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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포유여향 1권(7화)
3장 차시태극…… 차 덖음의 시작은 태극일지니…… (2)
여인.
달려오는 자의 등 뒤로 한 여인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일신에 걸친 새하얀 소복과 아무렇게나 늘어트린 머리카락과 그 사이로 보이는 푸르스름한 눈빛. 게다가 놀랍게도 여인은 허공에 둥실 떠 있었는데, 응당 있어야 할 두 발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여인은 사내의 등 뒤로 따라오며 음산한 어조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내 다리 내놔라…… 내 다리…….”
“히익……!”
“진짜 귀신……!”
두 명의 장한은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고야 말았다.
난생처음 귀신이란 존재를 본 그들은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그런 그들을 보며 백천성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지박령(地縛靈)이로군. 본래 지박령은 별거 아닌 잡귀지만 원한을 품고 죽은 여귀라면 상당히 귀찮긴 하지.”
중얼거리는 그는 품속에서 부적 한 장을 꺼내더니 앞을 향해 휘익 던졌다.
부적은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팔랑거리며 날아가더니 한순간 화락 불덩이로 변한 채 곧장 귀신과 충돌하는 것이었다.
“끼아아아악!”
마치 녹슨 기계를 강제로 돌리는 듯한 날카롭고도 귀에 거슬리는 괴성과 함께 귀신은 그 자리에서 한 줌의 불덩이가 되어 팍 꺼지듯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너…… 너…….”
귀신에게 쫓겨 도망쳐 온 사내는 백천성 앞에 풀썩 엎어지며 다급히 소리쳤다.
“부…… 부적을 내게 줘! 난 오늘 중으로 이 산을 넘어가야 할 중요한 일이 있어!”
백천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보니 아까 부적을 사지 않고 그냥 지나치셨던 아저씨로군요. 진작 부적을 샀으면 귀신에게 당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 아무튼 죽지는 않았으니 아저씨 운도 좋은 편이로군요.”
그는 이내 품속에서 한 장의 부적을 꺼내 내밀었다.
“부적 값이 은자 한 냥이라는 건 알고 있겠죠?”
“여…… 여기 있다.”
사내는 황급히 은자를 내밀고는 부적을 받아 들었다.
“고맙다. 아까 진작 네 말을 들을걸. 그랬으면 귀신에게 쫓기지 않았을 텐데…….”
그는 이내 부적을 품속에 넣고는 몸을 일으켜 왔던 길로 걸어갔다.
허겁지겁 도망쳐 올 때와는 달리 다소 여유 있는 걸음걸이였다.
“그 부적을 우리에게도 다오.”
“은자 한 냥이랬지?”
두 장한들은 서슴없이 은자를 꺼내 내밀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반신반의하던 그들이었으나 직접 자신들의 두 눈으로 귀신까지 보았으니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여기 있습니다.”
백천성은 은자를 받아 품속에 넣고는 부적을 두 장 건네주었다.
부적을 받아 든 장한들은 그제야 다소 안심하는 얼굴을 했다.
“빌어먹을…… 무당산에는 그 유명한 무당파가 있으면서 왜 잡귀들이 설치는 걸 놔두고 있는 거야?”
“그러게. 그런 걸 보면 무당파가 이름만 그럴듯한 사이비 아닌지 몰라.”
서로 투덜거리던 두 명은 그제야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걸어가기 시작했다.
귀신을 쫓는 부적을 받아 들고서도 행여 귀신이 나타날까 봐 안심 못하는 눈치였다.
그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그제야 백천성은 나직한 웃음을 흘렸다.
“후후…… 삼 년 동안 조화일심태극결을 수련한 보람이 있네.”
사실 조금 전 장한들이 보았던 귀신은 그가 만들어 낸 일종의 허상이었다.
삼 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공동묘지에서 조화일심태극결을 수련해 온 그였다. 사부의 말처럼 법술을 펼칠 수 있는 법기가 어느 정도 축적되었는지는 자신할 수 없었지만, 언제부턴가 귀신들을 볼 수 있는 귀안이 열리게 되었다.
귀인이 열리게 되자, 그는 어느 정도 귀신들을 움직일 수가 있었다. 물론 잡귀 정도에 지나지 않지만…….
아무튼 조금 전에 나타났던 귀신은 사실 귀안의 단계에 접어들게 되면서 얻어지게 되는 일종의 부가 기능이라고 할 수 있는 잔상이었다.
즉, 진짜가 아닌 허상을 일으켜 일반인에게 귀신처럼 보이게 한 것에 지나지 않았고, 당연히 그가 던진 부적은 아무렇게 낙서한 종잇조각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조화일심태극결인가 뭔가가 아주 쓸모없는 건 아니란 말이야. 이렇게 은자까지 생기다니…….’
이 고개에서 귀신이 출몰한다는 말은 그가 퍼트린 소문이었다.
그래야만 가짜 부적을 팔아먹을 수 있을 것이고, 미심쩍어하는 놈들에게는 조금처럼 잔상을 보여 주면 그걸로 즉빵이었다.
