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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부활 1권 (6화)
2장 내딛다 (3)


인간의 신체는 그 무궁하리만 한계가 끝없이 이어진다. 더구나 체력과 정신의 한계를 경험한 사람은 회복 후, 그다음에 이르면 전보다 더 높은 한계를 경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신체의 회복 기간은 사람마다 저마다 제각각이어서 그 기간을 당기기 위한 많은 이들의 시도가 수많은 역사 속에서 이어져 내려왔다.

“이것이… 뭡니까?”
준원은 절 뒤편 창고로 부른 김소흥을 쳐다보며 물었다. 대답 대신 김소흥이 목조 욕탕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들어가라는 뜻이었다.
“좌공을 틀어라.”
얼떨결에 목조 욕탕에 들어앉게 된 준원을 향해 김소흥이 입을 열었다.
“끄윽.”
하지만 수련 때문인지, 준원은 쉽게 다리를 꼬지 못했다. 온갖 근육들이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숨쉬기도 힘든 고통이 준원의 머릿속을 잠식했다.
“약탕(藥湯)이다. 약초들로 이뤄진 탕이지. 문수를 통해 들여온 비싼 약초들이니, 아프더라도 참으려무나. 곧 약 기운이 네 몸에 흡수되어서 근육이 훨씬 쉽게 풀어질 게다. 허나 네 아픈 몸을 내일 당장 원 상태로 회복시키려면 이것으로는 부족하겠지. 그래서… 선조들께서는 비전(秘傳)을 남겨 두셨다. 과거에도 기일이 촉박한 이들을 위한 수련법이지.”
어느새 포대 자루를 들고 온 김소흥은 준원이 뭐라 할 새도 없이 약탕에다, 포대 안에 있던 가루를 들이붓기 시작했다. 이내 가루는 수증기와 함께 뿌옇게 사방을 뒤덮으며 준원이 담구고 있던 약탕을 딱딱하게 굳혀가기 시작했다.
“석… 고입니까?”
“껄껄. 석고라고 오해할 수도 있겠구나. 허나 석고는 아니니 염려 말려무나.”
“어떤… 약입니까?”
“약재들이라기보다, 귀한 약재들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산성, 함유황, 알루미늄, 유산성 염화물천과 같은 약품을 처리한 합성 약품인 셈이지. 거기에 더해 비전에서나 내려오는 인체의 무해한 석고를 섞어 약의 효능이 공기 중에 날아가지 못하고 탕 속에서 네 신체에만 스며들도록 만든 것이다. 과학이 발전한 시대도 아니거늘, 선조들의 지혜가 놀랍지 않느냐. 이러한 물질들을 발견해 내지 못한 시대에 이런 효능을 낼 수 있는 탕을 만들어 사용하셨던 것이.”
“네. 흡!”
감탄하고자 고개를 끄덕이려던, 준원의 눈이 별안간 크게 뜨여졌다. 그러자 준원의 귓가로 김소흥의 늦은 뒷말이 덧붙여졌다.
“모름지기 입에 쓴 약이 몸에 좋은 법이라 했다. 이것 또한 외부의 물질로 네 신체를 회복시키는 일이니 조금은 고통스러울 게다.”
이미 몸을 뒤틀며 눈을 뒤집는 준원의 귓가에 이어지는 김소흥의 말이 들릴 리 만무했다.

