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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포유여향 1권(6화)
2장 입문 무당법문(4)


“사부, 저기 공부라고 쓰여 있는 건 뭐죠?”
“그거야 네가 조화일심태극결을 수련하는 시간이라는 의미다.”
“그럼 공동묘지에서…….”
“그냥 훈련 장소라고만 생각하려무나.”
“그런데 중간에 있는 산책이란 건 뭔가요?”
“산책이란 말 그대로 산책이지. 피곤에 지친 네가 산을 돌아다니다 보면 몸과 마음이 개운해지는 걸 알 수 있을 거다. 물론 산책 중에 다른 것도 해야 하지만…….”
“다른 거……?”
“별거 아니니까 신경 쓸 필요는 없다. 어차피 산책을 하려면 적어도 한 달은 있어야 하니까.”
정말로 의미심장한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산책을 하는데, 한 달 뒤에나 가능하다는 말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지만, 그나마 잘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걸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백천성은 물었다.
“마지막에 취침 시간이라는 건…… 자는 시간이 정해져 있나요?”
현허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다. 너무 일찍 자게 되면 게을러지고, 너무 늦게 자면 하루의 시작이 힘들어지지. 그러니까 아주 적당한 시간에 자야 한다는 게 이 사부의 생각이다. 이를테면 축시(오전 1시∼3시)가 좋겠군.”
“축시요?”
백천성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축시라면 사부의 말처럼 아주 적당한 시간이 아니라 매우 늦은 시간에 잠자리에 든다는 의미였다.
“그…… 그럼 대체 언제 일어나나요?”
“일찍 일어나는 새가 모이도 많이 먹는다고 했으니…… 묘시(오전 5시∼7시)에 기상해야 한다.”
‘묘시……!’
그러니까 자는 시간이 축시에서 묘시까지, 단 두 시진(4시간)이라는 말이었다.
사부와 같은 아주 상늙은이라면 모를까, 자신과 같은 어린아이라면 응당 다섯 시진은 자야 한다고 생각해 왔던 그였다.
어린아이에게 중요한 것은 먹을 것과 자는 것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먹는다는 건 그렇다 치고 자는 시간이 고작 두 시진이라는 건 터무니없이 짧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천성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명심하겠습니다.”
자신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사부의 자애스런 눈빛(?)에서 ‘수틀리면 중압술 한 방’이라는 의지를 읽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눈빛을 번뜩이며 사부는 말했다.
“천성아, 마침 지금 네가 일어난 시간이 기상 시간하고 거의 일치하는구나. 그럼 시간표대로 움직이거라.”
사부의 말처럼 모옥 방문을 통해 서서히 밝아 오는 여명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백천성의 얼굴은 어둡게 변해 갔다.
‘그러니까 물부터 떠 오라는 거겠지. 빌어먹을 쓰파…….’
무당법문에 입문한 지 이틀 만에 욕만 엄청 늘어난 그였다.

3장 차시태극…… 차 덖음의 시작은 태극일지니…… (1)

