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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 호위무사 1(5화)
1장, 청부의뢰(5)


그들이 사라진 후.
남겨진 광동사귀들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참담한 심정으로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방금 자신들에게 일어난 일들이 꿈만 같았다. 꿈이라면 빨리 깨었으면 좋으련만, 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생생한 게 문제였다.
둘째가 굳건한 표정을 다지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형님! 우리 그 장 노인이라는 영감한테 갑시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어차피 우리는 갈 곳도 없지 않소? 더군다나 우리를 벼르고 있는 패거리들이 한둘이 아닌데, 괜히 그들 눈에 띄어 봤자 맞기 밖에 더하겠수? 그럴 바에는 그 장 노인이라는 영감한테 몸을 의탁합시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이 바닥 생활에 점점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영원한 것은 없는 법. 어떤 식으로라도 그들이 이 짓을 그만해야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다만 그 시일이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을 뿐이다.
젊었을 때야 패기로 버텼지만, 그들도 이제는 점점 나이가 들고 있었다. 평범한 직장, 화목한 가정, 그리고 자신을 꼭 닮은 자식들. 지난 몇 년 동안 서로가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이 바닥을 뜬다면 가장 갖고 싶었던 것들이었다.
그동안 그들을 이 정도까지 버티게 해주었던 것은 의리라는 단어의 울타리였다.
첫째가 결연한 의지를 다진 채 외쳤다.
“좋다! 언제고 이 바닥을 떠야 할 날이 올 거라는 것을 직감했다. 다만 그 시일이 조금 앞당겨졌을 뿐. 둘째의 말대로 나는 장 노인에게 몸을 의탁할 생각이다. 그리고 조금은 사람답게 살 생각이다. 너희들의 의사까지 내가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떠날 사람은 떠나라. 붙잡지 않으마.”
첫째가 먼저 걸음을 떼었다.
한 걸음이 천금같이 무거워 쉽사리 떼어지지가 않았다. 아마도 그의 발걸음이 무겁다고 여겨지는 것은 그동안 정들었던 아우들과의 정이라는 무게 때문이리라.
다른 사람이 본다면 꼴 같지도 않은 신파극을 찍는다고 눈살을 찌푸리겠지만 이들에게는 지금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될 순간이었다.
그리고 두 발자국을 떼기도 전에 둘째가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세 발자국, 네 발자국.
“형님들! 같이 갑시다!”
다섯 발자국을 채 떼어 놓기도 전에 셋째와 넷째가 동시에 외쳤다.
“맞소. 죽는 날 같이 죽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죽더라도 같이 죽읍시다.”
첫째와 둘째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동생들이 자신들에게 뛰어오고 있었다.
“형님!!!”
“아우야!!!”
십 년을 같이 한 형제들.
그들은 부둥켜안고, 다시 한 번 서로의 우정을 확인하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 * *

길위천은 무황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끊임없이 말을 건넸다. 그는 보기와는 달리 말이 무척이나 많은 편이었다. 무황은 그를 무시하려고 노력했으나, 길위천은 그런 무황의 태도를 신경 쓰지도 않았다. 처음에는 자신이 무공을 처음 배웠을 때를 시작으로, 하도 들어서 귀에 박힌 식상한 고수들의 무용담까지 늘어놓았다.
듣다 듣다 귀찮아진 무황은 걸음을 멈추며 물었다.
“왜 자꾸 따라와?”
길위천이 우물쭈물 대답했다.
“나도 이 길로 가야 하오.”
할 말이 없어졌다. 목적지가 같으니 길이 같을 수밖에.
무황이 다시 걸음을 떼었다.
그러자 길위천이 또 졸졸 쫓아왔다.
“그런데 형씨 뭐 하나만 물어봅시다. 무공은 도대체 누구한테 배운 거요?”
“…….”
“그 정도 무공이라면 흔하지 않을 텐데. 혹시 무당제자요? 아니면 청성? 아, 아까 보니까 손과 발을 쓰던데 혹시 세가 쪽이요?”
“…….”
“무공은 몇 살 때부터 익힌 거요? 이류는 넘은 것 같던데. 수위가 어느 정도요? 이류? 아니면 일류?”
“…….”
“아참 그러고 보니까 이름도 안 물어봤네. 난 길위천이라고 하오. 형씨 이름은 어떻게 되오?”
무황은 귀찮게 하지 말고, 집에나 다시 돌아가라고 말하려는 순간, 길위천이 입을 떼었다.
“실은 난 돌아갈 곳이 없소. 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시고, 장원이 하나 있었는데 그마저도 흑도 패거리들에게 빼앗겼소. 숭양문이라는 조그마한 문파를 운영 중이었는데 아마도 아버지께서 문파를 담보로 돈을 빌려 쓴 모양이오. 그래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무림학관에 입부 신청서를 넣었는데, 다행히 합격했소. 예전에 조부께서 무림맹의 무사로 일하신 적이 있는데, 임무 도중에 돌아가셨다고 하오. 아마도 그 점을 참작해서 합격시켜 준 모양이오.”
무황은 대꾸할 말이 없어서 그냥 육포나 뜯었다.
조금 전에 처음 본 놈의 집안 사가 궁금하진 않았지만, 그 면전에 대고 면박을 줄 만큼 무황의 심성이 못되지는 않았다.
“지금은 비록 이 모양 이 꼴이긴 하지만, 나는 꼭 일류무사가 되어 숭양문을 재건할 계획이요. 어떻소. 이 정도면 꽤 남자다운 포부가 아니오?”
남자가 돼서 무공을 배우면 적어도 천지를 쩌렁쩌렁 울릴 정도의 명성을 떨쳐야지 고작 목표라는 게 일류무사란다.
무황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미화시켜서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퍽이나.”

