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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변했어.’
정확히 콕 하고 집어 낼 수는 없지만, 유나는 더 이상 말리는 것을 멈추고 조용히 지켜보기로 했다. 가슴을 뛰게 하는 기대감을 충족시킬 ‘결과’를 기대하면서 말이다.
‘정확히 생각난다.’
“주먹질 하나도 제대로 못하는 거냐? 이 애송이 녀석아!”
아득한 기억의 너머에서 노인의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초라한 복장을 하고, 제멋대로 풀어헤친 머리칼이 지저분하게 보였지만, 두 눈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는 정체불명의 노인이었다.
“상체를 곧게 펴라, 그리고 정면을 바라봐라.”
“후우…….”
정현의 몸이 일자로 변하며, 강렬한 눈빛으로 노인을 응시했다.
“발로 땅을 딛는다. 하지만 강하게 할 필요는 없다. 힘을 앞으로 전달한다는 느낌으로 가볍게 내딛으면 된다.”
쿠웅!
발로 땅을 박찼다.
신속한 속도와 함께 거리가 좁혀졌다. 그와 동시에 서로의 시선이 교차되었다.
“주먹을 지른다. 하지만 단순히 내뻗는 것이 아니다. 적의 눈을 봐라. 완전히 파악해야 된다. 압도해야 된다. 그렇다면 단조로워지는 적의 움직임 정도쯤은 얼마든지 예상할 수 있다. 그 순간 적을 꿰뚫어라.”
“이, 이 녀석이!”
노인의 눈동자에서 당황스러움을 읽었다.
그 순간 정현의 몸이 폭발적으로 가속하며 주먹을 내뻗었다.
퍼엉!
“큭!”
“……!”
순간 정적이 주위를 휩쓸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놀라움에 터져 나올 환호성을 양손으로 틀어막는 유나가 그러했고, 당혹감에 비명을 지를 뻔했던 노인이 그러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해, 해냈다.’
주먹을 통해 전해 오는 감각은 너무도 명백한 것이었다.
하지만 전과는 달랐다.
뇌에서 엔도르핀(Endorphin)이 쏟아지고, 혈관의 틈에서 아드레날린(Adrenaline)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전신을 찌릿하게 만드는 황홀감에 등골이 오싹할 지경이었다.
‘오랜만이군. 이런 감각은 정말 오랜만이야.’
중동 지역에서 수십 명의 반정부군을 뚫고 임무를 수행했을 때나, 북한의 실력자인 ‘김격식’을 제거했을 때나 느껴보았을 충실감이었다.
“……힘없는 노인을 함부로 대하다니, 정말 버르장머리가 없는 녀석이군.”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면 뒷목을 싸잡을 이야기를 하던 노인은 이윽고 유쾌하다는 듯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래, 이렇게 나와야지. 그래야만 나로서도…….”
“……!”
“마음 편히 널 박살 낼 수 있으니까!”
쿠웅!
“큭!”
노인의 발바닥이 땅속 깊숙이 족적을 남긴다.
그 순간 사방으로 뿜어지는 진한 투기(鬪氣)가 정현의 목줄을 심하게 조여 왔다.
휘리릭!
“먹어라!”
강렬한 투기에 시선을 뺏긴 사이, 노인의 몸이 그림자에서 솟구치기라도 했는지 정현의 뒤에서 주먹을 휘둘러 왔다.
쒜에엑!
햇빛을 받아서 새하얗게 백열하는 순백의 글러브를 보며, 지금의 순간과 어울리지 않지만 눈가가 시릴 정도로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위험해!’
뇌리를 자극하는 위험신호에 정현의 몸은 다리에서 힘을 빼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쳇!”
아슬아슬하게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간 쇼트 훅에 아쉬움을 달랜 노인은 옆으로 몸을 굴리며 위험한 거리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정현을 보고 그대로 걷어찼다.
퍼억!
“윽!”
허리가 끊어질 것 같은 통증을 애써 참아 내며 정현은 노인의 힘을 반발력 삼아서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바로 공격이 올 것이다. 어디냐!’
