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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하아, 하아…… 이제 잘 알았지? 이런 엄청난 기회를 놓치면 정말 후회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
하지만 계속해서 침묵을 지키고 있는 정현을 본 문수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을 이어 갔다.
“왜? 고민할 필요 없다니까. 너만 참가하면 우리도 다섯 명이 되니까, 충분히 성공할 수 있을 거야. 게다가 난 믿고 있다고. 리얼의 세계에서의 너를.”
아직 본 적도 없으면서 확신에 차서 이야기를 하는 문수.
그렇게 전폭전인 신뢰의 말을 들으면서 정현은 부담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벌써 랭커들은 이렇게 앞서 가고 있단 말이지.’
삼 개월의 차이는 생각보다 컸다.
정현이 아직 클래스 설정도 하지 못한 사이, 상위권의 유저들은 C등급의 던전들을 클리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클래스 설정을 한 뒤, 바로 참가하면 되겠군. 이번 기회에 파티 사냥도 한번 경험을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니까.’
“던전 적정 레벨은 35 정도야. 우리 수준에 딱 맞는 던전이지.”
“…….”
그 순간 정현의 몸이 심하게 경직되었다.
문수와 준석은 알고 있을까?
갑작스럽게 정현의 등줄기를 타고 흐르기 시작한 땅방울들을…….
“후, 제안은 고맙지만 참여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엥!?”
“……!”
말은 안 했지만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던 준석도 의외였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그들과 다르게 정현의 속은 시커멓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젠장, 아무리 그래도 35는 너무하잖아.’
아무리 정현이 스스로의 능력에 자신감을 갖고 있지만, 게임의 유명한 명언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레벨이 깡패!’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게임에서는 컨트롤 못지않게 레벨과 아이템들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왜, 왜 그러는데? 던전을 최초 발견한 파티라서 경험치와 드랍율 두 배의 혜택도 적용된단 말이야.”
“……저도 바쁜 일이 있습니다.”
“그래도 이 기회가 너무 아쉽잖아. 던전을 먼저 클리어한 다음에 그 일을 해도 늦지 않을걸.”
끈질기게 설득하는 문수를 뒤로하고, 정현은 하던 운동도 중단하며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젠장, 쪽팔리게 내가 약해서 함께할 수 없다고 어떻게 이야기를 해.’
속마음을 감추고 체육관을 나서는 정현을 보며 문수와 준석은 나란히 한숨을 내쉬었다.
“후, 나름 친해질 기회도 될 것 같아서 용기를 내본 건데. 너무 섣불리 다가선 걸까?”
“아니지. 어쩌면 다른 부분에서 맞지 않은 것이 있을지도…….”
“그게 무슨 말이야?”
“예를 들면…… 우리 수준이 너무 낮아서 시간을 낭비하기 아깝다는 뜻일지도 몰라.”
“어라? 생각해 보니까, 그럴 수도 있겠네.”
하나의 가설을 세우고 보니, 정현이 보였던 수상한 행동들이 모두 이해가 되었다.
“그래, 어쩐지 레벨을 말한 순간부터 태도가 싸늘하게 변하더라고. 그런 던전에서 놀아 봐야 경험치도 안 되고, 시간 낭비라는 뜻인가?”
“그렇겠지. 우리 둘을 가볍게 제압하는 실력을 생각한다면 정체를 감춘 10위권의 랭커들 중 하나일지도 몰라.”
“와아, 그렇다면 정말 대단하네. 다음번에 다시 오면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어려운 퀘스트들이나 도와 달라고 부탁해 볼까?”
“그것도 좋은 생각이네.”
뭔가 심하게 착각하고 있는 문수와 준석이었다.
* * *
“스테이터스 창 오픈.”
[Player Status]
닉네임 ― [테라]
레벨 ― [Lv. 10]
클래스 ― [노비스(Novice)]
칭호 ― [無]
명성 ― [49 / 알 수 없는]
근력 ― [8] / 민첩 ― [8] / 체력 ― [5]
지능 ― [1] / 집중 ― [4] / 행운 ― [2]
HP ― [50] / MP ― [40] / SP ― [97%]
공격력 ― [8]+8 / 방어력 ― [5]+3
공격 속도 ― [0.08%]
회피율 ― [0.02%]
크리티컬 ― [0.02%]
속성 ― [無]
Point ― [0]
오랜만에 확인한 능력치들은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우선 근력과 민첩, 집중 등이 많이 향상되어 공격력과 MP량이 많이 늘어났고, 명성도 ‘초라한’에서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는 ‘알 수 없는’으로 변경되었다.
