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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내가 이겼어! 첫 무림출도에 절혼장을 쓰는 고수를 꺾었으니, 두 번째 출도에는 무슨 공을 세울지 두렵구나. 창건! 으하핫, 그 이름은 천하제일 검객이라!”
당황했던 마음이 걷히고 나니 순수한 승리의 희열이 그를 감쌌다. 창건은 자신이 배웠던 무림맹의 무공들을 허공을 향해 모조리 토해 냈다.
이미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기 힘든 지경이었다. 그런데도 어디서 이런 기운이 솟아나는지 창건도 신기했다.
차창! 차차창!
멀리서 새벽 해가 떠오를 때까지 창건은 쉬지 않고 검을 움직였다. 전신이 땀으로 흠뻑 젖고 숨이 차서 어지러울 지경이 되어서야 창건은 검을 거두었다.
창건은 얼굴을 시원하게 씻어 내고는 탄성을 터뜨렸다.
“푸하! 시원하다!”
아예 개울에 머리를 처박는 것을 시작으로 웃통까지 벗어젖혔다. 속옷만 남기고 몽땅 벗어 버린 창건은 물빨래를 해 버렸다. 대충 헹군 옷을 건져서 풀밭에 펼쳐 두고는 개울 속으로 뛰어들었다.
아직 초여름이라 멱을 감기에 적당한 기온은 아니다. 그러나 정신이 번쩍 들어서 지난밤의 피로가 풀리는 것만 같았다.
“으흐. 좋다, 좋아……. 맹에 있을 때는 이런 재미도 없었지.”
사삭. 사사삭.
들풀이 몸을 비비는 소리를 냈다. 맹에서는 이런 소리를 들을 여유도 없었다. 하루의 대부분을 격렬한 수련으로 보냈고, 밤에는 교대 경계를 서느라 피곤이 몸에 절었다.
“좋다, 좋아. 옛날에는 여기서 멱도 자주 감았는데, 더운 날이면 송사리도 잡고…….”
느긋하게 머리만 내밀고 중얼거리던 창건은 문득 느껴지는 인기척에 눈을 크게 껌뻑였다.
사삭. 사사삭.
등 뒤, 옷을 펼쳐 놓은 쪽에서 풀이 스치는 소리가 났다. 자연적인 게 아니다. 누군가의 다리를 스치고 있는 소리였다.
‘누, 누구지? 설마…… 귀신은 아니겠지?’
동이 터 오는 새벽, 귀신이 가장 들끓는 시간이라고 한다. 귀신이 밤새 놀고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창건은 그 얘기를 떠올리고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까 그 마교인인가?’
이미 뇌동고라는 이름은 잊은 지 오래였다.
창건은 자신이 가져온 금패를 떠올리고는 혀를 찼다. 죽은 이의 물건을 함부로 만지면, 돌려달라고 계속 쫓아오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다.
사삭. 사사삭.
뒤돌아보는 것조차 겁이 났다. 도망쳐 버리고 싶었다.
“마, 마교인이냐!”
창건이 등도 돌리지 않고 외쳤다. 만약 죽은 그의 목소리가 들려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홀랑 벗고라도 도망칠 셈이었다.
“과연, 소교주님의 안목에 탄복했습니다.”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는 유령처럼 음산했다. 그러나 뇌동고의 것은 아니었다.
‘소교주?’
길게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홀랑 벗고 멱을 감고 있으니 이만저만 창피한 게 아니었다.
‘일단 옷이라도 입자!’
누구로 착각했는지는 모르나 창피를 면하는 게 먼저였다. 창건은 몸을 돌려 상대를 확인했다.
“허, 허어…….”
기겁을 하고 말았다.
회의무복을 입고, 얼굴까지 회색 천으로 가린 백여 명의 무인들이 한쪽 무릎을 꿇고 부복하고 있었다. 자신을 향해서.
“유령대, 소교주를 뵈옵니다.”
“소교주를 뵈옵니다.”
쿵!
일백 명의 무인이 땅바닥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부드러운 파동이 바닥을 타고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창건은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유, 유령대라면…… 마교 암혈팔혼의…….’
마교를 대표하는 여덟 세력, 유령대는 바로 그 암혈팔혼 중의 하나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제 이름은 사림(死林)……. 부족하나마 유령대주를 맡고 있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야!’
창건은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적당한 대답을 할 수조차 없었다. 무슨 착각을 하고 자신에게 무릎을 꿇는지는 모르지만, 무림맹의 무사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당장에 목이 날아갈 판이었다.
호랑이를 만나면 살기에 눌려서 움직일 수조차 없다고 했던가. 창건의 상태가 딱 그랬다.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다.
창건이 아무런 대답 없이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유령대주가 첨언했다.
“한설 장로와 불화가 있었다는 얘기는 이미 들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없습니다. 교주님께서 돌아가셨기에 한시라도 빨리 소교주님께서 직위를 이으셔야 합니다.”
