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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포유여향 1권(9화)
4장 인연과 비연(1)


퍼엉!
“커억!”
일 장을 맞은 흑의인의 가슴이 그대로 박살 나고야 말았다.
묵의인.
언뜻 보아도 초로의 노인이었다. 그리 크지 않은 체구이나 두 눈에서 쏟아지는 신광이 날 선 비수처럼 예리한 묵의 노인이 앞을 바라보며 무감각한 어조로 말했다.
“사혼십팔영(死魂十八影)…… 이제 보니 너희들이 모두 움직였군.”
열여덟 명의 흑의인들.
묵의 노인 앞으로 열여덟 명의 흑의인들이 한 손에 검을 쥔 채 묵의 노인에게 서서히 접근하고 있었다.
조금 전 한 명이 묵의 노인에게 일 장을 맞고 가슴이 박살 난 채 열일곱 명이 되었으나, 그들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은 얼굴들이었다.
사혼십팔영.
죽음의 그림자라고 불리는 열여덟 명의 무인들. 절대의 살수들이었다.
그들을 키워 낸 것은 바로 묵의 노인이었으며, 그들 개개인의 살인 능력은 놀라워 각파의 장문인이라고 해도 능히 죽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들 중 맨 선두에 있는 날카로운 눈매의 사내, 고군이 입을 열었다.
“벽주, 우리를 이 자리에 올라오게까지 만들어 준 당신에게 경의를 표하오. 살왕이라는 이름은 적어도 우리 사혼십팔영들에겐 신이나 다름없는 존재였소이다.”
“흐흐……. 그런데도 나 살왕(殺王) 여가랍(呂可拉)을 배신하겠단 말이냐?”
삭막한 웃음을 흘리는 묵의 노인.
살왕(殺王) 여가랍(呂可拉).
이 하늘 아래 존재하는 모든 살수들의 왕이라고 불리는 자. 이미 팔십 년 전부터 강호팔대공적 중의 한 명으로, 살아 있는 악마라 불리는 사신이었다. 또한 그가 벽주로 있는 북벽(北壁)은 세상의 모든 살수들의 요람으로 지칭되는 곳이라고 할 수 있었다.
“배신이 아니요. 다만 다른 선택을 했을 뿐…….”
고군이 고개를 흔들며 말하자, 여가랍은 두 눈에서 음산한 살기를 떠올렸다.
“흐흐……. 선택이라? 그럴 수도 있겠군. 하지만 고작 네놈들만으로 나를 처치할 수 있으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우린 사혼십팔영은 스스로의 능력을 잘 알고 있소. 우리 모두가 공격한다고 해도 결코 벽주에게 이기지 못하리라는 것을……. 그러나 그것은 벽주가 정상적인 몸일 때만 가능한 일…….”
“내가 다쳤을 거라고 생각하는가?”
“허세는 통하지 않소. 이미 우린 벽주가 천붕혈산지독(天崩血酸之毒)에 중독되어 본래 내공의 삼분지 일밖에는 사용하지 못함을 알고 있소. 그러지 않았다면 진작에 우리 사혼십팔영들은 시체가 되어 나뒹굴었을 테니까.”
천붕혈산지독은 당금 천하에서 가장 극독하다고 알려진 독. 일종의 무영지독이기도 한 천붕혈산지독에 걸리면 금강불괴에 이른 최절정의 고수라고 해도 한 줌의 혈수로 화할 수밖에 없었다.
“크크크…….”
문득 여가랍의 입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호랑이가 조금 상처를 입었다고 개에게 당하지는 않는다. 그것도 기르던 개라면…….”
화악…….
그의 오른손에 묵빛의 광망이 번득이더니 이내 그의 우수에 묵빛의 철갑이 채워져 있었다.
묵룡철갑.
그로 하여금 살왕이라는 명칭을 부여받게 한 희대의 살인 병기였다.
고군이 긴장하며 소리쳤다.
“묵룡철갑이다! 모두 일제히 공격해!”
쓰와아앙…….
그가 번개같이 검을 내뻗자 눈부신 검광이 곧장 여가랍을 향해 폭사되어 갔다.
동시에 나머지 사혼십팔영들 역시 지체하지 않고 일제히 검을 휘두르며 여가랍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쐐애애액…….