‘제 눈으로 귀신을 봤으니 부적을 안 사곤 못 배기지. 그 말은 곧 다른 인간들도 엄청나게 부적을 살 거라는 말이 되겠고…… 이젠 시간 날 때마다 부적을 그려야겠구나. 히히…….’
내심 흐뭇한 웃음을 흘리는 그였다.
“그 차, 파는 것인가?”
갑자기 앞에서 나직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중년 도인.
언제부터인가 푸른 청의 도복을 걸친 사십 대 중반의 도사가 백천성이 펼쳐 놓은 좌판 앞에 우뚝 서 있었다.
백천성은 중년 도인을 보며 멈칫거렸다.
정광이 번뜩이는 두 눈과 장대한 체구에서 도인이라기보다는 장수에 가까워 보였기 때문이었다.
“호…… 혹시 무당파 신선들이세요……?”
중년 도인, 무덕은 뜻밖이라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난 무당파의 무덕이라고 한다.”
백천성은 짐짓 두 눈을 크게 떴다.
“우와, 난 처음이에요. 무당파 도사들을 이렇게 눈앞에서 보는 게 말이에요.”
처음엔 신선이라고 했다가 지금은 도사라고 했지만, 어린애다운 기대와 존경이 실려 있었기에 그런 거라고 생각한 무덕은 입가에 미소를 떠올렸다.
“무당파라고 모두 삼두육비의 괴물인 줄 알았느냐?”
“그런 건 아니지만…… 손 한 번 휘두르면 바위가 부서지고, 하늘까지 날잖아요.”
“그거야 무공을 연성했으니까 그런 것뿐이다. 그런데 혹시 여기서 무슨 나쁜 일이 있지 않았느냐?”
무덕의 말에 백천성은 내심 뜨끔했으나 겉으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쁜 일이라니요? 제가 아까부터 여기에 앉아 있었는데, 행상들만 몇 명이 지나간 정도였는데요.”
‘이것 참, 내가 잘못 느꼈단 말인가? 분명 이곳에서부터 극히 사이한 기운을 느꼈는데……아이가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고…….’
사실 무당파의 중진이라고 할 수 있는 무덕이 이곳까지 온 것은 우연히 산책하던 중에 극히 이질적이고도 사악한 기운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무당파의 무공은 각종 천사만악한 기운과는 극성이라 그러한 존재가 부근에 있다면 자연히 반응하게 된다. 으음…….’
무덕은 내심 곤혹스런 신음을 흘렸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어린아이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는 터라 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내가 그동안 수련하느라 너무 민감했던 모양이로군.’
그가 잠시 생각에 빠져 있자 백천성은 슬쩍 입을 열었다.
“괜찮다면 차 한 잔 드릴까요?”
“차?”
“차 파는 거냐고 물었잖아요? 물론 도력 높은 도인 어른에게는 공짜로 드립니다. 뭐, 따지고 보면 저도 일종의 도사이니까요.”
“일종의 도사……? 껄껄걸…… 그렇군. 그러고 보니 너도 도사 옷을 걸쳤구나.”
무덕은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이 무당산에는 무당파 말고도 수많은 도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각기 일정한 장소에 살며 도를 공부하거나 혹은 연단을 제련하는 등의 수련을 한다.
그들 말고도 도사 옷을 걸친 채 오가는 행인들을 상대로 물건 등을 파는 장사꾼들도 있었다. 그는 눈앞에 있는 백천성이 그런 장사꾼이라고 생각했다.
“도우가 주는 걸 거절한다면 원시천존님께서도 노하실 것이다.”
‘원시천존은 무슨 개뿔…….’
백천성은 속으로 투덜거렸으나 이내 찻주전자를 들어 찻잔에다 차를 쪼르르 따랐다.
“드세요. 차는 아주 식어 버리면 맛이 없으니까 지금이 딱 좋을 거예요.”
“고맙구나.”
무덕은 그가 건네주는 찻잔을 받아 들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은은한 다향이 입안 가득 번져 갔다.
“허어…… 대단하구나. 내 비록 차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이제껏 마셔 본 차들 중에서는 최고인 것 같구나.”
백천성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럴 거예요. 다른 건 몰라도 차 하나는 제가 최고거든요. 게다가 도사님이 마신 차는 제가 직접 따서 만든 차니까요.”
“호오, 차를 만든다는 건 쉽지 않다고 들었는데 대단하구나. 그런데 왜 짐을 싸는 거냐?”
무덕이 말하는 가운데 백천성은 주섬주섬 좌판을 걷고 있었다.
그러고는 기대어 앉아 있는 나무 뒤쪽에서 커다란 망태기를 꺼냈다. 망태기는 거의 그의 키만큼이나 컸는데, 안에는 각종 잎들이 가득 담겨져 있었다.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에요.”
백천성은 거둬들인 좌판과 찻주전자 등을 망태기 안에다 쑤셔 넣었다.
“늦으면 사부님에게 혼나거든요. 차 다 드셨으면 그 찻잔도 주세요.”
“그…… 그래…….”
무덕이 주는 찻잔을 백천성이 받아 들고는 다시 망태기 안에 집어넣었다.
