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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포유여향 1권(20화)
8장 그놈도 틀림없는 법사(2)
삼국지에 나오는 장비를 연상케 하는 당당한 체구의 도사 무덕은 눈앞으로 보이는 산봉우리를 보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 냈다.
“저기가 바로 영취봉이로군.”
영취봉은 무당산의 수많은 봉우리 중에서도 가장 외진 곳이었으며, 험한 봉우리이기도 했다.
그러니 자연 일 때문에 산을 오르내리는 사냥꾼이나 심마니를 제외한다면 자신과 같은 무당파의 도사들이 올 일이 전혀 없었다.
“장문 사형의 말씀대로, 아니 도적부에 적혀 있는 기록이 맞다면 저 봉우리 위에 현허 사숙께서 은거해 계신다는 건데…….”
그는 말꼬리를 흐렸다.
무당파 내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고수인 그조차 산을 오르는 데 이렇게 힘이 드는데, 백 세 노인(장문인인 무상자의 말에 의하면 그보다 더 많을지도 모르는)이 은거할 수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헛걸음이 될 가능성이 크겠군…….’
무덕은 쓴웃음을 삼켰다.
그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다시 발을 옮긴 순간이었다.
사사삭…….
갑자기 그의 발아래 풀에서 뭔가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흠칫한 무덕은 황급히 시선을 아래로 내렸는데, 눈에 들어온 것은 전신이 온통 검은빛 일색인 독사가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흑묵사……!”
신음처럼 중얼거린 무덕은 재빨리 몸을 옆으로 움직인 뒤 지풍을 날렸다.
그 순간, 옆에서부터 나직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죽여선 안 됩니다.”
슈욱……!
동시에 돌멩이 하나가 빠르게 날아오더니 무덕이 날린 지풍을 가로막았다.
퍼억!
돌멩이는 지풍과 충돌해 허공에서 가루가 되어 버렸다.
그 틈을 타서 흑묵사는 풀숲으로 재빨리 사라졌다.
“……!”
무덕은 눈썹을 찌푸린 채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백의 청년.
그의 시선이 멈춘 곳에 한 백의 청년이 바위 위에 앉아 있었다. 앉아 있는 모습은 흡사 자신과 같은 도사풍인데, 얼굴만큼은 유독 뺀질거린다는 느낌을 주는 청년.
“자네 덕분에 흑묵사를 놓쳤네.”
무덕은 백의 청년을 보며 못마땅하다는 듯 말했다.
사실 흑묵사는 무당산 일대에서 서식하는 독사로, 근처에 사는 농부며 행인들을 물어 적지 않은 피해를 입히는 존재였다.
백천성은 한 손가락으로 귀를 후비적거렸다.
“오늘 생명을 구하셨으니 도사님께선 후일 축복을 받으실 겁니다.”
“흑묵사는 백해무익한 짐승일세. 그놈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인명이 다칠지도 모르는데, 축복이 아니라 원한을 사고 말 걸세.”
“제가 축복을 받는다고 한 건 바로 이 샘물 때문입니다.”
백천성은 손가락으로 아래를 가리켰다.
그러고 보니 그가 앉아 있는 바위는 비슷한 크기의 바위와 머리를 맞붙인 채 놓여 있었다.
바위의 갈라진 틈 사이로 작은 물병이 놓여 있었고, 틈 사이로는 물이 흘러나와 물병에 채워지고 있었다. 흘러나온다고는 하지만 고작 한두 방울 똑똑 떨어지는 정도여서 물병을 채우기엔 제법 시간이 걸려 보였다.
“이 샘물은 적어도 물의 팔덕 중 경청(輕淸)과 불취무환(不臭無患)의 사덕을 갖춘 물입니다. 차를 좋아하는 다인들에겐 극상품의 물은 아닐지라도 좀처럼 볼 수 없는 상품의 물입니다.”
본래 물은 가볍고[輕], 맑으며[淸], 시원하고[冷], 부드럽고[軟], 아름다워야[美] 한다. 또한 냄새가 나지 않고[不臭], 비위에 맞으며[調適], 먹어서 탈이 없어야[無患] 하는데, 이를 가리켜 물이 가진 팔덕이라고 한다.
“만약 도사님께서 흑묵사를 죽였다면 그 살기로 인해 샘물의 기운이 탁해졌을 겁니다. 그랬다면 이 샘물은 찻물은커녕 마시는 물로도 사용되지 못했을 겁니다. 살기가 배인 물이란 결국 이 물을 마시는 자들에게도 해를 입히기 마련이니까요. 그러니 도사님께선 마땅히 축복을 받아야 하는 거죠.”
“이제 보니 아직 젊은 청년이 차에 빠졌군. 내게도 사형 되시는 분이 광적일 정도로 차를 좋아하네만……. 솔직히 고작 차를 마시면서 그렇게까지 물을 가려야 한다는 건가? 이해가 되지 않는군.”