‘이제 클래스만 생긴다면 뭔가 좀 채워진 느낌이 들겠지.’
강제접속종료 시간은 24시간. 즉, 게임에서의 하루이자 현실 시간으로 12시간이었다.
그 시간 내내 게임을 접속하게 되면 강제접속종료 시스템이 발동하여서 자동으로 접속을 차단하고, 게임 시간으로는 6시간, 현실 시간으로는 3시간 동안 휴식을 취해야만 재접속이 가능한 시스템이었다.
아무튼 하루 만에 제대로 된 식사와 운동을 끝내자마자 리얼의 세계로 접속한 정현은 캐릭터의 정보를 확인하며, 다시 한 번 각오를 다졌다.
‘이 정도로 만족할 단계가 아니다. 좀 더 강해져야 한다. 아니, 조금이 아니라 많이!’
트레이너들과의 대화는 정현에게 충격을 주었다.
본인이 가진 능력만큼이나 강한 자존심을 갖고 있는 정현에게 스스로가 부족하다고 느껴지는 경험은 흔치 않은 것이었고, 그만큼 이를 갈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지금 ‘전설’과 마주하였다.
“그래, 궁금하군. 애송이가 꿈꾸는 이상(理想)은…….”
저벅, 저벅!
오두막집을 나선 노인의 모습은 어제의 그것과는 달랐다.
볼품없이 추레하게만 느껴졌던 옷차림은 새하얗게 빛나는 튜닉으로 바뀌어져 있었고, 정리가 되지 않아 엉망으로 늘어져 있던 하얀 머리칼은 단정하게 묶여 있었다.
무엇보다 노인의 양손에서 은은하게 빛나고 있는 순백의 장갑은 그 위로 형이상학적으로 생긴 수많은 마법진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전 말재주가 별로 없습니다.”
정현은 허리를 곧게 피며 양 주먹을 가볍게 부딪쳤다.
초보자 마을의 클리어 보상 아이템인 파워 너클이 그 뭉툭한 모습만큼이나 딱딱한 소음을 내며 주먹을 감쌌다.
“그래? 후훗, 예상은 했지만 네 녀석도 정말 어쩔 수 없는 녀석이군.”
기분 좋다는 듯 입가에 미소를 매달며 거리를 좁혀 왔다.
새하얀 튜닉의 목 부분에 은 재질의 십자가가 찰랑거리며 시선을 자극했다.
“대신 제가 자신 있게 여기는…… 행동으로 보여 드리죠!”
“바라던 바다.”
쿠웅!
그 말을 끝으로 강하게 진각을 밟으며 정현에게 접근해 오는 노인.
그 순간 둘 사이의 거리가 제로가 되었다.
‘펀치, 발차기, 방어술…… 그 모든 것을 연습한 시간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상대방은 그러한 노력을 뛰어넘을 정도로 강하다.’
퀘스트의 네 번째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정현은 많은 고민을 하였다.
노인이 말하는 이상(理想)과 퀘스트 창에서 요구되는 재능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말이다.
터엉!
“호오, 막았다고? 실력을 다 파악했다고 생각했는데, 예상과는 좀 다르군.”
방어술을 충실하게 연습한 덕분이다.
정현의 가드는 노인의 공격을 부드럽게 흘려 내었고, 큰 충격 없이 마무리하여 즉시 반격을 가할 수 있었다.
“어딜!”
덥썩!
기습적으로 미들킥을 날렸지만, 노인의 손에 발목을 붙들려서 한순간 균형을 잃었다.
그렇게 비틀거리는 정현의 발목을 놓아준 노인은 로우킥으로 버티고 서 있던 다리의 각도를 꺾어 버렸다.
“카운터 어택(Counter Attack)!”
휘리릭!
정현의 움직임이 순간 빨라지며 노인의 로우킥을 피해 냈다.
그리고 이번에는 정현의 차례였다.
치익!
“이런!”
날카로운 주먹이 노인의 볼을 스쳤다.
예상하지 못한 정현의 선전에 노인이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자 기세를 탔다는 것을 느낀 정현은 땅을 박차고 달려들어서 노인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심장을 노린다. 잘하면 특수상태를 일으킬 수도 있으니까.’
