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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포유여향 1권(24화)
9장 강호로 나서다(4)


“크아아악!”
“커어억!”
그때, 구자춘과 양소걸의 입에서 폐부를 쥐어짜는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서는 그들의 얼굴은 퉁퉁 부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울긋불긋하게 멍들어 있었다.
밀랍처럼 창백한 안색, 입가로 흘러내리는 가느다란 핏물…….
조금 전의 기세등등한 모습과 달리 그들의 몰골을 처참 그 자체였다.
마치 생사격전이라도 치른 듯 지독히도 내상을 입은 몰골이었는데, 전신을 휘청거리던 그들은 이내 바닥으로 꼬꾸라져 쓰러지고야 말았다.
무쌍이도.
볼썽사납게 꼬꾸라진 그들은 그대로 혼절하고야 말았다. 그리고 깨어났을 땐 알게 될 것이다.
적어도 족히 십 년은 요양해야 될 만큼 지독한 내상을 입었다는 사실을…….

* * *

강.
단강구에서 호북의 여양까지 이어진 샛강이었다.
그 샛강 위를 한 척의 배가 바람결에 흘러가고 있었다.
“우윽…….”
남운룡은 배 난간 앞에 엎드려 연신 토악질을 해 댔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한나절가량을 백천성의 봇짐을 진 채 걷고, 이번엔 배를 타게 되었는데 그 뱃멀미가 여간 지독한 게 아니었다.
“사형…… 속은 어때요?”
그 옆으로 다가온 운여청이 근심스러운 듯 물었다.
남운룡은 창백한 안색을 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괘…… 괜찮아……. 다만 뱃멀미를 하는 것뿐인데…….”
그는 다시 난간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는 토했다. 사실 배라고는 난생처음 타 보는 그인지라 이러한 뱃멀미는 당연한 것이었다.
“쯧쯧……. 허약한 놈…….”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백천성은 혀를 차다가 옆에 앉아 있는 무검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대 무당파의 제자답지 않게 순 허풍선입니다. 저놈은…….”
무검자는 힐끗 남운룡을 바라보고는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배를 처음 탔을 뿐이다.”
“처음 타기로는 저도 마찬가진데, 보다시피 전 이렇게 멀쩡하지 않습니까? 하긴 제가 본래 자질이 뛰어난 편이긴 하지만…….”
“…….”
“그런데 이 사람들은 우릴 여기에 태우고는 모두 어딜 간 거지?”
백천성은 무검자의 낯빛이 찌푸려지는 걸 보고는 슬쩍 시선을 돌렸다.
배 위에는 그들 말고도 한 대의 마차와 십여 명의 장한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아까 보았던 봉황표국의 표사들이었다.
사실 이 배는 봉황표국의 소유로, 백천성이 무쌍이도를 처리해 준 덕분에 승선하게 된 것이었다. 다행히 이 배는 낙양과 그리 멀지 않은 여양까지 가니, 뜻하지 않게 편안한 여행이 된 셈이었다.
덜컥!
그때 선실 문이 열리며 장노삼과 여전히 검은색 면사로 얼굴을 가린 백의여인 봉황화가 그들에게로 걸어왔다.
“소녀가 무검자 어르신에게 인사드립니다.”
봉황화는 먼저 무검자를 향해 정중히 포권을 했다.
무검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사는 오히려 본 도가 해야 할 걸세. 소저 덕분에 편안히 가게 되는 것 같네.”
“아무튼 어르신의 도움 덕분에 위기를 넘기게 되었습니다.”
“저 미안하지만, 그 도움은 제가 한 것이거든요.”
백천성이 못마땅한 얼굴을 한 채 끼어들었다.
“그 무쌍 뭐라는 놈들과 싸운 게 나이지 무검 사형이 아니오. 그러니 소저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다면 내게 해야 하는 게 옳은 것 같은데요.”
“그렇군요.”
면사 밖으로 흘러나오는 봉황화의 눈빛이 신비롭게 일렁거렸다.