파츠츠츳…….
사위를 찢어발기는 듯한 검광.
그 속에서 여가랍의 음산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크크크……. 네놈들에게 다시 한 번 알려 주마! 본 벽주가 왜 살왕이라고 불리는지를…….”
번쩍!
쿠콰쾅!
열일곱 개의 검기와 여가랍의 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묵광이 충돌하면서 엄청난 폭음을 일으켰다. 어둠이 그대로 폭발해 버리는 것 같았다.

* * *

밤은 깊었지만 잠잘 시간인 축시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다.
백천성은 공동묘지에서 나와 숲 깊은 곳까지 걸어갔다.
‘시끄러운 놈들…… 귀신 주제에 그렇게 수다스럽다니…….’
평범한 인간들이라면 귀신들이란 무섭고 두려운 존재이겠지만, 조화일심태극결을 수련하여 귀안의 단계에 들어선 백천성에게 있어선 오히려 그 반대였다.
‘별것도 아닌 것들이 툭 하면 튀어나와 멀쩡한 인간들을 놀라게 하냔 말이야. 그놈들 덕분에 은자를 벌긴 했지만…….’
객사하여 잡귀가 된 귀신들은 그에게 있어 호구에 지나지 않았다.
단지 귀찮은 점이 있다면 그가 공동묘지에서 조화일심태극결을 수련할 때마다 모여들어 짜증날 정도로 떠든다는 정도였다.
귀신들 입장에서 보자면 자신들의 억울한 죽음을 풀어 달라는 하소연에 지나지 않지만, 어찌 되었던 백천성에게는 무척이나 성가시고 정신 사나운 일에 지나지 않았다.
‘잡귀 녀석들 때문에 그곳에서 수련할 수 없으니, 결국 이곳에 올 수밖에 없네.’
그는 숲 한가운데 커다란 나무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신선한 숲 내음이 코끝을 스쳐 갔다.
“귀기를 맡다가 여기에 오면 마음까지 상쾌해지는 것 같단 말이야. 후흠…….”
그는 코를 벌름거리며 한껏 공기를 들이켜며 품속에서 새하얀 부채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바로 삼 년 전 음양마 두광에게서 얻은 음양조화선이었다.
“이것만 쥐고 있으면 머리가 맑아진단 말이야. 그리고 이 상태에서 음양조화신공을 끌어 올리게 되면 그 효과는 몇 배나 높아지고…….”
음양조화신공은 그가 두광의 품속에서 꺼낸 고서에 수록되어 있는 무공이었다.
사실 이 음양조화신공은 오백 년 전의 일대기인인 조화노인의 신공으로, 음양조화선 역시 그가 남긴 기병이었다.
음양조화신공의 요결은 흡기취정에 있었는데, 이는 천지만물에 있는 기운을 빌려 내공을 쌓는 극히 오묘한 내공심법이었다.
그러나 이를 우연히 얻은 두광은 흡기취정을 여인의 몸에서 취하는 방법으로 사용하여, 음양조화신공은 천하제일색마의 독문무공인 음양화화마공으로 알려지고야 말았다.
지난 삼 년 동안 백천성은 조화일심태극결뿐만 아니라 이렇게 때때로 여기에 찾아와 음양조화신공을 수련해 왔었다.
“음양조화신공을 운기한 채 손을 이렇게 대면 기분이 좋아지지.”
백천성은 나직이 중얼거리며 음양조화신공을 끌어 올린 채 앞에 있던 거목에다 손을 마주 댔다.
쓰우우우…….
나무에서부터 알 수 없는 기운이 그의 손바닥을 통해 들어왔다.
대체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이런 식으로 다른 것의 기운을 흡수하게 되면 정신이 맑아질 뿐만 아니라 몸까지 개운해지는 기분이었다.
“너무 움직이게 되면 몸이 쉽게 피곤해진단 말이야. 사부가 펼친 중압술 때문이긴 하지만…… 그래도 음양조화신공으로 나무의 기운을 빨아들이면 피곤이 사라지니까.”
백천성은 나무에 댔던 손을 이내 거둬들였다.
조금 전과는 달리 나무는 다소 말라 버린 느낌이었다. 나뭇가지에 나 있던 푸른 잎들 끝부분이 노랗게 말라붙어 있었다. 나무의 생명력을 그가 흡수한 탓이었다.
