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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부활 1권 (4화)
1장 사형선고 (4)
전사라니? 타살도 자살도 아닌 전사? 준원은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김소흥을 쳐다봤다. 힐끗 준원을 쳐다본 김소흥이 뒤에 두고 있던 또 다른 파일 철을 준원의 앞으로 천천히 밀었다.
“읽어 봐라.”
“이것이… 뭡니까?”
준원이 자리에서 일어난 김소흥을 향해 물었다. 설명을 해달라는 무언의 눈빛이었다. 하지만 김소흥은 말없이 자리를 떴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류를 확인하면 될 것이라는 것처럼, 등 한번 돌아보지 않고 문을 열고 사라졌다.
꿀꺽―!
이상하게 긴장이 됐다. 아버지의 사진이 담겼던 서류를 확인할 때와는 다른 감정이 솟아올랐다. 조금씩 알고 싶어 하는 진실에 가까워져 가기 때문일까?
준원은 이내 상념을 접고 파일을 열었다. 파일 안에는 처음 문수라 불렸던 남자가 보여 줬던 서류와 비슷한 내용의 서류들이 담겨 있었다. 준원의 아버지인 강태식의 신상정보와 그와 혈연관계로 이어져 있는 일가친척의 이름들까지도, 뿐만 아니라 그 다음 장을 넘긴 서류에는 오래전, 비행기 티켓과 함께 강태식이 홍콩으로 갔던 상황들에 대해 열거해 놓았다.
―1980년 일인전승 대맥 비천의 마지막 후예. 강홍도 노사의 유일무이한 아들이자 제자, 비천과 비맥과의 재 교류를 이끈 장본인.
―86년 비맥류 경성 김씨 일가의 후손이자 국자랑(國子郞)의 원류를 계승하는 김소흥 노사의 딸, 김시연과 혼약을 맺다.
―1988년 88서울올림픽 당시 AST 주최 측과 접선 이후 행방이 묘연.
―1988년 12월 이루어진 비맥회의(秘脈會議) 결과, 흔적 없이 실종, 생존 여부 확인 불가.
―김소흥을 비롯한 비맥류 후손 보호 처분 결정.
―1989년 1월 김시연 실종.
“김시연… 엄마!”
말없이 묵묵히 서류를 넘기던 준원이 갑자기 피가 끓는 듯한 목소리로 뇌까렸다. 뺑소니로 돌아가시던 어머니의 모습과 사진 속 어머니의 모습을 제외하고 서류 속에서 보는 어머니의 느낌은 무척 달랐다. 준원은 낯선 느낌에 흠칫 놀라면서도 실체화되어 가는 분노에 접근해 가기 시작했다.
촤악―!
서류를 또 한 장 넘긴 준원은 자기도 모르게 서류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미 과거의 사실을 접근하기 시작한 그의 눈은 평소의 눈빛과는 사뭇 달랐다. 죽음 끝에서 살아났기 때문일까? 준원의 눈에는 이젠 절실함을 넘어선 독기가 감돌아 있었다.
■TOP SECRET CODE 1:겉으로 기록되고 보고 된 서류와 진본 서류의 사실이 다르다.
―유일한 비천의 승계자인 그는 AST 참가를 거부했다. 그러자 당시 AST의 주축 세력인 삼합회와 중국 남방계 무인들의 리더 우춘산이 비밀리에 대한민국을 방문했다. 상황이 악화되자 우춘산은 삼합회를 움직여 비맥의 계승자들을 가둬 두고는 강태식에게 그들을 볼모로 협박한다. 그의 그 당시 움직임은 오래된 역사를 지닌 대한민국, 비천의 후예를 참가시킴으로써 AST의 위상과 명성을 드높이려 했던 것으로 사료된다.
―삼합회와 그들을 움직이는 중국계 무인들의 조직적 움직임에 강태식은 스스로 AST에 참가하겠다고 선언한다. 강태식은 AST에 참가하기 위해 북경으로 떠났으나, 1988년 12월 홍콩 등지에서 총살된 채로 한국으로 건너와 김소흥의 손에 이르러서야 화장을 치렀다.
―강태식의 죽음으로 인해 한국계 비맥은 조직적인 결사 형태를 갖추게 됐고 아울러 지금까지 애매하게 연결되어 있던 비조직적 형태를 비밀스러운 조직적 형태로써 변모했다.
