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칠포유여향 1권(22화)
9장 강호로 나서다(2)


태극오형 중의 첫 번째인 난화경.
손은 허공 중에 난화의 문양을 그려 내며 무검이 휘두르는 손과 마주쳐 갔다.
공력이 실려 있는 무검의 손과 충돌하고도 아무런 소리가 일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정면으로 충돌하기보다는 비스듬히 무검자의 손을 밀어냈기 때문인데, 그것은 바로 현허가 낮잠 잘 때 그가 옆에서 회초리로 날아들던 날벌레들을 밀어내는 것과 마찬가지인 동작이었다.
‘내 공격을 막아 내고 있다. 그것도 처음 보는 수법으로…….’
무검자는 적지 않게 놀라고 있었다.
비록 삼 성의 내공만 쓰고 있다고는 하지만, 당금 천하에서 이처럼 쉽게 자신의 일 수를 막아 낼 수 있는 자가 몇이나 된단 말인가?
“이게 마지막입니다.”
그렇게 십 초가 흘렀을 때, 백천성이 품속에서 부적 한 장을 꺼내 홱 그를 향해 던졌다.
슉!
날아들던 부적이 돌연 무검자의 눈앞에서 커다란 화염 덩어리로 변해 화악 불타올랐다.
“헛!”
돌연한 상황에 무검자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멈추고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어느 틈엔가 화염 덩어리로 변했던 부적이 팔랑거리며 그의 발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이게 법술인가?”
무검자는 발아래 있는 부적을 보며 물었다.
백천성은 히죽 웃었다.
“별로 대단한 건 아니지요. 근데 이젠 절 사제라고 인정하시는 겁니까?”
무검자는 묵묵히 그를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본 도를 따라오너라.”
이어 그는 바람처럼 앞을 향해 몸을 날렸다.
‘젠장……. 까칠하기는…….’
내심 투덜거린 백천성은 이내 그의 뒤를 쫓아가기 시작했다.
“같이 가요, 사형…….”
달리 신법도 아니었으나 무검자에 뒤지지 않는 빠른 속도였다.

