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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포유여향 1권(19화)
7장 후계자 인증하기(4)


“이…… 이건…….”
만수혈마는 말을 더듬거렸다.
“그런 게 있어. 어차피 말해 줘 봤자 알지도 못할 테니까.”
백천성은 히죽 웃으며 좌수를 가볍게 흔들었다.
“그리고 내 이름은 백천성이야. 지옥에 가서도 기억해 두도록…….”
츠릿…….
만수혈마의 단전에 박혀 있던 은밀지옥사가 소리 없이 빠지며 다시 그의 좌수 팔목에 감겨져 있는 유리은형살환으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배…… 백천…… 성…….”
만수혈마의 신형이 크게 휘청거리더니 이내 바닥으로 꼬꾸라지고야 말았다.
일세에 악명을 날린 거마치고는 허망한 최후였다.
설명은 길었으나 처음 백천성이 만수혈마에게 주먹을 날린 것을 시작으로 해서 은밀지옥사에 당하기까지 일련의 과정은 찰나처럼 짧았다.
“……!”
“……?”
남운룡과 운여청은 멍한 얼굴을 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
사실 그들은 백천성의 등 뒤에 있었던 터라 그가 은밀지옥사를 날려 만수혈마를 죽이는 장면을 볼 수 없었다. 다만 그가 휘두르는 주먹에 대마두인 만수혈마가 꼼짝 못하고 구타당하더니 죽었다는 사실만 머릿속에 각인되었을 뿐이었다.
‘세…… 세상에 만수혈마를 죽였어…….’
‘그것도 주먹으로 패서…….’
그들은 입을 쩍 벌렸다.
눈으로 직접 보고도 믿기지 않을 사실에 정신마저 혼란스러워졌기 때문이었다.
이때 백천성은 천천히 그들에게로 몸을 돌렸다.
“이러다 우리 정들겠어.”
자연스럽게 말을 놓는 그였다.
그제야 남운룡은 바닥에서 주춤주춤 일어서며 그를 향해 포권을 했다.
“도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냥 도와준 것만은 아니지. 생명의 은인인데…….”
백천성은 다소 퉁명스럽게 말하더니 그들의 앞을 지나쳐 갔다.
그가 걸음을 멈춘 곳은 부적에 의해 도관 벽면 쪽에 달라붙은 채 축 늘어져 있는 귀호 앞이었다.
심령을 통제하고 있던 만수혈마가 죽게 되자 귀호 역시 숨이 끊어진 것이다.
“나쁜 녀석치고는 편안한 죽음이로군.”
백천성은 못마땅한 얼굴을 했다.
“이런 녀석들은 잡아 놓고 죽을 때까지 뺑뺑이 돌려야 하는데…… 에잉!”
그는 혀를 차더니 한 손을 뻗어 귀호의 꼬리를 뚝 잘라 버렸다.
자신이 귀호를 죽였다는 사실을 사부에게 보여 줘 인증을 받기 위해서였다.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귀호의 꼬리를 한 손에 든 채 서 있는 백천성의 모습은 어딘가 모르게 사악(?)하게 보였는데, 그 상태에서 다시 그는 두 사람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설마 생명의 은인한테 말로만 때우려는 건 아니겠지?”
“……?”
남운룡과 운여청은 화들짝 놀란 얼굴을 했다.
그러다 그의 손을 보고는 머리카락이 쭈뼛 곤두섰는데, 그것은 귀호를 보았을 때나 만수혈마를 보고 놀랐을 때보다도 더 놀라고 공포스런 모습이었다.
백천성의 엄지와 검지가 동그랗게 맞붙인 채 그들을 향해 내보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자신들을 마구 때린 뒤 야광주 한 알을 빼앗아 갈 때와 마찬가지로 돈을 의미하는 손 모양이었다.
‘또 돈을…….’
‘맙소사.’
갑자기 두 사람은 지독한 현기증을 느끼며 비틀거렸다.