노인은 타고난 승부사였다.
분명히 타격을 입힌 후, 생겨 난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본능적으로 그것을 느낀 정현은 이를 악물고 전면을 훑었다.
“하앗!”
더킹을 하며 하체를 잡아 오는 손을 발견한 정현은 노려지고 있는 왼발을 뒤로 빼며 오른발을 축으로 빙글 돌며 뒤차기를 시도했다.
“걸렸어!”
노인의 입가에 미소가 매달리며, 잽싸게 옆으로 몸을 이동하며 양손을 뻗어서 정현의 발목을 잡아 갔다.
“위, 위험해!”
발차기를 할 때마다 노인의 손에 발목을 붙잡혔던 정현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던 유나가 경고를 했다.
휘익!
“응?”
노인의 손이 정현의 발목을 움켜쥐려는 순간, 거짓말처럼 발차기가 멈추었다.
예상하지 못한 움직임에 몸이 굳어진 노인을 보며, 다시 몸을 빙글 돌린 정현의 백핸드가 향했다.
“발차기란 강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지. 하지만 주먹보다 스피드가 느리며, 읽기 쉽다는 단점이 있다. 애송이 네 녀석의 발차기도 마찬가지다. 정직한 공격은 결국 한계에 부딪치기 마련이니까.”
‘전 발차기 수련도 클리어했습니다만…….’
퍼억!
“큭!”
“서, 성공했어.”
유나의 눈동자가 토끼처럼 동그랗게 떠졌다.
한 번은 우연으로 치부할 수 있지만, 그것이 반복된다면 이야기는 다르다.
정현은 당당히 실력으로 노인과 맞대결을 펼치고 있다. 그것도 호각 이상으로 말이다.
“아아…….”
그 순간 유나는 가슴 깊숙이 일어나는 묘한 감동을 느꼈다.
절대로 대적할 수 없을 것으로 판단했던 노인을 각고의 노력으로 성장한 정현이 상대하고 있었다.
그러한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자부심도 떨리는 감정에 큰 부분을 차지하였다.
“정말 대단해!”
“이 애송이 녀석이!”
환호성을 지르는 유나와 반대로 무겁게 가라앉고 있는 노인의 모습이 상반되었다.
정현은 가볍게 심호흡을 하며 냉정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한편으로, 노인과 시선을 마주쳤다.
“전 변했습니다. 누구보다 강해지려는 저만의 이상(理想)이 짧은 시간이지만, 그것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
“무엇이 당신을 그렇게 무너트렸습니까? 저는 결코 그렇게 되지는 않습니다. 만약 지금의 승부에서 제가 무릎을 꿇는다고 하더라도 포기하지 않을 테니까요.”
꾸욱!
뜨겁게 달아오른 심장이 말했다.
눈앞의 적은 아무것도 아니다.
도전해라.
강해져라.
꺾어 버려!
“네 녀석은 어떻게 태연할 수가 있지? 실패가 두렵지 않나? 다시 일어서기 힘들 정도로 철저하게 내동댕이쳐질 마지막 순간을 알고는 있나? 내가 마음만 먹으면 네까짓 녀석은 일순간에 짓눌러 버릴 수 있다.”
“전 아직 젊습니다.”
“……?”
“젊은 놈은 넘어져도 뼈마디가 물렁해서 크게 다치지 않는 법이거든요.”
“그런 바보 같은!”
자신의 의견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정현의 태도에 소리를 치려던 노인은 꿰뚫어 버릴 듯한 시선에 말문이 막혔다.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순수하게 자신을 응시하는 그 모습에서 진실성을 엿보았기 때문이다.
“큭! 정말로 그렇게 믿고 있다니…… 바보 같은 녀석이 아니라, 바보 그 자체로군.”
띠링!
[‘정체를 감춘 노인’이 노골적인 관심을 드러냅니다. 만약 대련을 청해 온다면 ‘버릇없는 애송이, 와라.’ 정도의 반응을 보여 줄 것입니다.]
‘성공인가?’
