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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포유여향 1권(10화)
4장 인연과 비연(2)
그것은 손바닥 반만 한 크기의 작은 나무 상자였는데, 겉표면에 용과 봉황의 무늬가 찍혀 있었다. 다소 색이 바래 있어 제법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건……?”
백천성이 어리둥절해하자, 여가랍이 말했다.
“그것은 밀운룡(密雲龍)이다.”
“밀운룡……!”
“흐흐……. 놀라는 걸 보니 그것이 엄청 값어치가 있다는 걸 알고 있는 모양이로군.”
본래 무이암차는 남북조시대에서부터 시작하여 당과 송에 이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었다.
그중 송대에선 무이암차의 품질을 매우 높였는데, 태평흥국(太平興國) 때 조정에서는 특별히 용과 봉황의 무늬를 찍은 용단봉병(龍團鳳餠)을 제작하게 되었다.
용단봉병의 문양은 무이암차 중에서 최고를 의미하며, 그중에서도 밀운룡과 용단승설(龍團勝雪)이라 불리는 두 가지는 최고 중의 최고라고 할 수 있는 극상품이었다.
백천성이 받아 든 상자 속에 있는 게 정말로 밀운룡이라면, 차를 즐기는 다인에게 있어선 부르는 게 값일 정도로 값어치가 있는 차라고 할 수 있었다.
“삼백 년 넘게 전해졌지만 완전 밀봉한 터라 차를 마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라면 차보다는 상자에 신경을 쓸 것이다.”
“……?”
대체 무슨 말일까?
밀운룡을 담아 두고 있는 나무 상자를 살펴보라니…….
“한 가지 더 네 녀석에 주도록 하마.”
여가랍은 천천히 자신의 우수를 들어 보였다.
“이것은 유리은형살환(琉璃隱形殺環)이라고 한다.”
소맷자락이 아래로 내려가며 드러난 그의 팔뚝 부분에 유리처럼 투명한 옥환이 부착되어 있었다.
“유리은형살환은 나 살왕의 독문병기이자 하늘 아래 가장 강력한 살인 도구라고 할 수 있지. 각기 묵룡철갑과 은밀지옥사(隱密地獄絲), 무영혈륜(無影血輪), 유리천방(琉璃天防)으로, 변환하는 유리은형살환은 나 살왕을 나타내는 표식이자 북벽 최고의 영부…….”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번쩍!
한 줄기 눈부신 섬광이 백천성의 눈 속으로 파고드는가 싶더니, 갑자기 오른쪽 팔뚝 부분이 무거워진 느낌이 들었다.
그가 소매를 걷고 살피자, 그의 우측 팔뚝에는 어느 틈엔가 여가랍이 차고 있던 유리은형살환이 채워져 있었다.
“유리은형살환을 다루기 위해선 적어도 이갑자 이상의 내공을 필요로 한다. 내공을 네놈에게 전해 주고 싶으나, 아쉽게도 난 천붕혈산지독에 중독된 터라 내공을 전해 주었다간 네놈까지 중독되고 말 터…… 대신 색혼이심술(索魂移心術)로 네놈 머릿속에다가 유리은형살환을 비롯한 살왕의 무공을 전해 주겠다.”
후와아악……!
갑자기 여가랍의 두 눈에서 저녁노을과 같은 은은한 혈광이 뿜어져 나왔다.
백천성은 혈광을 보는 순간, 마치 뭔가에 홀린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고 정신마저 아득해졌다. 오랫동안 면벽한 고승이 깨우침을 얻는 순간 같다고 할까? 그것은 머릿속을 온통 헤집는 듯한 느낌을 주었고, 이내 사라져 버렸다.
“…….”
“…….”
수유 같은 찰나였다.
백천성은 정신을 차리고는 여가랍을 바라보며 알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대체 왜 제게 이것들을 주시는 건가요?”
“한 가지 네놈에게 부탁이 있기 때문이다.”
여가랍의 말이 이어졌다.
“내게는 하나밖에 없는 손녀가 있다. 여소화라고 하지. 만약 그 애를 만나게 되면 한 마디를 전해 주면 된다. 흔룡(?龍), 이 말을 그 아이에게 해 다오. 은밀하게…….”
흔룡.
그 말은 곧 ‘용을 근심하다.’라는 뜻…….
“물론 강요하지는 않겠다. 천하를 누벼 왔던 나 살왕 여가랍이 이렇게 죽는 게 하늘의 뜻이듯, 네가 그 애를 만나고 못 만나고는 하늘이 정한 인연에 달렸을 테니까.”
몇 마디 하는 동안 그의 하체가 한 줌의 혈수로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치이익…….
녹아내린 혈수가 지면과 닿으며 검은 독무가 피어오르자, 여가랍은 양팔을 휘둘렀다.
“비록 믿었던 수하들에게 배신당하고 결국 독에 중독되어 죽는다고 해도, 마지막 순간에 널 만나게 된 것 역시 하늘의 뜻일 터…….”
