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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윤 팀장은 그러한 분위기를 읽으며 조심스레 말을 이어 갔다.
“그분에 대한 정보가 워낙 없는 것이 사실이잖습니까. 이번에 얻은 정보도 우연찮게 정말 간신히 얻은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신빙성이 없는 정보를 어떻게 신뢰하란 말인가?”
“……그 점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벌써 2년입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동안 수집한 자료를 모두 모아 보았습니다.”
“이것이 전부라고?”
민우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두 번째 서류철 안에 들어 있는 내용물은 A4용지로 두 장 정도였다.
2년이라는 긴 시간을 조사했다고 하기에는 믿기 힘들 정도의 분량에, 민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실망시켜 드려서 죄송합니다.”
꾸벅!
민우의 불편한 심기를 읽었는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사죄를 하는 윤 팀장. 그러자 이번에는 민우가 당황하며 손사래를 쳤다.
“아니야. 항상 나를 위해 노력하는 자네의 마음을 잘 알지. 후, 이번에는 내가 너무 기대를 했나 봐.”
“…….”
“그건 그렇고, 그분은 여전히 그곳에 계신가?”
“네, 그렇습니다.”
민우는 ‘그분’이 거주하고 있는 인피니티(Infinity)사의 지하 10층을 생각했다.
‘지하 3층부터 9층까지는 실체를 감추기 위한 눈속임이지. 사실 가상현실게임 리얼(Real)의 서버를 생성하고 유지하는 것은 지하 10층이니까.’
더불어서 ‘그분’의 존재도 부각되었다.
가상현실게임 리얼(Real)을 개발한 위대한 과학자이자, 지배자라고 할 수 있는 존재!
“몰래 외출하거나 그런 움직임은 없으신가?”
“컴퓨터로 출입증 상태를 확인하니, 항상 Off 상태셨습니다.”
“정말 속을 알 수 없는 분이군.”
가상현실게임 리얼(Real)을 개발한 뒤로 24시간 지하 10층을 떠나지 않고, 그곳에서 생활하고 있는 상황이다.
벌써 3개월째 이어지고 있는 ‘기행’이기에 슬슬 사장인 민우도 의구심과 불안함을 느끼고 있는 상태였다.
“그분에게 특이 사항이 발생하면 곧바로 알려야 하네.”
“네, 알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인사를 한 뒤, 뒷걸음질 쳐서 사장실을 빠져나가는 윤 팀장.
그러자 침묵이 주위를 장악한다.
사각, 사각!
서류 위로 사인을 하기 위해 펜을 놀리는 소리만이 외로이 울려 퍼졌다.

* * *

[선택의 기로―Ⅲ]
등급 : ―
설명 : 강하다는 말은 무엇일까?
단순한 물리적인 힘? 권력? 재력? 답을 찾기 어려운 문제다.
하지만 그에 대한 기준은 있다.
악(惡)을 심판하기 위해 신을 외면한 그는 원하지 않았지만, 대륙의 수많은 사람들은 입을 모아서 말한다.
‘그는 전설이다!’
조건 : 정체를 감춘 노인의 인정을 받아라.
펀치[100%] / 발차기[100%] / 방어[100%] / 재능[100%]
보상 : 퀘스트의 연계[선택의 기로―Ⅳ]

‘해냈다!’
속으로 파이팅 포즈를 취하며 즐거워하던 정현은 마지막을 짐작하며 노인을 바라보았다.
“큭! 정말 잘했다. 이제 더 이상 애송이라고 부르기도 뭐하군.”
결과적으로 정현은 패했다.
하지만 이틀 동안의 변화는 노인의 가슴에 깊은 폭풍을 일게 했고, 정현을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네가 가지고 있는 재능은 ‘투기(鬪氣)’다. 그야말로 싸우기 위해 태어난 존재를 위한 능력이지.”
띠링!
[스테이터스 창에 새로운 능력이 추가되었습니다.]
[‘테라’ 님의 클래스 전직 습득 능력치가 투기(鬪氣)로 설정되었습니다.]
[자세한 설명은 스테이터스 창에서 확인하세요.]
“이건…….”
정현의 눈빛이 기대감으로 빛났다.
10레벨에 도달하게 되면 클래스 설정 퀘스트를 진행할 수 있게 되고, 그 과정에서 하나의 추가 능력치를 부여받게 된다.
‘추가되는 능력치는 실로 엄청난 것부터 어이없을 정도로 황당한 것까지 다양하다고 했지? 과연 내게 생성된 능력치는 어떤 것일지…….’

