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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 호위무사 1(9화)
2장, 무림학관(3)


화무린은 담벼락을 따라 한가로이 건물 이곳저곳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를 모용수미가 졸졸 쫓아다녔다.
둘은 어딜 가도 눈에 잘 띄었다.
천하절색이라고 불리는 무림삼미와도 비견될 만한 용모를 가지고 있는 화무린이다. 그 뒤를 귀엽고 깜찍한 모용수미가 쫓아다니고 있으니, 남자들이 그녀들을 내버려 두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었다.
이곳 이, 삼학년들에게도 무림학관에 신입생들이 오는 날은 그들 또한 즐거운 날이었다. 특히나 남자들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무림학관이라는 폐쇄적인 공간에 갇혀 매일같이 지루한 생활만을 반복하는 그들에게는, 아리따운 소저들의 풋풋함을 엿볼 수 있는 기회는 그리 흔한 것이 아니었다. 남자들에게 있어 아름다운 여자의 존재는 동경이요, 선망이었다.
장미꽃에는 가시가 있지만 그것을 꺾기 위해 몸부림쳐야 하는 것이 수컷들의 운명! 그것은 신이 남자들에게 내린 최고의 형벌이자 최고의 굴레였다. 남자들에게 있어서 아름다운 여자란 그런 존재였다.
그러던 와중에 화무린과 모용수미를 보게 되었으니, 그들은 이게 웬 횡재인가 싶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그녀들이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는 것 정도로 그쳤지만, 그중에는 그녀들에게 말이라도 붙여 볼 요량으로 다가오는 이도 있었다.
자기들 딴에는 나름 가문도 괜찮고, 인물도 자신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커흠! 안녕들 하시오. 혹시 이번에 들어온 신입생들이시오?”
무슨 의도로 접근하는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다. 하지만 먼저 인사를 건네 왔는데 무시하고 지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화무린도 건성으로 대답했다.
“네, 그런데요?”
“나는 요동에서 대문파로 자리 잡고 있는 사환세가의 사호라오. 이학년생이지요.”
사환세가라.
들어 본 적이 있다. 요동에 얼굴만 번지르르한 놈이 하나 있는데, 가문의 돈은 그 자식 혼자 계집질하는데 다 쓰인다고. 개 버릇 남 못 준다고 여기서도 계집질 중인 모양이다.
“아, 네.”
화무린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그냥 지나치려고 하자 그가 그녀의 앞길을 막아섰다.
“제 소개를 했으니 소저의 소개를 해주는 것이 마땅한 도리 아니오? 혹시, 바쁜 일이라도 있는 것이요?”
상대가 이렇게까지 나오는데 그냥 무시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되어 화무린도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저는 화무린, 제 옆에 있는 동생은 모용수미라고 합니다.”
“아! 화 소저와 모용 소저이셨구려.”
화무린도 근본이 남자이다 보니 이 능글거리는 놈들과 이런 영양가 없는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 자체가 짜증스러운 일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앞에서 능글거리고 있는 녀석의 면상을 갈기고 싶었지만, 지금은 무황이 아닌 화무린이라는 신분이었기에 참아야 했다.
‘젠장, 얼굴이 예쁘니 이런 피곤할 일까지 겪어야 하다니!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못생긴 얼굴을 택할걸 그랬나?’
후회가 조금 밀려왔지만, 어떻게 하겠는가? 이미 엎질러진 물인 것을?
그냥 순수한 친분을 나누고자 했으면 그녀 또한 이런 반응을 보이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화무린이 보기에는 이 녀석들은 친구가 필요한 것이 아닌 그냥 예쁜 여자가 필요한 것이다. 지나가는 길에 재수 없게 자신이 얻어 걸린 것이고.
“반갑소. 처음 뵙는 얼굴들인 걸 보아하니 이번에 입관하신 소저들인 모양이구려. 난 풍월공자라 하오. 이름은 제호라고 하오.”
이놈도 들어봤다. 글재주에 남다른 재주가 있다고 하여 풍월공자라고 불리는 호북성의 귀재. 꽤나 영특하다고 들었는데, 사호 같은 놈이랑 어울리고 있었던가?
“무림학관은 보기보다 크다오. 괜찮다면 저희들이 안내를 해드리고 싶소만…….”
모용수미를 쳐다보자 그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싫다는 의사 표현이다.