“아까 보니 매우 특이하게 싸우시는 것 같더군요. 무당에 그러한 수법이 있다는 건 처음 알았습니다.”
아까 무쌍이도와의 싸움을 유의 깊게 살펴본 그녀였다.
백천성이 일방적으로 그들을 두들겨 패 주긴 했으나, 어딘가 모르게 일반적인 무공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망나니들을 패 주는데 무슨 무공씩이나…….”
백천성은 그녀를 보며 히죽 웃었다.
“그런데 우리 사이에 무공 운운하는 게 너무 거리감이 느껴지는군요.”
실로 경박하기 그지없는 말이었다.
처음 보는 여자에게 ‘우리’라는 말도 그렇지만, ‘거리감’이라는 단어 또한 적절치 못한 것이었다.
“어쩐지 소저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알 수 없는 감동이 전율처럼 밀려옴을 느꼈습니다. 물론 천 조각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 그 감동의 실체를 정확히 표현하지 못하겠지만…….”
“……?”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소생은 백천성이라고 합니다만…… 소저의 방명은 어떻게 되시는지……?”
느끼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백천성이었다.
‘훗…….’
내심 실소를 금치 못하는 그녀였다.
전형적으로 여자에게 수작을 걸 때 하는 말투이나, 왠지 싫게 느껴지지 않았다.
“남들은 저를 봉황화라고 불러요. 백 소협도 그렇게 부르셨으면 좋겠군요.”
‘어쭈, 튕긴단 말이지.’
백천성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다면 당분간은 봉황화 소저라고 부르겠습니다.”
“다시 한 번 인사드리겠습니다. 아까 도와주셔서 고마워요.”
“봉 소저가 원한다면 한 번이 아니라 두 번도 해 드릴 수 있습니다. 핫하…….”
“더욱 고맙군요. 수하들에게 일러 여러분들께서 요기를 할 수 있도록 식사를 마련해 오라고 했습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 다시 선실 안에서부터 몇 명의 표사들이 커다란 식탁을 들고 걸어 나왔다.
그들은 둥근 형태의 원탁을 들고 있었는데, 탁자 위에는 각종 음식과 고기들이 술과 함께 놓여 있었다. 표사들이 배 중간에 원탁을 내려놓고는 이번엔 사람 수에 맞게 의자를 가지고 나왔다.
“고기로군요.”
어느 틈엔가 백천성이 원탁 앞 의자에 앉아 위에 있던 오리고기를 덥석 쥐었다.
무검자는 그런 행동에 눈살을 찌푸렸으나 이내 탁자 앞으로 가서 앉았다.
“소저도 식사를 하는 게 어떻겠소?”
“알겠습니다.”
봉황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탁자 앞에 앉았다.
그때, 백천성은 오리고기를 입에 넣고 우적우적 씹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 안 됩니다…… 식사는…….”
“……?”
봉황화와 무검자는 의아한 듯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인가요? 저와 식사를 같이하는 게 싫단 말인가요?”
“자…… 잠깐……. 쩝쩝…….”
백천성은 간신히 오리고기를 뱃속으로 꿀꺽 삼키고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후아, 죽을 뻔했네. 지금 소저는 식사는 물론이고 술도 마시면 안 됩니다. 최소한 지금 탁자 위에 차려진 이 음식들을 조금이라도 먹게 되면 그건 봉 소저에게 치명적인 해가 될 테니까요.”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아마 지금 봉 소저는 미지의 독에 중독된 상태일 겁니다.”
“……!”
봉황화는 멈칫거렸다. 면사 밖으로 흘러나온 그녀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녀가 독에 중독되었다는 걸 아는 자는 그녀 자신과 장노삼밖에는 없다.
있다면 그녀에게 독을 쓴 흉수뿐…….
그녀는 백천성을 노려보며 냉랭히 소리쳤다.
“왜 그렇게 생각한 거죠?”

