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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포유여향 1권(3화)
1장 대마두의 최후(3)
사실 두광이 마비산과 군자산에 중독되어 쓰러지긴 했으나 완전히 정신을 잃은 건 아니었다. 비록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상황이었지만 자신의 내공으로 군자산과 마비산의 약력을 간신히 억눌러 놓고 있다가 기회를 틈 타 백천성에게 달려든 것이었다.
‘틀림없이 저놈에게 해독약이 있을 것이다……!’
설명은 길었지만, 백천성이 소도를 꺼내 두광의 옷을 찢어 버리고 다시 그를 개울물로 밀어 버리려 하자, 두광이 몸을 일으켜 달려든 것은 거의 찰나에 지나지 않았다.
두광의 일 수가 막 백천성의 머리를 움켜잡으려는 순간.
“음양마 두광!”
갑자기 허공중에서 창노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허공을 쪼갤 듯이 가르며 곧장 날아드는 푸른 섬광.
쐐애애액!
그것이 푸른 검기에 휩싸인 한 자루의 검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땐 두광의 입에선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크아아악……!”
꽈직……!
검은 그대로 두광의 가슴을 꿰뚫었고, 두광은 마치 작살에 맞은 물고기처럼 전신을 퍼득거리더니 이내 바닥에 쓰러져 죽고야 말았다.
현의 노인.
가슴이 박살 난 채 쓰러진 두광 앞으로 한 줄기 인영이 스륵 모습을 드러냈는데, 일신에 정갈한 현의를 걸치고 탈속한 기품을 가진 깊은 눈빛의 노인이었다.
“감히 내 손녀를 납치하다니…… 그러고도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면 나 제갈염황을 너무 우습게 안 것이다.”
어느 틈엔가 그의 우수엔 한 자루의 검이 쥐어져 있었는데, 바로 두광의 가슴을 박살 낸 바로 그 검이었다.
제갈염황.
하늘이 내린 천재적인 두뇌들의 가문인 제갈세가의 노가주로, 당금 천하에서 신기검왕(神機劍王)이라 불리는 절대 무인이었다.
“할아버지…….”
제갈청아는 반색하여 황급히 제갈염황의 품 안으로 달려가 안겼다.
제갈염황은 그녀를 안으며 빙그레 웃었다.
“괜찮으냐?”
“이름이 백천성이라고? 청아의 말로는 네 덕분에 음양마 두광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했으니…… 실로 고마운 일이다.”
제갈염황은 눈앞에 있는 백천성을 보며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떠올렸다.
백천성은 한 손으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에이, 별일도 아닌데요. 뭘…….”
“…….”
그런 그를 보며 제갈염황은 다소 기이한 눈빛을 했다.
‘도관을 쓴 것으로 보아 도사인 것 같은데…… 그러면서 무당파의 제자는 아니라고 했지.’
처음 그가 백천성을 보았을 때 도사 복장을 한 그를 보고는 무당파의 제자로 착각했었다. 그러나 물어본 결과, 그는 무당파하고는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
‘더군다나 저 아이의 말에 의하면 입고 있는 도복은 어려서부터 습관처럼 입었던 것이라고…….’
이상하게도 그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아이였다.
제갈염황은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물었다.
“혼자서 그렇게 돌아다녀도 괜찮으냐? 부모님은 어쩌고…….”
백천성은 즉시 대답했다.
“삼 년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지금은 아버지의 유언을 따라 누구를 만나러 가는 중이고요.”
“대견하구나.”
백천성의 말을 들은 제갈염황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불과 열 살 남짓한 아이가 여행을 한다는 것은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또한 유명을 달리한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기 위한 것이라니, 실로 감탄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허…… 만약 달리 갈 데가 없다면 나중에라도 본 제갈세가로 찾아오거라. 제법 이름을 떨친 가문이니 찾기는 어렵지 않을 터…… 언제든 본 제갈세가의 문은 열려 있다.”
“알겠습니다.”
“꼭 와야 돼. 내가 기다리고 있을게.”
이제까지 조용히 서 있던 제갈청아가 다짐하듯 그를 바라보았다.
백천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럼 약속…….”
제갈청아는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어서 약속하고 도장 찍어.”
“도장……?”
백천성이 엉겁결에 새끼손가락을 내밀자, 제갈청아는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걸더니 엄지손가락으로 백천성의 엄지손가락을 꽈악 눌렀다.
“이제 도장 찍었으니까 반드시 약속 지켜야 돼.”