투기(鬪氣) ― [0]
[특수상태 이상에 저항할 확률을 갖습니다.]
[프로그램상의 계산 확률이 적용됩니다.]
[HP가 10% 이하일 때, 투기의 능력치가 랜덤으로 두 가지 능력치에 더해집니다.]

“이, 이럴 수가!”
“왜 그래?”
깜짝 놀라서 굳어진 정현의 모습에 무슨 큰일이라도 벌어진 것이 아닌지, 주위를 살피는 유나였지만 어찌 알겠는가?
지금 정현이 놀란 이유는 황당할 정도로 엄청난 추가 능력치의 존재 때문이라는 것을 말이다.
‘HP가 10% 이하가 되면 투기의 능력치가 랜덤으로 다른 능력치에 더해진다고? 그렇다면, 만약 투기가 10이라면 HP가 10% 이하일 때 근력, 민첩, 체력, 지능, 집중, 행운 중에서 두 가지 능력치가 +10이 된다는 거잖아.’
물론 랜덤이기 때문에 정현의 전투력 발휘에 별로 중요하지 않은 지능이나 행운 등이 올라갈 수도 있지만, 아무튼 엄청난 능력치라는 것은 변하지 않은 사실이었다.
띠링!

[선택의 기로―Ⅳ]
등급 : ―
설명 : 강하다는 말은 무엇일까?
단순한 물리적인 힘? 권력? 재력? 답을 찾기 어려운 문제다.
하지만 그에 대한 기준은 있다.
악(惡)을 심판하기 위해 신을 외면한 그는 원하지 않았지만, 대륙의 수많은 사람들은 입을 모아서 말한다.
‘그는 전설이다!’
조건 : 플레이어의 ‘선택’
보상 : 클래스 설정

‘이제 마지막인가?’
클래스 설정 퀘스트의 마지막 단계였다.
그렇게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정현에게 노인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비참한 전쟁고아로 태어났다. 용병과 창녀의 원치 않는 생명으로 태어나서 다섯 살 때부터 무기를 잡아야 했고, 썩은 물을 마시며 곰팡이 낀 빵을 씹었다.”
“아아…….”
클래스 설정 퀘스트의 내용을 알고 있는 유나는 정현이 성공을 눈앞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이미 성공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결국 해내다니.’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Code No―7의 Lock은 히든 클래스 중에서도 최상위권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런 엄청난 난이도의 퀘스트를 눈앞의 남자는 사흘 만에 해결해 버린 것이다.
“쳇! 이러면 인정해 줄 수밖에 없잖아.”
약간은 쑥스럽게 웃고 있는 유나의 뒤로 노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렇게 전쟁터에서 비참하게 뒹굴고 있던 날 구해 준 분은 운명의 신 ‘레아’ 님을 모시는 프리스트셨지. 난 그 길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레아 님의 신실한 종으로서 말이다.”
노인은 국어책이라도 읽는 것처럼 무뚝뚝하게 이야기했다.
하지만 정현은 느낄 수 있었다. 그 안에 스며 있는 진한 고통과 슬픔의 감정들을 말이다.
“그러다가 나는…….”
‘응?’
정현의 눈앞이 점점 흐려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알 수 없는 현상에 당황하다가 이것이 웬만해서는 보기 힘들다는 ‘스토리 보드(Story Board)’라는 것을 깨닫고, 전신에 힘을 풀며 편안한 자세로 관찰자의 자리를 받아들였다.

“운명의 앞에 서 있는 미천한 종이 어머니의 신실한 다섯 번째 축복을 뵙습니다.”
“어머, 카르얀. 둘만 있을 때는 그런 말은 하지 않기로 했지!”
몽환적인 안개가 물결치고, 새하얀 빛이 포말처럼 부서지는 아름다운 공간의 중심에는 순백의 대리석으로 우아하게 세워진 ‘레아’ 여신의 신전이 있었다.
“저, 전 그러니까…… 아우!”
꾸욱!
“못 써! 어린애는 어린애다워야지. 후훗, 어려운 생각 같은 것은 하지 말고 마음이 움직이는 방향대로 행동하렴.”
카르얀의 양 볼을 쭈욱 잡아당기며 백옥 같은 미소를 짓는 여성은 밟고 있는 대리석보다 찬란하게 느껴지는 금발을 찰랑거리며 그렇게 다가왔다.

‘저 꼬마가 설마…….’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정현은 마치 전지적 작가 시점의 주인처럼 모든 사실을 알았고, 평생을 꼬장꼬장한 고집으로 살아왔을 것 같은 노인의 색다른 모습에 신선한 충격을 느꼈다.

