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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포유여향 1권(8화)
3장 차시태극…… 차 덖음의 시작은 태극일지니…… (3)
화다다닥…….
잠시 후, 모옥 앞바닥에 돌로 간단하게 쌓은 화로를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백천성이 잔 나뭇가지들을 쑤셔 놓고 불을 붙이자 금세 불길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화로 위로는 기다란 세 개의 다리가 붙어 있는 무쇠 솥을 올려놓았는데, 둥근 형태로 된 무쇠 솥은 다소 납작하면서도 윗부분이 매우 넓어 솥이라기보다는 거의 냄비를 늘려 놓은 형태였다.
바로 차를 덖는 살청(殺靑:말 그대로 푸른색을 죽이다는 뜻으로, 차의 산화를 방지하고 차의 색과 향을 유지시키는 작업) 솥이었다.
“시작하거라.”
여전히 평상에 느긋한 자세로 앉은 채 현허가 나직이 말했다.
‘자기가 하는 게 아니라고 아무렇게나 말하네.’
백천성은 못마땅한 눈빛으로 바닥에 놓인 돗자리로 시선을 던졌다.
돗자리엔 얼마 전에 따서 말려 놓은 찻잎들이 놓여 있었다. 말린 후 적당한 크기로 잘게 썰어 놓은 찻잎들.
“불은 양이며 차는 음한 존재…… 두 가지 서로 다른 것들이 인간의 힘을 빌려 조화를 이루게 되니…… 차시태극(茶始太極), 그런 고로 차 덖음의 시작은 태극이라고 할 수 있다. 태극이란 끊임없이 순환하는 음양의 움직임을 의미하는 것이니, 그것을 명심하고 차를 덖도록 하거라.”
그때 차를 노려보고 있던 백천성의 귓가로 다시 사부인 현허의 유들유들한 음성이 들려왔다.
사실 죽은 아버지 덕분에 어려서부터 차를 만들 정도의 높은 다제(茶製:차를 만드는 일)를 자랑하는 백천성이었으나, 차를 덖으면서 태극의 뜻까지 파악해야 한다는 건 난생처음 듣는 일이었다.
‘아무래도 오늘도 엄청 손을 데이겠군. 쓰파…….’
속으로 욕설을 내뱉은 백천성은 돗자리에 있는 찻잎을 적당히 집어 무쇠 솥에 담았다.
치이익…….
찻잎들이 잘 달궈진 무쇠 솥 바닥에 닿자 타는 듯한 소리를 냈다.
‘이크…… 서둘러야겠군.’
백천성은 흠칫 놀라며 황급히 두 손으로 찻잎을 들쑤시며 뒤적거렸다.
본래 차를 덖을 때 화상을 입지 않기 위해 두터운 장갑을 낀다. 그런데 지금 장갑이나 손을 보호할 그 어떤 보호 장비도 없이 그냥 맨손으로 뒤적거리다 보니, 몇 번 움직이지 않아 백천성의 손은 발갛게 달아올랐다.
비록 데이지는 않았으나 열기에 의해 뜨거움을 느낀 것이다.
재차 현허의 음성이 들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차를 덖는 데 있어 손 모양은 난화처럼 하고 손동작은 지극히 가벼워야 한다. 이를 가리켜 난화경(蘭花輕)이라고 하고…… 또한 동작마다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듯 나가야 하니 이를 쾌속연(快速連)이라 할 것이다.”
“…….”
“다음은 상유면(像柔綿)이니, 찻잎을 덖는 손은 마치 솜털처럼 부드럽게 움직여야 하는 터…… 차를 어린애 다루듯 조심스럽게 다루면서 움직일 때마다 둥글게 원을 그리며 이동하는 것이 그다음이니, 이를 천이원(擅移圓)이라고 한다. 마지막이 바로 건곤화(乾坤和)…… 차를 다룰 때는 몸과 마음, 그리고 표정까지 온화함이 있어야만 제대로 차를 만들 수 있다. 이 다섯 가지를 가리켜 태극오형이라고 말하느니…….”
본래 차를 덖을 때의 손동작을 경(輕), 연(連), 면(綿), 원(圓), 화(和)의 다섯 가지 동작으로 구분한다. 하지만 지금 현허의 말처럼 그 다섯 가지 동작을 가리켜 태극오형이라고 하지 않으며, 단순히 보여 주기 위한 다예표연에 지나지 않았다.
