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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포유여향 1권(2화)
1장 대마두의 최후(2)


졸졸졸…….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개울.
그 앞에 작은 모닥불이 피워져 있었고, 불 위로는 나뭇가지에 꽂힌 생선들이 노릇노릇하게 구워지고 있었다.
“정말이지 우리 아버지긴 하지만 좀 문제가 있는 양반이야.”
생선이 구워지는 모닥불 앞에 삐딱하게 도관을 쓴 열 살가량의 소년이 투덜거리며 앉아 있었는데, 바로 기련산을 떠나온 백천성이었다.
“누굴 찾아가라고 했으면 좀 더 정확한 정보를 남겨놨어야 하는 거 아냐. 최소한 어디에 산다던가 하는 것 정도는 말이야. 잘난 아버지 덕분에 생고생이란 말이야. 쓰파…….”
습관처럼 마지막 말을 욕설로 끝냈다.
사실 아버지가 남긴 유언대로 기련산에서 이곳 무당산까지 석 달 넘게 걸어오긴 했으나 문제는 무당산에 도착하고 난 다음이었다.
아버진 단순히 ‘무당산 영취봉에 있는 ‘현허’란 도사를 찾아가라고 했지만, 따지고 보면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사실 무당산은 매우 산세가 험할 뿐만 아니라 넓었다. 산 전체 둘레만 해도 근 사오백 리에 달할 정도였다. 비록 찾아야 할 자가 영취봉에 있다고 했지만, 지금도 영취봉에 있는지는 자신할 수 없는 문제였다.
‘무당산 안에 있는 봉우리만 칠십이봉……. 그런데 뭐, 무당산에 가서 현허란 도사를 만나라고……?’
하루에 한 봉우리씩만 오르락내리락하려고 해도 칠십이 일이 걸릴 것이다. 더욱이 넓고 넓은 무당산 안에서 현허라는 도사를 만난다는 건 장님이 벼락 맞고 눈뜨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무튼 울 아버지지만 대책 없다니까.”
그가 투덜거리며 구워지고 있는 생선으로 손을 가져갈 때였다.
바스락…….
갑자기 옆에서 풀잎 스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자기 또래의 계집아이를 옆구리에 끼고 있는 살벌한 인상의 흑의 중년인이었다.
“여기서 잠시 쉬도록 하지.”
두광은 옆구리에 끼고 있던 제갈청아를 휙 하니 백천성 앞으로 내던졌다.
쿵!
“으윽…….”
제갈청아는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기가 무섭게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서 날 풀어 주지 않으면…….”
“한 번만 더 그따위 소리를 하면, 제자고 뭐고 일단 팔부터 꺾어 놓고야 말겠다!”
두광은 살기 어린 눈빛으로 제갈청아를 노려보더니, 이내 모닥불 위에 구워지고 있는 생선으로 손을 가져갔다. 이어 그는 노릇하게 구워진 생선을 입으로 가져가며 음침한 눈빛을 한 채 백천성을 노려보았다.
“네놈은 무당파 도사냐?”
‘아, 쓰파……. 내가 구워 놓은 생선을 왜 허락도 없이 먹는 거야.’
속으로 욕설을 해 대는 것과는 달리, 백천성은 겉으로는 매우 공손한 얼굴을 했다. 그것은 척 보기에도 두광에게서 풍겨 오는 느낌이 매우 찜찜했기 때문이었다.
“아닌데요. 그럼 이만……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백천성은 인사를 하고는 재빨리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오랫동안 떠돌아다닌 그의 경험으로 비추어 볼 때, 이 자리에 있는 건 매우 위험하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두광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의해 움직임을 멈춰야만 했다.
“네놈도 느꼈겠지만, 난 쫓기는 중이다. 이유는 내가 저 계집아이를 납치했기 때문이지.”
‘쓰파…… 듣고 말았네.’
백천성은 갑자기 창백한 얼굴을 했다.
그가 보기에도 느닷없이 나타난 저 자식은 완전히 범죄자의 느낌을 팍팍 풍기고 있었다. 그런 놈이 자신이 쫓긴다는 걸 말했다는 건 한 가지 이유밖에 없었다.
