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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포유여향 1권(5화)
2장 입문 무당법문(3)


현허의 말대로 샘물은 영취봉 중턱에 있었다.
그리 크지도 않은 물통에다 샘물을 담고 다시 정상까지 올라가는 일련의 과정은 백천성에게는 고문과도 같았다. 고문도 지독한 고문이었다.
그저 단순히 물을 길어 오는 것이건만, 그가 모옥 앞까지 물을 길어 왔을 때 해는 중천에 떠 있었다. 다시 그 물에다 쌀을 씻어 불에 올려놓고 밥을 했는데, 정작 밥이 됐을 땐 그는 거의 녹초가 되어 아무렇게나 바닥에 쓰러진 채 거친 숨만을 몰아쉬어야 했다.
“힘들어도 밥은 먹어야 한다.”
만약 현허가 이런 말과 함께 강제로 그의 입속에다 밥을 쑤셔 넣지만 않았어도 그는 하루 온종일 굶었을 것이다.
‘차라리 굶는 게 나아. 그냥 잠만 잤으면 좋겠다.’
사실 백천성은 이것으로 하루 일과가 끝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밥을 먹고 난 뒤 현허는 방 한가운데에 앉은 그에게 조용히 말을 건넸다.
“밥을 먹었으니 이제 제대로 법술에 대해 공부해야지.”
공부.
사전적인 의미로 말하자면, 학문이나 기술을 배우고 익힌다는 말이다.
너무도 당연하게도 현허는 무당법문의 맥을 이은 자이고, 백천성이 그의 제자가 되었으니 법술을 공부한다는 건 잘 때 눈감고 잔다는 것과 너무도 똑같은 말이었다.
“무당파가 삼풍 진인이 개파했다고 알려졌지만, 우리 무당법문은 그보다 오랜 수천 년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고 있다. 따지고 보면, 우리 무당법문이 정통이라고 할 수 있지.”
매우 엄숙한 얼굴로 무당법문의 역사와 전통에 대해 한참을 떠벌리던 현허는 그제야 생각난 듯 물었다.
“그런데 너는 네 아버지에게서 달리 배운 것은 없었느냐?”
백천성은 피곤한 가운데에서도 의아한 얼굴을 했다.
“배우긴 배웠는데…… 부적 쓰는 법이라던가 주문을 외우는 법, 물론 순 엉터리지만요.”
“다른 건?”
“뭐, 차를 만드는 정도랄까요?”
“차?”
듣고 있던 현허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차라면 어느 정도까지냐? 그저 만들어 놓은 차에다 물만 붓는 정도는 아니겠지?”
“다예표연(茶藝表演)할 정도는 되죠?”
“다예표연을……!”
백천성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하자, 현허는 화들짝 놀란 얼굴을 했다.
다예표연이란, 차를 우리는 사람이 기교와 재주, 기술로써 차를 우리는 방법 및 맛을 보는 것까지의 모든 동작을 하나하나 펼쳐 보이는 것을 말한다.
이는 차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고, 또한 다양한 차들과 각종 다구(茶具)를 제대로 다룬다는 것을 의미했다.
한마디로, 차에 대해서라면 완전히 통달했다고 할 수 있었다.
“네 나이에 다예표연을 할 정도라니…….”
“지지리 궁상인 아버지 덕분에 투다(鬪茶)로 먹고살았거든요. 차를 좋아한 아버지가 반 강제적으로 알려 준 거지만…….”
“차백희(茶百戱)까지……?”
투다란 송대에서 성행한 것으로, 차를 애호하는 다인(茶人)들끼리 서로 차에 대한 지식이나 맛에 대해 승부를 가려 왔는데, 후일 이것은 살벌한 싸움으로까지 변질되었다.
그랬기에 나중에는 투다라는 말 대신에 차백희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되었고, 지금에 와선 자연스럽게 다예표연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죽은 네 아버지 덕분에 다예표연을 할 정도의 놀라운 다인이 됐다는 거로구나.”
현허는 백천성을 보면서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입가에 미소를 흘렸다.
왠지 그 미소가 매우 불길하다고 생각된 백천성은 찝찝한 얼굴로 물었다.
“이제껏 투다를 해서 져 본 적이 없으니까요. 그런데 법술 공부는 하지 않을 건가요?”
“물론 해야지.”
현허는 그를 보며 입가에 기묘한 미소를 떠올렸다.
“무당법문의 법술을 수련하기 위해선 그보다 먼저 한 가지를 알아야만 한다. 그것은 바로 조화일심태극결(造化一心太極訣)……. 사실 이 조화일심태극결은 모두 일만 자로 이루어졌기에 만자진결이라고도 불린다.”
일만 자의 글자로 이뤄진 조화일심태극결.
이는 무당법문의 경전이면서 동시에 일종의 도인양생술이라고 할 수 있었다.
“조화일심태극결을 외우며 수련하다 보면 세 가지 능력을 얻을 수 있을 터…… 귀안(鬼眼)과 광명부동심(光明不動心), 그리고 조화혼(造化魂)이 바로 그것이다.”
“귀안과 광명부동심? 조화혼……?”
“그렇다. 이제 조화일심태극결에 대해 알려 줄 테니 정신 바짝 차리고 들어야 할 것이다.”
그의 설명대로 하자면 이랬다.
일만 자의 조화일심태극결 중에서 삼분지일만 터득해도 세상의 모든 귀신을 단지 보는 것만으로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또한 두 번째인 광명부동심을 이루게 되면 귀기에 홀리지 않은 채 오히려 귀신들을 수족처럼 부릴 수 있으며, 마지막인 조화혼에 이르게 되면 각종 천사만악의 존재들을 일시에 소멸시킬 수 있었다.
“한마디로 조화일심태극결을 제대로 연성한다면 모든 귀신들의 왕이나 다름없게 되지. 다른 도문에선 고작 우화등선하는 게 목적이지만, 우리 무당법문은 신선은 기본이고 귀신들을 똘마니처럼 부릴 수 있다는 게 선택 사항이라고 할 수 있다.”
자랑스럽게 말하는 현허와는 달리 지금 백천성은 내심 비명 같은 욕설을 터트리고 있었다.
‘으악! 일만 자나 되는 걸 오늘 밤중으로 다 외우라고…… 말도 안 돼.’
지독한 현기증에 그는 정신마저 아득해졌다.
천자문도 석 달 동안 이 악물고 공부해서 겨우 뗄 수 있었다. 그런데 일만 자나 되는 글은 하룻밤 동안 다 외우라니, 억장이 무너지다 못해 가슴이 뻥 뚫리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뒤이어지는 현허의 말엔 입을 쩍 벌릴 수밖에 없었다.
“사실 조화일심태극결을 외우기 위해선 특별한 방법이 필요하지.”
“특별한 방법……?”
“정확하게는 아주 특별하고도 색다른 장소를 말하는 거다.”
“그럼 여기서 그 조화일심태극결을 외운다는 게 아닌가요?”
점점 미로에 빠지는 듯한 말에 백천성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이럴 게 아니라 당장 그곳으로 가야겠구나. 따라 나오너라.”
현허는 벌떡 몸을 일으켜 모옥 밖으로 나갔다.
‘또 걷는 거야?’
백천성의 얼굴이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졌다.
중압술에 걸린 채 물을 길어 오느라 거의 녹초가 되다시피 한 그였다. 걷는다는 게 거의 고문이나 다름없는데, 이번에도 또 걸어서 어디론가 가야만 하니 저절로 욕설이 터져 나왔다.
“쓰파…….”