그렇게 수련을 시작한지 나흘이 지나자 김소흥은 준원에게 새로운 숙제를 안겨 주었다.
“고단한 것을 모르지 않는다.”
늦은 밤 준원의 방을 찾아온 김소흥이 말했다.
“괜찮습니다.”
준원은 온갖 근육이 비명을 지르는 것을 느끼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척 대답했다. 그러자 김소흥이 고개를 끄덕이며 뒷말을 덧붙였다.
“초유행공의 형을 대강이나마 익혔으니… 내일부터는 국자랑의 정수를 익힐 것이다. 알다시피 너에게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머지않아 위협이 다가올 테니, 그 전에 만반의 준비를 해두어야 한다.”
“네.”
그 말이 끝나고 다음 날은 부지불식간에 찾아왔다. 준원은 심신을 다지고, 김소흥의 평소와 같이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고작 며칠이나 됐다고 준원의 걸음은 전보다 한층 빨라져 있었다. 스스로의 신체에 대한 자각이 이뤄 낸 믿을 수 없는 성과였다. 이내 둘은 금세 오대산에 오를 수 있었다.
“잘 보아라.”
이윽고, 준원을 옆에 세워 둔 김소흥이 초유행공이 아닌, 또 다른 형(形)의 국자랑을 보여 주기 시작했다. 국자랑의 정수라 불리는 무무도풍(無舞刀風)의 형이었다.
“국자랑의 정수라 불리는 무무도풍은… 초기의 형식만 있을 뿐, 수많은 형태의 것으로 바뀔 수 있다. 허나 그 안에는 중국계 무인들이 말하는 타, 추, 나, 포와 같은 모든 형태의 무예가 총망라되어 있으며 그것은 서로 개별적으로 나뉠 수 없고 한데 어우러진다. 무지한 자들의 말로써 그것들을 나눈 것뿐인 게지. 알겠느냐.”
“예.”
“그러니 너는 이것들을 구별해서도 나누어서도 아니 된다. 하나의 형으로써 받아들이라는 이야기다. 초유행공은 기틀을 잡기 위한, 형일 뿐이다. 그러니 무무도풍을 익힐 때에는 형을 외우려 들지 말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네 육감을 전부 이용해 국자랑을 받아들여라. 그것을 완성했을 때, 너는 네 솜털마저 너의 의지로 움직일 것이다.”
김소흥은 그 말을 하며 마치 신선이 춤을 추는 것과 같이, 바닥을 노닐었다. 어떨 때는 느리게 어떨 때는 격렬하게 몸을 흔들었다.
그의 말대로 초유행공과는 그 깊이부터가 틀렸다.
느껴지는 따가운 기세에, 준원의 입이 자연스레 벌어졌다.
무엇을 해야 할지 조금씩 명확하게 드러나는 기분이었다.
‘우선 할아버지를 넘어선다.’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포기한다는 생각은 애초부터 버린지 오래였다. 해본다. 해보고 나서 결정한다. 준원은 뭔가에 홀린 듯, 천천히 김소흥에게 다가가 그의 동작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시간은 날아간 화살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준원이 오대산에 온지 두 달여, 그는 그간 초유행공의 형(形)을 익혔고 이어 무무도풍의 기본 틀을 배웠다. 하지만 가장 아직도 준원의 머리를 쭈뼛하게 만드는 건, 오대산의 산기슭을 오르는 일이었다.
평범하게 산기슭을 오르는 것이라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김소흥이 시킨 수련법은 가혹하리만치 체력적 한계를 끌어올리게 했다. 아니, 체력을 넘어선 정신력의 한계의 밑바닥까지 보였다.
바로 산기슭은 올라 절벽을 타고 산 아래로 내려오는 것이다. 이름난 산악인이라 해도 줄 하나에 목숨을 거는 일은 쉽게 하지 않는다. 하다못해 준원은 단 한 달여 만에 줄을 버리고 산을 올라야 했다. 목숨을 건 사투를 시작한 것이다.

“모르는 이들은 그리 말한다. 무예의 근간이 단전호흡에 있다고. 그것은 옳지 않은 무론이다. 단전을 비롯한 신체의 각 부분은 인간 신체 전반부를 통틀어 상호보완하며 균형을 유지한다. 그중에서도 기합을 지를 때 필요한 이의 악력은 무예를 펼칠 때 빼놓을 수 없는 근간 중 하나이니라. 훗날, 네가 기합을 지르지 않고서도 발경이 가능한 경지에 오른다면 상관없겠지만 말이다.”

그러한 김소흥의 무론 때문일까? 덕택에 준원은 발경의 필요한 집중력 강화 훈련을 위해 로프 하나 없이 산을 오르고 내리게 된 것이다.

푸스스―!
준원이 힘겹게 도약하기 위한 돌에 발을 디딜 때였다. 돌이 부서지며 왼손에 잡은 돌덩이에만 몸을 지탱하고 있던 준원의 몸이 기우뚱거렸다. 균형을 잃은 것이다. 자칫하면 절벽에서 떨어져, 비명횡사할 순간 준원의 눈에 모든 것이 느리게 들어왔다. 토납법을 시작하며 익힌 스스로의 몸에 대한 관조 덕분에 생긴 각성일 수도 있었다.
돌이 부서지는 그 찰나마저도 마치 비디오 녹화를 느리게 감기를 누른 듯 천천히 보이기 시작했다. 폐 호흡량이 깊어진 순간, 준원의 몸 전반부에서 심장을 통해 피가 흐르는 속도가 빨라진 덕분이었다.
보통 사람의 열 배에 달하는 혈류 속도가 준원에게 기이한 능력을 가져다주었다. 이내 그가 스스로도 믿을 수 없을 만큼 민첩하게, 디디려 했던 왼발을 허공에서 차올려 몸을 반대로 뒤집고는 왼손을 곧장 보이는 돌을 향해 뻗었다.
턱―!
“하아. 하아.”
가까스로 반대편 돌을 잡을 수 있었던, 준원은 떨어지는 돌가루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죽음을 목전까지 뒀던 상황이었다. 앞으로도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었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러나 준원은 두려울수록 되레 균형을 찾고 침착하게 디딤돌이 될 돌을 찾기 시작했다.
‘죽는 것보다 두려운 건, 아무것도 해내지 못하고 죽는 겁니다. 그러니까…아버지 저를 지켜 주세요. 해내겠습니다.’
목숨을 담보로 수련한다는 것부터가 이미 상식 밖의 일일지 몰랐다. 하지만 준원의 적들 또한 지금껏 그가 생각해 온 상상 외의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해내야 했다. 그들마저 생각하지 못한 방법으로 그들에게 접근해야 했다.
그래서 준원은 입술을 더욱 질끈 깨물었다.

