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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참 불쌍한 주군이야. 그렇지 않아? 일을 시켜도 들어 먹지를 않으니 말이야. 너희들이 바보인 건가? 내가 너무 많은 기대를 했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다음번에는 기필코 성공하겠습니다!”
일랑과 일풍이 사죄를 구했다. 그는 어둠 속에서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새하얀 치아가 얼핏 보였다.
“할 수 있다? 이번에는 실패했는데? 정말 할 수 있나?”
그가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목숨을 걸겠습니다.”
일랑과 일풍이 이구동성으로 답했다.
“그렇군. 다음에는 성공할 수 있는 일을 이번에는 실패했어. 애초에 성공할 수 있는 일인데 말이야.”
그의 목소리가 음산하게 변했다. 끈적거리는 살기가 일랑과 일풍을 올올이 휘감았다. 그는 오른팔을 허공으로 들어 올리더니 엄지와 검지를 튕겼다.
따악!
“크헉!”
경쾌하게 터진 소리가 일랑과 일풍의 내부를 헤집었다. 막대한 내공이 실린 일종의 음공(音功)이었던 것이다.
따악!
푸화악! 허공에 피분수가 뿜어졌다. 사방에 피비린내가 가득했다. 둘은 무릎을 꿇고 얼굴을 땅바닥에 처박고 있었다. 입에서는 꾸역꾸역 먹피가 쏟아져 내렸다.
그는 느긋하게 둘의 모습을 구경하다가 입을 열었다.
“유령대 따위에게 선수를 빼앗겨? 가당키나 하다고 생각하나?”
“끄윽, 다시는…… 지지…… 않겠습니다.”
그는 다시 일풍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둠 속에서 그의 눈은 날카로운 빛이 흘렀다.
“일풍, 너도 마찬가지야. 소교주가 왔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암살했어야지. 암천마령기를 받게 놔둬?”
“필히…… 죽이겠습니다…….”
그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아까부터 말했잖아, 너무 늦었어.”
그렇게 말하더니 다시 손가락을 튕겼다.
따악!
“크아악!”
둘은 다시 엄청난 양의 피를 토했다. 그러고는 바닥에 실신하듯 널브러졌다. 그들은 출혈이 너무 많았는지 바들바들 떨기만 했다.
“소교주는 내버려 둬. 암천마령기까지 전수 받았으면 팔혼의 경계가 만만치 않을 거야. 사령(死靈)의 축적에나 신경 써.”
둘은 심각한 내상으로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지만, 간신히 입을 열어서 답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는 활짝 웃었다.
“그래, 그래야지. 이번에는 실망시키지 마.”
‘추워…….’
미친 듯이 땀이 흘렀다. 몸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발가벗고 눈밭에 뒹굴어도 이보다 춥지는 않을 것이다.
‘괴로워…….’
정상적인 생각을 할 수가 없다. 뼛속까지 관통하는 냉기가 심장을 옥죄었다. 혈관 사이사이에 얼음 조각이 박히기라도 한 것처럼, 지옥 같은 추위가 전신을 갉아먹었다.
끊임없이 환청이 들렸고 계속해서 무언가를 토해 냈다. 감각마저 엷어져서 스스로 무엇을 토해 내는지조차 몰랐다.
‘먹은 것도 없는데……. 위액인가…….’
현실 감각이 없는 상념이 스칠 뿐이었다.
가끔 비몽사몽간에 창문이 보였다.
아주 가끔, 정신을 잠시 차렸을 때 정도다. 언젠가는 낮이었고, 다시 보니 밤이었다. 낮과 밤이 몇 번이나 교차했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살을 쑤시는 냉기도, 진탕되어서 뒤집히는 속도 어느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무언가가 심장을 파먹는 감촉만은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나가……. 내 몸이야……!’
완강히 거부해 봐도 심장을 침식하는 사악한 기운을 막을 수가 없었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느껴진다. 음험한 의지를 가진 시커먼 기운이 심장을 야금야금 뜯어먹고 조금씩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도대체…… 이게…… 뭐야…….’
사악한 기운의 정체는 마교의 암천마령기였다.
일반적인 내공과는 근본부터 다른 극악, 극사의 기운이다. 창건은 몸을 지키기 위해서, 무의식중에 태을심법(太乙心法)을 운용했다.
태을심법은 무림맹에서 하급무사에게 전수하는 중급의 내공심법 중 하나였다. 비록 성취가 빠르진 않아도, 정순하고 맑은 기운을 취할 수 있는 정도의 심법이다.
‘죽을 수…… 없어…….’
우우웅.
단전에 머물러 있던 태을지기가 전신 기혈로 뻗어 가기 시작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기운이 몸에 퍼지자 창건은 한결 냉기가 가시는 걸 느꼈다.
암천마령기는 심장을 삼키고 뇌까지 뻗쳐 올라가려 했다. 정도에서 말하는 주화입마의 단계다. 혼탁한 기운이 뇌를 잠식하면 잘해 봐야 광인(狂人)이요, 자칫하면 폐인이다.