‘날 보내 주지 않을 거야. 그리고…… 조용히 묻어 버리려 할 테고…….’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세상을 돌아다닌 백천성이니 눈치에 관한 한 노련한 강호 고수라고 할 수 있었다.
“휴우…….”
백천성은 고개를 떨구더니 깊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재수 없는 놈은 엎어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절레절레 고개를 흔든 그는 옆에 있는 보따리 쪽으로 손을 뻗으며 제갈청아에게 말을 건넸다.
“우리 아버진 차를 매우 좋아했지. 좋아하는 게 어느 정도냐 하면, 돌아가시기 전날까지 차를 마실 정도였으니까.”
백천성은 보따리 안에서 휴대용 화로를 꺼내 앞바닥에다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다시 찻주전자를 꺼내더니, 앞에 있는 개울에서 물을 담고는 화로에 올려놓고 불을 붙였다.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 말씀에 의하면 인간의 몸은 늘상 따뜻해야 된대. 밖으로 자주 돌아다니게 되면 아무리 더워도 한기에 노출될 수밖에 없고, 결국엔 몸이 상한다고 하셨지. 그럴 때 풀어 줄 수 있는 게 이 차거든…….”
“차는 별로 맛없는데…….”
제갈청아가 나직이 중얼거리자, 백천성은 노인처럼 끌끌 혀를 찼다.
“그건 네가 제대로 된 차를 마셔 보지 못해서 그래. 참, 내 이름은 백천성이야.”
“백천성……? 무슨 이름이 그래. 하늘에 있는 별이라니…… 그럼 구름 끼거나 비 오는 날이면 별 볼일 없는 거네. 난 제갈청아라고 해.”
‘그러는 네 이름은? 제갈청아라는 네 이름도……. 음, 이름이 좋네. 아! 쓰파…… 아버진 왜 하필이면 이름을 천성이라고 지어 가지곤…….’
다시 한 번 속으로 욕을 삼킨 백천성은 찻주전자 속 물이 끓고 있는 걸 보자 이내 화로의 불을 껐다. 그러고선 다시 보따리 안을 뒤져 작은 찻잔과 잘 말린 꽃잎을 꺼내 찻주전자 안에다 넣었다.
“그게 무슨 꽃잎이야?”
그의 행동을 지켜보던 제갈청아가 신기한 듯 동그란 두 눈을 치켜떴다.
백천성은 별거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국화…… 작년 가을에 따서 말려 놓은 건데…… 자, 한번 마셔 봐.”
그는 이내 찻주전자를 들어 보따리에서 꺼낸 찻잔에 찻물을 따랐다.
제갈청아는 그가 건네주는 찻잔을 받아 들고는 코를 킁킁거렸다.
“냄새는 괜찮네.”
그녀는 조심스럽게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 한 모금 훌쩍 마셨다. 은은한 국화향이 입안 가득 퍼지며 뱃속까지 번지는 느낌이 들었다.
“우와…… 이거 맛있다. 이제까지 내가 마셔 왔던 차는 별로 맛이 없었는데…….”
제갈청아가 자신이 지금 납치되었다는 사실조차 잊은 듯 두 눈을 휘둥그레 뜨자, 백천성은 우쭐거리는 얼굴을 했다.
“맛있는 게 당연하지. 지금 네가 마신 차는 내가 직접 따서 말린 국화 꽃잎 화차(花茶)니까. 사실 화차의 특징은 차의 향기와 맛에 있어. 이를 화차삼품(花茶三品)이라고 하는데…… 목품(目品)과 비품(鼻品), 그리고 구품(口品)이라고 하지.”
“화차삼품……? 목품, 비품, 구품이라고……?”
“한마디로 눈과 코, 그리고 입까지 즐거워야 진정한 화차라고 할 수 있다는 거야.”
“이제 보니 넌 차에 대해서 엄청 많이 아는구나.”
