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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일곱 개의 그림자가 전각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들이 향한 곳은 지하의 제단이었다. 교주와 암혈팔혼만이 접근할 수 있는 금지(禁地)다. 애초에 주변 오십 장 반경은 허락받은 사람만 들어올 수 있는 제한구역이었다.
제단에는 시신이 있었다. 바로 사흘 전에 숨을 거둔, 이십일대 교주 뇌일혁이었다. 생전에는 파천마제로 추앙받았던 그였지만 목숨을 잃은 지금은 거죽만 남아 뼈를 감고 있는 꼴이다.
‘교주님, 소교주가 오고 있습니다.’
흑염군이 뇌일혁의 시신을 바라보다가 마음속으로 말을 건넸다.
‘저희를 믿고 편히 쉬십시오. 소교주는 저희가 잘 보필하겠습니다.’
가장 존경하던 사람의 죽음이다. 흑염군은 마음속으로나마 최대한의 예를 갖추었다.
‘부디 극락왕생 하시기를…….’
속으로나마 인사를 마친 흑염군은 미미한 인기척을 느꼈다. 희미하게 퍼지는 음산한 기운이었다.
흑염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늦었구나.”
“죄송합니다. 소교주를 모시는 데 시간을 허비했습니다.”
“아니, 딱 맞춰서 왔으니 문제될 건 없다.”
흑염군은 사림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회의를 입었던 사림은 어느새 다른 팔혼처럼 흑색의 장포를 걸치고 있었다.
그는 축 늘어진 청년을 안고 있었다.
“그분이 소교주신가.”
흑염군의 눈이 날카롭게 청년을 응시했다.
“예, 맞습니다. 흑의에 금패, 틀림없는 소교주입니다. 일혼께서도 처음 보십니까?”
“아니, 태어났을 때 보고 처음이니 두 번째로구나. 과연 세월이 지나 알아보지 못하겠다.”
나머지 팔혼의 관심도 소교주에게로 쏠렸다. 그들이 예상하고 있던 얼굴은 아니었다.
파천마제는 젊어서 오만하고 선이 굵은 인상이었는데, 어쩐지 소교주는 이목구비는 뚜렷했으나 눈매가 찢어지고 입술이 얇은 게 소심하고 얍삽해 보였다.
사림은 소교주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단상 위에 눕혔다. 바로 파천마제 뇌일혁의 시체 옆에 나란히.
“호오, 교주님은 닮지 않았네? 어머니를 닮았나?”
유일한 여자인 적혈화(赤血華)가 창건의 얼굴을 유심히 뜯어보면서 웃었다.
“자, 소교주께 인사드리는 건 의식이 끝난 다음이다. 소교주가 성지에 있었던 시간은 십칠 년이다. 그리 길지 않았던 만큼, 몸이 덜 만들어져서 반발이 강할 수도 있으니…….”
흑염군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팔혼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모두 조심하도록. 대법을 시작한다!”
흑염군의 목소리가 지하 제단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팔혼은 각기 팔방으로 흩어져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곧 팔혼이 특수한 기공을 운용하자 어깨 위로 검은 기운이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으음…… 추워…….’
창건은 갑자기 주변이 싸늘해지자 몸을 떨었다. 비몽사몽간이었으나 추위를 느꼈다.
암혈팔혼의 내공은 구파일방 장문인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다. 일혼인 흑염군의 경우에는 감히 비견할 자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그들이 익힌 내공심법은 하나만이 아니었다.
자신을 위한 것과 차기 교주를 위한 것이 따로 있었다. 내공심법이라기보다는 일종의 격공전기(隔空傳氣)의 수법으로, 죽은 교주에게 남아 있는 암천마령기를 꺼내서 차기 교주에게 전하는 사악한 수법이었다.
빠른 시간 안에 암천마령기를 전수 받으면 교주가 생전에 쌓았던 내공을 고스란히 취할 수 있다. 마교 교주에게만 대대로 내려오는 비전의 수법이었던 것이다.
흑염군이 크게 소리쳤다.
“흡(吸)!”
팔혼이 뽑아 낸 검은 기운이 뇌일혁의 시체에 쏘아졌다. 목내이(木乃伊)처럼 말라 버린 시체는 한순간 꿈틀 움직이더니, 가슴에서 거대한 흑색의 구체를 토해 냈다.
콰아아아아!
흑색의 구체는 끊임없이 요동쳤다. 바람이 통하지 않는 실내이건만 미친 듯이 회오리가 몰아쳤다. 등불이 모조리 꺼져 나갔고, 팔혼의 장포가 찢어질 듯이 부풀었다.
“전(傳)!”
흑염군이 다시 내공이 실린 목소리로 외쳤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실내였지만, 모두 소교주가 어디 있는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시각이 가려진다 해서 눈 하나 깜짝할 이들이 아니었다.