“으응…….”
“최대한 빨리 와.”
그 말을 끝으로 제갈청아는 할아버지인 제갈염황과 함께 떠나갔다.
한동안 그들 조손이 멀어지는 걸 바라보던 백천성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무당산에 오자마자 엉뚱한 일에 휘말려 하마터면 죽을 뻔했네.”
문득 그의 시선이 바닥에 가슴이 뻥 뚫린 채 쓰러져 죽어 있는 두광에게로 머물자 얼굴이 일그러지고야 말았다.
“깜박했네. 시체가 있다는 걸. 아버지 말에 의하면 객사한 시체를 그냥 내버려 두면 틀림없이 원귀가 된다고 했는데…… 저걸 언제 파묻어. 쓰파…… 열 받네.”
* * *
“저놈이다!”
무당파에서도 아는 자가 거의 없어 스스로 무명기인이라고 생각하는 노도사 현허는 앞을 보며 두 눈에 불통을 튕겼다.
그의 시선이 멈춘 곳. 무당파가 자리 잡은 무당산에서도 인적이 드문 영취봉으로 오르는 산길을 한 아이가 걸어가고 있었다. 등 뒤로는 자신의 몸집만 한 보따리를 멘 채 허름한 도복에 머리엔 나이 지긋한 노도사들이나 쓰는 도관까지 쓴 어린아이.
지금 현허가 심하게 분노하고 있는 건 어린아이가 도관을 썼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산길을 올라오면서 악을 쓰듯 부르고 있는 노랫가락 때문이었다.
“현허야, 현허야! 너는 어디에 있느냐? 깊고 깊은 무당산에서 머리카락 보일까 봐 꽁꽁 숨어 있구나. 누가 널 보고 자라 새끼라고 해도 괜찮을 거야.”
‘자…… 자라 새끼라고……?’
“아! 쓰파. 현허란 도사가 벌써 뒈졌다면 난 정말로 재수 없는 놈이로구나.”
‘저 빌어먹을 애새끼가……!’
노래인지 저주인지, 멀리서 듣고 있던 현허의 온몸이 부들부들 떨릴 지경이었다.
사실 사흘 전부터 느닷없이 들려온 노랫소리를 처음 들었을 땐 그저 ‘어느 놈인지 엄청 노래 못하네.’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러다 노랫말 중에 ‘현허’라는 이름과 ‘자라 새끼’라는 단어가 있다는 걸 알았을 땐 분노로 머리 뚜껑이 열릴 지경이었다.
어려서부터 짜리몽땅했던 그의 키는 커서도 크나큰 약점이었고, 친구들에게서 늘상 ‘자라’라고 놀림을 받아 왔기 때문이었다.
‘감히 도가 하늘에 닿아 살아 있는 신선이자, 이제 얼마 후면 우화등선하여 진짜 신선이 될 내게 자라 새끼라고……?’
현허는 결국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치며 한달음에 달려갔다.
“이 사악하기가 이를 데 없는 꼬마 도사 녀석아!”
“……?”
백천성은 느닷없이 고함을 지르며 달려온 바람난 무쪽처럼 볼품없게 생긴 노인을 바라보며 의아하다는 얼굴을 했다.
“영감님은 누구세요?”
“여…… 영감님…….”
현허는 너무도 기가 막혀 입을 쩍 벌렸다.
말이라는 건 ‘어’하고 ‘아’가 다른 법이다. 척 보기에도 고매한 도사인 자신에게 도사님이라고 못할망정 영감님이라니…….
게다가 자신을 보는 저 삐딱한 눈초리는 흡사 자신을 ‘웬 망령 난 늙은이야?’ 하는 게 분명해 보였다.
“이 빌어먹다 못해 평생 주저앉아서 뭉갤 놈아!”
현허는 악쓰듯 외쳤다.
“현허란 이름이 니가 기르는 똥개 이름이냐? 하늘의 이치를 깨닫고 지리를 통달하여 활불…… 아니, 신선이나 다름없는 거룩한 분에게 자라 새끼라고……? 네놈은 필시 원시천존님의 분노를 사서 벼락을 맞고 말 것이다!”
그의 거창한(?) 욕설을 듣고 있던 백천성은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현허를 욕하든 말든 영감님이 왜 그러세요?”
“내가 바로 현허다!”
다시 한 번 현허는 호통을 쳤다.
그는 자신이 신분을 밝혔으므로 눈앞에 있는 사이비 도사와 같은 꼬마 놈이 넙죽 엎드려 용서를 빌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생각과는 달리 백천성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이, 구라 치지 마세요.”