10장 봉황화를 지켜라(1)

쩌억…….
백천성은 다시 한 번 오리고기를 뜯으며 입을 열었다.
“왜냐고 묻는다면 그런 이유 같은 건 없습니다. 그저 내 기감이 남다르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겠군요.”
그가 그녀가 중독된 것을 안 건 조화일심태극결을 수련했기 때문이었다.
남들에겐 안 보이겠지만 그녀의 몸 주위로 검은 기운이 감돌고 있는데, 그것은 오직 법술을 연마한 자에게만 보이는 것이었다.
‘만약 그녀가 죽었다면 아주 암울한 검은빛이겠지. 그러나 옅은 검은빛이라는 건 그녀가 상처를 입었다는 증거……. 외상이 아닌 내상, 그것도 독에 의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말한다고 해도 믿어지지 않는 것이기에 그는 기감으로 돌린 것이다.
“독이란 게 수많은 종류가 있고, 매우 은밀한 것이라서 좀처럼 치료하기 힘든 거라고 알고 있는데…… 봉 소저가 해결책이 있는지 모르겠군요.”
백천성이 그녀를 응시하며 말하자, 봉황화의 눈빛이 흔들렸다.
“정말로 내가 독에 중독되었다면 당신은 달리 해결책이라도 있다는 건가요?”
“하하……. 솔직히 말하자면 난 독에 관해 맹탕입니다.”
백천성은 크게 웃으며 남운룡을 향해 손짓을 했다.
“그 봇짐을 가져와.”
남운룡은 의아해했으나 지체 없이 봇짐을 들고 그의 앞으로 갔다.
“여기 있습니다.”
“풀어 봐.”
“예.”
그는 지체하지 않고 묶여 있던 봇짐을 풀었다. 그러자 봇짐 안에 있는 여러 가지 물건들이 보였다.
수건부터 시작해서 책, 그리고 각종 만물까지.
그중에서 백천성은 휴대용 화로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고는 불을 붙였다.
다시 찻주전자를 하나 꺼내더니 화로 위에 올려놓고선 봉황화를 바라보았다.
“괜찮다면 물을 좀 주시겠습니까?”
봉황화는 이내 수하에게 물을 가지고 오라고 시켰다.
수하가 선실 안쪽에서 가죽 부대를 가지고 왔는데, 부대 안엔 물이 담겨져 있었다.
백천성은 가죽 부대를 받아 들고선 찻주전자에 물을 쏟았다.
“차를 끓이시는 건가요? 차는 제게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봉황화가 곤혹스러운 듯 묻자, 백천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난 내가 직접 만든 차가 아니면 마시지 않습니다. 그저 물만 넣고 끓인다고 해서 제대로 차가 되는 건 아니죠. 차는 그 향과 맛, 색 등을 함께 마시고, 마시고 난 뒤엔 차의 효험을 느낄 수 있어야만 진정한 차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어느새 물이 끓기 시작하자, 그는 화로의 불을 끈 뒤 품속에서 종이로 만든 상자를 꺼냈다.
종이 상자 안에는 찻잎들이 있었는데, 그는 즉시 찻주전자 안에 찻잎들을 넣었다.
“이 차는 제가 직접 제다하여 만든 무이암차죠.”
백천성은 그녀와 무검자를 둘러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무이암차라……?”
매사에 냉정한 얼굴을 하고 있던 무검자는 비로소 흥미 있는 표정을 했다.
그는 평생 동안 검에 빠져 있는 검귀였는데, 검만큼이나 미쳐 있는 게 바로 차였다.
“아까 장문 사형에게 주고 나온 게 정말 무이암차란 말인가?”
백천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사부님께서 오래전에 무이산에서 직접 씨앗을 가지고 와 무당산 주변에 심어 놓았던 것이죠.”
“정말로 암차란 말인가요?”
봉황화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눈빛을 했다.
그녀는 표국을 운영하다 보니 차가 얼마나 귀한지 잘 알고 있었다. 그 차들 중에서 무이차는 매우 특별했고, 그 특별한 무이차들 중에서도 암차는 최고라고 할 수 있었다.
“내가 알기로는 무이차들은 모두 세 품종이 있다고 하더군요. 제일 하품이 산과 계곡 주변에서 채취한 반암차(半岩茶)이며, 그다음 단계 품종이 명종(名種)이라 불리는 주차(洲茶)…… 마지막으로 최고로 치는 것이 산봉우리의 암벽에서 채취한 암차로, 이 품종이 맛과 향이 가장 뛰어나기에 달리 기종(奇種)이라고도 한다더군요.”
예로부터 암암유차(岩岩有茶) 비암불차(非岩不茶)라고 했다. 이 말은 ‘암석이 있는 곳마다 차가 있고, 암석이 없으면 차도 없다.’라는 뜻으로, 무이차의 특성을 가장 잘 나타낸 말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무이차는 대개 향은 강렬하고 맛은 달콤하다고 표현한다. 한마디로 활감청향이라고 하는데, 차를 몇 번이나 우려내도 그 향이 변치 않기에 칠포유여향(七泡有餘香)에 가까운 차라고 한다.
칠포유여향은 일곱 번 우려내도 맛과 향이 변하지 않는다는 뜻…….
명차 중의 명차를 의미했다.
흔히 알려진 무이차의 사대명총(四大名?)인 대홍포(大紅袍), 철라한(鐵羅漢), 백계관(白鷄冠), 수금귀(手金龜) 등은 명 말부터 시작하여 청 초 때에 나타난 것이다.
백천성이 자신이 제다한 무이차를 굳이 무이암차라고 표현한 것은 그만큼 차에 대해 자신이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봉 소저도 무이차에 대해서 잘 아는군요.”
백천성은 뜻밖이라는 얼굴을 했다.
차는 매우 귀한 음료라고 할 수 있었다. 비싼 만큼 차를 마신다고 해도 차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이 일반적인 상황이었다.
“봉 소저께서 설명해 주었다시피 암차란 무이차들 중에서 최고의 품종에게만 붙이는 명칭입니다.”
백천성은 다시 봇짐 속에서 찻잔 세 개를 꺼내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찻주전자를 든 그는 찻잔에다 찻물을 쪼르르 따라 각기 무검자와 봉황화 앞으로 내밀었다.
“이는 소생이 직접 제다한 암차…… 한번 맛보시기 바랍니다.”
“…….”
무검자는 지체 없이 찻잔을 들어 자신의 코앞으로 가져갔다.
다향 특유의 향내가 그의 코끝을 간지럽게 했다. 그는 마치 그 향을 음미한 듯 지그시 두 눈을 감은 채 천천히 차를 입안으로 떨어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