“솔직히 말하면 지금 네가 마신 국화차를 다루(茶樓)에 가서 팔면 적어도 은자 한 냥은 달라고 그럴걸. 하지만 그건 내가 직접 만들어 낸 다른 차들에 비하면 거의 밑바닥이라고 할 수 있지. 어흠!”
백천성은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이번엔 두광에게 차를 내밀었다.
“아저씨도 한번 마셔 보세요.”
“…….”
두광은 솔깃한 얼굴을 했다. 비록 그가 대마두이기는 하나 나름대로 풍류(?)를 즐기다 보니 자연 차에 대해 알고 그 맛 또한 아는 터라, 백천성이 내민 찻잔에서 은은한 다향이 풍겨 오자 구미가 당기는 얼굴을 했다.
“제법 괜찮은 향기를 풍기는군.”
그는 슬쩍 우수를 들어 올려 허공섭물의 공력으로 백천성의 손에 쥐어져 있던 찻잔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
“……!”
두광은 천천히 찻잔 속의 국화차를 한 모금 마셔 보고는 뜻밖이라는 얼굴을 했다.
그러더니 이내 두 눈까지 지그시 감은 채 맛을 음미하며 차를 완전히 다 마시는 것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차 맛 하나만큼은 일품이로구나.”
“헤헤……. 당연하죠. 더군다나 단순한 차가 아니니까요. 사실 국화차 안에다 다른 걸 조금 탔거든요.”
“다른 거……?”
“에이, 그렇게 인상 쓸 거 없어요. 독을 넣은 게 아니라 약을 넣었으니까요. 설사약이긴 하지만…….”
“설사약…….”
두광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천하에서 손꼽히는 대마두인 자신이 한낱 어린아이에게 속아 설사약을 먹었다니, 어처구니가 없다 못해 머리 뚜껑이 열릴 일이었다.
“이 빌어먹을 쥐새끼 같은 놈…….”
그는 버럭 소리며 당장 몸을 날려 백천성의 목을 꺾어 버리려고 했다.
한데 그 순간.
꽈튜튜튜퉁…….
갑자기 배 안에서 벼락 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물론 그것은 두광의 귀에만 들리는 소리였지만, 즉시 그는 창백한(?) 안색을 했다.
‘으윽……. 서…… 설사가…….’
그는 엉거주춤한 자세를 했다.
비록 그가 희대의 색마로 악명을 떨치고 있다고는 하나, 그래도 명색이 대마두인 이상 똥개처럼 아무 곳에서나 똥을 쌀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만약 이러한 사실이 강호에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아무리 그가 파렴치한이라고 해도 얼굴 들고 다닐 수 없는 쪽 팔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설사라는 게 제아무리 무공이 하늘에 닿았다고 해도 참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한순간.
푸왁…….
마침내 간신히 참고 있던 설사가 기어코 쏟아지며 지독한 냄새를 풍겼다.
백도인의 공적이며, 우는 아이도 울음을 그친다는 희대의 악명을 떨치고 있는 대마두 음양마 두광이 그만 선 채로 싸고 만 것이다. 그것도 말똥말똥 두 눈을 뜬 채 바라보고 있는 아이들 앞에서…….
‘그것도 내가 거둬들여야 할 제자 앞에서……. 이게 무슨 개망신이냐! 그렇다면…….’
바드득 이를 갈아붙인 두광은 살기 어린 눈으로 백천성을 노려보았다.
“어처구니가 없게도 마빡에 피도 안 마른 애 녀석이 감히 나 음양마 두광을 농락하다니…… 네놈을 반드시 죽여 놓고야 말겠다!”
“그렇게 날뛰면 안 될 텐데요…….”
두광이 분노한 표정을 한 채 우수를 번쩍 치켜들자, 백천성은 짐짓 근심(?) 어린 표정을 했다.
“내가 설사약을 넣기 전에 다른 약을 한 가지 넣었다는 사실을 말했던가요? 군자산이라는 약인데…… 뭐, 몸에는 그리 나쁜 건 아니니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군자산……!”
두광의 입에서 비명 같은 외침이 터져 나왔다.
본래 군자산은 독이 아닌 약. 그러나 무인이 복용하면 일정 시간 동안 내공이 흩어지게 하는 효능을 가지고 있는 터라, 어떤 면에선 독보다 꺼려하는 약이기도 했다.