‘이 정도라면 이 나무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기운을 되찾겠지.’
이제까지 몇 번이나 나무에 손을 댄 채 음양조화신공을 운기하였다가, 자신도 모르게 그 속에 담겨진 흡기취정의 묘를 운용하는 바람에 나무가 말라죽는 걸 몇 번 경험한 그였다.
그 뒤부터는 흡기취정을 하는 시간을 매우 짧게 가졌고, 대신 한 나무가 아닌 여러 나무에서 기운을 빨아들여왔다.
더군다나 음양조화선을 손에 쥔 채 음양조화신공을 끌어 올려 나무의 기운을 흡수하게 되면 나뭇속에 쌓여 있던 나쁜 기운을 걸러 내는 것이어서 한층 기분이 상쾌해졌다.
“나무의 기운을 받아들이고 나면 귀안도 더 발전하는 것 같군. 이런 식으로 하면 조화일심태극결의 마지막 단계인 조화혼까지도…… 어라?”
흡족한 얼굴을 한 채 중얼거리던 백천성는 무심코 한쪽을 바라보다가 당혹성을 터트렸다.
멀리서부터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게 보였다.
검은 연기.
마치 안개와 달빛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듯한 검은 연기들은 죽은 자들의 영혼이었고, 오직 법술을 수련한 자들에게만 보이는 것이었다.
“저 정도라면 한두 명이 아니라 꽤 여러 명이 죽었다는 건데…….”
백천성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곳으로 빨리 다가갔다.
죽은 아버지도 그랬지만, 사부인 현허 역시 객사한 시신을 보게 되면 반드시 축원을 해 주고 묻어 주어야 한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설마 단체로 떼죽음한 건 아니겠지. 정말 그랬다면 상당히 귀찮아지겠구나.”

시체.
정확히 열여덟 구에 달하는 시신들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마치 거대한 폭탄에라도 격중된 듯 전신이 터져 나간 처참한 몰골로 죽어 있는 시신들.
“서…… 설마 벼락이라도 맞은 건 아니겠지……?”
그 자리에 도착한 백천성은 시신들을 바라보며 질겁을 했다.
조화일심태극결을 수련하여 귀안의 단계에 든 터라 귀신을 보고 또한 그들을 호구로 생각하는 그였지만, 아직은 어린아이에 불과한 터라 눈앞에 있는 처참한 시신들의 상태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이렇게 시신이 훼손당하게 되면 모두들 원귀가 되고 마는데…….”
그가 잔뜩 얼굴을 찌푸릴 때였다.
돌연 등 뒤에서부터 녹이 슨 기계가 삐꺽이며 돌아가는 듯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크크…… 꼬마 도사로군…….”
흠칫 놀란 백천성은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황급히 몸을 돌렸다.
그와 마주 보는 바위에 한 묵의 노인이 등을 기댄 채 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시체처럼 창백하다 못해 파리한 안색, 게다가 전신은 피투성이였다. 가슴은 눈에 보일정도로 움푹 들어가 있었고, 복부 아랫부분은 거의 난도질당해 잘려진 내장 조각들까지 보이는 처참한 몰골이었다.
“괘…… 괜찮으세요?”
백천성은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여가랍은 대답 대신 무감각한 눈빛을 했다.
“복장으로 보아 도사 같은데…… 무당파인가……?”
“아닌데요. 도사도…… 무당파도…….”
백천성은 고개를 저으며 슬쩍 눈치를 살폈다.
척 봐도 바닥에 죽어 있는 시신들은 눈앞에 있는 노인이 저지른 만행(?)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결국 이 시체들은 모두 이 늙은이가 한 짓이란 말이지. 그 말은 결국 아차 하면 내 목도 위험하다는 거고…….’
삼 년 전 음양마 두광을 만났을 때 죽을 뻔한 상황이 판박이처럼 머릿속을 스쳐 갔다.
‘잘못하다간 저 시체들이 한 구 더 추가될 수도 있겠군. 쓰파…….’
그가 내심 욕설을 터트리며 슬쩍 상대의 눈치를 살폈다.
그때 여가랍은 한쪽을 향해 슬쩍 우수를 흔들었다.
퍼엉!