“으음…… 왜 이렇게 시끄러워…….”
그때였다. 수혈이 짚였던 창건이 소란스러운 나머지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떠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살을 엘 듯한 차가운 기운과 몸을 뒤흔드는 강렬한 바람이 느껴졌을 뿐이다.
“이, 이게 뭐야!”
창건은 기겁을 했다.
그러나 눈으로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몸 위로 무언가 사악한 것이 떠 있었다. 갑자기 잠에서 깬 창건은 지금 이곳이 어딘지, 어째서 누워 있는 건지 파악할 수도 없었다.
‘나한테 다가오는 건가? 안 돼, 절대 안 돼!’
창건은 눈을 부릅뜨고 몸을 옆으로 굴리려고 했다. 그러나 흑염군이 훨씬 빨랐다. 그가 양손을 마주 잡으면서 외쳤다.
“속(束)!”
전신을 옥죄는 강력한 내력! 창건은 미동조차 할 수 없었다. 창건은 서서히 하강하는 사악한 기운을 느끼며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아악!”
차갑다.
고통스럽다.
기이한 감촉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살을 헤집고, 고동치는 심장을 향해 빨려 들어갔다. 피가 모두 얼어 버리는 것만 같은 한기가 엄습했다.
“아아아아악! 으아아아악!”
손톱 밑에 가시를 죄다 박아 넣어도, 살을 저미고 뼈를 칼로 박박 긁어도 이보다 고통스럽지는 않으리라.
창건은 목이 찢어져라 비명을 질렀다. 기절할 수조차 없었다. 정신은 빌어먹을 정도로 또렷했다.
“으아아아아아아악!”
목구멍이 찢어져라 비명을 질렀다. 누군가 몸속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듯한 공포가 엄습했다. 혈관 구석구석까지 새끼손톱만 한 벌레가 파먹는 듯한 고통이 들었다.
“반발이 거세다! 공력을 늘려라!”
흑염군은 의외의 사태에 당황했다. 고통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거대한 힘이 몸속으로 억지로 들어가니 반작용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암천마령기를 밀어 낼 정도의 반발력이라니 너무 심하지 않은가.
‘정녕 십칠 년으로는 너무 짧았단 말인가!’
흑염군으로서도 처음 겪는 대법이었다. 선대 팔혼에게서 배웠을 뿐, 실제로 써먹을 기회가 없었다. 그들에게 들었던 얘기 중에 이 정도로 반발력이 강하다는 얘기는 없었다.
‘후계 즉위는 평균 이십 년 이상이 흐른 뒤에 하니…… 몸이 덜 여물었어.’
흑염군은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다. 성지에서의 안정화가 너무 짧았다. 하지만 이 정도라면 힘으로 누르면 된다.
흑염군은 제단이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남은 공력을 모두 짜내라! 셋을 세겠다! 단번에 눌러!”
“하지만 대사형! 그럼 소교주가 위험할지도 모르는데!”
정철이 다급하게 외쳤다. 흑염군은 당치도 않다는 듯 소리쳤다.
“이대로 시간을 끌면 소교주는 어차피 죽는다! 더 이상은 무리야! 한 번에 간다!”
흑염군은 크게 내기를 휘돌렸다. 이미 지금까지 소모한 내력만 해도 어지간한 고수가 수십 명 있어도 모자랄 양이었다.
“하나…….”
쿠우우우우!
팔혼의 어깨 위로 암흑의 기류가 휘몰아쳤다. 각기 절대자의 기운이 뻗어 나와 창건의 위로 소용돌이의 형상으로 모여들었다.
“둘…….”
암흑의 소용돌이는 점점 거대해졌다. 그 뿌리에 닿아 있는 암천마령기공의 구체를 찍어 누르기 위해서 온 힘을 모으는 듯했다.
흑염군이 눈을 부릅뜨면서 외쳤다.
“셋! 눌러라!”
콰아아앙!
창건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거력이 하나의 송곳으로 변해 암흑의 구체를 찍어 눌렀다. 반쯤 밀려 나오던 구체는 갑작스런 공격을 받고 단숨에 가슴속으로 쑤셔 들어갔다.
콰드득, 콰드드드득.
말 그대로 사람을 짓이기는 소리가 들렸다.
“크아아아아악!”
창건은 눈을 찢어져라 부릅뜨며 비명을 질렀다. 눈의 실핏줄이 모조리 터져 나가 피눈물이 흘렀다. 목소리가 쇠를 긁는 듯 갈라졌다.
“크헉!”
내장이 상한 듯 창건의 입에서 검은 피가 토해졌다.
“커, 커으윽.”
왈칵, 검은 피가 연이어 터져 나왔다. 창건이 토해 낸 피로 제단이 흥건해질 지경이었다.
“끝……났나?”
