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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포유여향 1권(14화)
6장 북어와 여자는 삼 일에 한 번씩 패야 한다(2)
“자네가 백 도산가?”
황 노야는 백천성을 바라보며 물었다.
담담하되 전형적으로 아랫사람으로 치부하는 말투.
백천성의 입꼬리가 비틀어졌다.
“그렇다고 해 두죠.”
“설마 아니란 말은 아니겠지?”
“영감님이 고작 제 이름이 궁금해서 여기까지 온 건 아닐 텐데…… 제 생각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말이죠.”
“…….”
비로소 황 노야의 노안에 의외라는 표정이 떠올랐다.
이제껏 칠십 년 동안 살아오면서 눈앞에 있는 백천성처럼 말하는 자들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전 원주가 백 도사라고 했으니 나도 그렇게 부르겠네.”
백 도사라는 호칭은 전석이 오 년 전 백천성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부르는 호칭이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그때만 해도 낡은 도관을 쓰고 있었고, 허름하기는 해도 도의를 걸치고 있는 터라 전석은 ‘백 도사’라고 불렀던 것인데, 지금까지 그 호칭이 굳어진 것이었다.
“전석이 자네가 실로 차에 관한 한 매우 뛰어난 다인이라고 하더군.”
“하늘 아래 둘도 없다는 표현이 맞을 겁니다.”
백천성의 장난스런 말에 황 노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도 그렇게 말하더군. 하지만 난 직접 눈으로 본 것만 믿는 성격이지. 전석에게서 밀운룡이란 말은 듣긴 했네만, 맛이 어떤지는 모르겠네.”
드륵…….
그때 내실의 문이 열리며 청앵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손에 다구들을 가지고 들어와선 백천성의 앞으로 내려놓았다.
“말씀하신 대로 다구들을 가지고 왔습니다.”
전석이 입을 열었다.
“노야께선 자네에게서 직접 차 한 잔을 받고 싶어 하시네. 이미 비구(備具)를 해 가지고 온 다구들일세.”
비구란 차를 우리는 데 사용할 모든 다구들을 깨끗이 씻어 물기를 없애는 걸 말한다.
황 노야가 백천성에게서 차 한 잔을 받고자 한다는 말은 그가 가지고 있는 밀운룡이 진짜인지 확인해 보고 싶다는 것과, 정말로 그가 뛰어난 차 솜씨를 가지고 있는지를 알고 싶다는 말이었다.
“그 정도야 쉬운 일이죠.”
백천성은 힐끗 황 노야를 쳐다보더니 이내 앞에 있는 다구들에게로 시선을 내렸다.
“보아하니 이 다구들은 제법 돈 좀 쓴 것 같군요.”
전석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 다구들을 구입하는 데 은자 삼백 냥이나 들었네. 워낙 귀한 거라서…….”
“귀해서 좋겠군.”
백천성은 다소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이어 그는 앞에 놓인 다구들 중에서 다호(茶壺:찻주전자)의 뚜껑을 열었다.
“물…….”
그가 짧게 말하자, 뒤에 있던 청앵이 미리 준비해 온 뜨거운 물이 채워져 있는 수호(水壺:물 주전자)를 가지고 그 옆으로 다가와 다호 안으로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물을 쪼르르 따랐다.
“그만…….”
그녀는 즉시 따르던 물을 거두었다.
백천성은 다호를 들어 안에 담긴 뜨거운 물을 가볍게 돌리더니 이내 옆에 놓인 빈 찻잔에다 물을 따라 냈다. 다호의 뚜껑을 열고, 뜨거운 물로 다호를 데운 후 빈 찻잔에 데워 낸 물을 따라 내기까지의 과정을 온호(溫壺)라고 한다.
온호를 마치고 다호를 바닥에 내려놓은 그는 품속에서 반듯하게 접은 종이 뭉치를 꺼냈다.
“아시겠지만, 밀운룡은 송대에선 거의 최고로 치던 무이암찹니다.”
백천성이 꼭꼭 감싼 종이를 풀자, 잘 말린 찻잎들이 보였다.
“보관을 잘했군. 오랜 세월 동안 상하지 않을 정도로…….”
찻잎들을 보던 황 노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히 보관만 한 게 아니죠. 삼백 년이 넘은 세월에도 향기가 조금도 상하지 않을 정도니까.”
백천성은 적당한 찻잎들을 집어 다호 안에다 넣었다.
“충포(沖泡)…….”
충포란 찻잎이 담긴 다호에 뜨거운 물을 따른다는 의미. 청앵이 즉시 다호 안에다 뜨거운 물을 적당한 양만큼 따랐다.
백천성이 다호의 뚜껑을 닫자, 청앵이 그 옆에 있는 찻잔들에 뜨거운 물을 채웠다.