무덕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자, 백천성은 담담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찻잎 따서 달여 마시기까지를 다사(茶事)라고 하는데, 이는 몸과 마음을 수련하여 덕을 쌓는 행위이기에 다도라 불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고작 찻물이 아니라 그것이 도의 첫걸음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도란 비범이 아닌 평범한 것일세.”
무덕은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평생 동안 무당파에서 살아왔고, 이제껏 도교의 도만을 추구해 온 그에게 있어 지금 백천성의 말은 궤변처럼 들릴 뿐이었다.
“한 가지 일에 빠져 그것을 버리지 못하는 것을 집착이라고 하거니와, 무릇 도란 그 모든 집착을 털어 내는 데서부터 비롯되는 법이니 이를 가리켜 도충(道沖)이라 한다네. 그대가 물을 지나칠 정도로 소중하게 생각하는 건 차에 집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세.”
도충이란 ‘도는 텅 비어 있다.’라는 말이다.
이는 불가에서 말하는 색즉시공의 공과 같은 개념이기도 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의 말과는 조금 다르군요. 텅 비어 있다는 도충은 그분의 말에 의하면 내가 텅 비면 세상과 우주가 텅 비게 되고, 삼라만상이 텅 비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텅 빈 것은 다시 말해 수많은 것들로 가득 차 있다는 의미라고 하더군요.”
백천성의 입꼬리가 비틀어졌다.
“그 텅 비어 있는 세계 속에 ‘나’와 ‘삶’은 또한 너무도 평범한 것이지만, 그러나 얼마나 신비롭고 오묘한지…… 고상무욕이관기묘(故常無欲以觀其妙:그러므로 언제나 텅 비어 있으면 그 오묘함을 보게 된다)…… 그리하여 무한한 생명력이 언제나 새롭고, 늘 끊임없이 샘솟듯 한다고 했습니다[谷神不死]. 그러한 이치로 볼 때, 도는 만사에 있으며 도가 아닌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누군가에게는 별 볼일 없는 차 마시는 일이 어떤 이들에게는 다도가 되는 거죠.”
“……!”
무덕은 할 말을 잃은 얼굴을 했다.
눈앞에 있는 뺀질뺀질해 보이는 청년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들은 모두 도덕경 속에 있는 내용이기는 했지만, 평생을 도에 전념한 도인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말이었다.
“무량수불…….”
무덕은 습관적으로 도호를 외웠다.
“자네에게 그렇게 말씀하신 분은 틀림없이 매우 고매한 도인이시겠군. 그분의 함자라도 알 수 있겠나?”
백천성은 고개를 저었다.
“아! 그 영감님은 남들 입에 자신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걸 무척이나 싫어합니다. 성격이 좀 그런 편이거든요.”
“…….”
무덕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부터가 무당산은 도인들이 많은 곳이다. 몸을 숨긴 채 도에만 전념하는 도인에겐 명성이란 뜬구름 같은 것이니, 좀처럼 나서지 않을 뿐만 아니라 평생 동안 숨어 지내는 일이 허다했다.
“그런데 우리 어디서 보지 않았나? 왠지 자네 얼굴이 낯이 익구먼.”
문득 무덕은 백천성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럴 리가요.”
백천성은 짐짓 모르는 척을 했다. 어려서부터 ‘무당파와는 거리를 두거라.’라는 사부인 현허의 눈치도 있었고, 또한 삼 년 전까지만 해도 가짜 부적을 팔아먹던 전력이 있었던 만큼 알게 되면 귀찮아질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한데 무당파에서 오신 것 같은데, 이렇게 외진 곳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누군가를 찾고 있네만. 혹시 자네가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도명이 현허라는 분이시네.”
‘사부……!’
백천성은 두 눈을 반짝였다.
비록 무당산이 넓다고는 하지만 적어도 영취봉 근처에서 현허라는 도명을 쓰는 자는 오직 사부밖에는 없었다.
‘사부를 찾아온 손님이라……? 그것도 무당파에서 말이지.’
십 년 전부터 사부인 현허에게서 은연중에 ‘무당법문과 무당파는 서로 거리가 멀수록 좋다.’라는 식으로 세뇌(?)당해 왔던 터라 그는 매우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로 그러시는 겁니까?”
무덕은 두 눈을 크게 떴다.
“그 말은 자네가 그분이 어디에 계시는지 알고 있다는 것인가?”
“아마 그럴 겁니다.”
백천성은 앉아 있던 바위에서 내려왔다. 그러고는 바위틈에서 물을 받고 있던 물병을 집어 들더니 앞으로 걸어갔다.
“따라오시죠.”
“그러지.”
무덕은 지체 없이 그 뒤를 따라 산 위로 올라갔다.
산봉우리 위.
백천성은 모옥 앞 평상 위에 앉은 채 꾸벅꾸벅 졸고 있는 현허에게로 다가갔다.
“사부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그제야 현허는 길게 하품을 하며 눈을 떴다.
“아함……. 날 찾아왔다고……?”
“그런 거 같은데요.”
백천성은 퉁명스럽게 말하고선 뒤를 돌아보았다.
다소 어정쩡한 모습을 하고 서 있는 무덕을 향해 눈짓으로 평상 위에 앉아 있는 현허를 가리켰다.