‘크윽, 저리 가……. 사라져…….’
결국 마기가 머리에까지 뻗쳐 올라왔다. 창건은 머리가 깨지는 고통을 느꼈다. 이대로 일 각만 지체해도 그의 심성은 마인으로 변할 터였다.
‘나가……. 꺼지란…… 말이다…….’
창건은 엄청난 고통 속에서도 암천마령기를 거부했다.
우우웅.
순간, 전신을 휘돌던 태을지기가 모조리 백회혈로 치고 올라갔다. 머릿속에 퍼지려던 암천마령기는 태을지기와 만나 충돌하기 시작했다.
콰쾅! 콰콰쾅!
창건은 폭발음을 들었다. 바로 머릿속에서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끄, 끄아아악!”
의식이 없는 창건의 입에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오공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암천마령기는 마교 비전의 내공이다. 전대 교주의 내공을 고스란히 물려받으니 절정고수가 되는 건 식은 죽 먹기다. 반면, 약점도 있었다.
사마외도의 내공치고는 너무나 정순하여, 이종의 진기와 절대 섞일 수 없다. 애초에 다른 내공을 익힌 사람은 받아들일 수도 없으며, 설령 무공을 모른다 하여도 체질이 맞지 않으면 역시 받아들일 수 없다.
남의 내공을 받는 것이니 만큼 조건이 까다롭다. 몸에도 맞지 않고 태을지기와 충돌까지 하였으니, 창건이 머리가 터져서 죽는 건 시간문제였다.
고통에 시달리던 창건의 머릿속에 옛 기억이 떠올랐다.
‘여기 두 개의 내공심법이 있다. 바로 태을심법과 현천심법이다. 어느 쪽을 택하겠느냐.’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태을심법(太乙心法)은 부드럽고 가늘다. 흐름을 중시하는 유법(柔法)이다. 현천심법(玄天心法)은 강맹하고 굵다. 일격을 중시하는 강법(剛法)이다.’
‘태을심법으로 하겠습니다. 저와 어울리는 것 같네요.’
나중에야 알았지만 태을심법은 무당과 소림의 합작품이었다. 현천심법은 화산과 남궁세가가 함께 만든 것이고. 하급무사의 대부분은 현천심법을 익혔다. 익히기 쉽고, 강력한 기운을 주기 때문이다.
반면에 태을심법은 절정에 이르기 전까지는 여타의 심법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다만 마음이 조금 더 차분해지는 작용이 있을 뿐이다.
바로 사악한 기운을 배척하는 파사(破邪)의 효능이 있다는 얘기다.
태을지기는 창건을 보호하기 위해 맹렬히 싸웠다. 단전에 담겨 있던 한 방울의 내력까지 모조리 백회혈로 치달려 싸웠다. 그러나 수백 년을 이어져 온 암천마령기를 막아 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주 잠시 백회혈을 보호했던 태을지기는 일 각도 버티지 못하고 산산이 흩어졌다.
콰아앙!
귀가 터지는 듯한 굉음이 들렸다. 바로 머릿속에서.
“끄아아아악!”
창건은 다시 피를 뱉었다. 지켜보던 시녀가 놀라 비명을 질렀다. 창건은 학질 걸린 사람처럼 온몸을 덜덜 떨었다.
“커헉, 크아아악!”
비록 작은 기운이었으나 태을지기는 확실하게 암천마령기를 방해했다. 그것만으로 암천마령기를 뒤흔들기에는 충분했다. 애초에 성지에서 수련을 쌓은 후계자가 아니기에 융화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 방점을 태을지기가 찍은 것이다.
콰앙! 콰콰쾅!
백회혈에 머물렀던 암천마령기가 전신으로 내달렸다. 뇌를 잠식하는 것은 무위로 돌아갔다. 목적을 잃은 암천마령기가 팔대 기혈을 휘돌면서 혈도를 헤집었다.
“커억! 크아아악!”
상상도 할 수 없는 거력이 전신으로 퍼지자 창건은 쉴 새 없이 피를 토하고 비명을 질렀다. 내장이 다치고 혈도가 너덜너덜하게 상했다.
그렇게 암천마령기가 대주천을 몇 바퀴나 휘돌았을까. 창건이 평생 익힌 태을지기는 온데간데없이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단지 암천마령기만이 남아 창건의 혈도를 타고 흘렀다.
제4장 살기 위해서
“……끄으윽.”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창건은 고통에 찬 신음을 흘리며 눈을 떴다.
‘도대체…… 무슨 일이…….’
통증이 너무 심했다. 쇠망치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작신작신 두들겨 맞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덜덜 떨리는 손을 눈앞으로 들어 올렸다.
핏기가 가신 창백한 피부, 기괴하게 튀어나온 푸른 핏줄이 마치 남의 손 같았다. 손등으로 튀어나온 핏줄은 팔뚝까지 거미줄처럼 이어졌다.
‘이, 이게 뭐야…….’