* * *

무검자를 따라 백천성이 도착한 곳은 무당파의 내원 깊숙한 곳이었다.
무검자를 따라 들어간 백천성은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두 명의 인물을 만날 수 있었다.
“어…… 어서 오게, 사제…….”
덩치 큰 거구의 도인이 그를 보며 어정쩡하게 입을 열었다.
바로 전날 보았던 무덕이었다.
“또 보게 되는군요, 무덕 사형…….”
백천성은 등에 지고 있던 봇짐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넉살 좋게 웃어 보였다.
무덕은 눈치를 살피며 옆에 앉아 있는 풍채 좋은 모습의 노도사 무상자를 가리켰다.
“이…… 인사를 하게. 이분은 우리들의 대사형이시자 장문인이시라네. 도호가 무상자시지.”
백천성은 무상자를 향해 꾸벅 인사를 했다.
“인사드리겠습니다, 사형. 백천성이라고 합니다.”
무상자는 빙그레 미소 지어 보였다.
“무덕을 통해 얘기는 들었네. 사제가 법문의 후계자라고……?”
“예.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무당파와 무당법문은 서로 왕래가 없게 되었네. 물론 그 모든 것은 못난 내 탓이긴 하네만…… 이제부터라도 사제가 다리 역할을 해야 할 것일세.”
“이왕이면 아예 눌러살도록 하겠습니다.”
백천성이 앞에 놓인 의자에 털썩 주저앉자, 무상자는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허허……. 그렇게 하도록 하게. 무당파가 그리 가난하지는 않으니 자네가 쉴 정도는 될 걸세. 무덕 사제의 말로는 사제가 사숙의 진전을 모두 이었다고 하더군.”
말은 백천성에게 했으나 무상자의 시선은 무검자에게로 돌아갔다.
그 눈빛은 ‘실력이 어떤가.’라고 묻는 것이었기에 무검자는 즉시 대답했다.
“그는 제 공격을 몇 번이나 막아 냈습니다. 그것이 정확히 무공인지 뭔지는 확신할 수 없으나…… 아무튼 괜찮았습니다.”
아까 무검자가 백천성에게 공격을 했던 것은 일종의 시험이었다.
백천성은 단순히 법사로서 무림맹에 파견되는 것이지만, 어찌 되었든 무당파를 대신하여 가는 것이기에 적어도 무당파의 명예는 지킬 정도는 되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제야 무상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제는 현허 사숙님께 얘기는 들었겠지?”
백천성은 시큰둥한 얼굴을 했다.
“별로 들은 얘기는 없었습니다. 단지 무당파로 가서 사형들과 함께 무림맹으로 가라는 얘기밖에는 말이죠.”
“그래, 그곳에 가서 법사로서 그들이 맡긴 일만 처리하고 돌아오면 되는 걸세. 그리 오래 시간을 빼앗지는 않을 걸세.”
‘남는 게 시간인데…… 팍팍 써도 됩니다.’
내심 구시렁거린 백천성은 슥 무상자 등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말씀하시는 걸로 봐서 지금 떠나라는 것 같군요.”
무상자는 움찔했으나 이내 담담히 말했다.
“시간이 없네. 무림맹에서 한시라도 빨리 파견해 달라고 하였으니 지금 떠나야 할 걸세. 무림맹에서 일을 끝내고 온 뒤엔 사제에 대해 정식으로 환영 행사를 하도록 하지.”
즉, 그때쯤이 되어서야 정식으로 자신들의 사제가 될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것은 다시 말하자면, 무림맹에서 제대로 일을 처리하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설마 저 혼자서 가라는 건 아닐 테고, 누구와 같이 동행하는 겁니까?”
백천성이 세 사람을 둘러보며 말하자, 무검자가 입을 열었다.
“내가 너와 함께 간다. 그리고 내 제자 두 명도 함께한다.”
“무검 사형께서…….”
그는 슬쩍 무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무덕 사형께서는 같이 안 가는 건가요?”
무덕은 얼굴을 찡그렸다.
“나는 별로 무림맹에 가고 싶은 생각이 없네. 그들은 퍽이 나를 귀찮게 하거든…….”
사실 무덕은 무림맹에 속해 있는 인물들을 꺼려하는 편이었다.
그것은 그들이 지나치게 예의를 따지기 때문인데, 사실 무덕은 무상자나 무검자의 경우처럼 존칭인 ‘자’ 자를 붙여 ‘무덕자’라고 칭해야 했으나 어쩐지 낯간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장문 사형도 아니고 무검 사형처럼 명성을 떨치는 고수도 아닌데 무덕자라니…….’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손발이 오글거리는 느낌에 무덕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백천성을 바라보았다.
“아무튼 일만 마치고 돌아오게. 내가 사제를 위해 환영 행사를…… 아니지. 이건 장문 사형께서 직접 해 주신다고 했으니…… 아무튼 무사히 돌아오게.”
“그렇게 하도록 하죠.”
백천성은 다소 아쉬운 듯한 얼굴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까칠한 무검자에 비해 무덕이 사람 좋기 때문이 아니라, 만만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사부님, 운룡과 여청이옵니다.”
그때 방문 밖에서 나직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너라.”
무검자의 말이 떨어지자, 드륵 문이 열리며 밖에서부터 한 쌍의 젊은 남녀가 안으로 들어왔다.
깨끗한 백의 무복을 걸친 남녀들.
바로 무검자의 제자인 남운룡과 운여청이었다.
“사부님의 명을 받아 제자 남운룡과 운여청이……?”
무심코 말하던 두 사람의 망막 속에 사부인 무검자가 앉아 있는 원탁 앞에 앉아 있는 한 청년의 모습이 들어왔다.
아무렇게나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자신들 또래의 백의 청년.
그는 두 사람을 보며 히죽 웃어 보였다.
“안녕, 또 만나게 되는군.”
‘허억……!’
‘저 괴물이 어떻게……!’
두 사람은 내심 심장이 철렁 내려앉을 정도로 놀랐다.
안색마저 창백해졌다.
무검자가 그런 그들을 보며 이상하다는 눈빛을 했다.
“서로 아는 사이인가?”
“몇 번 얼굴을 본 정돕니다.”
제대로 입도 벙긋하지 못하는 그들을 대신해서 먼저 백천성이 여유 있게 말했다.
“그땐 서로의 관계를 잘 몰랐을 때지만요.”
무검자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남운룡 등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곧 여장을 꾸리도록 해라. 이 사부와 함께 잠시 어디를 다녀와야 하니까.”
“그보다…….”
그의 말을 자르며 백천성이 끼어들었다.
“저들에게 내가 어떤 존재인지부터 말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나중에 실수라도 하게 되면 서로 곤란해질 테니까 말입니다. 사형.”
그는 마지막 ‘사형’이라는 말에 힘을 주었다.
무검자는 못마땅한 듯 그를 힐끗 쳐다본 후 그들에게 다시 시선을 던졌다.
“그는 너희들과 비슷한 나이이기는 해도…… 이 사부의 사제가 된다. 그러니 앞으로는 반드시 사숙이라고 불러야만 한다. 명심하도록…….”
“사…… 사숙……!”
남운룡과 운여청은 망연히 중얼거렸다.
그들에게 있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존재가 바로 백천성이었다.
‘마…… 말도 안 돼. 그가 사숙이라니…….’
‘만수혈마를 두 주먹으로 때려죽인 저자가…….’
이 자리에서 쓰러져 기절하지 않은 건 순전히 지난 시간 동안 정심한 무당의 신공을 연마한 덕분일 것이다.
그런 그들을 보던 백천성의 입꼬리가 천천히 위로 말아 올라갔다.
“재정립된 관계로 다시 만나게 되니 무척이나 기쁘군. 앞으로 잘 부탁해.”
새하얀 웃음.
그것을 보는 순간, 남운룡과 운여청은 앞이 갑자기 노래지다 못해 깜깜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자신들이 이제껏 너무도 평탄하게 살아왔음을 알게 되었고, 반대로 앞으로의 삶은 그리 순탄치 않으라는 걸 본능적으로 깨닫게 되었다.
원시천존이시여, 굽어 살피소서.