한 달.
백천성이 무당법문에 입문하여 현허를 사부로 모신 지 벌써 한 달이 흘러갔다.
속절없이 흐르는 게 물과 시간이라고 하지만 백천성에 있어 한 달은 인고의 나날이었다.
‘내 몸이 내 몸이 아냐. 마치 뭍으로 걸어 나온 하마 새끼 같으니까, 걷는 것에도 이렇게 힘들다니…….’
단순히 걷는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지난 한 달 동안 뼈저리게 깨닫게 된 그였다. 현허가 걸어 놓은 중압술에 의해 손가락 하나 움직이려고 해도 온몸이 다 결리고 쑤시는 실정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무거운 몸에 어느 정도 적응되어 처음보다는 괜찮다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시간표에만 정해져 있는 산책 시간을 휴식 시간으로 쓸 수 있어서 어느 정도 여유가 있었다.
그런데 바로 오늘, 그러니까 정확하게는 시간표대로 설거지가 끝나기가 무섭게 사부는 그를 향해 엄청 큰 망태기 하나를 불쑥 내밀었다.
“오늘부터는 산책을 해도 되겠구나.”
백천성은 망태기를 받아 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이 망태기는 뭔가요?”
“허허…… 놀면서 염불한다는 말이 있지 않느냐? 산책하면서 산에 나 있는 찻잎이나 조금 따 오거나. 내가 젊은 시절 무이산에서 얻어 온 좋은 암차 씨앗을 여러 군데 뿌려 놨으니…… 지금쯤이면 제법 딸 만할 게다.”
“차를…….”
“말하건대, 시간표대로 움직이려면 부지런히 따야 할 거다. 산책하면서…… 참! 공부 시간까지는 늦지 않게 돌아와야 한다.”
아침 식사가 끝나고 설거지를 마치는 시간이 사시(오전 9시∼11시), 그리고 사부가 정해 놓은 산책 시간은 유시(오후 5시∼7시) 직전까지다.
그러니까 산책 시간은 거의 세 시진이었고, 백천성의 키만 한 망태기를 준 것은 산에 자라나 있는 찻잎들을 망태기에 가득 채워 오라는 의미일 것이다.
당연하게도 백천성이 제대로 따 오지 못했을 경우, 뭔가 불이익을 받을 것이라는 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결국 백천성은 커다란 망태기를 든 채 모옥 밖으로 터벅터벅 나설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다 찻잎을 가득 채우려면 정신없이 찻잎을 따야겠구나. 그 말은 곧 쉴 틈도 없다는 말이겠고…….’
그제야 알았다.
시간표에 쓰여 있는 산책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그러니까 산책은 누군가가 사부가 마셔야 할 차를 따야 한다는 것이고, 그 누군가가 바로 본 문의 유일한 제자인 나라는 얘기겠지.’
산책은 가사 노동에 지친 자신을 위한 게 아니라 차를 즐기기 위한 사부의 간특한(?) 꾀에 지나지 않았고, 결국 망태기를 어깨에 짊어진 채 걸어가는 그의 발걸음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무거운 건 그의 마음이었다.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무당법문에 입문한 것이 그리 좋은 선택이라고 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관둘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중압술에서 벗어나려면 십 년은 버텨야 한단 말이야. 지금 관둔다면 평생 이래야 할 거고…….’
그가 살아온 지 어언 십 년.
평생 처음 가는 산책길이었다.
그렇게 다시 삼 년이 흘러갔다.