“넬 님!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호호, 우리 카르얀이 어떤 궁금증이 있는지 듣고 싶은데?”
카르얀의 손을 붙잡고, 신전 내부에 있는 정원을 거닐던 ‘넬’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카이트란 왕국은 우리가 모시는 ‘레아’ 여신을 배척하고, 과거에는 교단을 탄압하기도 했다는 사실을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적이라는 뜻인데, 어째서 넬 님은 저들을…….”
한낱 수련 신관의 신분으로 교단의 다섯 번째 지위의 프리스트인 넬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는 것이 스스로도 건방지게 느껴졌는지, 마지막에 가서는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이미 전하려고 하는 내용은 모두 알게 된 상태였기에 넬은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카르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카르얀, 세상에서 가장 공평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니?”
“잘 모르겠습니다.”
카르얀은 솔직하게 대답을 하며, 힐끔 고개를 들어서 넬의 어깨 너머의 치료실을 바라보았다.
일주일 전부터 묵고 있는 카이트란 왕국의 기사들이 눈에 밟혔다.
“그것은 바로 운명이란다. 신분의 귀함과 천함에 관계없이 모든 존재들은 자신만의 길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환하게 밝혀 주는 것을 바로 운명이라고 한단다.”
“아……!”
“그들이 전쟁에서 패하여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을 비롯하여, 평소 하찮게 생각하던 우리에게 도움을 청한 것도…… 마지막으로 그런 그들을 우리들이 보살피고 있는 것도 운명일진대, 그런 운명의 여신인 ‘레아’ 님을 섬기는 우리가 그들을 핍박해서는 되겠니?”
“아, 아닙니다. 절대로요.”
“그래, 지금의 그 마음을 절대 잊지 말고 잘 간직하렴.”
카르얀은 불행했던 과거를 망각할 정도로 행복했다.
칠흑 같은 마음속의 광기와 공포를 단번에 거둬 버리는 태양과 같은 ‘넬’이 항상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18살이야. 이제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
어린 시절부터 많은 시간이 지났다.
이제는 장성하여 18살의 건장한 청년으로 변한 카르얀은 심부름을 끝내고 신전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바삐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정식으로 몽크(Monk)의 직위도 받았고, 이것도 어렵게 구했으니까.’
카르얀은 씨익 웃으며 품속의 선물을 생각했다.
평소 물욕이 없는 ‘넬’조차도 신성교국에 있는 레아 여신의 대신전에 방문하였을 때 보았던 이 물건에게 아쉬움을 보였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했다.
‘많이 기뻐하겠지. 하하하, 성공할 수 있을까?’
카르얀은 넬과 자신의 나이 차이를 조심스레 가늠해 보며, 띠동갑쯤은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고 힘찬 파이팅 포즈를 취하며 한 걸음씩 걸음을 떼었다.
화륵, 화르륵!
“음,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이상한 냄새가 나는데. 뭐지?”
신전은 카렌 왕국의 외진 곳에 위치하여 인적이 드물고, 숲이기 때문에 더욱이 이러한 냄새가 퍼질 이유가 없었다.
“킁킁!”
타닥, 타다닥!
“어, 어어? 이건…… 불이야, 불이야!”
숲의 안쪽에서 영역을 확대하고 있는 불줄기들을 보면서 고래고래 소리치는 카르얀.
그러다가 이내 신전 안쪽에 있을 ‘넬’을 생각하며, 황급히 상의를 벗어서 수통의 물로 적시고 얼굴 쪽을 싸맨 후 안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네, 넬! 네엘!”
“정말이지, 개구쟁이로 자랐군요. 이렇게 늠름하게 자랐는데도 여전히 안기는 것을 좋아하다니.”
“어디야? 말 좀 해 봐!”
“으음, 좀 곤란하네요. 아무리 사춘기라지만, 카르얀은 제가 업어서 키운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말을 놓고 싶다니, 후…… 어머니들은 자식들을 보며 다들 이런 고민을 할까요?”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매캐한 연기가 사방을 뒤덮었고, 지옥을 방불케 하는 불길들이 먹잇감을 찾는 맹수처럼 거칠게 주위를 휩쓸고 있었다.
“제발 대답 좀 해!”
불에 타다만 신관복을 볼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숯덩이가 되어서 갈 길을 잃어버린 시체들은 하나같이 오랫동안 웃음과 행복을 공유했던 형제자매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