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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 호위무사 1(2화)
1장, 청부의뢰(2)


탁!
“이것은 선수금이다. 금으로 환산하자면 족히 십만 냥은 될 것이다!”
장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십만 냥?”
쌀 한 가마니가 대략 다섯 냥 정도.
서른 냥이면 한 식구가 한 달을 먹을 식량을 구입할 수 있는 돈이다.
천 냥이면 어지간한 중소 문파의 일 년치 예산. 무림맹이 아무리 거대한 단체라고는 하지만 십만 냥은 무림맹의 일 년치 예산에 육박하는 엄청나게 큰돈이었다.
“일이 끝나면 십만 냥을 더 주마.”
장한은 호주머니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하면서 물었다. 주머니 안에는 묘안주와 홍안에서만 나온다는 홍옥, 비취 등의 보석들이 가득 담겨져 있었다. 지방의 유지들이라고 하더라도 손쉽게 구경할 수 없는 큰돈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러시오? 이 정도면 황제의 옥쇄라도 훔쳐다 줄 수 있소만?”
“그런 것은 필요 없다. 다만 한 여자를 지켜 주면 된다.”
“호위 일이요?”
흑의경장의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기한은 삼 년. 삼 년 동안만 그녀가 죽지 않게 지켜 주면 된다.”
“뭐 그 정도 일 가지고 이십만 냥이나 쓰고 그러시오? 이 정도 돈이면 일류급 무사를 몇 십 명도 고용할 수 있소만. 혹시 이중에 가짜가 섞여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장한은 보석을 집어 하나하나 살펴보며 말했다.
그의 눈에는 탐욕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흑의경장 사내가 눈살을 찌푸렸다.
‘천박한 놈! 장로님은 왜 이런 놈에게 일을 맡기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네.’
“대신 아무도 모르게 은밀히 지켜 줘야 한다. 그녀조차도 보호받고 있는지도 모르게.”
“큭큭. 그 정도야 호위의 기본 중의 기본이지. 근데 그녀의 신분이 뭐요? 혹시 숨겨 논 맹주의 딸이나 뭐 이런 것은 아니겠지요?”
장한이 툭 내뱉은 말에 흑의경장 사내가 움찔거렸다.
그 반응이 재미있었는지 장한이 다시 말을 이었다.
“어? 정말인가 보네? 맹주에게 딸이 있었소?”
흑의경장 사내가 서릿발을 풍기는 표정으로 싸늘하게 소리쳤다.
“헛소리! 쓸데없는 추측은 하지 말도록! 네가 지켜 줘야 할 여인은 당문화라는 소저다!”
“당문화?”
어디선가 많이 들어 본 이름이다. 그리고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사천당가에 말괄량이가 한 명 있다는 것을 상기시켰다.
당씨라는 성이 흔한 성은 아니고… 장한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보았다.
“혹시 사천당가?”
“맞다.”
“설마 사천당가에 말괄량이?”
…….
침묵은 무언의 긍정.
순간 장한의 얼굴에는 의의함이 물들었다.
“그런데 당가의 여식을 왜 무림맹에서 지켜 준단 말이오? 당가가 무림맹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 한들 여식하나 지켜 주는데 이십만 냥을 투자할 만큼 무림맹이 풍족한 것은 아닐 터인데?”
확실히 이상한 일이다.
더군다나 이십만 냥이라는 거금을 들여가면서 말이다.
흑의경장 사내는 질문에 친절하게 대답해 줄 의향이 없었다. 돌아오는 것은 싸늘한 냉소뿐이었다.
“그것까진 네가 알 필요 없다! 너는 그저 시키는 일만 해주면 된다!”
이른 바. 묻지 마 청부라는 것인가?
사천당문의 당문화라면 열다섯에서 스물 살 사이 정도. 그 나이에 어디서 죽을 만큼의 원한을 지었을 리는 없을 테고.
감히 천하의 사천당문의 여식을 죽이겠다고 달려들 정도의 적이라면 최소한 구파일방 급이나 그 이상 가는 세력의 집단.
그러한 세력을 가진 곳은 무림에 몇 군대 되지 않는다.
그들 중 황오현 장로와 적대하고 있는 세력을 추스르면. 딱 한 군데가 나온다.
무림맹의 원로원. 그리고 무림맹의 대공자.
설마 그들이었던가? 당문화를 노리고 있는 자들이?