정현은 충분히 자신의 진심을 전했다고 생각했다.
이제 결과는 하늘에 맡길 뿐이다.
“네 생각은 잘 알았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승부는 내야지?”
“물론입니다.”
뜨겁게 달아오른 심장을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않은가?
그 순간 정현과 노인의 뇌리에 ‘퀘스트’나 ‘시험’이라는 단어들은 그대로 사라져 갔다.
상대방을 노리는 맹렬한 투기(鬪氣)!
승리를 향한 강렬한 의지(意志)!
그것을 지켜보는 유나의 입가에는 어느새 본인도 모르게 희미한 미소가 매달렸다.
* * *
띵동!
“들어오세요.”
인피니티(Infinity)사의 빌딩은 대한민국에서도 손꼽히는 규모를 가지고 있었다.
일단 메인 서버를 관리하기 위해 지하 3층부터 9층까지가 배정되었고, 지하 2층과 1층은 서버 관리팀의 업무를 처리하기 위한 사무실과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룸들이 있었다.
물론 그 밑으로 지하 10층이 있지만, 그곳에 출입할 수 있는 것은 인피니티사의 사장과 고위급 임원들뿐이기 때문에 세상에 알려진 것은 없었다.
더불어서 지상으로도 50층의 높이를 자랑하여, 어지간한 주위 빌딩들은 허리 아래로 내려다볼 정도였다.
“보고드릴 것이 있어서 찾아뵈었습니다.”
그러한 권위 있는 건물의 최정상 층을 차지하고 있는 인물.
인피니티(Infinity)사의 사장인 유민우였다.
“음, 궁금하군요. 어서 말씀해 보세요.”
“알겠습니다. 그 전에 이 파일을…….”
책상 위에 파일철을 올려놓고, 다시 뒷걸음질 쳐서 거리를 벌리는 인물은 올해로 30대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남성이었는데, 개발팀의 팀장 자리를 맡고 있었다.
“호오, 윤 팀장, 이게 사실입니까?”
“그렇습니다. 금일 오전 11:27부로 락(Lock)이 해제되었습니다.”
윤준용 팀장의 설명에 사장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맺혔다.
한동안 속을 썩이던 고민거리가 말끔하게 해결된 것이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그 대상자가 유나는 아니겠죠?”
“하하하! 사장님께서 그렇게 당부하셨는데, 제가 잊어버리겠습니까? 정상적으로 게임 플레이를 진행하는 유저입니다. 걱정하실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후, 한시름 놓았군.”
유민우 사장은 전 사장의 아들로서, 어렸을 때부터 경영에 참가하여 인피니티(Infinity)사의 규모를 10배 이상 키웠다고 평가되는 입지적인 인물이었다.
하지만 서비스를 하고 있는 가상현실게임 리얼(Real)의 인기가 너무도 폭발적이어서 수많은 외압에 시달리고 있는 형편이기도 했다.
‘이럴 때 나와 혈연관계에 있는 유나의 실수는 물어뜯기 좋은 먹잇감이겠지. 항시 조심해야 한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긴장감을 늦추지 않는 민우는 확실히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다.
“Code No―7의 락이 해제되면서 현재 총 7개의 히든 클래스가 리얼의 세계에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그럼, 앞으로 3개가 남은 건가?”
“그렇습니다. 차후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히든 클래스의 숫자를 추가할 계획도 있지만, 희소성이라는 메리트를 쉽게 포기할 수 없기 때문에 개발팀 내부에서는 반대의 소리가 많습니다.”
“확실히 히든 클래스라는 것은 함부로 건들 수 있는 것이 아니지. 그러한 난이도의 시험들을 통과하고 성공한 사람들이라면 그 자체만으로도 평범한 인물들은 아닐 테니까.”
민우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윤 팀장이 가져온 첫 번째 서류를 덮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침묵…….
“…….”
“…….”
“이게 사실인가?”
“백방으로 알아보고 확인했습니다. 확신까지는 할 수 없지만 가능성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심상치 않게 굳어지는 민우의 표정에서 지금 나온 주제의 심각성을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