왠지 두 사람의 미래가 암담하게만 느껴졌다.

8장 그놈도 틀림없는 법사(1)

휘우우우…….
침상 위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노도인의 머리 위에 있던 희뿌연 기운이 한순간 그의 코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무검자.
자신이 기거하는 방 안에서 운기조식을 마친 그는 천천히 감고 있던 두 눈을 떴다.
먼저 그의 눈 안으로 들어온 건 원탁 앞에 앉아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부드러운 얼굴의 노도인 무상자였다.
무당파의 현 장문인이자 사형이 되는 무상자.
“사형…….”
무검자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아래로 내려왔다.
무상자는 빙그레 웃어 보였다.
“사제의 내상이 완치되어 다행이네. 하마터면 무당파가 배출한 최고의 검신을 잃을 뻔했네.”
“장문 사형…….”
무검자는 무상자 앞에 앉으며 무거운 낯빛을 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구유명옥수가 나타났습니다.”
그의 말에 온화한 낯빛을 하고 있던 무상자가 답답한 신음을 흘렸다.
“으음……. 안 그래도 그걸 알기 위해 지난 오 일 동안 사제가 깨어나기만을 기다렸네.”
“제가 쓰러진 지 벌써 오 일이나 지났다는 겁니까?”
“자네의 상세는 매우 심각했네. 현청단을 두 알이나 복용시키지 않았다면 아직도 깨어나지 못했을 걸세.”
무당파 최고의 영약은 태청단이다. 그 아래 있는 게 바로 현청단인데, 현청단 한 알만 해도 삼십 년 내공을 얻을 수 있을 만큼의 뛰어난 영약이었다.
“자네의 검은 본 무당파에서뿐만 아니라 당금 강호에서도 손꼽힐 정도라고 할 수 있네.”
무상자는 매우 무거운 눈빛을 했다.
“그런 자네를 쓰러뜨린 상대가 누군지 궁금하더군.”
무검자는 입가에 씁쓰레한 미소를 떠올렸다.
“죄송합니다. 그자는 제 앞에 나타날 때부터 기이한 술법으로 정체를 숨기고 있었습니다.”
이어 그는 정체불명의 존재가 자신 앞에 나타났을 때의 상황을 설명했다.
온통 검은 운무에 휘감겨 있던 미지의 인물.
“무량수불…….”
그의 말을 듣고 있던 무상자는 침중한 도호성을 외웠다.
“검은 운무라……? 아무래도 술법에 의한 것 같단 말이지.”
무검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비록 그자의 모습을 보지는 못했으나 마지막 순간에 그자가 펼친 것은 분명히 구유명옥수였습니다.”
“확실한가?”
“물론입니다. 그자가 구유명옥수를 펼친 순간, 저 역시 혼신의 힘을 다해 태청무극의 일 검을 날렸습니다. 사형께서는 태청무극을 뚫고 절 쓰러뜨릴 만큼 뛰어난 무공이 구유명옥수 말고 달리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
무상자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사제인 무검자는 검도에 평생을 바친 검객이었다. 당금 천하에서 검신으로 추앙받는 몇 안 되는 검객 중의 한 명으로, 평범한 무공으로는 그의 옷자락 하나 건드릴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가 오 일 동안 정신을 잃을 정도의 극심한 내상을 입었다면, 그건 구유명옥수밖에는 없었다.
구유명옥수.
금단의 마공이라 일컬어지는 이것은 오직 한 사람만이 펼칠 수 있는 것이었다.
‘구유명옥수도 그렇지만, 그러한 사이한 술법은 오직 명왕만이 펼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명왕은 이미 오래전에 죽고야 말았다. 우리 무당파와 강호 명숙들의 합공에 의해…… 그것이 벌써 백 년 전의 일…… 그런데 어찌하여…….’
생각해도 모를 일이었으나 무상자는 문득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제, 이틀 전에 무림맹에서 연락이 왔었네.”
