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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어째서! 도대체 왜!’
신전에 있는 인원들은 하나같이 신성력(神聖力)을 사용할 수 있는 존재들이었고, 산불이 난다고 해도 우습게 소화(消火)시킬 것이 뻔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설마, 저건 검상(劍傷)?’
카르얀의 시야에 무너진 벽에 몸을 기댄 채 목과 어깨로 이어지는 라인이 날카롭게 절단되어서 활활 타오르고 있는 시체가 들어왔다.
두근, 두근!
불안감이 뇌리를 짓눌렀다.
지금의 이 사태는 인위적인 것이다. 그러한 생각이 드는 순간, 잔혹함에 비명을 내지를 수밖에 없는 끔찍한 상상들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으으…… 으아아아!”
미친 듯이 비명을 내지르며 화마(火魔) 속으로 돌진했다.
옷이 타들어 가는 것도 모르고, 피부가 시뻘겋게 달아올라서 익어 가는 것도 인식하지 못했다.
지금 카르얀의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 ‘넬’만이 존재했다.
“아……!”
그리고 그 순간 발견할 수 있었다.
“네, 넬 님!”
평소 산책 코스가 되어 주던 신전의 정원에서 그녀를 찾을 수 있었다.
폭발할 것같이 펌프질을 해 대는 심장을 애써 억누르며 조심스럽게 넬에게 다가갔다.
“무, 무사하셨군요.”
뒤돌아서 있는 넬의 주위에는 불길이 침범하지 않았고, 옷가지 등도 깨끗했다.
그것만으로도 이러한 상황에서 침착함을 찾을 수 있는 스스로가 황당했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고 넬에게 다가갔다.
“어서 이곳을 피해야 합니다.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지이이잉!
그 순간 카르얀은 알 수 없는 이명(耳鳴)을 느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감…… 그것은 곧 현실이 되었다.
털썩!
“어, 어어? 으아아아!”
실이 끊어진 연극 인형처럼 무너져 내리는 넬을 보며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머릿속에 차오르는 비참함과 분노에 광인처럼 비명을 내지를 뿐이다.
“응? 아직 생존자가 있었군.”
“아아, 아직까지 살아 있는 것을 보니 중요한 인물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알고 있는 것도 많겠지. 이봐, 너 혹시 ‘레아의 거울’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냐? 말만 잘한다면 목숨은 살려 줄 수 있으니, 생각 잘해 봐.”
“…….”
모든 사고가 정지되며, 쓰러지는 넬의 모습만이 반복적으로 재생되었다.
심장을 칼로 도려내는 듯한 고통과 함께 무의식중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응? 이 녀석 미쳐 버린 것 같은데?”
“뭐라고? 제길, 그럼 레아의 거울을 어디 가서 찾지?”
멍한 표정으로 장승같이 서 있는 카르얀을 보며 투덜거리기 시작한 습격자들은 하나둘씩 정원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변방의 쓰레기 같은 신전에 온 것도 다 그것을 찾기 위해서인데, 만약 아무런 성과도 없이 돌아간다면…… 이봐, 정말로 보긴 본 거야?”
“후, 나하고 군터가 이곳 치료소에서 한 달이 넘게 있었는데, 그걸 모르겠어? 분명히 있었으니, 의심하지 말고 좀 더 샅샅이 뒤져 보라고.”
‘……뭐?’
그 순간 짧게나마 카르얀의 의식이 돌아왔다.
군데군데 혈흔으로 붉은 장미꽃이 피었지만, 습격자들의 복장은 평범하지 않았다.
기사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플레이트 메일과 품위가 느껴지는 고급스러운 검은 그들이 보통의 신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건!’
플레이트 메일의 가슴 부위에 그려진 문장이 드러났다.
그것은 카이트란 왕국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두 개의 머리를 가진 그리핀(Griffin)의 모습이었다.
쩌저정!
그 순간 깨어져 나갔다. 부서졌다.
마음을 흔들었던 넬과의 추억이 일그러지며, 추악하고 폭발할 것 같은 분노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뭐가, 뭐가 운명이죠? 설마 이런 빌어먹을 일이 운명?’
하늘을 바라봤다.
이런 지옥과 같은 아수라장 속에서도 고고하게 빛나고 있는 새하얀 달이 괜스레 원망스럽다.
‘함께 보았던 하늘은 여전히 높고, 달은 아름다운데…… 왜 당신은 그렇게 있습니까?’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서럽다.
분하다.