백천성과 무검자 등이 떠난 원탁 위에 두 개의 찻잔이 놓여 있었다.
무상자는 여전히 자리에 앉은 채 앞에 놓인 찻잔 하나를 잡아갔다.
“어떨 것 같은가?”
무덕은 멀뚱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뭘 말입니까? 장문 사형…….”
“백 사제가 무림맹으로 가서 제대로 일을 처리할 수 있을 것 같냐는 말일세.”
“아무리 현허 사숙의 진전을 이어받았다고 해도 백 사제가 강호는 처음인 터라…… 곤란한 경험을 많이 하게 될 것입니다.”
“경험이야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일…… 무검 사제가 동행했으니 별일은 없을 것일세. 다만, 그가 현허 사숙의 법술을 어느 정도 이었느냐 하는 것이겠지.”
무림맹에서 무당파에 법사를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한 것은 근래에 일어난 살인 사건 때문이었다.
그것은 무공보다는 술법에 관한 것일 테니, 만약 백천성이 무당법문의 법술을 일정 수준 이상 연성하지 못했다고 하면 매우 난처한 상태에 빠지게 될 게 뻔했다.
‘무검이 갔으니 만에 하나 그렇다고 해도 최악의 상황은 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고 하면 결국 현허 사숙이 나설 수밖에 없다.’
사제인 무덕의 말에 의하면 현허 사숙의 법술에 의해 순식간에 영취봉에서 이곳까지 왔다고 했다.
그것은 실로 불가사의할 정도의 능력이었고, 그런 능력을 지닌 현허 사숙이 은거를 깨고 나선다면 골치 아픈 여러 가지 사안들이 해결될 것이 뻔했다.
솔직히 백천성을 무림맹으로 보낸 것은 현허 사숙을 끌어내기 위한 미끼에 지나지 않았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현허 사숙이 직접 움직이게 해야만 한다. 그렇기에 백 사제에겐 미안한 일이나 될 수 있으면 실패해야만 한다.’
사실 무검이 동행한 것은 그럴 경우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서였다.
후룩…….
무상자는 들고 있던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 한 모금 마셨다.
백천성이 떠나면서 그에게 준 차로 탄 것이었다.
“호오…… 이것 참 괜찮군.”
무상자는 차를 마셔 본 뒤 뜻밖이라는 얼굴을 했다.
입안에 감도는 그윽하면서 단맛이 풍부하게 감도는 다향에 절로 탄성이 흘러나올 정도였다.
“이 차가 무이암차라고 했던가?”
“그렇게 말한 것 같습니다. 직접 제다했다고 하더군요.”
“많은 무이차들 중에서 암차라 불릴 수 있는 건 극히 일부라고 하더군. 정말로 뛰어난 암차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제껏 내가 마셔 본 차 중에선 단연 발군일세.”
무상자는 마시고 있던 차를 탁자에 다시 내려놓았다.
“사제, 앞장서게.”
무덕은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무슨……?”
“어제는 내가 장문인이라는 신분이었기에 직접 가지 못했으나, 오늘은 제자로서 사숙을 찾아가는 것일세. 웃어른에게 인사드리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니까.”
“그럼 모시겠습니다.”
무덕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무상자와 함께 방 밖으로 나갔다.
이어 그들은 신법을 펼쳐 한쪽을 향해 날아갔는데, 그들이 가는 곳은 바로 영취봉이었다.

* * *

벌써 무당파를 떠나온 지도 반나절.
아직 초여름에 불과한지라 불어오는 바람은 사뭇 상쾌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뭔가를 잔뜩 들고 가는 자에겐 말 못하게 더운 날씨라고 할 수 있었다.
“헉…… 헉…….”
남운룡은 땀을 뻘뻘 흘리며 걸어가다가 원망스러운 듯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에 박혀 있는 태양은 잘 달궈진 무쇠처럼 뜨거운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하늘마저 날 안 도와주는군.’
그가 땀을 흘리고 있는 이유는 등 뒤에 메고 있는 커다란 봇짐 때문이었고, 그것은 본래 백천성이 메고 있던 것이기도 했다.
‘대체 봇짐 속에 쇳덩이라도 넣어 두었단 말인가? 고작 무당파 입구를 벗어난 정도건만 이렇게 힘이 들다니…….’
잠깐 드는 정도라면 모를까 이렇게 지속적으로 들고 간다는 것은 힘에 부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운여청이 근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사형, 괜찮아요?”
남운룡은 그녀 쪽으로 얼굴을 돌리지도 않은 채 고개만을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