가뜩이나 수줍음이 많아 보이는 녀석인데 이제는 아예 등 뒤에 찰싹 붙어 있었다. 굳이 모용수미 때문이 아니더라도 그녀도 이런 놈들이랑 어울리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괜찮습니다. 폐를 끼치기 싫으니, 그냥 저희끼리 둘러보도록 하지요.”
화무린이 정중하게 말했다.
그러자 사호가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부담 가지실 것 없습니다. 아리따운 소저들이 행여 이 넓은 무림학관 내에서 길이라도 잃어버리시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저희들이 안내해 드릴 터이니 이쪽으로 오시지요.”
“아닙니다. 그냥 저희끼리 다니는 것이 편해서 그럽니다. 그러면 이만.”
화무린이 녀석을 피해 걸음을 옮기려고 하자 또 다른 한 녀석이 잽싸게 길을 막아섰다.
“자꾸 저희의 호의를 거절하지 마십시오. 자꾸 그러시면 저희가 무안해집니다.”
이 녀석들처럼 계집질을 많이 해 본 놈들이 내숭인지 정말 싫어서 거절했는지조차도 구분하지 못할 리는 만무하고, 보아하니 찰거머리처럼 붙어서 어떻게든 수작질 좀 해 보려는 속셈 같다. 아무리 좋게 이야기한들 먹힐 것 같지도 않은 분위기.
이런 놈들은 어딜 가나 꼭 있다.
맞아야 정신을 차리는 놈들.
화무린의 미간에 갈지자가 새겨졌다.
역시 남자라는 족속들은 좋게 해서는 말을 안 듣는 종자들이다. 남자와 북어는 자고로 패야 말을 듣는다.
더군다나 여자에게 눈이 돌아간 놈들은 더욱더 패야 한다.
화무린은 그러한 것들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여지껏 그가 받은 의뢰의 세 개 중 한 개는 꼭 치정이나 남녀 문제가 얽혀 있었는데, 여자한테 눈이 돌아 버린 남자는 가문도 팔아먹을 정도로 지독한 독심을 보이곤 했다.
그럴 때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냥 때리는 것이다. 때리고, 때리고, 또 때리는 것이다. 여자를 때릴 수는 없으니 여자가 맞을 몫까지 고스란히 남자에게 쏟아부으면 된다.
처음에는 사랑이 어쩌구저쩌구 하면서 절대 굴복할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전부 개소리다.
사람의 육체는 정신적인 측면과도 깊은 교감이 있어, 극도에 달하는 고통을 맛보게 되면 그 어떤 집념이나 상념, 소신 등 보다도 우선하게 된다.
적어도 화무린이 보아 왔던 남자들은 전부 그러했다.
화무린은 귀찮게 하는 이 두 남자를 어떻게 떨쳐 버릴까 생각하고 있는데, 의외로 문제는 간단하게 해결되었다.
“이놈들!!! 수업 시간에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 게냐!!!”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외침과 함께 누군가가 불쑥 나타났다.
그는 바로 무당에서 파견 나온 사람 중 한 명으로 운자 돌림의 항렬을 가지고 있는 무당지운이라는 교관이었다.
그는 여유와 너그러움으로 마음을 다스리는 무당의 성격과는 어울리지 않게 괴팍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는데, 무림학관에서 교육을 받고 있는 이들 중 그의 심기를 어지럽힐 만한 배짱을 가진 이는 없었다.
“교, 교관님 잘못했습니다! 저희들은 다만…….”
“다만 뭐! 여자 신입생을 꼬시려고 교육 시간을 내뺐다고 말할 셈이냐!”
그 말에 둘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크흠! 너희 둘은 이번 생활교육 점수에서 각 삼 점에 해당하는 벌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들 알고 냉큼 교육장으로 튀어 가!”
“네, 넷!!!!”
교관의 호령 소리에 둘은 발이 안 보이게 뛰기 시작했다.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무당지운은 화무린과 모용수미를 쳐다보며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이번 신입생들인가 보군.”
“예, 그렇습니다.”
“학관 내에 저런 놈들만 있는 것은 아니니 너무 걱정들 마시게. 좋은 녀석들도 있으니. 그럼 나도 이만 가 볼 테니 구경들 잘들 하시게나.”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무당지운이 사라지자 화무린이 모용수미를 쳐다보며 물었다. 지분거리는 인간들이 사라지기는 했으나 그 둘을 향하는 시선은 아직 따가웠다.
“구경은 대충 했으니 숙소로 돌아갈까?”