“뭐, 뭐라고?”
유령대주의 눈빛이 변했다. 잠시 말을 멈추었던 그는 나지막이 한숨을 쉬며 답했다.
“실례했습니다. 사안이 너무 급해서 제대로 설명을 드리지 않았군요. 뇌일혁 교주님…… 소교주님의 아버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소……교주?’
창건은 머리가 핑 도는 걸 느꼈다.
‘소교주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창건도 바보는 아니었다. 차갑게 얼어 버린 그의 표정과 달리, 마음속으로는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순차적으로 되짚어 보고 있었다.
결론은 너무나 쉽게 나왔다.
‘빌어먹을! 내가 죽인 그놈이 소교주야?’
왜 소교주가 아니라 소주라고 적어 놨단 말인가.
‘일이 더럽게 꼬였네. 그런데 저것들은 왜 나보고 소교주라는 거야?’
창건이 머리를 재빨리 굴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답을 찾지 못했다.
“소교주님, 저희와 함께 가셔야 합니다.”
사림이 재차 스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 잠깐만…….”
창건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이대로 따라갈 수는 없다. 어차피 소교주가 아니라는 게 들통 나서 죽임을 당할 테니까.
‘어쩌지 그럼? 내가 너희 소교주를 죽였다! 하고 밝힐까?’
창건은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며 실소했다.
‘적어도 무림 역사에 남는 영웅은 될 수 있겠지. 죽어서 이름을 떨칠 뿐이지. 그런 건 필요 없어.’
아무리 궁리해도 방법이 나오질 않았다.
‘따라가는 척하다가 기회를 봐서 도망칠까? 아니야, 아니야……. 너무 위험해. 도대체 이 일을 어쩐다.’
창건은 꼼짝달싹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는 걸 깨달았다. 결국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도망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당장은 아니었다.
“저기…… 나 옷 좀 입어도 될까요?”
창건이 주저하면서 말을 꺼냈다.
‘옷이라도 입고…… 도망칠 기회를 보자.’
“입으십시오.”
유령대주 사림의 목소리는 여전히 스산하게 들렸다. 그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팔뚝을 타고 스멀스멀 벌레가 기어 올라오는 것 같았다.
창건은 사림을 지그시 응시하다가 천천히 경계하면서 개울에서 나와 옷을 입었다.
‘사람이 다 벗고 있는데…… 좀 저리 가지!’
그들은 부복하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민망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민망함 이전에 살인귀들의 앞이라는 공포까지 엄습했다.
마침내 옷을 다 껴입은 창건은 사림에게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저기…… 사람 잘못 본 것 같은데요. 그 소교주라는 사람은 제가 봤는데 아까 저기 남쪽으로 갔는데…….”
사림은 창건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딱 잘랐다.
“소교주님, 장난치실 때가 아닙니다.”
“자, 장난이라뇨?”
“흑의를 입고 소주의 금패를 가진 사람이 그럼 누구란 말입니까.”
그의 말을 듣는 순간, 창건은 깨달았다.
‘보이지도 않는 금패의 존재를 알아? 설마…… 그걸 쫓을 방법이 있었던 거야?’
금패는 창건의 옷에 깔려 있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금패를 쫓아왔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고 창건은 결론지었다.
‘미치겠네. 공에 눈이 어두워서 저주 받을 물건에 손을 댔구나.’
후회막심이었다. 창건은 불쌍한 표정을 지으면서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하여튼 난 아니라니까요! 진짜 잘못 본 거예요!”
“소교주님! 정말 이러실 겁니까!”
사림의 언성이 높아졌다.
“난 소교주고 뭐고 아니라니까요!”
창건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여기서 잡혀갔다가는 진짜로 죽는다. 무슨 핑계를 대든, 어떤 방법을 쓰든 도망가야 했다.
“후…… 역시 한설 장로가 말한 대로군요. 사안이 워낙 급하니,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사림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더니 영문 모를 소리를 했다. 기회를 봐서 도망가려던 창건은 갑자기 사림이 꺼지듯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목덜미에 따끔한 감촉이 느껴졌다.
“아, 안 돼…….”
졸음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창건은 견디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
“어지간히 말을 안 듣는 청개구리라더니, 정말이로군.”
사림이 나지막이 중얼거리더니 창건을 들쳐 업었다. 말썽 부리기로 악명이 자자한 소교주다웠다.
“돌아간다, 마교로.”
결국 창건은 납치 당했다.
광서성의 성도 남녕에서 북동쪽으로 칠십 리 떨어진 곳에 명화산이라는 산이 있다. 대낮에도 음산한 기운이 뻗어 나오는 귀산(鬼山)이다.
명화산은 중원무림을 양분하고 있는 마교의 본산이다. 명화산 전체를 마교의 건물들이 뒤덮고 있고, 명화산에 머무는 마교도의 숫자만 일만 이천이니 감히 중원에 견줄 세력이 없다.
