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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포유여향 1권(23화)
9장 강호로 나서다(3)
“아…… 아직은…… 버틸 만하다.”
“힘들면 말해요. 나도 도와줄 테니…….”
“고…… 고맙다, 사매…….”
“하루라도 빨리 무림맹에 도착해야 사형이 고생을 안 할 텐데…….”
그녀는 시선을 앞으로 던졌다.
그들의 시선이 멈춘 곳에 백천성이 유유자적하게 걸어가고 있었는데, 전형적으로 유람 나온 한량의 모습이었다. 이에 반해 꼿꼿한 자세를 유지한 채 걸어가는 무검자의 모습이 사뭇 대조적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이렇게 여행을 가는 겁니다. 무검 사형…….”
백천성은 유유자적한 모습으로 걸어가며 연신 떠들어 댔다.
“어릴 적엔 참으로 많이 돌아다녔는데…… 지난 십 년 동안 영취봉에서 꼼짝도 않고 우리 영감 수발만 들었죠. 참, 영감은 바로 우리 사부님을 말하는 겁니다.”
만약 무검자가 평생 수련한 도인이 아니었다면 당장 그의 입에다 주먹을 날렸을 것이다.
“백 사제는 현허 사숙 앞에서도 그러한 말을 한단 말인가?”
무검자는 못마땅한 듯 새하얀 눈썹을 찌푸렸다.
제자인 백천성이 사부를 가리켜 ‘영감’ 운운하는 게 못마땅했던 것이다.
백천성은 히죽 웃었다.
“우리 사부님은 그런 말은 신경 쓰지도 않을 겁니다. 워낙 얼굴이 두꺼우신 편이니까요. 그리고 안 듣는 데서 황제도 욕하는 게 인지상정 아닙니까?”
무검자는 그를 보며 어처구니없다는 얼굴을 했다.
평생 무당파 안에서 도인으로서, 또한 일세를 울리는 검인으로서 살아온 그였기에 지금 백천성의 말은 망발에 지나지 않았다.
“현허 사숙께선 어쩌자고 자네를…….”
무검자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저들은 상인 같은데요.”
갑자기 백천성은 앞을 보며 뜬금없는 말을 했다.
무검자가 앞을 바라보자, 그들과 십여 장 떨어진 곳에 네 필의 말들이 끄는 마차 한 대가 산길 한가운데 세워져 있었다.
마차 주변에는 십여 명에 달하는 자들이 다소 난처한 얼굴을 한 채 주위를 둘러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뭔가 난관이 있는 모양이로군요.”
백천성은 두 눈을 반짝거리며 중얼거렸다. 그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매우 지루해 있다가 뭔가 신기한 것을 발견했을 때의 그런 눈빛이었다.
“백 사제…….”
무검자는 ‘괜히 쓸데없는 일에 끼지 말게.’라고 말하려 했으나, 어느 틈엔가 백천성은 그들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이런…….’
무검자는 내심 혀를 찼으나 이미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재빨리 마차를 둘러싼 일행들 앞으로 다가간 백천성은 쾌활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제야 그들은 일제히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소협은 누구시오?”
그들 중 청의를 걸친 노인이 그에게 말했다.
백천성은 노인을 보며 말했다.
“그냥 지나가던 과객이라고 할까요? 한데 안 좋은 일이 있는 것 같습니다.”
말은 청의 노인에게 하고 있으나 시선은 앞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들과 조금 떨어진 앞 산길 위에 두 명의 청년들이 우뚝 서 있었다.
대략 이십 세 중반쯤 되었을 듯한 나이에 제법 준수한 용모를 한 청년들. 모두 흑의를 걸치고 있는데, 왼쪽에 있는 청년이 이마에 푸른색의 영웅건을 쓰고 있는데 반해 오른쪽의 청년은 누런색의 영웅건을 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모두 하관이 빠져 있고 눈꼬리가 가늘게 찢어져 있어 다소 음침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왼쪽에 있는 푸른색의 영웅건을 쓴 청년이 소리쳤다.