관도를 곧장 따라 일다경쯤 가니 전방으로 우뚝 솟은 건물이 보였다. 길위천은 연신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건물을 구경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길위천의 고향은 지리적으로나 꽤 낙후된 곳인지라 이런 으리으리한 건물들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광동성 내에서도 으리으리하기로 손꼽히는 무림학관은 그 담벼락의 둘레만 백 장이 넘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했다.
깨끗하고 고풍스럽게 생긴 전각들은 수십 명의 기관진학의 대가들과 지리학. 건축에 능통한 이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작품으로, 혹시 모를 외부의 침입자나 비상시에 진법으로 활용할 수 있게 설계되어 있었다.
정문 입구에는 몇 명의 무사들이 탁자를 가져다 놓고 의자에 앉아 있었으며, 그 앞으로는 입학생들의 가족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모여 있었다.
무림학관은 칠 일에 걸쳐 신입생을 받았는데, 오늘이 육 일째 되는 날이었다. 천 명의 입학생 중 벌써 구백 명이 넘는 학생들이 수속절차를 끝낸 것을 보면 무황이와 길위천은 꽤 늦게 온 편이라 말할 수 있었다.
먼저 길위천이 접수대에 다가가 패를 내밀었다.
“안녕하시오. 나는 운남 지방에서 온 길위천이라고 하오.”
“흐음. 어서 오시오. 패를 잠깐 줘 보시오.”
길위천은 떨리는 마음으로 공손히 패를 내밀었다.
접수관은 패의 뒷면에 새겨져 있는 글씨를 보더니, 이내 장부를 꺼내 뒤적였다. 패의 진위 여부와 장부에 등록되어 있는 이름과 패에 기록되어 있는 이름을 대조해 보는 것이 그들의 주된 임무였다.
그의 시선이 깨알같이 써진 글씨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훑더니 어느 지점에 가서 멈춰 섰다.
“여기 있군. 운남 지방의 숭양문. 길위천. 그대가 본인이요?”
“그렇소.”
“길위천이라… 좋소. 접수됐소이다. 절차에 따라 간단한 신체검사를 끝낸 후, 시험을 볼 것이니 안내해 주는 대로 따라가면 되오.”
“시, 시험이오?”
길위천이 화들짝 놀라며 되묻는다.
“올해부터 생긴 규정이오. 모든 입관생들은 학관 내 규율에 따라 시험을 봐야만 하오. 뭐, 간단한 것이니 별문제는 없을 거요.”
길위천은 시험이라는 말에 갑자기 마음이 불안해졌다. 몸집도 왜소하고, 무공이라고 배운 것은 어린아이도 다 안다는 삼재검법이나 육합권법 같은 삼류 무공이 전부였다. 시험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는 모르지만, 무림학관 같은 대단한 곳에서 치르는 시험이라니 왠지 자신감이 없어졌다.
그 모습을 보고 면접관이 웃었다.
“너무 걱정 마시오. 사지육신 멀쩡하고 아픈 데만 없으면 모두 통과하는 시험이니. 그냥 형식적인 절차니 편하게 임하시면 될 것이오.”
그 말을 들은 길위천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 그렇소?”
“걱정 마시고, 그만 들어가 보시요. 그대 뒤로도 줄 서고 있는 입관생 더 있으니.”
면접관에 말마따나 길위천 뒤로도 세 명의 대기자가 자신의 순번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속에는 무황도 있었다.
“알았소.”
길위천이 무황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먼저 들어가 보겠소. 시험에 통과해서 저 안에서 웃는 얼굴로 다시 만납시다.”
무황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그냥 고개만 까딱했다.
길위천이 들어가고 무황의 차례가 돌아왔다.
그는 주섬주섬 패를 꺼내 내밀었다.
면접관이 패를 살피더니 이내 장부를 뒤적거렸다.
“어디 보자. 절강의 철가장이라… 아, 여기 있군.”
면접관은 장부에 써 있는 글씨를 보고, 무황을 쳐다보고를 반복했다. 그리고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절강에 있는 철가장에서 온 분 맞소?”
“맞는데요?”
“설마 그대가 화무린이요?”
“왜 그러시죠?”
면접관은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철가장의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는 이름이 하나인데. 그게… 여자라고 써 있소이다. 철가장의 외동딸이라고 등록되어 있구려.”
“여, 여자라고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어디 좀 봐요!”
무황이는 기겁을 하며 장부를 쳐다봤다.
그곳에는 화무린(女)이라고 써 있었다.
처음에는 자신이 잘못 본 줄만 알았다.
하지만 몇 번을 들여다봤지만 글씨는 바뀌지 않았다.
분명한 男이 아닌 女!
“그럴 리가 없는데! 뭐가 잘못된 거 아니에요? 행정 착오라던가?”
“크흠! 무림맹에서 하는 일에 실수란 존재할 리가 없소! 본관에 입관등록신청을 하려면 본인이 직접 와야만 하오. 가서 그녀보고 직접 오라고 하시오. 자, 다음!”
“말도 안 돼!”
무황은 머리에 망치를 두들겨 맞은 기분이었다.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부분이었다.
화무린이라고 써 있는 것을 확인하기는 했지만 자신은 그게 남자 이름인 줄로만 알고 있었던 것이다.
무황은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으악! 미치겠네. 여자라니!”