“그럼 다음에 뵐게요. 무량수불…….”
백천성은 무덕을 향해 두 손을 합장한 채 도호성을 외웠다.
그러고는 천천히 몸을 돌려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무덕은 걸어가는 백천성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두 눈에 이채를 띠었다.
‘저렇게 느리게 걸어가다니…… 저건 걷는 게 아니라 기어가는 거나 다름없구나. 어허…….’
어깨에 멘 망태기 때문일까?
걸어가고 있는 백천성의 발걸음은 굼벵이가 연상될 정도로 더디기 짝이 없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걷는 형태였다. 본래 느릿하게 걷는 자들은 팔자걸음이라든지 혹은 어기적거리는 형태의 걸음걸이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지금 백천성은 허리를 꼿꼿하게 편 채 일자로 걸어가고 있는, 매우 정상적인 형태의 걸음걸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느리게 움직이다니, 정말 모르겠군.”
무덕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더니 몸을 돌려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사실 그가 나타나지만 않았다면 백천성은 한참 동안 부적을 팔았을 것이다.
그러나 귀신을 만들어 내는 잔상이라는 수법은 다소 사기를 동반하고 있기에, 백천성은 그것을 무덕이 눈치채면 귀찮은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좌판을 거둔 것이었다.
백천성은 걸어가면서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고작 은자 다섯 냥밖에는 벌지 못했네. 쓰파…….”
나이가 들었어도 욕은 여전했다.
* * *
“오늘은 일찍 오라고 했는데…… 늦었구나.”
모옥 앞 평상 위에서 느긋한 자세로 꾸벅꾸벅 졸고 있던 사부 현허는 망태기를 짊어지고 다가오는 백천성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사부님도 중압술에 걸려 보세요. 마음처럼 그렇게 빨리 움직일 수 있는지…….”
백천성은 걸치고 있던 망태기를 내려놓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현허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천성아, 요즘 들어 네 녀석의 말투에서 사부에 대한 존경심이 줄어든다는 걸 느끼겠더구나. 만약 정말로 그렇다면 저절로 존경심을 불러일으키게 해 줄 수도 있다.”
보나마나 ‘십 년짜리 중압술 한 방 추가’였다.
‘존경은 개뿔…….’
근자에 들어 어려서 해 왔던 ‘쓰파’란 욕설에다 ‘개뿔’이란 단어가 추가된 백천성이었다.
존경은 늘 ‘심통 난 늙은이에게 하는 게 아니다.’라는 확고부동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 그였으나, 이내 사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절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사부는 하늘, 제자는 땅…… 이게 우리 무당법문의 전통 율법이 아니겠습니까?”
“잘 알고 있구나.”
“조금 전의 망동은 아까 만났던 무당파의 도사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 몰상식한 도사 놈이…….”
그는 하마터면 ‘찻값 은자 한 냥을 받지 않았다.’라고 말할 뻔했다.
만약 그렇게 했다면 눈치가 날카롭기가 절세신검이나 다름없는 사부가 당장 협박(?)을 할 것이고, 그것은 결국 자신이 몰래 가짜 부적을 팔아 모은 돈을 내놓아야 한다는 의미였다.
‘결코 그럴 수는 없지. 어떻게 모은 돈인데…….’
그가 갑자기 입을 다물자, 현허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했다.
“몰상식한 도사 놈? 누굴 말하는 거냐?”
“우연히 만난 무당파 도사였어요. 어찌나 우쭐대던지, 보는 것만으로도 재수 없던데요. 참, 근데 무당파와 우리 무당법문이 한 뿌리라고 하셨죠?”
슬쩍 말꼬리를 돌리는 백천성이었다.
그러자 현허는 움찔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 그랬지…….”
“그런데 어쩐지 그 도사 놈은 우리 무당법문을 모르는 거 같더라고요.”
“설마 놈에게 무당법문에 대해 말했느냐?”
“에이, 존경하는 하늘같은 사부님이 내리신 엄명인데, 함부로 말할 리 있겠습니까? 그냥 떠본 정도죠.”
“어흠……. 우리 무당법문은 그야말로 구름 속에 실체를 감춘 용과 같은 극히 신비스런 문파인지라 웬만한 아랫것들은 모르는 게 당연하지. 아마도 무당파 장문인이라면 알고 있을 터…… 그만큼 우리 무당파가 중요하다는 말이 아니겠느냐.”
사부의 말대로 하자면 천하인들이 다 아는 자금성도 허접한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백천성의 정상적인 판단에 의하면 무당법문을 모르는 건 그만큼 중요해서가 아니라 알 필요도 없기 때문이었다.
‘무당법문은 강호의 삼류 중에서도 삼류에 지나지 않는다. 난 그런 삼류문파의 하나밖에 없는 후계자이고…… 그러니까 사부의 말은 한마디로 까는 소리에 지나지 않지.’
하지만 생각대로 말했다간 성질 더러운 사부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건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렴요.”
사부는 다시 말했다.
“짐작했겠지만 오늘 일찍 오라고 한 것은 차를 덖기 위해서다. 어서 준비하거라.”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