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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부활 1권 (7화)
2장 내딛다 (4)
“하아. 하아.”
준원도 그제야 조금씩 정신이 돌아오는지 거친 숨결을 내쉬며, 멍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여 댔다.
“얻었느냐?”
과도하게 힘을 쏟은 김소흥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왔다.
“솜털이 쭈뼛쭈뼛 서는 것 같습니다. 몸 안의 열기가 식혀지지 않아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허허. 열각의 접어든 것이니라.”
“열… 각?”
준원이 혼잣말로 중얼거리자 김소흥이 안심이 된다는 얼굴로 껄껄 웃었다. 이토록 빨리 열각에 접어들 줄은 김소흥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기 때문이다.
“열각이 무엇입니까?”
“새로운 경지의 들어설 때 무예가들이 겪는 일종의 통과의례라 보면 되느니라. 즉, 이제는 네가 본격적으로 무예의 입문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기합이 필요 없이 발경이 가능하다는 얘기지. 기합 또한 네 모든 의념을 집중하기 위한 하나의 의식일 뿐이었으니 말이다.”
“기합이 필요 없다 하심이라면.”
“네가 생각하는 것이 맞다. 지금껏 네가 수련해 온 모든 것들이 발경을 가능케 하기 위한 정신 집중 강화의 일종이었다면, 이제부터는 너의 신체가 기억하게 된 발경을 얼마나 자유자재로 가능할 수 있게 하는지가 네 수련의 관건이 될 것이다. 허나 자만하지 마라. 이제 초입에 든 것뿐이니라.”
“예.”
준원이 한층 굳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가야 할 길은 멀었어.’
혼자 마음속으로 중얼거린 그는 이내 김소흥을 직시하며 말했다.
“몸이 기억하는 것을 잊지 않도록, 다시 한 번 시연해 보고 싶습니다.”
“오냐.”
김소흥이 흔쾌히 허락하자 준원의 두 다리가 보세(步勢)를 취했다. 준원은 어느새 무예의 깊이에 흠뻑 취해 가고 있었다.
* * *
오대산 깊숙한 곳에는 계곡이 있다. 봉우리에서 직접 내려오는 물이라, 급류라 불릴 만큼 물의 세기가 거세다.
열각이 있은 후 열흘이 지나자, 김소흥은 준원을 이곳에 데려왔다. 준원이 귓가에 울려 퍼지는 급류 소리를 들으며 의아함이 담긴 표정을 지었다. 김소흥이 어떤 배움을 가르칠지 확신이 서지 않았던 탓이다.
“들어가거라.”
대강 예상은 했던 내용이었지만, 뭔가 미진했다. 평소 김소흥이 시켜 오던 극악한 수련법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때문에 준원은 의아하게 생각하면서도, 시키는 대로 물에 반쯤 들어갔다. 허리까지 물이 차자 애써 움직이지 않으려 해도, 물결 때문에 몸이 계속 출렁였다.
“받아 들어라.”
첨벙―!
그때였다. 김소흥이 준원에 들어간 계곡물을 향해 사람 얼굴 크기만 한 돌 두 덩이를 던졌다. 돌 두덩이가 물에 떨어지면서, 준원의 눈에 물살이 튀겼다. 그가 얼굴을 덮은 물살에 고개를 좌우로 흔들고는 김소흥이 서 있는 방향을 쳐다봤다.
“어깨에 좌우에 돌을 올리고 균형을 잡아라.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급류 쪽으로 자리를 옮길 것이다. 그 전까지 돌의 균형을 잡아야 한다.”
미친 짓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나 다름없을 만큼, 김소흥의 주문은 상식선을 벗어난 지시였다. 말이 얼굴 크기만 한 돌이지, 급류 속에 그 돌 두 덩이를 어깨에 올려놓는 건 천근 무게의 돌을 얹는 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뿌득―!
가까스로 돌을 어깨 위에 올려놓은 준원이 이를 악물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세찬 물살이 준원의 등을 덮쳐들었다. 등판을 세게 내리쳤다 다시 떨어지는 물살과 함께 준원의 몸이 기우뚱해졌다. 구겨진 물살이 코에 닿을락말락하며 낮아지고 높아졌다. 어깨에 이고 있던 돌의 무게 덕분이었다.