그의 양손에서 쏟아져 나온 무형의 기운에 의해 주위에 파헤쳐져 있던 흙들이 일제히 구덩이 안으로 날아 들어갔다. 마치 썰물처럼 날아드는 흙더미들.
파샤샤샤샥…….
눈 한 번 깜박할 사이에 흙들은 이내 열여덟 구의 시체들을 덮고, 녹아내리고 있는 여가랍의 몸을 뒤덮었다.
그 속에서 여가랍 특유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언제고 소화 그 아이를 만나거든, 살왕 여가랍이 이곳에서 최후를 맞았다고 알려 주거라. 크크크크……!”
마지막 웃음소리가 끝나는 순간, 그의 몸은 흙들에 의해 완전히 뒤덮이고야 말았다.
살왕 여가랍.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살수들의 왕이라 불리는 절대무인.
또한 당금 천하에서 정한 여덟 명의 공적 중 한 명이기도 한 그의 최후였다.
백천성.
그는 한동안 그의 죽음을 바라보고 있다가 이내 두 손을 모으고 도호성을 외웠다.
“무량수불…….”
매사에 다소 삐딱한 모습을 보이는 그였으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엄숙한 모습을 보였다.
살왕 여가랍과의 만남과 죽음.
그의 말처럼 이것이 하늘이 정한 두 사람의 인연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무심한 하늘의 뜻을 피와 살로 이뤄진 인간이 어찌 짐작할 수 있으랴. 인연(因緣)인지 비연(非緣)인지는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나 겨우 알 수 있을 것이다.
백천성은 여가랍이 묻힌 자리에 나뭇가지를 꺾어 비석처럼 꽂아 두고는 그 자리에 앉아 도경을 외우기 시작했다.
“도라고 할 수 있는 도는 늘 같은 도가 아니며[道可道非常道], 이름 할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名可名非常名]. 하늘과 땅은 이름 없음에 비롯되고[無名 天地之始], 이름 있음으로 모든 것의 어미가 된다[名 萬物之母]…….”
그가 외우고 있는 유일한 도경 구절이었다.
* * *
백천성이 조화일심태극결을 수련한 지 오 년.
추운 겨울을 다섯 번이나 보내고 맞이한 여름, 이른 아침부터 그는 사부와 함께 모옥 앞 평상에 앉아 있었다.
정확히 앉아 있는 건, 그것도 무릎을 꿇고서 앉아 있는 건 바로 그였고, 사부인 현허는 평상 위에서 늘어지게 자고 있었다.
‘쓰파…….’
백천성은 자고 있는 사부를 노려보면서 욕을 삼켰다.
지금 그의 손에는 회초리가 쥐어져 있었는데, 그것은 달콤하게 자고 있는 사부의 숙면을 위해서였다.
‘날아드는 날벌레들을 막으라고 했지. 이 회초리로…….’
회초리.
본래 도사들이란 중들과 비슷한 존재이므로 살생을 엄격히 금하고 있다.
비록 미미한 벌레라고 할지라도 함부로 생명을 없앤다는 건 도인답지 않은 일이라는 설레발과 함께 현허는 어느 날부터 그에게 회초리 하나를 건네주었다. 그러면서 말했다.
“이 사부가 자거나 쉬고 있을 때 하나밖에 없는 제자인 너는 사부를 위해 이 회초리로 날아드는 벌레들을 막아 주어야 한다. 그렇다고 날벌레들을 죽여서는 안 되는 터…… 그저 녀석들을 밀어 버리도록 하거라.”
그때 알았다.
말 안 듣는 아이들의 종아리를 때리는 회초리의 용도가 단지 그것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그날부터 백천성은 허구한 날 퍼질러 자는 사부을 위해 그 옆에서 보초를 서며 회초리를 휘둘러 왔는데, 사실 가늘디가는 회초리로 번개같이 날아드는 날벌레들을 맞춘다는 건 미친년이 지랄하다 벼락을 맞고 제정신으로 돌아오는 것보다 확률이 낮았다.
그럴 때마다 그는 사부에게 체벌을 받아 왔었다.
‘그 체벌이라는 게 팔굽혀펴기, 쪼그려 뛰기, 오리걸음 등등, 그것도 장장 두 시진에 걸쳐서…… 차라리 맞는 게 더 나아.’
사부의 교육 방법은 ‘절대 구타는 금한다.’였다.
대신 체벌을 주었는데, 그러면서 이것은 수련의 연장이라고 늘 말해 왔다. 하지만 백천성의 입장에선 그 수련의 연장이 고문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건 때리는 것보다 더 악질적이야. 가짜 도사 노릇을 하면서 생긴 화를 내게 풀어 버리는 게 틀림없어.’
