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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부활 1권 (5화)
2장 내딛다 (2)
다음 날부터 김소흥은 빗질을 시키지 않고 준원과 함께 상원사 뒤쪽 산기슭을 올라갔다. 일반적으로 오대산에 만들어 놓은 등산로를 택하지 않은 김소흥은 미리 다니는 길이 있었던지, 쉼 없이 산을 올랐다. 그의 나이가 칠십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믿을 수 없는 체력이었다.
“이쯤이면 되었다.”
오대산 봉우리 근방에 도달한 김소흥은 깎아 내지른 듯한 절벽 앞에 있는 큰 평평한 바위를 가리켰다.
“앞으로는 이 산로를 기억해서 오르고 내려야 한다. 알았느냐.”
“예.”
“네게 가르칠 것은 국자랑의 정수다. 국자랑은 오랜 옛날 고구려의 조의선인을 통해 이어진 것으로써…….”
김소흥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는 누구보다 국자랑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었고 진정한 한국 무예의 원류야말로 국자랑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물론 강태식의 사문이었던 비천의 이야기에 이르러서는 처음으로 국자랑의 자존심을 한 번 꺾었다.
“비천의 무예 또한 그것이 하늘에 숨겨질 만한 한반도의 저력을 담고 있는 것이나, 현재로써는 실전된 상황이니라. 조부의 특별한 신체까지 물려받은 네게 그것까지 이어졌다면 참으로 좋았으련만.”
김소흥은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며 국자랑에 관한 가르침을 하나둘씩 설교해 갔다.
“어떤 무예든 천지인(天地人)의 상징성을 무시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바퀴의 중심을 담당하는 추는 억세고 단단하다. 하늘과 땅 사이에 위치한 사람 또한 그러한 추처럼 이루어지니 너는 늘 하루마다 체력의 한계점을 찍어야 한다. 시작은 이곳부터다.”
김소흥이 오른발로 땅을 툭툭 디디며 말했다.
“체력을 다 디디고 나면 이 할아비가 하는 동작을 잘 보고 품계(品階)를 시작해라. 그것이 국자랑의 근간이 되는 초유행공(初儒行功)이니라.”
초유행공.
유함의 시작이자 무예(武藝)가 아닌 무예(舞藝)라고까지 불리는 국자랑의 정수다.
“기실 도심 속에 널리 퍼져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국자랑에는 사람을 해하는 동작이 없다. 오로지 스스로의 각성과 단련을 위한 무예일 뿐이다. 허나 국자랑은 본디, 침략 세력에 맞선 고구려 조의선인의 무예, 어찌 사람을 제압하는 살기가 없으랴. 유하고 부드럽기는 독사와 같으나 사람을 해하는 순간의 움직임은 매의 발톱과 비견 될 만하다. 그것이 무예(舞藝)가 아닌 무예(武藝)로써의 국자랑이 가진 참 모습이다.”
연달아 김소흥이 펼치는 국자랑의 시연이 이어졌다. 드라마에서나 영화에서 같이 화려한 동작은 아니었다. 하지만 빈틈이 없었다. 어딜 때려도 모두 막아 낼 것 같은 느낌이었다. 처음으로 김소흥의 기세에 주눅이 든 준원이 흠칫하며 올라 서 있던 바위 뒤로 물러났다.
“똑똑히 보아라! 이것이 기세(氣勢)라는 것이다!”
준원의 귀에 김소흥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놀라운 건 목청을 돋아 크게 내리는 소리가 절대 아니었다는 사실이었다. 준원의 눈이 몽롱해졌다.
스스스스―!
김소흥의 움직임은 얼핏 택견과 유사했지만 택견과는 거리가 멀었다. 우선 단순한 보법 위주의 택견과는 달리 국자랑의 보법은 천 가지의 변화를 가지고 있었다.
‘어디로 튈지, 어디로 향할지 모른다는 말은 이와 같은 움직임을 보고 말하는 거겠지.’
“이리 오너라.”
숨소리도 거칠어지지 않은 김소흥이 바위 뒤에 있던 준원을 불렀다. 기다렸다는 듯 준원이 다가왔다.
“네 마음껏 할아비를 쳐 보아라.”
김소흥이 준원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발을 놀렸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아무리 버려진 듯 살아왔던 손자라도 할아버지를 때릴 수는 없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고 강산이 바뀌어도, 인간에 대한 예의를 쉽게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준원이 망설이는 것은 당연했다.
“껄껄. 네 녀석이나 염려하려무나. 할아비 말고.”
“갑니다.”
허락을 받았다고는 하나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옥 불에 뛰어든다 할지라도, 부모를 해한 자들과 기만한 자들 모두를 다 부셔 버릴 것이다. 나약한 의지로 시작한 일도 아니기에 준원은 이를 악물었다. 필요하다면 하겠습니다. 할아버지. 준원의 눈이 결연해졌다.