“구라 아냐!”
“내가 알기론 현허란 도사는 제법 도력이 높아서 귀신을 부를 수도 있으며, 잡을 수도 있다던데…….”
“그래, 맞아. 귀신을 잡아 족칠 수 있는 건 이 하늘 아래 오직 나 현허밖에는 없다.”
“하지만 듣기론 현허란 도사가 보기에 매우 탈속한 기품을 풍길 정도로 그럴싸하다던데…… 영감님은 아니잖아요?”
백천성의 의심스런 말에 현허의 노안이 떨떠름하게 변했다.
“그러니까 나잖아. 탈속한 기품…… 그건 전적으로 나 현허를 표현하는 수식어다…….”
갑자기 그의 끝말이 사그라들었다.
솔직히 말해 자신도 스스로의 외모에 대해 자신이 없는 그였다. 난쟁이 똥자루라는 표현에는 키가 작다는 뜻과 외모 또한 수준 이하임을 나타내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 백천성이 영취봉에서 지난 삼 일 동안 노래를 부르고 다닌 것은 현허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동안 영취봉을 이 잡듯 뒤졌음에도 현허 비스므레한 도사도 못 본 터라, 마지막으로 포기하는 심정으로 욕설에 가까운 노래를 불러왔던 것이다.
본래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지만, 욕은 지랄발광하게 한다는 걸 그간의 생활로 터득한 그였다.
“그럴 리가…… 아버지가 허풍이 심하긴 하지만 없는 말을 할 사람은 아닌데…….”
백천성은 현허의 위아래를 훑어보며 여전히 미심쩍은 얼굴을 했다.
현허는 발끈했다.
“내가 현허가 아니라는 근거가 뭐냐?”
백천성은 여전히 퉁명스런 음성으로 말했다.
“그거야 울 아버지가 그렇게 말했으니까요.”
“그건 네 아버지가 사기 친 거야?”
“물론 아버지가 평소에도 허풍이 심하긴 하지만 유언까지 거짓말하진 않았을 겁니다.”
“으으…… 대체 네 아버지가 어떤 녀석이야? 이름이 뭐야?”
“백씨 성에 묵 자 겸 자를 쓰는데요.”
“백묵겸……? 그놈이 어떤 놈이길래? 이름을 보니까, 오래전에 도망친 내 제자 녀석과 이름이 똑같구나! 가만? 백묵겸이라고……!”
마지막 말은 거의 비명에 가까웠다.
이제까지의 표정과는 달리 얼음장처럼 굳어 버린 얼굴을 한 현허는 두 눈을 부릅뜬 채 백천성을 바라보았다.
“그…… 그럼 네가 묵겸이의 아들……?”
백천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아버질 아는 걸 보니까 정말 현허 도사님이신가 보네요.”
그는 품속에서 서찰을 꺼내 현허에게로 내밀었다.
“이건 우리 아버지가 남긴 편지예요. 현허 도사님에게 주면 된다고 하셨거든요.”
현허는 그가 건네준 서찰을 받아 펼쳐 보았다.
한동안 서찰을 흔들리는 눈빛으로 바라보던 현허는 길게 장탄식을 했다.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다고 하더니…… 이어지지 말아야 할 인연이 또 이렇게 이어지게 되는구나.”
절레절레 고개를 흔든 그는 백천성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이름이 무어냐?”
이제와는 달리 무거운 신색이었다.
백천성은 대답했다.
“백천성인데요.”
“천성이라……?”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 현허는 지그시 두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다시 눈을 뜨더니 짧게 말했다.
“날 따라오너라.”
그는 몸을 돌려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에이, 하여간 우리 아버지 뻥은…… 탈속한 기품이 다 얼어 죽었네.’
다시 한 번 아버지의 허풍에 얼굴을 구긴 백천성은 여전히 보따리를 멘 채 현허의 뒤를 따라갔다.
2장 입문 무당법문(1)
이렇게 사부님에게 연락을 하게 되어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이 서찰을 사부님께서 받아 보셨을 때면 제자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중략(中略)……
제자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놈의 이름은 백천성이라고 합니다. 비록 제자는 사부님의 기대를 받고도 법신을 이루지 못했으나, 그 녀석만은 사부님의 염원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옵니다. 부디 천성이를 거두어 주십시오. 저승에서도 사부님의 건강을 축원하겠습니다.
미욱한 제자 묵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