“우리 무쌍이도(無雙二刀)가 봉황화(鳳凰花) 소저에게 도전하고자 하오. 부디 도전을 물리치지 않길 바랄 뿐이오!”
이름이 양소걸과 구자춘인 그들은 무쌍도문의 제자로, 근자에 들어 호북 일대에서 제법 명성을 떨치고 있는 신진고수들이었다.
청의 노인은 눈썹을 찌푸린 채 그들의 앞으로 다가갔다.
“이보게들, 느닷없이 나타나 무슨 도전이란 말인가?”
푸른색의 영웅건을 쓴 양소걸이 음침한 웃음을 흘렸다.
“무인이란 본래 명성을 좇는 존재들이오. 비록 봉황화 소저가 우리보다 연소하기는 하나 강호의 명성이 가히 우레와 같은지라 이렇게 부끄러움 없이 도전을 신청하는 것이오.”
“그러니 도전을 물리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오.”
옆에 있는 구자춘도 한마디 했다.
청의 노인은 버럭 노성을 질렀다.
“도전이라니, 그게 무슨 당치않은 소리란 말인가? 평소라면 우리 아가씨 앞에 나타나지도 못할 위인들이…….”
“그만두세요.”
마차 안에서 조용하면서도 힘 실린 음성이 흘러나왔다.
동시에 덜컥 마차 문이 열리며 안에서부터 한 명의 여인이 천천히 걸어 나오는 것이었다.
백의 면사녀.
얼굴을 봉황이 수놓아진 검은색의 면사로 가리고 있어 그 용모는 알 수 없으나, 눈처럼 새하얀 백의로 굴곡이 완연한 몸을 감싼 자태만으로도 능히 보는 이의 숨을 막히게 할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청의 노인은 황급히 백의 면사녀 앞으로 다가갔다.
“아가씨, 몸도 안 좋으신데…….”
백의 면사녀 하영령은 고개를 저었다.
“난 괜찮아요.”
“하나…….”
“비록 내가 독에 중독되었다고 해도 무인인 이상 저들의 도전을 피할 수는 없는 일이에요.”
상대의 도전을 회피한다는 것은 무인들에게 있어 수치스런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봉황화.
당금 강호에서 세 명의 아름다운 여자들을 가리켜 천중삼화(天中三花)라 하거니와, 눈앞의 백의 면사녀가 바로 천중삼화 중의 일화인 봉황화였다.
얼굴은커녕 그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봉황화는 근자에 들어 새롭게 생긴 봉황표국의 국주였고, 봉황표국은 천중삼화인 그녀로 인해 더욱 유명해졌다고 할 수 있었다.
지금 그녀는 지독한 극독에 중독되어 있는 상태였다.
‘내가 중독되어 있다는 사실을 어찌 알았는지 모르지만…… 무쌍이도는 그것을 알고 있기에 내게 도전을 한 것이다.’
봉황화는 면사 속에서 붉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독에 의해 그녀는 본래 지니고 있던 내공의 반도 사용 못하고 있는 실정이며, 무리하게 공력을 끌어 올리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녀가 나서자, 무쌍이도는 입가에 득의 어린 미소를 떠올렸다.
“무쌍이도가 봉황화 소저를 뵙게 되어 영광이오.”
“도전을 받아 주어 감사부터 드리겠소. 한 가지…….”
구자춘이 그녀의 전신을 훑어보며 음침한 눈빛을 했다.
“도전을 해서 소저를 꺾는다면 무엇이든 한 가지 소원을 들어준다는 약속이 유효한 것인지 확인하고 싶소이다.”
면사 밖으로 흘러나온 봉황화의 눈빛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어졌다.
“물론이에요.”
그녀가 강호에서 유명해진 것은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신을 꺾는 자에게 무엇이든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었다.