쐐액―!
고집스럽게 다문 입술과 함께 준원의 오른 주먹이 날아갔다. 그리고 이내 헛된 곳을 가른 주먹과 함께 준원의 상체가 크게 흔들리자, 어느새 등 뒤로 다가선 김소흥의 오른발이 준원의 등판을 툭 하고 밀쳐 냈다.
“어어!”
밀려난 준원이 균형을 채 가누지 못하고 땅바닥에 쓰러졌다.
“꼴이 우습구나. 어서 일어나라. 어찌 칠십 넘은 늙은이 하나 못 쓰러트릴꼬.”
“으아앗!”
“쯧.”
준원의 아무 효과 없는 주먹질은 이어졌다. 겨우 두 발자국 거리다. 하지만 김소흥은 믿기지 않는 유연한 허리로 전력을 다해 휘두르는 준원의 주먹을 단 한 대도 허용하지 않았다.
애초부터 정해진 결론이었지만 이대로 끝나기에는 아쉬웠다. 같은 움직임을 반복하길 한 시간째, 준원은 어느새 땀으로 흠뻑 젖은 얼굴을 양손으로 털어 내듯 닦아 내고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젠 쉽게 덤벼들지도 못하겠구나. 그럼 이건 어떠하냐.”
김소흥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준원이 동시에 눈을 부릅떴다. 어느새 뻗어진 김소흥의 수도(手刀)의 손끝이 칼날처럼 동공 코앞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국자랑이다.”
나지막한 김소흥의 음성이 눈을 크게 뜬 준원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동시에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낀 준원이 저도 모르게 딸꾹질을 했다.
“딸끅.”
“허허. 녀석. 오줌이라도 지렸느냐.”
“아닙니다. 딸끅.”
준원은 애써 태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분명 질 것은 자명했지만 막상 지고 나니 기분이 개운하지 못했다.
“훗날 이 할아비가 아닌 누구에게도 지지 마려무나. 네가 상대해야 할 자들 중에는 별종부터 악한 놈 그리고 이 할아비보다 배는 강한 자들이 있다. 그들을 이겨 낼 수 있으려면 네 스스로가 강해져야 하느니라.”
“하겠습니다.”
준원이 처음으로 눈을 맑게 빛냈다. 패배가 부끄러운 것보다, 넘어설 벽이 생겼다는 생각이 더욱 컸다. 그래서 기뻤다. 김소흥의 실력만 갖춘다면 무엇이든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물론 나이 차이가 크기에 하지 못할 수 있다는 불안감도 있었지만 일말의 불안함 따위로 지금의 일을 그만둘 수는 없었다. 이미 준원의 인생 중 온전한 목표 전부는 그들에게 향해 있었다.
“늦지 않았냐고 묻지 않아서 좋구나. 그리 말했다면 포기하고 돌아가라 할 생각이었다. 가장 큰 패악을 끼치는 것이 조급함이지. 최선을 다해라. 그뿐이다.”
“예.”
“오늘은 형(形)만 보여 줄 것이다. 따르는 것은 네 몫이니라.”
동작을 한 동작씩 느리게 시작하는 김소흥의 신체 곳곳을 준원의 반짝이는 시선이 따랐다.
다음 날.
새벽녘부터 준원은 이부자리를 개고 김소흥을 따라나섰다. 오대산 꼭대기로 향한 김소흥은 이내 따라나선 준원을 향해 말했다.
“말한 대로 네 약해진 신체를 강건히 만들어야 하느니라. 따라 해라.”
아직 초유행공을 완벽히 익히지 못한 것을 아는 김소흥은 준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어제에 이어 오늘까지 초유행공의 동작을 하나하나 따로 연결시켜 보여 주었다. 준원도 새벽 공기를 들이 내쉬며 김소흥의 동작을 따라했다.
“초유행공의 형을 익혀간다면 두 번째로 네가 해야 할 것은 토납법이다.”
초유행공의 형을 준원이 조금씩 숙달하는 듯하자 움직이던 김소흥이 보법을 멈추고 준원에게 다가왔다.
“토납법은 좌공(坐功)과 입공(立功) 그리고 와공(臥功)으로 이루어진다.”
“호흡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오냐. 호흡이야말로 보법과 함께 무예의 근간이라 부를 수 있는 것들이지. 짧게 내뱉고 깊게 거둔다. 얼핏 쉬운 듯하나, 경지에 올라서야 자유자재로 가능한 일이니라.”
“짧게 내뱉고 깊게 거둔다?”
생각해 보니 김소흥은 호흡을 거둔 적이 없었다. 격한 몸짓을 할 때에도 고른 호흡은 여전했다. 일반적인 사람들의 호흡과는 분명 차이가 컸다.