“우리 사부님이십니다.”
그 말은 곧 ‘당신이 찾는 현허가 바로 눈앞 평상에 앉아 있는 이 노인이다.’라는 의미였다.
무덕은 언뜻 그 말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다가 이내 ‘아’ 하는 나직한 탄성과 함께 현허 앞으로 다가갔다.
“무량수불……. 제자 무덕이 현허 사숙에게 처음으로 인사드립니다.”
두 손을 합장한 채 최대한 공손하게 허리를 굽혔다.
“무덕……?”
현허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무덕은 황급히 말했다.
“그렇습니다. 제자의 사부님께선 바로 현명 진인이셨습니다. 이십 년 전에 등선하셨지요.”
“이십 년 전이라…….”
현허는 손가락으로 숫자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하면 백이십 세까지 버티셨다는 겐가? 과연 현명 사형은 사부님의 진전을 모두 잇더니 엄청 장수한 셈이로군.”
그는 힐끗 무덕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그러니까 네가 현명 사형의 제자란 말이지?”
“맞습니다.”
“그런데 왜 온 거지?”
너무도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무덕은 말을 더듬거렸다.
“왜…… 온 거라니요……? 그거야 당연히 현허 사숙께서 생존해 계심을 알았으니…….”
“그럼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그만 돌아가. 어차피 지금까지 내가 있는지도 몰랐을 테니까 말이야. 안 그런가?”
“죄…… 죄송합니다, 사숙…….”
현허가 냉큼 말을 자르며 거절하자, 무덕은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사실 떠나오기 전에 사형이자 장문인인 무상자에게서 현허 사숙이 만약 생존해 있다면 반드시 무당파로 모시고 와야 한다는 간곡한 명령을 받은 그였다.
“장문인이신 무상 사형께서 사숙에게 드리는 서찰을 가지고 왔습니다.”
이어 그는 품속에서 서찰을 꺼내 공손히 현허에게로 내밀었다.
현허는 서찰을 받고는 펼쳐서 한 눈에 읽어 내려갔다.
“그러니까 무림맹에서 법사를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말이로군.”
서찰을 읽고 난 뒤 무덤덤하게 현허가 말하자, 무덕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사숙…….”
“결국 여기까지 날 찾아온 건 내가 살아 있나 궁금해서가 아니라 필요해서 왔다는 말이로구나.”
“…….”
무덕은 고개를 떨구었다.
현허의 말처럼 애초부터 그가 있는지조차 무당파에선 모르고 있었다. 아니, 아예 관심이 없었다.
옆에 있는 백천성은 노친네처럼 혀를 찼다.
“관심이란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데 있어 가장 최소한의 조건이라고 할 수 있죠. 안 그런가요? 사형…….”
그는 마지막 ‘사형’이라는 말에 힘을 주었다.
‘사…… 사형…….’
무덕은 다소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눈앞에 있는 백천성의 나이는 잘 봐 줘야 약관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에 비해 자신은 벌써 오십하나, 만약 자신이 속가였다면 아들도 한참 막내아들뻘인 애송이가 사형이라고 칭하자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 녀석이 현허 사숙의 제자라면 당연히 내가 사형이 되는 건 맞지만…….’
졸지에 새파랗게 어린 사제가 생겼다는 사실에 내심 한숨이 나오는 그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현허의 눈치를 살폈다.
“제자들이 어리석어 사숙의 심기를 어지럽혔으니 그 죄를 어찌 씻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사문의 명예가 추락되는 걸 막는 게 시급한 일이오니 사숙께서는 살펴 주십시오.”
현허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난 무당법문의 후계자야. 무당파와는 관계가 없어.”
“가지가 갈라졌다고 해서 어찌 뿌리가 달라질 수 있겠습니까? 제가 장문 사형에게 전해 듣기로는 법문과 무당은 본래 한 둥지였으며,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하였습니다. 더군다나 사숙께서 법문의 맥을 잇기 전까지는 사부님이신 현명 진인의 사제로, 청풍 사조님을 사부님으로 모시지 않았습니까.”
“과거의 인연을 가지고 물고 늘어지긴…….”
현허는 못마땅한 듯 새하얀 눈썹을 잔뜩 찌푸렸다.
“하긴, 청풍 사부님이 아니셨다면 나 현허가 무당법문과 인연을 맺지 못했을 터…… 과거에 맺은 인연의 한 매듭을 푼다는 의미에서 승낙하지.”
무덕은 반색했다.
“감사합니다, 사숙…….”
“대신…….”
문득 현허는 손가락을 들어 백천성을 가리켰다.
“내 대신 저 녀석이 갈 거야.”
“사…… 사숙……!”
무덕은 당황한 듯 소리쳤다.
“하오나…… 무림맹에서 파견을 요청한 분은 법사입니다. 그 법사가 바로 사숙일진데…….”
“저 녀석은 내 제자야. 다시 말해, 무당법문의 후계자라는 거지. 그러니 이놈도 틀림없는 법사인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