* * *

야심한 시각, 황오현 장로가 누군가와 대면하며 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맞은편에는 무황을 찾아갔던 흑의경장의 사내가 서 있었다.
“그래, 맡긴 일은 잘되었고?”
“예, 지금쯤이면 별 탈 없이 수속을 끝마쳤을 것입니다.”
“무림학관은 입관하는데 꽤 까다로운 곳이라네. 수상한 자들은 절대 들여보내지 않는 곳이지.”
“예, 그래서 신경 써서 입관패까지 준비했습니다.”
“그래?”
“마침 아이들을 선별하는 작업을 제 수하가 하고 있습니다. 절강에 있는 철가장이라고 버려진 장원이 하나 있는데, 철가장의 딸아이 앞으로 입관패를 보내도록 했습니다. 그것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딸?”
“아무래도 호위 대상이 여자라면 여자가 붙어 있는 편이 서로에게 편하지 않겠습니까?”
“흐음. 그렇군. 무림학관은 여자, 남자 기숙사가 별도로 운영되는 곳이지. 특히 밤 시간에는 여자 기숙사엔 출입이 아예 불가능하지.”
황오현 장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남자는 곤란하지. 자는 사이에 습격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예, 맞습니다.”
“괜히 우리가 당 소저를 보호한답시고, 움직이면 대공자 측에서 그녀의 정체를 알아볼 게 분명해. 그럴 바에는 차라리 그들에게 맡기는 편이 낫겠지. 그들은 그런 일에 전문가니까 말이야. 이번 일은 잘한 일이야.”
“그런데 그들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걱정이 돼서…….”
“내 짐작대로 그들이 무영문의 후예가 맞다면 어떻게든 당 소저를 꼭 지켜 줄 걸세. 다만 걱정이 되는 것은 그곳에 여자 고수가 있느냐가 문제인데…….”
“적어도 절정에 도달한 고수여야 합니다.”
“여자의 몸으로 절정에 도달하기란 쉽지가 않지. 하지만 너무 걱정 말게나. 강호에는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무영문은 대단한 곳이라네. 겉모습만 봐서는 곤란하지. 방대한 정보망은 개방을 능가하고, 웬만한 살수보다도 암살에 능한 자들이 즐비한 곳이라네. 그들이 여지껏 해 온 일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지. 돈을 준다면 황제의 속옷이라도 충분히 훔쳐 올 그런 자들이네. 그런 곳에 절정 여자 고수 한 명 없겠는가? 말도 안 되는 소리지.”
“그래도 저는 조금 불안합니다.”
황오현 장로는 확신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나를 한번 믿어 보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