사실 이 태극오형을 사부인 현허가 말하기 시작하고, 백천성에게 그대로 따라 할 것을 강요한 것은 불과 석 달 전부터였다.
가볍고, 연속적이며, 부드럽고, 둥글게 움직이면서 온화함마저 있어야 한다는 말도 이해되지 않았지만, 말한 그대로 동작을 해 보라는 말은 더더욱 이해되지 않았다.
‘사부라고 하지만 그저 하는 일이라곤 말만 하는 것뿐……. 그러면서 꼭 말한 대로 움직이라고…… 으으…… 갑자기 열만 받네.’
이제껏 말만 했지 단 한 번도 시범을 보여 준 적이 없는 사부였다.
뭘 알려 줘야 배우든 말든 할 게 아닌가?
덕분에 지난 석 달 동안 그의 손은 성할 날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차를 덖다가 하마터면 내 손이 잘 구운 고깃덩어리가 될 뻔한 게 한두 번도 아니었지.’
내심 구시렁대는 것과는 달리 그의 손은 엄청나게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양손에 빠르게 움직이게 하는 기계라도 단 듯 무쇠 솥에 있는 찻잎들을 위로, 아래로, 좌우로 들쑤시며 덖어 내고 있었다.
슥…… 스윽…….
휘릭…… 파파파…….
평소 현허가 펼친 중압술에 걸려 굼벵이처럼 움직여야 하는 백천성이다.
그런 그가 이와 같은 빠른 손놀림을 보인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헉…… 헉…… 힘드네…….”
백천성은 자신도 모르게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손을 빠르게 움직인다는 건 그만큼 관련된 근육을 움직인다는 것이고, 중압술에 걸려 있는 그의 입장에서 보자면 일반인에 비해 열 배 가까운 힘을 소비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아둔한 놈…….”
그런 그를 보며 현허는 끌끌 혀를 찼다.
“차를 만드는 다인이 차 한 잔 마실 정도의 여유조차 없단 말이냐? 네놈은 지금 찻잎을 빠르게 덖는 게 아니라 불에 델까 봐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것 같구나.”
백천성은 입술을 삐죽였다.
“정 그러시면 한번 시범을 보여 주시죠?”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는 끼지 않는 법이다. 게다가 나는 이미 방법을 전했다. 아둔한 제자 녀석이 제대로 깨닫지 못한 것일 뿐…….”
“그거야 순전히 말로만 한 거죠.”
“사부의 생각을 응당 제자가 알고 따라야만 하는 터…… 이를 가르쳐 불가에서는 이심전심이라고 한다.”
“사부님, 우리 무당법문은 도문이 아닌가요?”
“도란 본래 종목을 불문하는 것이다.”
사부가 제일 잘하는 게 있다면 꺾이지 않는 말빨이었다.
불문의 이심전심을 갖다 붙인 사부는 평상 위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원숭이도 백 일 동안 같은 일을 반복하게 되면 뭔가 깨닫는 게 있는 법이나, 네놈은 그것도 어렵겠구나.”
‘비유를 해도…… 하나밖에 없는 제자한테…….’
“천성아, 차라는 글자를 생각해 보거라. 차는 나무[木]에서 난 잎을 인간[人]의 힘으로 다스려 조화를 일으키는 풀[草]……. 이 사부가 네가 차를 잘 덖을 수 있게끔 태극오형을 완벽하게 연성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알려 주마.”
백천성은 알려 준다는 말에 솔깃한 얼굴을 했다.
“방법이라면 어떤…….”
천천히 차를 덖고 있던 그의 옆까지 다가온 현허는 빙그레 웃어 보였다.
“조화일심……. 한 마음으로 전력을 다해 차를 덖는 거다.”
“조화일심? 고작 그런 말로만…….”
“그렇다면 한 가지를 더 명심하거라. 만약 한 달 내로 태극오형의 진정한 움직임을 보여 주지 못한다면 중압술 한 방을 더 놔주마. 이번엔 삼십 년짜리로……. 그러니 반드시 성공해야 할 게다.”
그 말을 끝으로 휘적휘적거리며 모옥 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현허였다.
중압술.
백천성이 무당법문에 입문한 그다음 날에 걸렸던 이 술법이 언제나 사부의 해결책이었다.
“개뿔…… 쓰파…….”
기어코 백천성의 입에선 욕설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결국 사부의 말은 이제껏 해 왔던 것처럼 순전히 몸으로 때워서 알아내라는 것이었다.