“한동안 아무런 연락도 없던 무림맹에서 무슨 일로 연락이 온 겁니까?”
“얼마 전 강호에서 일종의 살인 사건이 벌어졌다는군. 광명검 관일량이 자신의 거처인 검승장에서 죽었다는 보고일세.”
“광명검 관일량…….”
무검자는 흠칫 놀란 얼굴을 했다.
광명검 관일량이라면 자신만 못해도 손꼽히는 검객이자 백도의 기인이었다.
“그럼 그가 누군가에게 살해당했다는 겁니까?”
“단순히 살해당한 게 아닐세. 시신을 발견한 자의 보고에 의하면, 관일량은 자신의 후원 연못 앞에서 잉어들에게 먹이를 주고 있는 자세 그대로 죽어 있었다는군. 마치 멀리서 보면 잉어들에게 먹이를 주며 서 있는 것으로 보이겠지.”
“……?”
“게다가 검승장 내에 있던 하인들 역시 마찬가지의 형태로 죽었다고 했네. 또한 그런 식으로 죽은 자들이 세 명이나 더 있는데, 백절신협 허승과 천리비각 도형 역시 관일량과 마찬가지의 형태로 자신들의 거처에서 죽어 있었다는군.”
“서…… 설마 술법……!”
무검자가 해연히 놀라 짧게 부르짖자, 무상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술법……. 그것도 명옥귀도(冥獄鬼道)의 술법이 아니고선 설명할 수 없겠더군.”
“하면 제 앞에 나타났던 그자와 관일량 등을 죽인 자가 관계가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무래도 그럴 가능성이 많네. 이러한 우연이라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물론 자네에게 구유명옥수를 펼친 자에 대해서 아직 말을 하지 않았네만…… 그리고 무림맹에선 우리에게 한 가지 요청을 했네.”
“요청이라면……?”
“법사를 파견해 달라는 걸세.”
“법사……!”
이번엔 무검자는 놀라는 대신 멈칫거리는 기색을 보였다.
법사.
본래 무당파엔 도사들 말고 다른 존재들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법사였다.
무공과 도를 수련하는 자들이 도사라고 한다면, 법사들은 법술을 연마하는데, 그 법술이라는 게 고대의 제례 의식에서 출발한 터라 미신적인 요소가 많았다.
다만 편벽 사이한 사도의 술법과는 달리 그 근본은 매우 광명정대한 것이었다.
“하나 지금 우리 무당파엔 법사가 없지 않습니까?”
무검자가 곤혹스런 표정을 했다.
법술의 맥은 오래전에 무당파에서 끊어진 상태였다.
백 년 전만 해도 간신히 그 맥을 이은 자가 있었으나, 그 뒤로는 단절되어 이제는 무당파 내에 단 한 명도 없었다.
사실 법사는 도가에서 벌어지는 모든 제례 의식을 관장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이를테면 축귀 의식이라든가, 혹은 죽은 자의 무덤을 정하는 풍수 등.
무검자가 생각하기엔 잡무라고밖에 여겨지지 않는 일을 처리하는 별 볼일 없는 존재에 불과하나, 일반인들에겐 법사란 도경을 전파하는 학도인들과 비슷한 존재로 인정되어 오는 터였다.
‘외부에다가 무당파에 법사가 단 한 명도 없다고 하면 그날로 시주가 반은 끊길 것이다. 게다가 다른 도문에서 우릴 우습게 알 건 뻔한 일일 테고…….’
무검자는 씁쓰레한 얼굴을 한 채 무상자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그 요청은 받아들일 수 없겠습니다.”
무상자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가 없네. 사실 백 년 전의 혈란이 끝났을 때, 각파의 지존들과 강호 명숙들이 회의를 했지. 그곳에서 결정된 일 중의 하나가 우리 무당파에서 법사의 맥을 잇고 배출해야 한다는 거였네.”
“…….”