몸이 우르르 떨릴 정도의 폭음 소리와 함께 바닥에 적지 않은 크기의 구덩이가 생겨났다.
느닷없는 행동에 백천성이 움찔 놀라는 얼굴을 하자, 여가랍은 다소 가라앉은 눈빛을 했다.
“저들을 모두 구덩이에 파묻거라.”
명령조의 말투.
그가 말하는 저들이란 바로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시신들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만약 평소 같았으면 당연히 백천성은 ‘안 돼요.’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지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랬다가 저 늙은이가 돌기라도 하면 내년 이맘 때 내 제사상을 받을 수도 있으니까.’
만약 지금 이 모습을 사부인 현허가 봤다면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라고 혀를 찰 만큼 굉장히 적극적인 모습으로 시체들을 한곳으로 모으기 시작했다.
하지만 말만큼 시신들을 구덩이에 몰아 놓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죽은 자들은 그에 비해 성인들이었으며, 유난히 덩치가 컸다. 게다가 대부분은 몸들이 조각난 터라 시신들을 구덩이에 전부 묻으려고 하니 시간이 엄청 들 뿐만 아니라, 절로 가쁜 숨이 흘러나올 정도로 힘이 들었다.
‘더군다나 그동안 몸이 적응했다곤 하지만 중압술에 걸려 있으니까 더욱 힘든 거지. 헉헉…… 쓰파…….’
잠시 후, 시신들을 모두 구덩이 속으로 밀어 넣었을 땐 그는 거의 기진맥진해 있었다.
“헉헉…… 다했는데요…….”
백천성은 길게 숨을 몰아쉬며 여가랍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여가랍은 문득 무감각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놈들은 모두 내가 발굴하여 키워 냈지. 그랬기에 북벽 최고의 살수들이 될 수 있었고…… 사혼십팔영이란 그렇게 탄생했다.”
사혼십팔영.
북벽 최고의 살수들이자 신조차 죽일 수 있다는 절대의 살인 병기들.
“사혼십팔영들이 내게 절대적인 충성심을 보인 건 나 살왕 여가랍이 그들의 주인이자 사부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녀석들이 반기를 들고 내게 검을 겨누었지. 그랬기에 죽일 수밖에 없었다.”
흔들렸다.
그의 무감각한 눈빛도, 푸석한 목소리도…….
“목이 마르군.”
여가랍이 낮은 음성으로 중얼거리자, 백천성은 자신도 모르게 허리춤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는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작은 호로병을 풀었다.
“마시겠다면 이거라도 드리겠습니다.”
호리병 속에 담겨진 건 조화일심태극결을 수련하며 틈틈이 그가 마시려 했던 차였다.
“식긴 했지만 무이암찹니다. 그런대로 마실 만할 겁니다.”
“무이암차라…….”
여가랍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우수로 잡아당기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백천성의 손에 쥐어져 있던 호로병이 자석에 이끌린 쇠붙이마냥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곧장 여가랍의 손에 잡히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차를 마셔 본 지도 꽤나 오래되었군.”
입가에 처음으로 흐릿한 웃음을 떠올린 여가랍은 천천히 호리병을 입으로 가져갔다.
식기는 했으나 차 특유의 향내가 은은히 입안으로 번져 갔다.
“나쁘지 않군…… 마지막 순간에 마셔 보는 차 맛이…….”
갈라진 복부에서 핏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가 마신 차 때문이었다.
“흐흐……. 내 나이 열다섯에 강호에 나와 지금까지 사십오 년 동안 천하를 종횡무진 누벼 왔다.”
여가랍은 다시 백천성에게 시선을 돌리며 낮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서 얻은 이름이 강호팔대공적 중의 한 명이라는 살왕……. 이제껏 무수한 청부를 맡아 왔고, 또한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얻어 왔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상대에 빚을 져 본 적이 없다.”
바위를 등진 채 앉아 있던 그의 신형이 허공으로 스륵 떠오르더니 곧장 구덩이 한 가운데로 내려앉는 것이었다. 여전히 앉아 있는 그 자세였다.
“네 녀석에게 차 한 잔을 얻어 마셨으니 그 대가를 주도록 하겠다.”
여가랍은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 백천성에게 가볍게 던졌다.
휘릭…….
백천성은 얼떨결에 손을 뻗어 그것을 받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