이어 다호를 내려놓은 그녀는 손으로 찻잔을 천천히 돌려 세배(洗杯)한 뒤, 찻잔이 알맞게 데워졌을 때 빈 찻잔에 다시 물을 비워 냈다.
그러자 백천성은 다호를 들어 천천히 돌린 뒤 두 개의 찻잔에다 찻물을 따랐다.
쪼르륵…….
그윽한 다향이 금방 실내에 퍼졌다.
“마셔 보시죠. 밀운룡의 맛이 어떤지…….”
백천성이 청앵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즉시 찻잔을 들어 황 노야 앞으로 내려놓고는 다시 다른 한 잔을 전석 앞으로 내려놓았다.
“기대되는군.”
황 노야는 찻잔을 들어 올리며 다소 흥분된 눈빛을 했다.
밀운룡.
송대에 최고의 차라고 불리운 차를 앞에 둔 그는 마치 오십 년 전 첫사랑에 빠졌을 때와 같이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느끼고는 천천히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찻물이 입안에 들어오는 순간, 그의 지나온 생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그는 전형적으로 자수성가한 사람이었다. 어릴 적 작은 상단에 들어가 갖은 고통과 역경 속에 지금의 황 노야가 되었는데, 밀운룡의 차 맛이 그랬다.
처음은 쓴 듯하더니, 그 맛은 곧 시원하면서도 풍부한 단맛으로 변했다. 흡사 인간의 생로병사를 한순간에 압축해 놓은 맛이었다.
“진짜로군.”
황 노야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담담한 음성이었으나, 그의 눈가는 가느다란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는 그가 매우 흥분했을 때 나타나는 현상.
그런 그를 보며 백천성은 품속에서 다시 한 번 종이 뭉치를 꺼냈다. 조금 전에 꺼냈던 종이 뭉치보다는 조금 더 큰 종이 뭉치.
“이게 바로 밀운룡입니다.”
황 노야의 눈빛이 그의 손에 들린 밀운룡에 고정되었다.
“그게 은자 오백 냥이란 말인가?”
백천성은 히죽 웃었다.
“생각보다 매우 싼 편이죠.”
“은자 오백 냥이면 오원에선 평생 먹고 지낼 수 있는 돈이지.”
“하지만 영감님이 벌어들일 돈을 생각한다면 거저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제 생각이 틀린 건가요?”
‘으음…….’
황 노야는 내심 침음을 흘렸다.
은자 오백 냥.
일반인이라면 평생을 벌어도 못 벌 수 있는 거액이다. 그러나 본래부터 찻값은 금 무게와 동등한 값어치를 지니고 있고, 밀운룡은 검으로 따지자면 전설과 신화 속에서나 나오는 신검과 같은 존재라 적어도 황금 열 냥 이상은 나간다고 볼 수 있었다.
‘아니, 그보다 훨씬 값어치가 있지. 내가 알고 있는 자들에게만 팔아도 그보다는 많이 받을 수 있다. 이건 명품 중의 명품이니까.’
삼백 년 전에 만들어진 밀운룡은 차에 미친 다인들에게 있어선 꿈의 상품이며 최고의 명품이라고 할 수 있었다.
“좋네.”
황 노야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품속에서 전표 한 장을 꺼내 백천성에게로 내밀었다.
“자네가 원하는 가격에 사지. 대륙전장에서 발행하는 전표일세.”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모두 내게 넘기는 건 어떤가?”
“뭘 말인가요?”
“밀운룡 말일세. 얼마만큼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나 황 노야라면 모두 사들일 수 있네.”
“아쉽게도 이게 마지막 밀운룡입니다. 가문의 보물이라는 게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가 아니니까요.”
백천성은 전표를 받아 품에 넣고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좋은 차를 원한다면 얼마든지 거래를 할 수 있을 겁니다.”
황 노야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다루는 물건은 많지만, 그중에서도 제일로 치는 게 차일세. 황제에게만 진상하는 차라도 본 노야가 원하기만 하면 가져올 수 있지. 밀운룡만 제외한다면…….”
“안타까운 일입니다. 밀운룡은 지금 영감님에게 드린 게 전부니까요.”
밀운룡은 십 년 전 살왕 여가랍에게서 받은 것이었다.
매우 적은 양이긴 하지만 백천성은 자신이 만든 무이암차에 섞어 양을 늘려 놓았다. 즉, 가짜 밀운룡을 만든 것이었다.
‘흐흐…… 그러나 속을 수밖에 없지. 처음 맛본 건 진짜 밀운룡이니까.’
사실 처음 꺼낸 종이 뭉치 속에 있던 밀운룡은 진짜였지만, 두 번째 꺼낸 종이 뭉치 속엔 자신이 직접 제다한 무이암차만 있었다.