중원 전역에 퍼져 있는 마교도까지 포함하면, 능히 천하를 상대할 수 있다는 것도 허풍이 아니다.
교주 직속의 암혈팔혼은 전각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침묵이 내려앉은 전각이었지만, 그들의 표정에서 충분히 초조함을 읽을 수 있었다.
묵묵히 차를 마시던 흑염군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자야(紫夜), 외궁에 특별한 조짐은 없더냐.”
자줏빛 눈동자를 가진 사내, 자야가 대답했다.
“예, 사귀장(四鬼將)에게서 이렇다 할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자야는 잠시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흑염군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자야를 응시했다. 병자처럼 파리한 안색의 자야는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외부에 드러난 세력이 조용할 뿐…… 그들이 비밀리에 육성한 인원을 움직인다면, 파악할 방법이 없습니다.”
흑염군은 그 말을 듣고 한숨을 내쉬었다.
“사귀장 앞에서는 무정살혼대(無情殺魂隊)의 감시마저도 무색하구나.”
“죄송합니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자야가 허리를 깊이 숙였다. 흑염군은 손을 저었다.
“너를 탓하는 게 아니다. 사귀장의 세력이 그만큼 커졌다는 얘기겠지.”
흑염군은 탄식하듯이 말했다.
“소교주님이 성지를 벗어나셨으니 사귀장의 손길에 고스란히 노출된 셈이다. 자칫하면 위험한 상황이 생길지도 모르니 걱정이다.”
거구의 사내가 흑염군의 말을 듣더니 이를 바드득 갈았다. 두툼한 흑색의 장포 위로 터질 듯한 근육이 드러났다. 그는 억눌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역시…… 흉수는 사귀장입니까, 대사형?”
흑염군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알 수 없다. 증거가 없지 않느냐, 정철(精鐵).”
“하지만 증거가 없더라도…… 그들의 소행이 확실하다면 모두 죽여 버리면 될 것 아닙니까.”
정철이 노기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흑염군은 착잡한 표정으로 정철을 응시했다.
“사귀장의 야망이 크다고 하나 그게 어찌 증거가 되겠느냐. 교주님의 목숨을 노리는 자들은 많고 많았으니 섣불리 단정 지어서는 안 된다.”
흑염군은 담담한 목소리로 정철을 타일렀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사귀장이 흉수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아니다. 사림이 모시러 갔으니 이미 교주님을 안전하게 모셔 오고 있을 테니까.”
좌중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림의 천리추종술은 천하제일이다. 유령대가 찾고자 마음먹는다면 그 누구도 피할 수 없었다. 하물며 금패까지 들고 있는 소교주라면 식은 죽 먹기다.
흉수가 짐작되는데도 불구하고 안심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유령대의 존재를 믿었기 때문이다. 그들이라면 가출한 소교주를 누구보다 먼저 찾으리라.
“정말 걱정이 되는 건 소교주님의 나이다. 암천마령기공을 전수 받으려면 최소한 이십 년의 정화 의식을 거치셔야 하는데…….”
뇌동고의 나이는 올해로 겨우 열일곱이었다. 최소한의 조건에서도 삼 년이나 모자랐다.
“과연 쉽사리 암천마령기가 융화될지 모르겠다. 부작용이라도 생기지 않을지…….”
흑염군이 말끝을 흐렸다.
다시 좌중에 침묵이 감돌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따라 놓은 찻물이 완전히 식을 무렵에 정철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대로는 너무 늦습니다. 이대로 밤을 넘기면 암천마령기에 손실이 생깁니다.”
“정철 사형, 유령대가 언제 실망시킨 적이 있던가요. 조금만 참고 기다려 보죠.”
유독 얼굴이 준수한 미청년이 정철을 말렸다. 선한 눈매를 가진 미청년은 누가 보아도 정도의 무인으로 착각할 용모를 갖고 있었다.
“후우, 그건 알지만 너무 답답해서……. 백뢰(白雷), 이대로 달이 져 버리면 곤란하지 않겠느냐.”
그랬다. 달이 지면 곤란한 건 사실이다. 흑염군은 차분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지만, 시선은 창밖의 하늘에 고정되어 있었다. 보름달이 하늘에 가득했다.
“왔군.”
야공을 바라보던 흑염군이 나지막이 중얼거리면서 허공으로 팔을 뻗었다. 그러자 곧 보름달에 작은 점이 생겼다가 이내 급격하게 커졌다.
쌔애액!
밤하늘을 가르고 창으로 들어온 것은 멋지게 생긴 독수리였다. 독수리는 당연하다는 듯이 흑염군의 손목에 내려앉았다. 흑염군은 독수리의 다리에 묶인 쪽지를 풀어냈다.
“소교주님은 일 각 뒤면 도착이다. 제단으로 이동한다.”
“드디어……!”
팽팽하게 긴장되었던 분위기가 부드럽게 가라앉았다. 이제 마지막 고비만 넘기면 될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