만약 성공한다면 그건 오로지 사부인 자신의 탁월한 가르침 덕분이었고, 실패하면 뒤떨어지는 재능을 가지고 있는 네놈 탓이라는 얘기였다.
‘틀림없이 중압술을 펼치겠지. 아무런 양심에 거리낌도 없이……. 이렇게 착한 어린아이를 속여 중압술을 건 게 불과 삼 년 전이니까.’
안 그래도 무거운 몸이다.
여기서 더 몸이 무거워지거나 그 기간이 길어진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해지는 백천성이었다.
“빌어먹을…… 태극오형……! 야아아아합……!”
버럭 고함을 지르며 차를 덖는 손을 마구 휘둘렀다.
태극오형.
결국 차를 잘 덖을 수 있다는 다섯 가지 수법을 완벽하게 익힐 수 있는 건 오직 연습, 피나는 연습밖에는 없었다.
잘될는지는 모르겠지만……
* * *
달빛.
은가루와 같은 교교한 달빛이 영취봉 곳곳을 밝히고 있었다.
달빛이라는 그럴듯한 수식어와는 정반대인 공동묘지.
그 한가운데 백천성은 우뚝 서 있었다.
후욱…….
사방이 이름 모를 묘지들로 둘러싸인 가운데서 백천성은 호흡을 일정한 간격으로 몰아쉬고 있었다.
들이마시는 숨과 내쉬는 숨.
그러면서도 그는 속으로 일만 자나 되는 구결을 떠올리고 있었다.
조화일심태극결.
무당법문의 법술을 기르는 방법이라는 이것의 처음은 숨을 고르는 것부터 시작한다.
‘숨만 제대로 쉴 줄 알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고 했지. 사부의 말이어서 믿을 건 못 되지만, 그래도 조화일심태극결은 그런대로 쓸 만하단 말이야.’
호흡은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하는 것.
지난 삼 년 동안 공동묘지에서 조화일심태극결을 수련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근력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것은 중압술에 걸렸을 처음과 비교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처음 중압술에 걸렸을 땐 물통에 물을 길어 오는 일조차 한나절이 걸렸다. 그러나 이젠 힘들긴 해도 일반인처럼 움직일 수 있다.’
그의 움직임은 일반인들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단지 조금 느리다는 느낌을 준다는 정도랄까.
사실 공동묘지에서 매일 밤 이처럼 조화일심태극결을 수련한 지 일 년이 지났을 때부터 배속에 뭔가 꿈틀거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사부는 그것을 법기라고 했다.
‘법기는 무공을 연성한 무인들이 쌓게 되는 내공과 같은 것이라고 했었지. 법기는 내공보다 한 수 위라고 하면서…….’
한 수 위라는 말은 믿을 수 없었다.
그렇게 무당법문의 법술이 무공보다, 특히 누구나 인정하는 무당파의 무공보다도 세다고 하면서도, 절대로 무당파 도사들과는 마주치지 말라고 강조하는 점이 더더욱 그랬다.
‘어쩌면 법술이라는 것은 무당들이 가지고 있는 신기(신끼) 같은 건지도 모르지.’
아무튼 그것이 법기인지 신끼인지 모르지만, 얼마 전부터 사부가 말한 조화일심태극결을 수련하여 얻게 되는 세 가지 능력인 귀안, 광명부동심, 조화혼 중에서 귀안의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귀안에 들게 되면 귀신을 마음대로 볼 수 있다고 했으니까.’
백천성은 중얼거리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휘우우우…….
사방이 공동묘지인 터라 주위에는 수많은 귀신들이 허공을 떠다니고 있었다. 귀신들이란 본래 육신이 없는 영적인 존재라 일반적으로 보이지 않지만 백천성의 눈에는 훤히 보일 정도였다.
그들은 백천성에게로 다가와 요란한 울림으로 떠들었다.
―나는 억울하게 죽었다. 나 삼색신마의 무공을 알려 줄 터이니 내 원한을 풀어 다오.
―아니, 내가 먼저다. 평생 동안 황금을 모았으나 간부에 의해 독살당해 이곳에 버려졌다. 내가 그년 몰래 감추어 두었던 황금이 있는 동굴을 알려 줄 터니…….
―그깟 황금보다는 내가 모은 기병들이 훨씬 값어치가 있다.
모기가 쉴 새 없이 앵앵거린다고 할까?
조화일심태극결대로 호흡을 하고 있던 백천성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그는 버럭 소리쳤다.
“꺼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