예로부터 후퇴하는 상대만큼 노리기 편한 것도 없었다. 뒤로 물러나는 동안은 제대로 하체의 힘을 상체로 전달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조, 조심해!”
“……?”
그 순간 조마조마한 눈빛으로 노인과 정현의 결투를 지켜보고 있던 유나가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물론 그 대상은 바로 정현이었고, 유리한 상황에서 터져 나온 경고성에 의아한 눈빛을 할 수밖에 없었다.
“훗, 이미 늦었다.”
휘리릭!
“……!”
정현의 주먹이 어색하게 허공을 갈랐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공허감에 눈살을 찌푸리는 것도 잠시였다.
다급하게 돌려차기를 시도하는 정현이었지만, 그전에 밀려오는 고통이 먼저였다.
콰직!
“커억!”
“테, 테라야!”
띠링!
[강렬한 타격을 받았습니다. 순간적으로 특수상태 ‘스턴’이 적용됩니다.]
[특수상태 ‘스턴’에 저항할 스킬이나 능력치가 없습니다. 강제적으로 1분간 모든 활동이 봉인됩니다.]
노인의 주먹은 정현의 얼굴을 그대로 가격했고, 뿌리를 뽑아 버리는 듯한 그 강력한 일격에 정현의 몸은 3m 정도를 날아가서 바닥을 나뒹굴었다.
“후, 정말 애송이라는 말밖에 널 표현할 수가 없구나. 그래, 네 이상(理想)? 뻔하지. 흐흐흐, 하는 짓을 보아하니 폼을 잔뜩 잡으면서 강해지는 것? 최고가 되는 것? 나와의 결투에서 결과를 낸 뒤, 그런 소리를 지껄이겠지.”
“…….”
정현은 대답하지 못했다.
아니, 입조차 열 수 없었다.
상태이상 ‘스턴’이 말을 하는 것조차 방해하진 못하지만, 노인의 말이 폐부를 무섭게 찔러 왔기 때문에 숨조차 쉬기가 어려웠다.
“인생 오십 년…… 돌고 도는 이 세상에 비하면 한낱 꿈과 같구나.”
노인의 눈빛이 아련하게 젖어들었다.
도대체 이 거인(巨人)은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일까?
인생의 허망함? 이상이라는 가치에 덧없음?
노인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사람들은 누구나 꿈을 갖고, 이상을 갖는다. 그렇게 살아가지. 하지만 성공하는 사람은 없다. 아니, 일시적으로 목표를 이룬 사람은 있지만 곧 새로운…… 그것보다 더한 목표가 생긴다. 그렇게 쉬지 않고 아등바등 달려가야 하지.”
“…….”
“언제까지 말뿐인 이상을 지껄일 것인가? 아무리 노력해도 이루지 못하는 결과물에 집착할 필요가 있는가? 포기해라, 너는 아무것도 해낼 수 없다. 목표에 눈이 멀어서 야수처럼 달려드는 것이 전부인 너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
[특수상태 ‘스턴’의 지속 시간이 5초 남았습니다.]
“……당신은 실패자군.”
“테, 테라야!”
완전히 불리한 상황에서도 오히려 노인을 도발하는 모습을 보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정현을 부르는 유나.
하지만 지금 노인과 정현이 있는 공간에 끼어들 수 있는 존재는 없었다.
“아등바등 살아가는 것이 뭐가 나쁘지? 목표를 위해서 실패하더라도 계속 도전하는 것이 잘못되었나? 그래, 방금 전 나는 패배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아.”
[특수상태 ‘스턴’이 해제됩니다.]
[신체의 능력이 정상적으로 돌아옵니다.]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언제까지고 ‘목표’가 되어 주기 때문에 그것이 이상(理想)인 거다!”
타닥!
정현의 움직임이 경쾌하게 변했다.
처음부터 가지고 있던 부담감을 떨쳐 버리듯이…….
그러자 노인도 양손을 신속하게 교차하며 정현의 공격을 대비했다.
‘노인의 실력은 저번과 같다. 나와 동일한 수준의 능력치만을 사용하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내가 변하면 된다.’
정현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예전이라면 노인에게 형편없이 막힐 수밖에 없는 그러한 공격들.
하지만 이틀간 정현과 내내 붙어 있었던 유나는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