‘밀운룡을 그렇게 싸구려로 넘길 순 없지. 최대한 받을 수 있을 만큼은 받아야 해. 밀운룡이 얼마 남지도 않았으니…….’
밀운룡이 없다고 한 자신의 말을 황 노야가 믿지 않는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말을 한 건 콧대 높은 처녀가 마음에 드는 남자를 보고도 코웃음 치는 것처럼 순전히 값을 올리려고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몸이 달겠지.’
백천성은 내심 득의 어린 웃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나중에 다시 만날 일이 있으면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영감님…….”
그는 들어왔을 때처럼 내실의 문을 열고 밖으로 휑하니 나가는 것이었다.
황 노야.
오원의 거부이자 실력자이기도 한 그는 묵묵히 그가 나간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다시 찻잔을 들어 차 맛을 음미했다.
“맛있군. 확실히 밀운룡이란 다른 차완 달라.”
전석은 슬쩍 그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그를 다시 부를까요? 노야…….”
황 노야는 고개를 저었다.
“한 번 지나간 마차를 잡는 건 어리석은 일…… 가장 좋은 방법은 스스로 되돌아오게 하는 것이지.”
여기까지 말한 그는 허공에 대고 나직이 말했다.
“흑암…….”
스윽…….
채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실 내에 한 줄기 검은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일신을 검은 흑의로 머리에서 발끝까지 휘감은 흑의 복면인.
그는 황 노야 앞에서 부복을 한 상태였다.
“하명하십시오.”
“그를 따라가라. 그가 어디에 기거하는지만 확인한 뒤 돌아오도록…….”
“존명…….”
흑의 복면인의 머리가 가볍게 숙여지는가 싶더니 이내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흥정은 본래 밀고 당기는 법이지만…… 이제까지 본 노야는 밑지는 장사를 해 본 적이 없다.”
황 노야는 입가에 건조한 웃음을 떠올린 채 중얼거렸다.
이제껏 그는 수많은 자들과 거래를 해 왔고, 그때마다 승자는 그였다.
그러니 이번에도 결과는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했다.
문득 뭔가를 떠올리며 그는 새하얀 눈썹을 꿈틀거렸다.
‘영감님…… 본 노야에게 감히 영감님이라고…….’
그 말 때문이라도 단단히 손을 봐줘야 할 놈이었다.
물론 그전에 그놈이 가지고 있을 밀운룡을 완전히 빼앗아야 하겠지만…….
그는 전석을 돌아보며 못마땅한 얼굴을 했다.
“대체 백 도사라는 싸가지 없는 그 어린놈의 진짜 이름이 뭔가?”
* * *
후리링…….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꽃내음을 담은 바람은 산책을 하고 있는 노도인의 도포 자락을 가볍게 펄럭이게 만들었다.
무검자.
장문인인 무상자의 사제로, 무당제일검이라고 추앙받고 있는 검의 달인. 그는 바람에 실린 은은한 화향을 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구나. 꽃내음이라…… 지난겨울이 지독히도 춥더니만…… 어느새 봄이로군.”
무검자는 완연한 봄기운을 느끼며 느릿하게 걸어갔다.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무당산에 봄꽃들이 만발하겠구나. 허허…….”
그가 가벼운 웃음을 터트릴 때였다.
“무검자…… 넌 더 이상 봄꽃을 볼 수 없다.”
돌연 그의 귓전을 파고드는 사이한 외침 하나.
“지금 이 순간이 지나면 넌 한 구의 시체에 불과할 테니까.”
사방을 울리듯 들려오는 음성은 아무런 억양이 실려 있지 않았다.
마치 기계음과 같이 고저강약도 없었으며, 심지어는 여자인지 남자인지도 알 수 없는 음성에 무검자는 낯빛을 굳혔다.
‘누군가가 지척지간에 있음에도 노도가 느끼지 못했다는 건 상대가 그만큼 뛰어나다는 의미…….’
내심과는 달리 그는 여유 있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누군지 모르나 모습을 드러내는 게 어떻겠소.”
“크크크…… 과연 무당제일검다운 침착함이로군.”
스으으읏…….
무검자와 조금 떨어진 정면에서 한 가닥 검은 안개가 피어오르는 것이었다.
흑운.
그것은 주위의 빛을 빨아들이는 듯한 지독히도 검은 구름이었다.
“난 무당을 싫어해. 그래서 무당파를 이 땅에서 없애 버릴 작정이다.”
검은 흑운 속에서 두 개의 핏빛 혈광이 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번쩍…….
그것은 섬뜩하리만치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무당은 이제껏 수많은 무리들의 도전을 받았으나 단 한 번도 넘어간 적이 없었소.”
무검자는 여전히 침착한 얼굴을 했다.
“그대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모르나, 사술을 쓰는 것으로 보아 사마외도의 무리가 확실한 터…… 시주의 뜻은 이루지 못할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