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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포유여향 1권(16화)
6장 북어와 여자는 삼 일에 한 번씩 패야 한다(4)
백천성이 소녀의 손에 이끌려 강제로 도착한 곳은 수풀에 가려진 동굴 입구 앞이었다.
“여기다.”
소녀는 동굴 입구에서 서서 그제야 잡고 있던 백천성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백천성은 히죽 웃었다.
“조금 더 잡고 있어도 돼. 난 괜찮으니까. 간만에 여자에게 잡히는 것도 나쁘지 않군.”
경박한 말투였다.
순간 동굴 입구에서부터 싸늘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냄새나는 사내놈이로구나.”
중년 미부.
일신에 걸친 흑의와 더없이 어울릴 정도의 어두운 안색. 그것만이 아니라면 인세에 보기 드문 미모의 중년 여인은 수풀 사이로 가려진 동굴 안쪽에서부터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사부님…….”
소녀는 그녀를 보며 황급히 목례를 했다.
중년 미부는 냉랭히 코웃음을 쳤다.
“난 분명히 네게 사내의 피가 필요하다고만 했다.”
소녀는 짧게 말했다.
“그와 약속했습니다. 목숨을 살려 주기로…….”
중년 미부는 그녀의 말에 낯빛을 찌푸렸다.
“너는 갈수록 안 하던 짓을 하는구나.”
이렇게 말한 중년 미부는 다시 백천성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네놈의 이름이 무어냐?”
백천성은 뻣뻣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는 그쪽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네놈이 감히…….”
“우리 사부가 그랬는데, 비밀이 많은 인간일수록 뒤가 구리다고 말입니다. 설마 부인께서도 그런 건지 모르겠습니다.”
“일단 네놈의 주둥이부터 찢어 놓고 놔야겠구나.”
중년 미부는 번개같이 그를 향해 우수를 내뻗어 갔다.
파츠츳…….
마치 먹이를 노리는 독사처럼 기이하면서도 쾌속하게 나가는 일 수였다.
“전 손 함부로 잡히는 인간이 아닙니다.”
백천성은 장난스럽게 말하면서 한 손으로 둥글게 원을 그리며 나아갔다.
타탁…….
중년 미부의 일 수는 난화 형태를 그려 내며 나오는 백천성의 손 그림자에 막혀 버렸다.
중년 미부는 뜻밖이라는 듯 두 눈을 치켜떴다.
“무공을 숨기고 있었군.”
백천성은 히죽 웃었다.
“믿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전 무공을 익힌 적이 없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다시 한 번 냉랭히 코웃음을 날린 그녀는 쌍수를 비쾌하게 내뻗어 백천성의 목과 가슴을 후려쳐 갔다.
쐐애애액…….
바람 가르는 파공음과 함께 백천성의 눈앞으로 무수한 수영이 떠올랐다.
마영수라 불리는 이 수법은 그녀가 가지고 있는 무공 중 가장 약한 것이긴 하나, 당금 강호에서 일 수를 쉽게 피해 낼 수 있는 자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그러나 백천성은 우수를 내뻗은 상태에서 반원을 그려 냈다.
‘난화경…….’
그의 손은 극히 유연하면서도 가벼운 움직임으로 상대의 공격을 막아 내는 것이었다.
그 모습은 차를 덖을 때 사용하던 경연면원화의 태극오형 중 난화경과 같았다.
탁타탁…….
눈 깜박할 사이에 십여 초가 교환되었다.
“처음 보는 수법…… 제법이로군.”
중년 미부는 손을 멈추곤 두 눈에서 예리한 광망을 비수처럼 번뜩였다.
“무당파 제자냐?”
백천성은 시큰둥한 얼굴을 했다.
“무당산에 무당파만 있다고 생각하면 착각입니다.”
“그러니까 무당파의 재수 없는 도사 놈은 아니란 말이로구나.”
“그렇습니다.”
백천성이 고개를 끄덕인 순간, 자신의 목에 금속성의 날카로운 감촉이 느껴졌다.
어느 틈엔가 소녀가 다가와 그의 목에다 날카로운 소도를 겨눈 것이다.
“네 도움이 필요하다.”
백천성은 멈칫했으나 여전히 여유 있는 얼굴을 했다.
“그럼 말부터 고쳐야 하지 않을까? 도움을 주면서 반말을 듣는다는 건 기분이 별로니까.”
“도와주세…… 요…….”
“이름은……?”
“악소연(岳少燕)…….”
“작은 제비라…… 좋은 이름이네. 기억해 둬. 내 이름은 백천성이야. 하늘에 떠 있는 별처럼 찬란하게 빛나라는 의미이지.”