누군가 완전히 탈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제단에 휘몰아치던 바람은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졌다. 창건의 몸속으로 전부 흡수된 것이다. 흑염군은 손가락을 튕겨 등불에 불을 붙였다.
창건의 처참한 얼굴이 드러났다. 전신의 핏줄이 불거져 나와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 입에서는 쉴 새 없이 먹피를 흘렸고 사지를 덜덜 떨었다.
“겨우 성공했군.”
“대사형…… 이거 성공한 거 맞아요?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데?”
적혈화가 걱정스럽다는 듯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창건은 당장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몰골을 하고 있었다.
“암천마령기가 융화되고 있는 거야. 소교주가 아직 성지에서의 수련이 모자랐던 모양이다.”
“역시 그런 건가. ……열일곱에 즉위라니, 힘들 만도 해.”
적혈화가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창건을 향한 적혈화의 눈에는 은근한 색기가 감돌고 있었다.
“역시 미리 깨워서 전하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요?”
정철이 아쉬운 목소리로 말했다. 거구에 어울리지 않는 소심한 성격을 가진 그였다.
“그랬으면 소교주께서도 마음의 준비를 하셨을 텐데…….”
“아니, 마찬가지다.”
흑염군이 딱 잘라서 말했다.
“어차피 소교주는 교주님께서 돌아가시면 암천마령기를 전해 받는 걸 알고 계셨다. 그 때문에 성지에서 수련을 쌓은 것이고. 한시라도 바쁜 때였으니, 깨어나면 충분히 이해하실 거야.”
흑염군이 정철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정철은 한숨을 쉬면서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미쳐 버리기 직전까지 갔던 창건의 머릿속에는 하나의 상념만이 간신히 흐르고 있었다.
‘도대체, 내가, 왜, 여기서, 이런 꼴을 당하고 있는 거지…….’
전신 구석구석으로 파고드는 차가운 한기는 도저히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이건 꿈인가…….’
미칠 듯한 고통에 괴로워하면서도 창건의 눈에는 지하 제단의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세상이 붉다. 실핏줄이 터져서 그렇다는 사실도 모른 채, 창건은 이 모든 상황이 꿈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래서 세상도 붉게 보이는 것이리라.
‘……정말 꿈인가.’
물론 꿈은 아니었다.
그러나 곧 창건은 정신을 잃었다. 아득해지는 의식 가운데 ‘소교주님을 옮겨라’라는 말이 귓가를 스쳤다.
사방이 어두웠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방에서 거칠게 이를 가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잔뜩 억눌린 살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실패라고……?”
공포에 질린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주군.”
사죄는 소용없었다. 공기에 농밀한 살기가 흘렀다.
“내가 잘못 들었겠지? 그래, 그럴 거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목소리는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드릴 말씀이 없으면 안 되지. 만들어서라도 해야지. 아니면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던 내가 뭐가 되나?”
“주군…….”
“말해 봐. 성지에서의 암살을 질질 끌다 실패한 이유를, 가출한 꼬맹이 하나 잡지 못한 이유를.”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침묵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종은 주인의 말에 대답할 의무가 있었다.
“성지에서는 오장로의 감시 때문에…… 기회를 잡지 못했다고 합니다.”
“장난해? 암살하는 데 기회가 생기기를 기다려? 기회가 없으면 만들 줄도 몰라? 얼마나 병신 같은 녀석을 심어 놓은 거야? 그래서, 성지 밖에서는 왜 놓쳤어? 이십사랑(二十四狼)을 데려갔잖아.”
성지에서 그들이 심어 놓은 간자가 ‘소교주가 탈출했다’는 연락을 보내왔다. 그 즉시 그들은 이십사랑을 보냈던 것이다.
“최대한 빨리 소교주를 찾았지만…… 간발의 차로 유령대가 빨랐습니다…….”
“하, 그래? 유령대?”
그의 목소리는 점점 열에 들뜨고 있었다.
“유령대에게 뺏겼단 말이지? 일랑(一狼), 성지에는 간자를 심어 놓고 두 눈 뜨고 놓치고, 밖에서는 유령대에게 뺏겼다 이 말이지?”
“죄송합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쿠웅, 어둠 속에서도 흐릿하게 보였다. 일랑이 돌바닥에 이마를 짓찧고 절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소교주는 어디 있는데?”
그의 물음에 대답한 것은 또 다른 그림자였다. 쇠를 긁는 것처럼 거친 음성이었다.
“암천마령기를 전수 받았습니다.”
장내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주군이라 불린 남자는 한참 동안이나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진짜냐, 일풍(一風)? 소교주가 벌써 암천마령기를 받았어?
목소리에 진득한 살기가 담겨 있었다. 일풍은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바, 방금 의식이 끝났다고 합니다.”
“크큭, 그래? 그걸 보고만 있었단 말이지.”
그가 움직였다. 일랑과 일풍은 어둠에 적응한 눈으로 그의 움직임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