단단하게 응어리져 있던 감정이 봄을 맞이한 폭포수처럼 녹으며 흘러내렸다.
‘그러게 제가 말했지 않습니까, 저들은 적이라고.’
“그래, 지금의 그 마음을 절대 잊지 말고 잘 간직하렴.”
‘아니라니까요, 저들은 적이라니까요.’
움찔!
마지막 독백을 끝으로 영상이 끊어져 버렸다.
무의식중에 존재하던 넬의 당부가 그렇게 흩어지고 있을 때, 카르얀은 눈물을 멈췄다. 그리고 진심으로…… 진심으로 미소를 지었다.
“당신들, 운명(運命)이라는 말을 믿어?”
테라력 2752년 카이트란 왕국의 수도가 무너졌다. 역사에는 영원히 ‘전설’로 기록될 한 남자에 의해서…….
“윽!”
스토리 보드(Story Board)가 종료되었을 때, 약간의 현기증을 느끼며 정현의 의식이 돌아왔다.
“난 수없이 죽이고, 또 죽였다. 셀 수 없는 존재들의 운명을 지워 버리고, 지금 이 순간 이렇게 존재하지.”
“…….”
“그래서일까? 어느 순간부터 나는 신성력(神聖力)조차 발휘할 수 없게 되었다. 운명의 신에게 버림을 받은 거지. 하지만 상관없었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복수였기에…….”
띠링!
[‘정체를 알 수 없는 노인’에 대한 정보를 얻었습니다.]
[테라 대륙의 역사에 한 획을 긋는 놀라운 인물에 대한 정보를 접하며, 명성치(+100)가 상승합니다.]
[고난의 길을 걷는 전설의 수사(修士), 절망의 몽크(Monk) 카르얀의 정보를 획득하였습니다.]
“더 이상 내가 걷고 있는 길은 빛이라고 할 수 없지. 너에게 몽크(Monk)의 길을 제시해 줄 수는 없다. 그렇다면…… 내가 걷고 있는 피의 길을 이어 갈 생각이 있는가?”
꿀꺽!
순수하게 압도되어 버렸다.
눈앞의 노인은 이제 더 이상 ‘정체를 알 수 없는 노인’이라고 평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전신에서 터질 듯 뿜어져 나오는 기세와 사람을 자연스레 내려다보는 위압감은 정현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제삼자의 입장에서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유나까지도…….
“당신이 버리고 말았다는 운명(運命)…… 제가 한번 이어 보겠습니다.”
“큭! 끝까지 건방진 소리를 하는 애송이로군. 좋아, 난 이미 지쳤다. 내가 걸어 왔던 길이 그릇된 것인지, 올바른 것인지는 이제 너에게 달렸다.”
띠링!
[퀘스트 ‘선택의 기로―Ⅳ’를 클리어하였습니다.]
[히든 클래스 ‘스트라이커(Striker)’로 설정되었습니다.]
[신성력을 잃어버린 카르얀은 평생 동안 극한의 신체 수련을 통해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습니다. 누구보다 강한 공격과 파괴를 통한 궁극의 무(武)를 보유할 수 있습니다.]
[클래스 설정을 통한 ‘보너스 포인트’를 획득하였습니다. 스테이터스 창에서 분배할 수 있습니다.]
[카르얀에게 기본적인 스킬들을 전수받습니다. 스킬 창을 오픈하여 확인할 수 있습니다.]
[카이트란 왕국과 ‘적대 관계’가 형성됩니다. 종족과 관계없이 같은 휴먼족일지라도 국적에 따라서 PK가 가능하게 됩니다.]
[신성왕국과 ‘우호 관계’가 형성됩니다. 종족과 관계없이 성직자 계열의 클래스 소유자와는 호감도를 쌓을 수 있습니다.]
[천, 가죽, 경갑 방어구 착용이 가능해집니다. 중갑 방어구 이상은 페널티가 부여됩니다.]
[장갑, 너클, 건틀릿 종류의 아이템에 특화됩니다. 각 아이템 별로 스피드와 데미지, 방어력에 가산점이 부여됩니다.]
“스트라이커(Striker)?”
“신성력을 사용하는 몽크는 강하다. 하지만 인간이 진정으로 강할 때는 하나의 기술을 극한까지 갈고닦았을 때지.”
꿀꺽!
오두막집 앞의 공터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정현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붙잡고, 얼른 스테이터스 창을 열어보고 싶었지만, 노인의 진중한 태도가 그것을 제지했다.