모용수미가 잠시 우물쭈물하더니 이내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나 배고파요.”
그 말을 하면서 왜 그렇게 부끄러워하는지 모르겠으나, 식 때가 이미 지나 화무린도 배가 고팠으니 별 이유를 달진 않았다.
“좋아. 식사나 하로 가자.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데 밥이라도 잘 먹어야지.”
“응!”
모용수미가 배시시 거리며 웃었다.
화무린이 그런 모용수미를 보며 움찔거렸다.
……이 녀석, 위험하다.
화무린은 어깨너머로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식당을 찾았다. 식당을 찾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다른 고풍스러운 전각들과는 다르게 단출하면서 커다랗게 지어진 건물을 바라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무림학관의 학생들이 식사하는 곳을 제대로 찾아온 것이다.
식 때가 지나서인지 사람들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가 않았다. 아니, 아예 보이지가 않았다.
그녀들은 조금은 편하게 식사를 하겠다 싶어서 식당 안으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깔끔한 옷차림에 흰색 마의를 걸친 중년 사내가 분주하게 식당 안을 치우다가 누군가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소리를 질렀다.
“식사 시간이 끝난 지가 언젠데 지금 오는 것이냐?! 밥 먹으려면 저녁때나 다시 오거라!”
무림학관에서 잡일을 하는 일꾼들의 대부분은 맹에서 차출해 온 삼류무사들이다. 무림맹이나 무림학관이나 잡일을 하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그들은 이왕이면 편하고 돈을 더 많이 주는 무림학관을 선호했다.
맹 안에서는 이리저리 눈치 봐야 할 것이 많으나, 이곳에서는 일만 제대로 한다면 눈치를 주거나 면박 받을 일도 없으니 그들에게는 천국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아, 죄송합니다. 배식 시간을 몰라서 그랬습니다. 그러면 지금은 식사를 못하는 겁니까?”
“두 번 말해야 알겠느냐? 일하는데 훼방 놓지 말고 썩 나가라!”
중년 사내가 여자 목소리에 대응하다 그녀들의 얼굴을 힐끔 쳐다봤다.
화무린은 볼을 긁적거리고 있었고, 그 옆에 모용수미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중년 사내는 자신이 여자들에게 너무했나 싶어서 그녀들에게 다가가 말했다.
“점심 배식은 오시(午時)부터 미시(未時). 저녁 배식은 유시(酉時)부터 술시(戌時)가 되기 직전까지다. 이곳에서 식사를 하려거든 꼭 그 시간에 맞춰서 와야 한다.”
“아, 그랬군요. 몰랐습니다.”
“알았으면 그만 나가 봐라.”
중년 사내가 등을 돌리고 다시 일하려고 하는데 조그맣게 소리가 들려왔다.
꼬르르륵.
작게 소곤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수미 배고파? 그런데 어쩌지? 저분 말로는 밥 먹을 수가 없대.”
“나 배고픈데.”
“흐음. 어쩐다. 밖에 나가서 사 먹고 들어오는 수밖에 없나?”
중년 사내는 문득 집에 있는 토끼 같은 아이들이 생각났다. 첫째 딸아이가 꼭 모용수미만 할 것이다.
“크흠! 잠깐만 기다려라.”
중년 사내는 자신이 먹기 위해 만들어 놓은 주먹밥 다섯 개를 내밀면서 말했다.
“원래 배식 시간 이외에 식사를 주는 것은 규칙에 어긋나지만 이것은 내 것이니 상관없겠지. 일단 이걸로 허기라도 면하고 저녁때 다시 오도록 하거라. 내 생각 같아서는 식사를 주고 싶지만 이곳도 나름대로 규칙이 있는지라 그럴 수가 없구나. 학관의 정문은 유시에 닫는데, 지금 나갔다가는 자칫 들어오지 못하는 수가 생길 수도 있으니 나갈 생각은 행여 말고.”
“흐음. 그런 규칙이 있었군요.”
“무림학관에서 생활하려면 규칙들을 잘 숙지해야 할 것이야. 자칫 퇴학당하지 않으려면.”
“고맙습니다.”
화무린은 고개를 숙였다.
모처럼만에 받아 보는 순수한 호의였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호의는 상대로 하여금 기분을 좋게 만든다. 세상에 대가없는 호의가 어디 있겠냐만은 중년 사내의 얼굴에는 그러한 것이 전혀 나타나 있지 않았다. 그래서 화무린은 드물게 기분이 좋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