■TOP SECRET CODE 5:김시연의 실종에 이은 죽음.
―AST 관계자와 중국 남방계 세력들은 당시 강태식에게 자식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때문에 비맥의 계승자들은 김시연과 논의하여 어쩔 수 없이 김소흥과 김시연의 거취를 따로 나누어 비맥이 정해 준 곳으로 김시연의 거처를 옮기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김시연은 떠나던 날, 뱃속의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1989년 1월 10일 AM 02:00 경으로 추정)
이유는 강태식의 죽음에 이은 충격과 함께 비맥의 관계자들을 믿을 수 없게 된 것으로 사료된다.
―1994년 3월 27일 김시연이 김소흥과 접선을 시도, 그들의 동향을 주시하고 있던 삼합회가 움직인다. 그들은 주도면밀한 계획으로 김시연의 생가를 파악, 그녀의 곳곳에 삼합회의 브로커를 파견했다. …이렇게 뺑소니 또한 그들의 작전 중 하나이며 현재 그녀의 자제인 강태식은 코드 분류 블랙으로 판단된다.
■강태식 (BLACK CODE).
중간 위장 에이전트 명단.
윤성희.
가명:조미령
나이:스물둘로 추정된다. 위장한 나이와 같다.
……남방계 인사들 가운데 하나의 딸로서 추정되며 정확한 신분은 아직 밝혀내지 못했다.
백청후.
가명:이용식
나이:스물여덟
……남방계 인사 중에서도 최고위급 인사의 자제로서 추정 중.
서류를 계속 읽는 준원의 손은 멈출 줄 몰랐다. 한 장, 한 장 속에 그가 감당해 내기에는 큰 과거가 깃든 일들이 무수히 쏟아지고 있었는데도 입을 꾹 닫은 채 눈에 핏발만 세웠다. 시간은 계속 흘렀다. 마지막 서류를 준원이 손에서 내려놓을 때쯤 이미 밖은 어두워져서 고요한 어둠 속에서 개구리 소리가 들려왔다.
덜컹―!
마침 김소흥도 다시금 준원의 방으로 돌아왔다.
“녀석. 보았느냐.”
김소흥은 안쓰러움 반 걱정 반이 담긴 눈빛으로 준원을 바라봤다. 준원이 대답하지 않고 내려놓은 서류를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로 가느냐.”
한 걸음 물러서 준원의 앞을 가로막은 김소흥이 수염을 쓸어 담으며 말했다.
“어차피 부딪쳐야 할 일이 있는 게다. 그렇다고 주저앉겠느냐.”
질책이 담긴 김소흥의 말에도 준원은 일어선 채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알려 주십시오.”
이윽고 입을 뗀 준원의 표정은 딱딱했다. 너무 돌처럼 굳어 버려서 그간의 그가 지었던 표정들은 모두 거짓된 가면이었던 것마냥 아무런 감정이 없어 보였다.
“정말로… 죽여 버릴 겁니다. 모두 다!”
표정 없던 준원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때론 소리를 치고 발악을 하며 분노를 표출하는 사람보다 용광로 같은 분노를 가슴속 깊이 감추는 사람이 더 위험한 법이었다.
“그리하려무나.”
김소흥은 준원의 상태를 알면서도, 굳이 말리지 않았다. 김소흥 또한 준원의 마음을 이해했고 공감한 것이다.
“그 전에 하나 묻겠다. 한 번 들어서면 포기할 수 없을 게다. 자신 있느냐? 할아비를 원망하지 않을 자신이 있느냐 물었느니라.”
“제게 사치입니다. 원망할 시간조차 없습니다.”
준원이 간결하게 대답했다.
“좋다. 옛 성인들의 말씀에 의하면 무예를 익힌 자야말로 감정의 요동이 없고 오욕칠정을 해탈한다 했다. 허나 감정 없는 자가 어디 있더냐. 네 뜻대로 해라. 네 아비를 죽인 것도 모자라 네 어미까지 죽인 그 악랄한 놈들과의 악연을 네 손으로 끊어라. 할 수 있겠느냐. 이제부터 네가 하려는 일은 비단 네 일뿐만이 아닌 아시아 권 나라들 간의 자존심 싸움이 될 게야.”
“무엇부터… 해야 할지 알려 주십시오.”
흔들리는 준원의 눈빛은 길 잃은 어린 양과 다를 바 없었다.