* * *

따뜻한 햇살이 녹음 사이로 파고드는 정오.
등에 봇짐을 멘 두 명의 장한들이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며 걸어오고 있었다. 행색으로 보건대 보부상임에 틀림없어 보이는 장한들이었다.
“이번 일만 끝나면 난 당분간 일 안 할 거야.”
“이 친구…… 힘이 있을 때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지. 그냥 놀 생각만 하다니 어쩌려고 그러나?”
“돈만 보고 일하면 그게 돈벌레지 인간이라고 할 수 있겠나?”
두 사람이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으며 걷고 있을 때였다.
문득 한쪽 옆에서부터 나직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차 한 잔 드시고 가세요.”
두 사람은 발걸음을 멈추고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소년.
그들 앞으로 커다란 나무가 있었고, 그 아래 이제 열서너 살쯤으로 보이는 소년이 좌판을 펼쳐 놓은 채 앉아 있었다.
좌판 위에 올려진 건 찻잔들과 찻주전자.
아마도 산길을 오가는 행인들에게 차를 파는 아이인 것 같았다. 사실 이처럼 차를 파는 것은 상당히 일반적인 일이어서 별로 특이할 것도 없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은 아이가 입고 있는 옷이 도사들이나 걸치는 도복이라는 점이었다.
“최고의 무이암차입니다. 둘이 마시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를 정도의 맛이죠.”
소년이 외치는 소리를 들으며 장한들은 피식 웃고야 말았다.
“이런 산속에서 차를 팔다니…… 대단한 장사 수완이구먼.”
“그러게 말일세. 아무튼 목이나 축이고 가세. 술이면 좋겠지만…… 차라도 괜찮지.”
두 장한은 즉시 소년에게로 다가갔다.
“그 차가 진짜 무이암차란 말이냐?”
차를 파는 소년 백천성은 지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한번 드셔 보면 무이암차의 특징인 활감청향(活甘淸香)을 느끼시게 될 겁니다.”
본래 무이암차는 무이산 바위 틈새에서 자라는 찻잎을 따다 만드는데, 활력을 주는 살아 있는 맛[活]과 달콤[甘]하고 맑은[淸] 향기[香]까지 더해져서 흔히들 활감청향으로 품평하기도 한다.
하지만 무이암차는 매우 비싸 고관대작들이 아니고선 엄두도 못 내는 최고의 차 중 하나, 이렇게 산길에 좌판을 벌여 놓고 팔 수 있는 차가 절대 아니었다.
“하하…… 무이산에 있어야 할 무이암차가 이곳 무당산에도 있다니 놀랍구나.”
“게다가 활감청향이란 말이지.”
장한들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튼 한 잔 다오.”
백천성은 멀뚱히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한마디 했다.
“선불인데요.”
“선불……?”
“그렇습니다. 요즘 치사한 인간들이 많아서요. 어린애가 먹고살겠다고 이런 좌판까지 하는데…… 차만 마시고 냉큼 튀는 치사한 인간들이 있어서요.”
“그래, 그럼 얼마지?”
“은자 한 냥입니다.”
“은자 한 냥!”
장한들은 어이없다는 얼굴을 했다.
본래 도시의 잘나가는 주루의 경험 많은 점원들이 한 달을 꼬박 일해 은자 넉 냥을 받는다. 그런데 산길에서 좌판을 깔고 하는 차 한 잔 값이 은자 한 냥이라니…….
그들 중 말상을 한 장한이 버럭 호통을 쳤다.
“이 녀석이 감히 우리들에게 바가지를 씌우려고 한단 말이냐?”
백천성은 힐끗 그를 보더니 퉁명스럽게 말했다.
“무이암차가 비싸다는 건 알고 있겠죠?”
“그…… 그거야…….”
말상이 멈칫거렸다.
백천성은 다소 뺀질뺀질한 얼굴을 했다.
“사실 이 차라는 게 말입니다. 웬만한 서민들은 제대로 마셔 볼 수도 없는 거죠. 차 두 냥이면 금 두 냥이니…… 서민들에겐 다향까지도 사치인 셈이죠.”
“그…… 그럼 우리가 그깟 차 한 잔도 못 마실 거라는 말이냐?”
“아아, 그런 건 아닙니다만…… 현실이 그렇다는 거죠. 은자 한 냥이라는 건 쉬운 액수가 아니니까요. 하지만 제가 차 한 잔에 은자 한 냥을 받는 건 찻값이라기보다는 부적 값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 부적…….”
장한들은 뜻밖의 말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백천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저씨들도 소문은 들었겠죠. 요금 이 부근에 귀신들이 출몰한다는 거 말이에요.”
“그…… 그건 듣기는 했지만…… 설마 이런 대명천지에 귀신이 나온단 말이냐……?”
장한들이 찝찝한 얼굴을 하자, 백천성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휴우…… 이거 소문이 꽉 막혔네요. 어제만 해도 이 산을 넘던 행상들이 귀신에게 걸려 죽었다는 사실을…… 이달만 들어서 벌써 열 명 넘게 북망산으로 떠났는데…… 뭐, 아저씨들이 싫다고 하시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찻값은 됐으니까 그냥 가셔도 됩니다.”
두 장한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들도 이미 이 근처에서 출몰한다는 귀신에 대한 소문을 들었으나 헛소리라고 생각해 온 터였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아이가 저렇게까지 말하자 왠지 마음이 찝찝해졌다.
“하…… 하지만 은자 한 냥이라는 건 너무 비싼데…….”
“게다가 네가 말한 부적이 얼마나 효과 있는지 알 수도 없고…….”
장한들은 슬쩍 말꼬리를 흐리며 백천성을 바라보았다.
백천성은 노친네처럼 혀를 찼다.
“쯧쯧…… 솔직히 말하자면 내 사부는 평생 순수하게 도만 닦은 엄청난 도인이신데…… 부적은 바로 사부님께서 직접 만드신 것이죠. 부적이 제대로 효과를 보기 위해서 부적을 그리는 사람의 도가 높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주사와 황금 가루, 그리고 각종의 희귀한 약초와 동물의 피를 섞어서 부적을 그리죠.”
“아…….”
“은자 한 냥이라고 해도 경제적 가치로 따진다면 그건 원가에도 못 미치는 것입니다. 만약 귀신에게 해를 입은 사람만 없었다면 결코 부적을 내놓치는 않았을 겁니다. 본래부터 사부님께선 인간 존중을 제일로 여기시는 분이니까요.”
순식간에 말을 와르르 쏟아 내자, 듣고 있던 장한들은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그…… 그렇지만 은자 한 냥이라는 건……?”
여전히 망설이는 모습을 보일 때였다.
돌연 그들 등 뒤에서부터 피 토하는 듯한 비명성이 들려왔다.
“끄아아아악…….”
동시에 그들 앞으로 멀리서부터 한 사람이 허겁지겁 달려오는 게 보였다.
기겁한 채 달려오는 자는 파리하게 질린 얼굴을 한 채 연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사…… 사람 살려! 귀…… 귀신이다……! 으아아아……!”
“……?”
느닷없는 외침에 두 장한들은 어리둥절하다가 달려오는 자의 등 뒤를 보고는 사색이 되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