영취봉 북쪽 아래 은밀한 숲 속.
모옥과 거리상으로는 그리 멀지 않았으나 중압술에 걸려 있는 백천성은 거의 십 리쯤 걸어오는 것처럼 지치고야 말았다.
“헉헉…… 이곳이 그 특별한 장소인가요?”
그는 연신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중앙이 푹 꺼져 있는 작은 분지와도 같은데, 전체적으로 알 수 없는 음침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것은 단지 느낌뿐만이 아니었고, 스쳐 가는 바람이 피부에 닿자 절로 소름이 돌 정도였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바닥 여기저기엔 작은 무덤들이 솟아나 있었다.
“서…… 설마 공동……묘지……?”
백천성은 무덤들을 보며 화들짝 놀란 얼굴을 했다.
현허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산에는 이런저런 사연으로 객사한 자들이 많이 있는 법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 이런 이름 모를 공동묘지들이라고 할 수 있다.”
“서…… 설마 여기서 공부를 한다는 건가요……?”
“조화일심태극결을 외우기엔 더없이 좋은 곳이지. 한눈팔 데도 없고, 정신 집중하기에도 좋고…… 천지사방을 다 뒤져도 여기보다 수련하기에 효과적인 곳은 없다.”
‘쓰파…… 돌아버리겠네.’
어쩐지 무당법문에 입문한 지 하루 만에 욕설만 전에 비해 서너 배가 늘게 된 백천성이었다.
대체 사부인 현허가 말하는 그 ‘법술’이라는 게 정확하게 무엇인지는 아직도 감이 잡히지 않지만, 공포스럽기 짝이 없는 무덤에서 왜 반드시 수련해야만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해가 꼬이면 오해가 되는 법, 고로 그는 지체하지 않고 물었다.
“사부…… 정말로 반드시 여기서 해야만 하는 건가요? 굳이 이렇게까지 하면서…….”
그의 뒷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현허가 그를 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한마디 했기 때문이었다.
“천성아, 아직 몸이 가벼운 모양이로구나. 중압술 한 방 더 놔주랴. 이번엔 한 이십 년짜리로…….”
이십 년짜리 중압술.
도합하여 삼십 년 동안 애 낳기 직전의 임산부처럼 무거운 몸으로 살기 싫었으므로 백천성은 즉시 모든 걸 납득했다.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역시 내 제자답게 말귀가 통하는구나. 그럼 이제 조화일심태극결의 첫 번째 구절부터 말해 줄 테니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하나의 마음에서 여러 갈래의 길이 나오나니…… 길은 곧 법이라고 할 수도 있으며…….”
“……!”
아아, 순식간에 정신이 비몽사몽간에 사로잡혀 버리는 백천성이었다.
현허의 말처럼 조화일심태극결이 모두 일만 자로 되어 있는지 세어 보지 않아서 알 수 없었지만, 설명을 듣는 동안 그는 지독한 현기증을 느껴야만 했다.
‘무슨 말이 이렇게 어려워. 외우기도 쉽지 않네. 쓰파…….’
다시 한 번 욕설을 내심 비명처럼 외쳐 댔다.
더욱이 단순히 외우는 것만이 아니었다.
각 구절마다 그에 해당하는 몸동작이 있었다.
예를 들어, 두 팔을 하늘 높이 들고는 숨을 내쉰다던가, 그러면서 혀는 입안을 마구 움직여야 하며 다리는 움직이지 않고 마보를 서되 엉덩이는 실룩거려야 한다는 등이었다.
좋게 말해서는 건강을 위한 체조와 같았고, 나쁘게 말하자면 경기 들린 선무당이 발작을 일으키는 것과 같았다.
‘이…… 이렇게 하면서 일만 자를 다 외워야 한단 말이지…….’
백천성은 팔십 먹은 늙은이처럼 지그시 두 눈을 감았다.
깜깜했다. 자신의 미래를 예고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직 창창하게 남은 미래보다는 당장의 일을 걱정해야만 하는 그였다.
사부인 현허가 그를 노려본 채 음산하게 한마디 했다.
“오늘 중으로 다 외우지 못하면 중압술 십 년을 더 추가해 주마.”
‘쓰파…… 저놈의 중압술……!’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까라고 하면 깔 수밖에 없는 신세였으므로 즉시 조화일심태극결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머릿속으로는 열심히 사부가 말해 준 구결들을 외웠고, 몸은 그에 따라 미친놈처럼 움직여 갔다.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불과 일각이 지났을 땐 그는 비 오듯 땀을 흘려야만 했고, 임종 직전의 환자처럼 숨을 거칠게 헐떡였다.
다시 한 시진이 흘렀을 땐 그는 그대로 앞으로 꼬꾸라져 기절하고야 말았다.
‘쓰파…….’
그의 마지막은 항상 욕이었다.
이렇게 무당법문에 입문한 두 번째 하루가 지나갔다.