한 가지 조건.
무쌍이도가 말한 한 가지 조건이란 말할 것도 없이 그녀의 몸이었다.
“휴우…….”
청의 노인 장노삼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무쌍이도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어느 분이 도전하시겠소?”
무쌍이도는 일제히 소리쳤다.
“우리 두 명이 모두 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우리 무쌍이도는 상대가 많건 적건, 혹은 강하든 약하든 함께 싸워 왔소. 그래서 얻은 이름이 무쌍이도지.”
그러니까 그들이 한꺼번에 봉황화와 싸우겠다는 말이었다.
억지이긴 했으나 달리 반박할 수 없는 말이었다.
무쌍이도는 말과 함께 허리춤에 있던 도를 풀러 손에 쥐어 갔다.
“봉황화와 싸우게 되어 무한한 영광이오. 그럼…….”
그들이 막 도를 잡고는 공세를 취하려는 순간이었다.
“잠깐…….”
느닷없는 음성과 함께 누군가가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무쌍이도는 얼굴을 찌푸린 채 자신들의 앞을 가로막은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오?”
그들 앞으로 나선 자는 다름 아닌 백천성이었다.
백천성은 어느 틈엔가 허리에 푹 꽂고 있던 새하얀 부채, 음양조화선을 오른손에 쥔 채 한쪽 다리를 건들거렸다.
“미안하게 되었소. 아무래도 내가 먼저 도전해야 할 것 같군.”
“……?”
“굳이 도전하겠다면, 두 분은 내가 한 뒤에 도전하셔도 무방하오.”
“……!”
무쌍이도는 기가 찼다.
사실 봉황화의 명성은 그들보다 높았고, 당연히 그녀의 무공은 그들로선 꿈도 꾸지 못할 만큼 높았다.
그런 그들이 봉황화에게 도전한 것은 그녀가 극독에 중독되어 매우 좋지 않은 상황이라는 걸 알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는 도전해 승리하여 그녀의 몸을 취할 생각을 했던 것이다.
‘천중삼화 중의 한 명인 봉황화가 천하에 선언한 약속이니만큼 우리에게 당했다고 해도 후환은 없을 것이다.’
‘게다가 우리에게 당하고 나면 그녀도 그리 자랑스럽게 떠들 처지도 못되는 터…… 그런데 난데없이 엉뚱한 놈이 도전하겠단 말인가?’
만약 그렇게 된다면 죽 쒀서 개 주는 꼴이 되는 셈.
구자춘과 양소걸은 동시에 버럭 소리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릴……! 도전은 우리가 먼저 했다!”
백천성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먼저 태어났다고 해서 죽는 것도 먼저 하는 건 아닐 텐데요. 마찬가지로 순서대로 도전한다면 그게 어디 도전입니까? 제비뽑기지.”
“제…… 제비뽑기…….”
“할 수 없군요. 두 분이 그렇게 우기니 도전자 결정전을 해야 할 수밖에……. 정말이지 이런 건 내 취미에 맞지 않는 일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럼 도전자 결정전을 치루죠.”
“도전자 결정전……?”
무쌍이도는 어정쩡한 얼굴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다 차려 놓은 밥상에 생판 얼굴도 모르는 놈이 숟가락을 디밀더니 뻔뻔하게 밥그릇의 주인이 누군지 한번 힘써 보자고 우기는 꼴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빌어먹을 놈이……!’
‘죽는 게 소원이라면…….’
그들은 두 눈에 불똥을 튕기며 소리쳤다.
“좋다!”
“그럼 지금부터 시작이다!”
그들은 일제히 백천성에게로 신형을 날리며 도를 휘둘러 갔다.
파쐐애애액!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날려든 그들의 공격은 실로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기습이었고, 또한 휘두르는 도는 번개가 무색할 정도로 빨랐다.