아무튼 처음 회초리로 날벌레들을 맞추기란 어려웠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어느 정도는 맞출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사부의 체벌은 계속되었다. 이유는 날벌레들을 죽이지 말라는 사부의 엄명을 어겼기 때문이었는데, 그것도 작년 가을부터는 사라졌다.
그것은 갑자기 성격 더러운 사부가 마음을 고쳐먹어서가 아니라, 백천성이 날아드는 날벌레들을 가느다란 회초리로 밀어 멀리 쳐 낼 수 있게 되어서였다.
‘갑자기 내가 천재가 되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지 못하면 죽을 것 같았으니까. 체벌로 죽지 않으려면 반드시 해야만 한 거지. 쓰파…….’
속으로 연신 욕설을 내뱉으며 회초리를 슬쩍슬쩍 흔들었다.
턱턱…….
그럴 때마다 날아들던 날벌레들이 회초리에 맞아 나가떨어졌는데, 자세히 보면 백천성이 날벌레들을 회초리 끝으로 밀어 버리는 것이었다.
‘귀찮아.’
휙휙…… 턱턱…….
백천성은 잔뜩 얼굴을 찌푸린 채 회초리를 휘둘렀다.
그런데 어딘가 모르게 그 움직임이 그가 차를 덖을 때 보여 주는 손동작과 닮아 있는 듯 보였다.
경연면원화의 태극오형.
번쩍!
갑자기 자고 있던 사부 현허의 두 눈이 떠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러고는 현허는 불현듯 백천성을 바라보며 귀신 씨 나락 까먹는 소리를 했다.
“뿌리가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흔들린다고 하느니…….”
“……?”
백천성은 회초리를 멈추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서요?”
“천성아, 이제 네 나이 열다섯……. 오 년 동안 조화일심태극결을 열심히 수련하여 귀안에 이어 광명부동심의 단계에 이르렀으니, 그만하면 우리 무당법문의 지고무상한 법술을 연성할 수 있는 기초는 닦인 셈이다.”
“조화일심태극결 말고 우리 무당법문에 법술이 달리 있단 말인가요?”
그의 물음에 현허는 이제껏 볼 수 없었던 인자한(?) 미소를 떠올렸다.
“전에도 말했지만, 우리 무당법문의 법술은 그 깊이가 광대무변할 뿐만 아니라 가히 인간의 힘으로썬 추측할 수도 없을 정도다. 그 반만 익혀도 우화등선하여 능히 신선이 될 수 있을 정도라고 할 수 있다.”
“과연 대단하군요. 하지만 아직 제자는 법술에 미숙하니, 사부님이 신선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딱 잘라 말하는 백천성이었다.
말이 좋아 신신이 되라는 것이지, 속뜻은 하루라도 빨리 이 세상을 하직하라는 뜻이었다.
“허허……. 천성아, 아직 네가 중압술에 걸려 있다는 걸 잊은 모양이로구나.”
“십 년이 지나면 풀린다면서요?”
“그렇지. 하지만 그것도 내가 풀어 줘야 하는 거란다. 법술이란 게 그리 간단한 게 아니니까.”
“그 말씀을 진작하셨어야죠. 사부님 말씀을 경청하겠습니다.”
갑작스럽게 백천성이 사부에 대해 경건한 자세와 마음가짐을 보이자, 현허는 만족한 얼굴을 했다.
“우리 무당법문은 법술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만…… 그 밖에 네가 잡다하게 배워야 할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네가 반드시 배워야 할 게 바로 부적술(符籍術)이다.”
부적술.
죽은 아버지 역시 백천성에게 부적을 쓰는 법을 가르쳤다. 그런 고로 그는 어느 정도 부적을 만들 수 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부인 현허의 말에 의하면 부적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며 고도의 집중력을 필요로 한다고 했다.
“부적을 만들기 위해선 스스로의 혼을 부적에다 불어넣는다는 생각으로 집중하여야만 한다. 엉터리 도사 놈들이야 단순히 황지에다 주사를 칠해 부적을 만든다만, 그건 아무런 효과도 없는 종이에 지나지 않는다.”
사부의 말을 요약하자면 이랬다.
사실 도사가 되었다고 해도 제대로 된 부적을 만들 줄 아는 자는 극소수에 지나지 않고, 또한 사용할 수 있는 자들은 그중에서 상위 일 할도 채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것은 부적이 그만큼 만들기 어렵고, 그에 상응하는 도력이 따라 줘야 하기 때문이랬다.
이 도력이라는 게 흔히 무당들이 가지고 있는 ‘신끼’와 비슷한 것인데, 그보다는 한 차원 높은 것이라고 했다.
아무튼 오늘 이후 백천성은 부적술을 배워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사부는 말했다.
“부적술을 배우기 전에 무엇보다 집중력을 길러야 하는 터……. 지금 이 시간 이후부터는 집중력 연마에 들어가겠다.”
무당법문의 유일한 문도이자 차기 후계자인 자신의 의사 따위는 전혀 존중치 않는 사부의 일방적인 결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