“하아. 하아.”
마침내 산 정상에 올라온 준원이 절벽 낭떠러지에 지친 몸을 맡기고 드러누웠다. 눈 하나 깜짝할 힘도 없었다.
“한참 기다렸느니라.”
흐릿해지는 의식 속에서, 김소흥의 음성이 또렷하게 들려왔다.
‘으음.’
준원이 감았던 눈을 천천히 눈을 뜨자, 김소흥이 엄한 눈빛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오셨… 습니까.”
“일어나라.”
“네…….”
‘고생했다’라는 따뜻한 말을 해줄 법했지만 김소흥은 냉정했다. 도리어 준원을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타박할 뿐이었다.
“초유행공을 어느 때든 몸 안에 가둬 두라 이야기하지 않았더냐.”
그의 꾸지람에 힘겹게 몸을 일으킨 준원은 쉴 틈도 없이, 초유행공의 형을 시연해 보였다. 손과 발이 부드럽고 장중하게 움직여 갔다.
쒜액―!
이제는 적당한 힘까지 실려 있어, 제법 위협적인 기세도 흐르기 시작했다.
‘허허. 대단하구나.’
초유행공의 형조차 익히지 못하고 떨어져 나가는 제자는 수도 없이 많다. 정수를 이어받을 인재가 없는 것이 현 시대의 딜레마였다. 하지만 준원은 놀랍게도 단 두 달여 만에 형을 완숙함이 보일만큼 익혀 나가고 있었다.
사력을 다한 수련 덕분일 수도 있지만 준원 스스로의 자질에 대한 자각이 불가능을 가능케 만들었다. 그 때문일까? 흥이 돋은 김소흥은 그도 모르게 준원의 움직임에 맞춰 함께 합(合)을 맞춰가기 시작했다. 조손간의 국자랑이 절벽 위에서 펼쳐졌다.
“네 속의 남은 불덩이를 표현해라!”
어우러져 가던 김소흥의 나직한 음성과 함께 준원의 눈도 덩달아 날카로워졌다. 그러자 보법을 밟아 가던 준원의 상체가 사시나무 떨리듯 격렬하게 흔들렸다.
좌우, 전후, 사방팔방이 준원에 의해 장악되었다. 서서히 준원의 신체와 정신이, 전부 흥분 상태에 도달하며 무아지경에 빠져들었다.
김소흥도 무아지경에 빠진 준원을 말없이 끌어 주었다. 지금이야말로 준원이 진정한 무예의 정수를 익힐 기반을 끌어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다.
평생토록 무예를 익혀도 열각(熱覺)이라 불리는 무예의 경지를 경험하지 못한다. 하나 준원은 단 두 달여 만에 김소흥의 지도를 받아 열각이라는 껍질을 깨려 하고 있었다.
쒜액―!
격렬해진 준원의 움직임은 김소흥마저도 무시하지 못할 만큼, 민첩하고 날카로웠다. 김소흥이 이내 뻗어진 준원의 손을 부드럽게 밀쳐 내자, 준원이 기다렸다는 듯 양발을 동일 선상에 놓으며 좌수를 아래에서 위로 쳐올렸다. 미리 준원의 움직임을 예측한 김소흥도 재빨리 허리를 뒤로 젖히며 준원의 좌수를 피해 내고는, 원을 그리듯 몸을 한 바퀴 휘감았다. 그러자 준원의 오른발이 김소흥의 가랑이 사이로 파고들었다.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동물적인 감각이라 해도 모자라지 않을 준원의 민첩함에 김소흥도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며 양손을 준원의 가슴을 향해 일제히 뻗었다.
쒜액―!
발경이 깃든 일격이었다. 김소흥마저 흥분해, 과다할 만큼 기력을 쏟아 낸 것이다. 이대로 적중당한다면 준원의 열각의 기회가 무산될 것이 분명했다.
그때였다. 눈을 감고 있던 준원이 별안간 몸을 낮추어 양손을 물결을 아우르듯 휘젓더니 뻗어진 김소흥의 양손바닥에 자신의 손바닥을 마주쳐 갔다.
“크합!”
눈을 번뜩이며 기합을 내지른 준원의 손바닥과 김소흥의 손바닥이 맞들어지자, 준원이 김소흥의 발경을 이겨 내지 못하고 뒤로 다섯 걸음이나 주르륵 밀려났다.
동시에 그의 열각도 종극을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