김소흥의 눈도 전과 달라졌다.
“너를 이 세계에 들이는 것이 옳은 것인지는 모르겠다. 허나 더 이상 너를 두고 볼 수만은 없었느니라. 네 어미처럼 허무하게 죽어 가게 만들 수는 없었다. 적어도.”
“허무하게 죽지 않을 겁니다. 절대.”
이어지는 준원의 음성이 칼날마냥 날카로웠다.
2장 내딛다 (1)
뺑소니로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에 앓아누운 적이 있다.
“준원아. 엄마 말 잘 들어.”
“엄마 나 아프니까 조금만 내일 얘기하면 안 될까? 피곤하다고.”
“들어야 돼.”
“대체 뭔데 그래.”
“아버지가 남기신 유품을 누구에게도 보여 줘서는 안 돼. 준원이 네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어야 돼. 알았지?”
“그깟 그림이 뭐길래? 팔아 봤자 돈도 안 나올 그림이야. 엄마하고 나한테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당장 먹고살 돈 걱정이라고.”
당시 어머니는 식당 일 때문에 피곤에 절어 있었음에도 유난히 그림, 그림 하셨다. 물론 그때 반응은 ‘대체 저 그림이 뭐 길래 사람을 이렇게 피곤하게 하나’ 하며 지나쳤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아버지가 남긴 마지막 유품을 어머니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어머니는 내게 무엇을 말하고 싶었기에 그토록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일까? 직접 얘기만 해줬더라도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진 않았을 것이다.
“준원아. 네가 이 그림을 가져가야 해. 어딜 가든 누굴 만나든. 알았니?”
“그래. 그래.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만 좀 해 엄마.”
아무것도 모를 때가 편하다는 말, 틀린 말이 아닌 것 같다.
“후우.”
새벽 늦게 잠이 들었음에도 준원은 한 시간여 후 다시 깨어났다. 그림을 가지고 실랑이 하던 과거의 기억이 준원을 깊게 잠들지 못하게 한 것이다.
‘대체 그림이 뭘까.’
머릿속을 헤집는 불쾌한 기분에 준원은 힘겨운 얼굴로 눈을 감았다. 혼란한 머릿속을 잠시나마 비우기 위해서는 눈을 감는 편이 나았던 것이다.
* * *
김소흥이 준원을 데리고 시킨 것은 주지 스님의 설법을 함께 경청하는 것과 무릎을 꿇고 하루 종일 앉아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남는 여가 시간에는 주로 다른 스님들과 함께 절 구석구석을 빗자루로 쓸고 다녔다.
“잘하는구나.”
“네.”
하루 사이에, 준원은 더욱 과묵해졌다. 쉽게 말을 꺼내지 않았고 묵묵히 김소흥이 시킨 일을 해냈다. 김소흥도 아무런 반항도 없이 순순히 따르는 준원의 행동에 굳이 이상히 여기지도 않았다.
“고작해야 빗자루 질을 시키는 것이 못마땅하지 않느냐.”
“예.”
준원이 솔직히 대답했다.
“네 마음을 다스리기 위한 것이다. 진정이 되었느냐.”
“물론입니다.”
“좋다. 그럼 네가 생각한 방향은 무엇이냐.”
빗질을 하는 준원의 앞을 턱 하니 가로막고 선 김소흥이 물었다.
“어디로 갈지 모릅니다. 길만 뚜렷이 잡힌다면 떠날 것입니다.”
“당장이라도 놈들을 전부 죽이겠다는 소리로 들리는구나.”
“못할 것도 없습니다.”
준원의 말도 아예 틀린 것만은 아니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이니 영 어색하고 어리둥절할 것이다. 하지만 끌어 주는 견인차 역할을 하는 사람만 있다면 향로를 설정하고 다시 현실을 설계할 수 있다. 말 그대로 준원은 때를 기다리고 있는 셈이었다.
“전에도 말했듯이 그들은 하나가 아니다. 수십, 수백의 사람들이 적이 될 게다. 험난할 것이야.”
“제 부모를 죽인 자들의 명단을 가지고 계십니까.”
“명단은 없다. 우리도 그들의 정확한 내부를 파헤치지는 못했지. 한국에 들어와 있는 끄나풀 정도만 유심히 지켜볼 뿐이다.”
“끄나풀이라도 상관없습니다. 무조건 찾아냅니다.”
말을 마친 준원은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빗질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