‘내…… 내공이 모아지지 않고 있다…….’
두광은 황급히 공력을 끌어 올려 보았으나 한 줌의 내공도 모아지지 않았다. 백천성을 노려보는 그의 얼굴이 구겨진 휴지 조각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네…… 네놈이……!”
“아참, 또 한 가지 잊고 있었네. 좀 전에 찻잔에 마비산을 조금 발라 두었는데…… 정신을 잃긴 하겠지만 그리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백천성은 별것도 아니라는 듯 말했다.
외과적인 수술을 필요로 하는 환자에게 먹여 진통을 없애 주는 마비산을 복용하게 되면 이 하늘 아래 다시없는 고수라고 해도 온몸이 마비되어 정신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이 쥐방울만 한 놈이……!”
두광은 안색이 일변한 채 백천성을 덮쳐 가려고 했다.
그러나 갑자기 그의 눈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마비산 때문이었다.
“네…… 네놈이 감히…….”
두광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앞으로 꼬꾸라지고야 말았다.
꽈당…….
음양마 두광.
천하에 악명을 떨치는 대마두이건만 어처구니없게도 어린아이가 쓴 독에 중독되어 그대로 기절하고야 만 것이었다.
“쓰파…… 날 띄엄띄엄 보았다간 당하고 말지. 강호에서도 제일 어려운 상대가 여자와 노인, 그리고 아이라는 걸 알았어야지. 참, 내가 힘들게 잡아서 구운 생선을 다 처먹었으니까 그 계산부터 해야지.”
백천성은 두광에게 다가가 그의 우수에 쥐어져 있던 새하얀 부채 음양조화선을 집어 들었다.
‘일단은 이게 값이 나갈 것 같단 말씀이지. 그리고…….’
두광의 전신을 이리저리 살피던 그는 이내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아 품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그는 은자 열 냥이 든 주머니와 낡은 고서 한 권을 꺼내 들었다.
‘히히…… 은자가 생겼네. 그리고 이건 웬 책이지.’
잠시 멈칫거리던 그는 지체 없이 은자는 품속에 넣고, 음양조화선과 고서는 보따리 안에 쑤셔 넣었다.
그때, 제갈청아는 재빨리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 허공으로 힘껏 던지는 것이었다. 그것은 손바닥만 한 길이의 대나무통이었는데, 순식간에 허공중에서 소리 없이 폭발하며 새파란 연기를 뿜어냈다.
“폭죽이야?”
백천성이 신기한 듯 묻자, 제갈청아가 그의 옆으로 걸어왔다.
“이건 우리 제갈세가의 비상용 폭죽이야. 이제까진 저놈 때문에 터트리지 못했는데, 지금 신호를 했으니 이제 곧 할아버지가 도착할 거야.”
여기까지 말한 그녀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두광을 보며 걱정스런 듯한 얼굴을 했다.
“깨어나지 않는 거지?”
“군자산에 마비산을 먹었으니 당분간은 시체나 다름없지. 뭐, 그래도 찝찝하다면…….”
힐끗 그녀를 본 백천성은 다시 보따리 안에서 뭔가를 꺼냈는데, 그것은 작은 소도였다.
부욱부욱…….
백천성은 이내 소도로 두광의 옷을 찢기 시작했다. 사실 그는 두광의 옷을 벗기려 했지만 격렬하게 설사를 한 탓에 소도로 옷을 찢어 버린 것이었다.
이윽고 알몸이 된 두광을 보고 백천성은 입가에 만족한 듯한 웃음을 흘렸다.
“이자가 깨어난다고 해도 이런 알몸으론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할 거야. 그리고…….”
그는 쓰러져 있는 두광을 개울 쪽으로 밀었다.
한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이놈!”
죽은 듯이 쓰러져 있던 두광이 벌떡 일어서며 달려드는 게 아닌가!
“히익!”
백천성은 화들짝 놀라며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이미 기절해 있는 줄 알고 있었던 두광이 벌떡 일어나 달려드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