그러니 너무도 당연하게도 그들은 눈앞에 있는 백천성의 몸이 두 쪽으로 쪼개질 것이라고 믿었다.
그것은 봉황화를 비롯한 나머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일찍 끝내기로 하죠. 길면 서로 피곤할 테니까.”
여유로운 백천성의 말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 순간의 일이었다.
동시에 그의 신형이 두 사람이 휘두르는 도기에 의해 이리저리 흔들렸는데, 그 모습은 마치 바람에 휘날리는 낙엽과 같았다.
스으으읏…….
‘뭐…… 뭐야? 어떻게 저렇게 움직이는 거야?’
‘마치 귀신같은 신법…….’
양소걸과 구자춘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멈칫거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백천성은 두 사람 앞으로 파고들었다.
“이제부터 즐거운 시간입니다.”
그는 그들이 잡고 있는 도를 향해 양손을 뻗었는데, 어느 틈엔가 그의 손에는 누런 부적이 쥐어져 있었고, 부적에는 ‘지(止)’ 자가 쓰여 있었다.
순식간에 그들의 도 끝에 부적을 붙인 백천성은 얼떨떨해하는 두 사람의 면상을 향해 냅다 음양조화선을 찔러 갔다.
퍼억!
꽈직!
잘 익은 수박을 몽둥이로 후려쳤을 때 깨지는 소리와 같은 둔탁음이 터져 나왔다.
“크억…….”
“컥……!”
외마디 절규와 같은 짧은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두 사람은 마치 거대한 쇠망치로 면상을 맞은 듯한 엄청난 충격에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본래 지독한 아픔엔 비명보다 웃음이 나오는 법이고, 그보다 더한 고통이라면 아예 할 말을 잊는 법이다.
지금 무쌍이도도 그랬다.
퍽! 퍼퍼퍽! 빠바바박!
백천성이 휘두르는 음양조화선을 마음껏 맞고 있는 그들은 아예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아프다고 비명 지를 새도 없이 맞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채에 맞는다고 얼마나 아프겠냐고 하겠지만 지금 두 사람 입장에선 짧은 쇠몽둥이로 맞는 것만큼이나 지독한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이…… 이대로 맞다간 죽는다!’
‘우…… 우리가 공격을……!’
무쌍이도는 이를 악물고는 백천성을 향해 도를 휘둘렀다.
아니, 휘두르고 했다. 그러나 자신들의 도는 마치 허공에 보이지 않은 줄에 묶이기라도 한 듯 요지부동이었다.
남들이 보자면, 두 사람은 자신들의 도를 머리 위로 든 채 백천성의 주먹을 온몸으로 고스란히 맞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사실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은 백천성이 부적을 그들의 도 끝에다 붙였기 때문인데, 멈춘다는 의미의 지 자가 지워지지 않는 한 그들의 도는 결코 움직일 수 없었다.
더군다나 그들은 백천성이 휘두르는 음양조화선에 맞을 때마다 힘이 쭉쭉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헉…… 헉……. 너무 맞아서 힘이 빠지는 건가?’
‘그냥 쓰러져 쉬고 싶을 정도로 힘이 없다…….’
사실 구자춘과 양소걸이 힘이 없는 것은 백천성이 음양조화선을 휘두르면서 흡기취정을 펼쳤기 때문이었다.
결국 백천성은 때릴수록 힘이 솟는데 반해 그들은 기운을 빼앗겼기에 헉헉거릴 수밖에 없었다.
다른 자들은 이와 같은 상황에 의혹 어린 모습을 보였으나, 단 두 명 남운룡과 운여청은 안타까운 눈빛을 했다.
‘만수혈마가 주먹에 맞고 죽었다.’
‘지금은 부채긴 하지만 저들도 곧…….’
척 보기에도 무쌍이도란 놈들이 나쁜 놈들이라는 건 알 수 있었지만, 왠지 안쓰러운 마음이 드는 두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