옷에 손을 넣어 확인하니 전신에 핏줄이 불룩 솟아 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병? 아니야…….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창건은 기억을 되짚었다. 지금도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몽롱해서 정신을 집중하기 어려웠다. 마침내 꿈과 현실을 구분한 창건은 자신이 마교의 소교주를 엉겁결에 살해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유령대를 만났어. 잡혀 왔고…… 기억이 없다.’
다만 죽음과도 같은 고통만이 뇌리에 새겨져 있을 뿐이다. 무언가 괴로운 꿈을 꾼 것 같은데 기억에 없었다.
‘고문이라도 당한 걸까? 아니야, 그럼 이런 비단 금침을 주진 않았겠지. 아아, 모르겠어. 머리가 너무 아파.’
더 이상 생각할 수가 없었다.
“후우.”
창건은 머리를 부여잡고 심호흡을 했다. 크게 숨을 들이쉬자 머리가 깨질 듯한 고통이 한층 선명하게 느껴졌다. 인상을 찌푸리며 주위를 살폈다.
‘도대체 여긴 어디야.’
아무도 없다. 화려한 방, 거대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침상에 비단 이불, 그리고 자신이 입고 있는 검붉은 장포가 지금 이해할 수 있는 전부였다.
‘설마…….’
창건은 검붉은 장포를 보고 마른침을 삼켰다.
‘여긴 마교인 거냐.’
새삼 깨달았다.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은 마교의 상징이었다. 유령대주에게 잡혀 온 게 꿈이 아니다. 한참을 긴장하고 주위를 살피던 창건은 일 각여 만에 한숨을 쉬었다.
‘내가 경계한다고 마교 고수들이 날 못 죽이겠냐. 차라리 운기조식이나 하자.’
심한 부상을 입었어도 운기조식을 거치면 어느 정도 통증이 가신다. 창건은 자신이 다친 거라고 여기고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크윽.”
자세를 잡고 앉는 것조차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정작 당황스러운 건 그 다음이었다.
‘내공, 내공 어디 갔어!’
단전에서 극심한 허탈감이 느껴졌다. 비록 많지는 않아도 수 년 동안 착실하게 쌓아 올린 내력이다. 그게 전혀 보이질 않았다.
‘게다가 이 질척한 건 뭐야!’
태을지기는 한 방울도 없었다. 대신에 차갑고 음습한 기운이 혈도 곳곳에 덩어리져서 엉겨 있었다. 심지어 단전에도 생전 느끼지 못한 차가운 기운이 고여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태을심법을 운용해 보았다. 만약 같은 종류의 내공이라면 태을심법의 운용방식대로 움직여 주리라. 그러나 단전에 엉긴 기운은 단단히 굳어 버린 진흙처럼 미동조차 하질 않았다.
진기(眞氣)가 아니라는 얘기다. 허탈해진 창건은 소리도 못 지르고 입을 쩍 벌렸다.
팔대 기혈 중 무사한 곳이 없다. 모조리 너덜너덜하게 변했고 내공은 씻은 듯이 사라졌으며 그 자리에는 웬 흙덩이들이 쌓여 있었다.
‘망가졌어. 완전히 망가졌어.’
창건은 풍운청룡단에 뽑힐 정도로 상승의 자질을 가진 무재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파악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회복이 불가능해.’
창건은 철저하게 망가졌다고 판단했다. 제아무리 일류 의원이라도 창건을 진맥하면 백이면 백, 혈도에 독이 쌓였다며 고개를 저으리라.
“이럴 수는 없어. 이럴 수는…….”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차라리 꿈이기를 바랐다.
“어머?”
절망하던 창건의 귓가에 웬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건 수수한 옷차림의 여인이었다.
“누구……?”
그녀는 깜짝 놀란 듯하더니 재빨리 예를 취했다.
“깨어나셨군요. 인사드리겠습니다, 저는 소교주님에게 배정된 시녀예요.”
“소교주……님?”
순간 알아듣지 못했다.
이미 죽여 버린 소교주를 말하는 것인가. 죽였다고 생각했는데 살아 있었던가.
잠깐 두리번거린 창건은 곧 상황을 깨달았다.
“소교주라는 게…… 나 말인가요?”
“예? 아, 예. 소교주님이시잖아요?”
시녀의 반문을 듣는 순간, 머릿속에 번개처럼 스쳐 지나가는 기억이 있었다.
‘소교주님, 장난치실 때가 아닙니다. 흑의를 입고 소주의 금패를 가진 사람이 그럼 누구란 말입니까.’
창건이 신음처럼 입을 열었다.
“빌어……먹을…….”
회의무복을 입고 나타났던 유령대주가 말했다. 소교주님이라고.
‘소교주인 줄 알고 잡혀 왔군. 멍청한 녀석들, 주인 얼굴도 몰라!’
물론 유령대주가 뇌동고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면, 창건은 지금쯤 머리와 몸이 따로 놀고 있었을 게다. 그래서 창건은 차라리 운이 좋은 게 아닌가,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할지 고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