“누군가는 조식(調息)을 이용해 영혼과 육체를 분리하는 시해법(尸解法)을 통한 탈각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들 하나, 보지 못하였으니 어찌 알 수 있겠느냐. 단지 이 할아비가 네게 가르칠 것은 자면서도 고른 호흡을 통해 육체의 기를 원활히 움직여 주는 호흡법이다. 너만의 토납법이 성취되면 너는 잠을 자지 않고서도 맑은 정신을 유지할 수 있고, 체력의 한계에 달해도 호흡을 통해 육체의 고통을 이겨 낼 수 있을 게다. 허나 그리 하기는 쉽지 않지. 뼈를 깎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토납법의 길은 스스로 구해야 하는 겁니까.”
“물론이다. 언젠가 네 단전에서 뜨거운 기가 뭉쳤을 때는 반드시 정신일통을 해야 한다. 그러니 인체의 혈 자리 공부를 함께 병행하도록 해라. 때가 되면 기회를 놓치지 말고 호흡을 네 몸에 구체화시켜야 할 게야. 그것이 바로 소주천(小周天)이니라.”
“소주… 천!”
“기는 마음에서 온다고 하느니라. 기가 일지 않아도 네 몸을 타고 흐르는 진기가 있음을 쉼 없이 믿어야 한다. 그 믿음의 여부에 따라 네가 기를 일으킬 수 있는 자질이 판단될 것이야.”
김소흥의 말에 준원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고요해진 그의 눈빛이 비장해 보이기까지 했다.
‘한 가지 더 알려 줄 것이 있지만 하지 않으마. 그러한 경지를 이룬 이가 네 아비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 그대로 현대 사회에서 기를 구현화시킬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비맥의 후예들과 현재 AST를 주축으로 한 중국 남방계 혈족들마저 보통 사람들보다 빠르고 지치지 않을 뿐이다.
그런 와중에 신체 내부에 구현화된 기를 자유자재로 운용했던 비천의 후예, 강태식의 등장은 아시아를 비롯한 무예가들 전체를 동요시키기에 충분했었다. 특히나 선도에 앞장서 왔던 한반도 또한 갖은 내란과 총칼로 무장한 일제시대와 조국상잔의 아픔인 6.25를 겪으면서 남아 있던 고수들마저 자손들을 남기지 못하고 죽게 됐었으니, 강태식의 등장을 질시하기도 혹은 기뻐하며 존경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사실이 그렇다 하더라도 이제 첫걸음을 디디며 복수를 마음먹은 준원에게 이러한 현실의 벽이 해가 될 것 같았던 김소흥은 굳이 뒷말을 하지 않고 목구멍 뒤로 삼켰다.
“무예가들이라면 누구나 기를 이용할 줄 알고 사용한다. 그러니 너 또한 호흡을 네 것으로 만들고 늘상 행해야 한다. 알았느냐.”
지금은 호흡을 이용해 일반인 이상의 큰 힘을 내거나 축지법과 비슷해 보이는 주법(走法)으로써 신체적 한계를 뛰어넘는다 하는 것이 무예가들의 한계였다.
결국 현대로 넘어와 기를 이용해 인간의 범주를 넘어서는 경지를 보여 준 것은 마지막 비천의 후예 강태식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미 강태식은 죽었고 남은 건 그의 자식인 강준원밖에 없었으니, 김소흥이 손자 강준원에게 기대를 거는 것도 기실 무리가 아니었다.
“알아들었느냐.”
여러 가지 생각으로 마음이 무거운 김소흥의 질문에 준원이 초유행공을 뻣뻣하게 시연해 보이며 대답했다.
“네.”
“하지만 이러한 기의 운용에만 치중해서는 아니 된다. 지금 네게 가장 필요한 것은 강건한 신체이니라. 그러니 토납법에만 마음이 흔들려 육체의 능력에 대해서는 간과하지 말고 수행하도록 해라. 기와 신 두 가지 토끼를 모두 잡아야 한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허면 지금부터 산을 내려갈 것이다. 따라나서라.”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앞질러 가는 김소흥의 발길은 거친 산길로만 향했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신기루마냥 걸어가는 김소흥의 뒷모습에 준원도 이빨을 꽉 닫은 채 묵묵히 그 뒤를 따라나섰다.
지치고 힘든 것 따위는 상관없었다. 준원이 이 순간 두려운 건 무예가라면 누구나 행할 수 있다는 일들을 스스로가 해내지 못할 것이 두려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능력이 뒷받침되지 않게 된다는 것은 어떤 현실보다 두렵게 다가왔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죽는 건 끔찍한 상상일 뿐이다.
준원의 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