아직 뭔가가 남아 있는 것이 분명했다.
“자, 보여 주마.”
휘이잉!
내려앉은 침묵 사이로 바람이 먼지들을 휩쓸고 지나갔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조차 울릴 것 같은 고요함 속에서 유나와 정현의 시선은 카르얀을 향해 못 박혔다.
“먼저 주먹이다.”
스윽!
시냇물이 흘러가는 것처럼 잔잔한 움직임이었다.
양다리가 벌어지며, 균형을 잡고 왼손은 후퇴하며 갈비뼈 쪽을 점했다.
허리가 쫙 펴지며, 어깨와 등 쪽의 근육이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질렀고, 마지막으로 뒤쪽으로 살짝 당겼던 오른손이 공간을 가르며 전진했다.
“후우…… 다음은 발차기다.”
휘리릭!
왼발이 축이 되어서 자연스럽게 몸이 회전했다.
다리서부터 허리를 넘어 뒤로 젖힌 목뼈까지 완만한 곡선을 이르며, 완벽한 중심을 잡아 냈다.
그리고 그 순간 접혀 있던 오른발이 스프링이 튕기듯 탄력적으로 뻗어 나가며 허공을 때렸다.
“아……!”
그 순간 정현의 시선이 멍해졌다.
명확하게 정의할 수는 없지만, 등골이 오싹해지는 감각을 맛보며 시선을 빼앗겨 버렸다.
카르얀의 평범하게 보이는 동작 하나하나가 정현에게는 신세계였고, 앞으로 지향해야 할 목표나 다름이 없었다.
“테라, 네가 이것을 이해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
처음으로 불러주는 ‘애송이’라는 단어를 제외한 이름이었지만, 그것이 뜻하는 것은 이별이기에 울적함이 차올랐다.
“이것은 마지막 선물이다. 그럼, 다음번에는 전장에서 보기를 기대하지.”
띠링!
[‘넬의 로사리오’를 획득하였습니다.]
[소지하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아이템. 신성왕국에서 이 성물(聖物)의 가치에 대해서 평가받는다면 충격을 받고, 뒤로 넘어갈지도 모릅니다.]
[명예롭고, 기품 있는 아이템을 접하여, 명성치(+30)가 상승합니다.]
“이건…….”
스토리 보드에서 보았던 카르얀이 넬을 위해 신성왕국까지 가서 구해 온 소중한 성물(聖物)이었다.
“아!”
그렇게 정현이 순백의 십자가에 정신이 팔린 사이, 눈앞의 오두막과 숲이 흐려지기 시작하더니 눈 깜빡할 사이에 자취를 감추었다.
“놀랄 필요는 없어. 원래 히든 클래스의 설정을 위해 준비된 공간이기 때문에 사라지는 것뿐이니까.”
“그런가?”
이 모든 것이 꿈인 듯 흐려지는 기억 속에서 눈부시게 반짝이는 넬의 로사리오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렇게 정신이 팔린 정현을 지켜보던 유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나 아직 클래스 설정을 안 했거든? 30레벨이 넘어가는데도 새롭게 시작하려니, 어떤 것을 골라야 할지 난감하더라.”
“…….”
뜬금없는 유나의 말에 무표정하게 쳐다보는 정현.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야기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포기하지 않는 너의 모습에서 많은 것을 배웠어. 후훗, 나도 힘차게 전진하려고. 다음에 다시 만났을 때는 몰라볼 정도로 변해 있을걸?”
“…….”
슬슬 유나의 표정이 찡그려졌다.
사람이 이렇게 진지하게 말한다면 사소한 반응이라도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정현은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넬의 로사리오’만 바라보고 있으니, 유나로서는 얄밉기가 그지없었다.
“우우…… 야! 나 좀 보라고. 사람이 말을 하면 봐 줘야 될 거 아니야!”
결국 참지 못해서 빽 하고 소리를 지르는 유나였고, 그제야 정신을 차린 정현은 멀뚱멀뚱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에헴! 이제야, 올바른 청중의 자세가 되었네.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 으음, 맞다. 내가 하려는 클래스는…….”
“그런데…….”
“응?”
자신의 말을 자르고 들어오는 정현이었지만, 처음으로 보여 주는 반응이기에 유나는 기쁜 미소로 그것을 반기며 이어지는 말을 기대했다.
“넌 뭔데 반말이냐?”
“에엑!?”
둘 사이에 정적이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