“당신의 피가 필요해요.”
말과 함께 그녀는 소도를 쥔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그러자 소도 끝에 의해 백천성의 목에 작은 도흔이 생기며 그로부터 뚝뚝 핏방울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소녀 악소연은 재빨리 품속에서 작은 유리잔을 꺼내 백천성의 피를 담았다.
이윽고 작은 유리잔에 백천성의 피가 반쯤 채워지자 그녀는 뒤로 물러섰다.
“지혈하세요.”
그녀는 몸을 돌려 중년 미부에게로 유리잔을 내밀었다.
중년 미부는 말없이 그녀가 건넨 유리잔을 받아 들더니 이내 입에 넣고 마셨다.
‘젠장…….’
백천성은 한 손으로 자신의 목에 난 상처를 지그시 누르며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생면부지의 인물이 자신의 피를 마시는 모습을 보자 왠지 알 수 없는 혐오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조금은 쓸 만한 피로군.”
그때, 피를 다 마신 중년 미부는 쥐고 있던 유리잔을 등 뒤로 던졌다.
푸스스…….
등 뒤로 날아가던 유리잔은 허공중에서 가루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실로 극에 이른 내공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차가운 눈빛을 한 채 백천성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언제고 다시 만나게 되면 네놈의 목숨을 한 번쯤은 살려 주겠다.”
“별로 만나고 싶지 않은데요.”
백천성은 얼굴을 찡그렸다.
“어쩌면 그러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겠군. 난 항상 마음이 변하니까.”
중년 미부는 독백하듯 중얼거리더니 이내 악소연에게 외쳤다.
“이제 돌아간다. 더 이상 있다가 자칫 놈들에게 발각될 수 있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녀는 허공을 향해 신형을 뽑아 올렸다.
악소연은 잠시 백천성을 바라보더니 이내 그 뒤를 따라 몸을 날려 갔다.
“…….”
순식간에 그녀가 사라져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백천성은 왠지 가슴 한쪽이 텅 비는 듯한 느낌이 일었다.
‘악소연이라고 했지. 악소연…….’
한 번은 다시 만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대체 이러한 감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스스로도 몰랐으나 매우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그냥 얼굴에 철판 깔고 그냥 따라갈 걸 그랬나? 아냐. 그랬다간 우리 영감만 혼자 남게 될 텐데…….”
그가 거기까지 중얼거릴 때였다.
갑자기 한쪽에서 퉁명스런 말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혼자 남게 된다고?”
그를 향해 뒷짐 진 채 어슬렁거리며 걸어오고 있는 짜리몽땅한 몰골의 노인. 바로 백천성의 사부이자 무당법문의 주인인 현허였다.
‘하여간 우리 사부는 귀신이라니까. 아무 때나 불쑥불쑥 나타다니…… 마음 놓고 욕도 못해.’
내심 불평을 터트린 그였으나 겉으로는 환하게(?) 웃는 얼굴을 했다.
“혼자 남게 되는 게 아니라, 인생은 혼자서 가는 거라구요.”
현허는 그를 보며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랬느냐? 난 또 네놈이 늙고 불쌍한 사부를 두고 어디론가 튀려 한다고 들을 뻔했지 뭐냐.”
“에이, 설마요.”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하지만 내 제자 놈이 그럴 리는 없겠지. 뭐, 그랬다간 끝장이지만…….”
그는 ‘끝장’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었다.
그 말에는 ‘가만두지 않겠다.’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음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는 백천성이었다.
“그런데 사부님께서 어쩐 일로 나오셨나요?”
백천성은 내심 움찔거렸으나 황급히 말꼬리를 돌렸다.
현허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아침 먹고 내가 잠을 자지 않았느냐?”
“그랬죠.”
“문제는 내가 잠에서 깼을 때 매우 배가 고팠지. 그래서 하나밖에 없는 제자를 애틋한 마음으로 기다렸지만 돌아오지 않더구나. 해가 이렇게 넘어가고 있음에도 말이다.”
그러니까 자신이 밥을 차려 와 눈앞에 대령할 때까지 기다렸다는 말이었다.
‘쓸데없이 건강만 좋은 영감…….’
백천성은 내심 욕설을 날렸으나 여전히 공손한 얼굴을 했다.
“그럼 모옥으로 가시지요. 제가 저녁을 차리겠습니다.”
현허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색다른 게 먹고 싶다. 이왕이면 남의 살로…… 요즘 보니까 멧돼지들이 살이 통통하게 올랐더구나.”
정말이지 사부는 고기를 좋아해도 너무 좋아했다.
이럴 때 반대 의견을 내거나 혹은 안 된다고 하면 뒤끝이 좋지 않을 거라는 것을 잘 아는 백천성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곧 멧돼지 한 놈을 잡아 올리겠습니다.”