장한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노리는 자들이 원로원이요? 설마 정말로 당문화가 무림맹주의 딸은 아니겠지?”
하지만 흑의경장 사내는 순순히 대답해 줄 의향이 없는 듯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그때 알려 주도록 하지. 지금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
장한이 투덜거렸다.
“쳇, 비밀도 더럽게 많은 고객님일세.”
“왜? 겁나나? 하지 못하겠으면 못하겠다고 말해라!”
“왜, 내가 거절하면 살인멸구라도 하시게?”
장한이 장난스럽게 손날을 세워 자신의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흑의경장 사내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자신의 칼자루에 손을 가져다 대며 말했다.
“때에 따라 필요하다면!”
그는 장한을 무서운 눈으로 쏘아보고 있었는데 그의 대답 여하에 따라 금방이라도 칼이 뽑혀져 나올 것 같았다.
장한이 너스레를 떨며 손을 내저었다.
“농담이요. 농담! 거참. 이 정도 금액이면 맹주의 딸이 아니라 황제라도 지켜 드릴 수 있지. 당문화는 지금 어디 있소?”
괜히 여기서 더 이상 자극해 봤자 좋을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장한이 누그러진 말투로 대답했다.
흑의경장의 사내는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 장한에게 던졌다.
그것은 동그랗게 생긴 패였다.
“그것을 가지고 무림학관에 가면 된다.”
패를 집어든 장한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이것은 무림학관에 입학하는 학생들에게 나눠 주는 패 아니오?”
“맞다.”
“그런데 왜 이걸 나에게 주는 거요?”
“당문화는 올해 무림학관에 입학할 예정이다.”
“설마, 무림학관에 학생 신분으로 잠입을 해야 하는 거요?”
“물론이다. 호위 대상이 있는 곳이라면 당연히 호위무사도 따라가야 하지 않겠나? 설마 이곳이 그 정도 능력도 안 되는 곳은 아니겠지?”
맞는 말이다.
청부업자가 이것저것 다 따지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으니까.
장한이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이내 히죽거리며 대답했다.
“그것은 걱정 마시오. 본문에서 불가능한 일은 없으니까. 그런데 말이요…….”
걸걸한 그의 목소리가 은근한 어조로 바뀌면서 나지막해졌다. 그는 거의 속삭일 듯이 들릴까 말까 한 목소리로 눈에 이채를 띠며 물었다.
“소문에 듣자 하니 당문화 소저가 꽤 예쁘게 생겼다는데… 그 말이 사실이오?”
흑의경장 사내가 한심하다는 눈으로 장한을 위아래로 훑었다.
부리부리하게 생겨서 산적질이나 하면 딱 어울릴 만한 외모를 지녔으면서 꼴에 사내라고 여자를 밝히다니. 무림맹의 무사로서 그 자존감을 지키며 살아온 게 이십 년.
이런 놈과 마주하며 대화를 하고 있으려니 자신의 겪이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고작 이런 놈에게 무림맹의 사활이 걸린 문제를 맡겨야 한다니.
별로 좋지 않은 기분.
그러다 보니 자연히 나오는 목소리 또한 곱지가 않다.
“지금 이 상황에서 고작 한다는 말이 그것밖에 없더냐?”
“나는 궁금한 것은 못 참아서 말이지.”
흑의경장 사내는 저도 모르게 살심이 치솟음을 느꼈다.
하지만 장한도 눈빛 하나 변하지 않고, 오히려 되물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장한도 보통내기가 아닌 듯싶었다.
흑의경장 사내가 짜증 섞인 말투로 내뱉었다.
“나도 모른다. 됐나?”
“쳇, 댁도 모르면서 유세떨기는.”
“뭐, 댁?”
흑의경장 사내는 기가 막혔다.
“아까부터 댁은 계속 반말을 하고 있었는데, 나라고 하지 말란 법 있어? 자고로 오는 말이 고아야 가는 말도 곱지. 왜 이러니까 기분 나빠?”
“이놈!!!!!!”
흑의경장은 하마터면 검을 뽑아 사내를 벨 뻔했다. 하지만 극도로 발휘된 인내심이 그의 검을 꾹 가로막았다. 그 여파로 인해 손잡이에 얹혀진 손이 부들거렸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장한이 흑의경장 사내의 턱 앞에 얼굴을 들이대며 씨익 웃었다.