“만약 이제 와서 무당파에서 법사의 맥이 끊어졌다고 하면 비난받는 것은 물론이고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책임을 묻겠지. 그렇게 된다면 무당파가 견딜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렇긴 하나…… 그렇다고 없는 법사를 만들어 낼 순 없지 않습니까? 이미 맥이 끊어진 법사를…….”
“아직 끊어지지 않았네. 아니, 끊어졌을지도 모르지만…….”
“예?”
“이틀 전 무림맹의 요청을 받고 매우 난처했지. 골머리가 아플 정도로 궁리하다가 문득 한 분을 떠올릴 수 있었네.”
“대체 누구를……?”
“아마도 무검 자네는 모를 거야. 본래 돌아가신 사부님에게 한 분의 사제가 계셨네. 도명이 현허라고 불리우시는…….”
“현허…….”
생소한 도명에 무검자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십 년 전에 그들의 사부인 현명 진인이 입적할 당시의 세수가 백이십 세였다. 비록 현명 진인이 무공을 연성하였고, 태청심법을 대성한 절대의 무인이기는 하나 백이십 세까지 살았다는 건 솔직히 예외라고 할 정도로 장수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현명 진인에게 사제가 있었다니…….
“사부님의 사제라시면……. 가만? 그럼 그 사숙님께서 사부님의 사제이자 사조님의 제자이실 텐데 우리와 같은 도인이 아닌 법사라는 겁니까?”
무심코 말하던 무검자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상자는 담담한 얼굴을 했다.
“내가 사부님에게 전해 듣기론 백 년 전 혈사로 당시의 마지막 법사가 사경에 처하게 되었다더군. 그래서 할 수 없이 사조님의 제자들 중 무공이 가장 떨어지는 분, 그리니까 현허 사숙님을 선택하여 무당법문의 맥을 잇게 하였다고 했네.”
“무당법문……?”
“사실 같은 무당이기는 해도 법술의 맥을 이은 법사들은 자신들을 그렇게 부르더군. 하긴, 무공을 추구하는 우리들과 법술을 추구하는 그들 법문을 구분하기 위해서 그렇게 나눈 것이긴 하겠지만…… 그러나 어찌 되었든 그들 역시 우리와 같은 무당파라고 할 수 있지. 즉, 뿌리가 같다고 할까.”
“그렇군요. 하지만 그 현허 사숙님께서 아직 등선하지 않고 살아 계실까요? 사부님의 사제라시면 꽤나 연세가 되셨을 텐데…….”
“그렇긴 하네만, 어찌 되었든 그분이 유일한 희망일세. 도적부를 뒤져 보았더니 그분께서 영취봉에 은거하고 계신다는 기록이 남아 있었네.”
도적부는 도문에 처음 들어서 도명을 받아 도인이 되었을 때 기록하는 서류로, 일종의 호패와 같은 것이었다.
도적부에는 도사의 본명부터 시작하여 사부가 누군지 등, 여러 가지 자질구레한 기록까지 남겨져 있었다.
“일단 무덕에게 명을 내렸네. 영취봉 전체를 다 뒤져서라도 현허 사숙님의 행방을 찾으라고…… 그리고 아직 살아 계시다면 정중히 모셔 오라고 말일세.”
무상자의 말에 무검자는 고개만을 끄덕였다.
현허.
따지고 보면 현 무당파에서도 그렇고, 백도 전체를 통틀어서 최고의 배분이 될지도 모르는 그들의 사숙이었다.
무당법문의 맥을 이은 유일한 법사.
껄끄럽다면 껄끄러운 존재가 될 수도 있는 인물이었으나, 현재의 무당파에게는 그가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가 죽거나 안 된다고 하면 무당파는 천하인들에게 망신당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어찌 되었든 지금으로선 그분께서 살아 계시길 바랄 뿐이네.”
무겁게 내쉬는 무상자의 한숨이 돌덩이처럼 방 안으로 내려앉았다.
적어도 지난 백 년 이래 지금처럼 막막한 경험은 처음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