* * *

백천성이 이제까지의 삶이 그래 왔지만, 앞으로의 인생은 이전보다 몇 배는 순탄치 않음을 깨달은 건 그다음 날 새벽이었다.
그것은 공동묘지에서 조화일심태극결을 기묘한 동작과 함께 수련하다가 끝내 기절한 그가 간신히 정신을 차렸을 때 사부인 현허가 말없이 눈앞으로 내민 한 장의 종이 때문이었다.
시간표.
하루의 일과를 잘 활용하기 위해 짜 놓은 시간표였는데, 오직 하나밖에 없는 제자를 생각해서 사부가 손수 짠 것이라고 했다.
사부가 손수 작성했다는 시간표는 매우 간단했다.

기상과 함께 물 떠 오기.
아침밥 준비하면서 모옥 주변 청소.
아침 식사 후 설거지.
산책.
공부.
취침 시간.

본래 시간표라는 것은 하루의 시간을 세분하여 정해 놓은 시간에 어떤 일을 하겠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사부가 짜 놓은 시간표엔 시간은 없고 오직 할 일만 쓰여 있었다.
“……?”
백천성은 의아한 눈으로 현허를 응시했다.
현허는 그의 생각을 알았다는 듯 담담히 입을 열었다.
“너는 시간표에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데 의아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걱정할 필요가 없는 터…… 시간은 이 사부가 그때그때 알려 주겠다. 그러니 그저 넌 내가 시킬 때마다 열심히 움직이면 되는 것이다.”
“그럼 시간표를 짜나마나한 것이잖아요……?”
“무슨 소리…… 인간이란 그 목표가 있어야 하는 법이다. 알고 움직이는 것과 모르면서 움직인다는 건 그 결과가 하늘과 땅 차이만큼이나 크다.”
“…….”
참으로 간단명료하면서도 빈틈없는 시간표.
그것은 시간표의 당사자인 자신의 의견이나 행동 등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사부의 일방적인 업무 지침서나 마찬가지였다.
더군다나 시간표대로 하자면 그의 할 일은 눈뜨자마자 물을 길고 밥을 하며 청소하는 등의 가사 노동이 대부분이었다.
‘제자가 아니라 가사 도우미 수준이로군.’
척하면 착이랄까, 시간표의 대부분 일과는 불과 이틀 전만 해도 사부 자신이 해야 할 일이었다는 걸 눈치챈 백천성은 내심 욕을 터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완전히 노동력 착취잖아! 확 관가에 가서 신고해 버려? 쓰파…….’
하지만 그랬다간 평생 중압술에 걸려 무거운 몸으로 살아갈 가능성이 농후하므로 그는 참기로 했다.
대신 조금 더 심도 있게 시간표를 파악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