그날 무당산을 터전으로 삼아 조금의 문제점도 없이 잘 먹고 잘 살던 한 멧돼지의 처절한 단말마가 숲 속에서 울려 퍼져 나왔다.
꾸에에에엑……!
7장 후계자 인증하기(1)
관일량.
하북에서 검에 관한 한 최고의 고수로, 강호인들이 광명검이라 불렀다.
이제 나이가 일흔이 된 존경받는 정파의 기인인 그는 오래전에 강호에서 떠나 자신의 장원인 검승장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이른 아침.
그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후원에 있는 연못 앞에 서서 잉어들에게 먹이를 주고 있었다.
“허허…… 녀석들…….”
관일량은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자신이 주는 먹이를 따라 잉어들이 연못의 수면 위를 몰려다니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자신의 이익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는 강호인들과 닮아 있었다.
“평생에 걸쳐 강호를 횡행하는 동안 난 많은 실수를 했다. 그러나 한 가지 잘한 것은 강호에서 손을 씻었다는 것이다.”
많은 노강호인들이 강호에서 은퇴하여 한동안 뭔가 아쉬운 듯한 후유증을 앓는 것에 반해 그는 매우 만족한 여생을 보내고 있었다.
“그래, 다음 달엔 장강어옹, 그 늙은이를 찾아가 한동안 낚시나 해야겠구먼.”
그가 거기까지 중얼거릴 때였다.
돌연 연못에서 나직한 말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관일량은 죽는다.”
“……?”
관일량은 어리둥절해하며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그가 주던 먹이를 쫓던 십여 마리의 잉어들이 모두 관일량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데 놀랍게도 잉어들이 주둥아리들을 끔뻑이며 일제히 그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관일량은 죽는다.”
“관일량은 죽는다.”
‘……!’
이러한 광경에 한동안 멍청이 바라보던 관일량은 문득 황급히 연못에서 물러서려고 했다.
그러나 자신의 두 발이 마치 땅속에 뿌리라도 내린 듯 전혀 움직이지 않는 것이었다.
‘우…… 움직이지 않다니…… 사술이란 말인가……?’
관일량이 당혹한 외침을 터트렸다. 그러나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외침이었다.
몸뿐만 아니라 입마저도 움직여지지 않았다.
사술.
흔히 어둠의 힘이라 불리는 이 술법은 무공과는 다른 매우 사악한 힘을 지녔고, 한 번 걸리게 되면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다고 알려져 있었다.
―관일량…… 넌 명왕을 배신했다. 네가 죽는 건 바로 그것 때문이다.
난데없이 귀전에 사악한 속삭임이 들려온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며…… 명왕……. 설마 아직도 끝나지 않았단 말인가……?’
내심 관일량이 아연실색하며 절규 어린 외침을 터트릴 때였다.
촤아악……!
돌연 연못 안의 물들이 허공으로 일어서는 것이었다.
검.
물은 관일량의 눈높이로 떠오른 채 하나의 형태를 취했는데, 그것은 수검(水劍)이었다.
수검은 곧장 관일량에게로 날아가 그의 가슴을 꿰뚫고야 말았다.
꽈직…….
관일량의 전신이 크게 흔들렸다.
‘으아아악……!’
그것이 그가 마지막으로 내지른 비명이었다.
백도의 기인이며 검에 관한 한 종사의 위치에 올랐던 이 희대의 고수는 이렇게 숨을 거두고야 말았다.
한 가지 이상한 건 숨이 끊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연못 앞에 우뚝 서 있다는 점이었다.
만약 누군가 멀리서 지켜본다면 여전히 그는 연못에서 잉어들에게 먹이를 주고 있는 것으로 보일 정도였다.
그것은 그뿐만 아니라 검승장 내에 있는 모든 인물들도 마찬가지였다.
집사는 서류를 검토하는 그 자세 그대로 죽었으며, 마당을 쓸던 하인은 빗자루를 든 채, 그리고 요리를 하던 하녀들 역시 주방에서 요리를 하는 모습 그대로 죽어 있었다.
검승장.
일대기인인 광명검 관일량의 장원이었던 이곳은 하루아침 새에 무덤이 되고야 말았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일은 이 땅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매우 은밀하게…….
* * *
모옥 안.
“…….”
현허는 마치 숭늉을 마시듯 찻잔 속의 차를 후룩후룩 마시고 있었다.
“천성아, 네가 무당법문에 입문한 지 몇 년이나 되었느냐?”
뜬금없는 말에 그의 앞에 앉아 있는 백천성은 다소 퉁명스럽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