“잘 참았소. 하마터면 밖에 있던 애꿎은 생명 스물세 개가 사라질 뻔하지 않았소? 나는 내 앞에서 칼을 뽑는 자는 살려 두지 않는 편이라서 말이지.”
흑의경장의 바로 턱밑에서 풍기는 살기를 느끼며 놀라움과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한꺼번에 교차됐다.
자신의 코앞까지 왔음에도 불구하고 장한의 움직임을 전혀 읽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 놀라웠고, 자신의 턱밑까지 사내가 왔음에도 자신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꼈다.
그냥 여자나 밝히는 시시한 산적 같은 놈인 줄만 알았더니 장한은 자신의 예상보다 훨씬 웃도는 고수임이 분명했다.
장한은 탁자 위에 놓인 주머니를 품속에 넣으면서 말했다.
“의뢰는 접수됐으니 그만 가 봐도 좋소. 일은 알아서 착수할 테니.”
이건은 명백한 축객령.
흑의경장 사내도 이쯤 되니 그냥 할 말이 없었다. 분하지만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오늘 일은 무덤까지 가지고 가야 한다. 알았느냐?!”
장한을 힘껏 노려보고는 들어왔던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집을 포위하고 있던 기운들이 동시에 사라졌다.
“당문화라…….”
모두가 사라진 후 장한이 중얼거렸다.
그런데 장한의 얼굴이 조금 이상했다. 아니, 몸도 이상했다.
주먹으로 두들겨 맞은 것처럼 근육이 부풀었다 줄어들었다 하더니 이내 괴이한 소리와 함께 뼈들이 탈골되기 시작했다.
그러고 몇 번 눈 깜빡일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까? 탈골된 뼈들이 제자리를 찾아가고, 근육의 움직임도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괴이한 소리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잦아졌다.
장한이 시전한 것은 인피면구나 기타 재료 없이 순수한 내공으로만 시전하는 변체환용술(變體環容術)이었다.
곧이어 장한의 얼굴 윤곽이 서서히 드러났다. 키는 조금 줄고, 몸집도 조금은 왜소해졌다.
장한이 서 있던 자리에는 청년이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어려 보이는 소년이 서 있었다.
눈썹은 짙고 눈망울은 선명했으며, 일그러트린 입매는 그 특유의 고집이 잔뜩 서려 있었다. 장한의 모습 때와는 달리 몸에는 군더더기 하나 없이 매끈했는데, 살짝 벌어진 앞섬 사이로 탄탄한 근육이 엿보였다.
소년이 입을 오므리며 휘파람 소리를 냈다.
삐이이익―!
그러자 잠시 후 새 한 마리가 구멍 난 판자 사이로 들어오더니 소년의 어깨 위에 앉았다.
푸드드득―!
일종의 매였는데, 보통의 매보다는 몸집이 조금 작고, 금색빛을 띠며 깃털에는 참기름을 바른 것마냥 윤기가 흘렀다.
“금아야. 이것을 전해 주렴.”
소년은 매의 오른쪽 다리에 매달려 있는 조그만 통에 종이를 접어 넣었다. 금아라고 불리는 매는 마치 소년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양 작고 앙증맞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모습이 참으로 귀엽고 앙증맞았다.
“좋아. 그럼 부탁한다.”
끄덕끄덕.
푸드드득―!
매는 들어온 곳을 통해 다시 빠져 나갔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르던지 한순간 점이 되어 사라지는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좋아. 이 일을 끝내고 되돌아왔을 때쯤이면 스무 살이 넘어 있겠군. 그러면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해방인가?”
소년이 히죽거렸다.
왠지 좋아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금아가 날아간 지 한 시진이 조금 못되었을까? 곧장 한 방향을 향해 날아가던 금아는 목적지 부근에 다다랐는지 하늘을 한 바퀴 선회하더니 어느 허름한 객잔 안으로 날아 들어갔다. 객잔의 입구에는 조그마한 편액이 걸려 있었는데, 그곳에는 무영객잔이라고 쓰여 있었다.
객잔 귀퉁이에는 방으로 짐작되는 곳이 있었는데, 창 문틈 아래로 금아가 드나들 만한 작은 공간이 있었다.
금아가 그 안으로 들어가자 어느 사내가 익숙한 손길로 금아의 오른쪽 발에 매달린 전서구 통을 열더니 종이를 꺼내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