“균형을 잡으라 하지 않았느냐!”
고통으로 일그러진 준원의 귓전으로, 김소흥의 호통이 이어졌다. 준원이 악이나 다름없는 기합 소리와 함께 다시 허리를 올곧게 폈다. 그리고는 돌이 무겁지 않다며 혼자서 되뇌었다.
하지만 되뇌고 또 되뇌어도, 무게는 변하지 않았다. 갈수록 무게마저 잊고 돌을 진 어깨에 준 힘도 서서히 풀어져 갔다. 이대로라면 쓰러질 것이 뻔했다.
“그만.”
준원의 한계치를 안 것일까? 김소흥의 음성이 돌을 이고 있던 준원의 귓가에 들어왔다. 그가 기다렸다는 듯 짊어지고 있던 돌을 물에 빠트렸다. 자연스레 어깨가 축 처졌다.
“돌을 다시 짊어지어라. 더 상류로 올라갈 것이다.”
상류라니? 기다렸다는 듯 돌을 던진 준원에게는 기절초풍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물살을 견디는 것만으로도, 지금껏 훈련해 온 다리가 후들거리는데 또 급류에 올라서다니? 준원의 얼굴이 구겨진 이불 마냥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는 투덜거리지 않고 묵묵히 돌을 양팔로 지고 천천히 물살을 견디며 물가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상류로 올라가라 했지. 물가 밖으로 나오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느니라.”
이어지는 김소흥의 뒷말에 물가로 나오던 준원이 말없이 물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 * *
일 년 뒤 겨울.
쏴아아.
“흐름을 기억하고 물결의 움직임을 국자랑에 응용해라. 남방계를 비롯한 아시아 전역, 대부분의 무예가들은 상대방의 힘을 이용해 받아치는 그것을 화경(化勁)이라 일컫지. 허나 국자랑을 비롯한 조선 비맥의 무예들은 그와는 다르다. 화경이라 불리는 합경(合勁)마저 국자랑의 큰 틀 속에 녹여 버리는 게다. 너는 세찬 물결 속에서 균형을 잡으며 발경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들을 너만의 색깔로 녹여내야 한다. 알았느냐.”
준원은 귓가로 김소흥의 목소리가 선하게 들려오는 것 같아 두 눈을 동시에 떴다. 그리고는 얼음장같이 차가운 계곡물의 냉기 속에서 깊은 들숨과 날숨을 반복해서 시행했다.
쏴아아―!
마침 호흡을 가다듬는 준원의 등판으로 얼음 밑의 물살들이 세차게 파고들어 왔다. 오래전이었다면 균형을 잃고 물속에서 허우적댔을 테지만, 지금의 준원은 과거와는 사뭇 달랐다.
전보다 훨씬 큰 돌덩이들을 어깨에 짊어지고도, 잘게 떨리는 흔들림조차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중력을 무시한 듯, 돌을 짊어지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보법을 펼쳐 갔다. 진정한 평정(平靜)의 상태에 이른 것이다.
파지직―! 파지직―!
더 놀라운 건, 그의 양손에서 뻗어지는 절제된 움직임이 웬만한 장비로도 쉽게 깨지지 않는 얼음벽을 가벼운 손놀림으로도 균열시켜 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내 준원이 어깨를 격렬히 흔들며 물결 중앙을 향해 오른 손바닥을 내려칠 때였다.
펑―!
내려친 그의 일격을 받은 물결을 중심으로, 사방팔방의 계곡물의 마치 고요한 호숫가에 돌멩이를 던진 것마냥 파동을 일으켰다. 그리고 팽창된 물결은 마침내, 사방팔방의 얼음벽을 깨트리며 위로 솟구쳐 올랐다.
쏴아아―!
주변을 뒤덮고 있던 얼음벽이 전부 깨지며 열 개가량의 물기둥이 사방에서 치솟아 올랐다. 장관이라는 말로밖에 표현이 되지 않는, 신비로운 광경이었다.
3장 평정심 (1)
“채비를 하려무나.”
두 번째 겨울이 찾아온 어느 날, 김소흥은 눈밭을 지나쳐 준원의 방 안에 들어왔다. 서류를 검토하며 앞으로의 계획을 살피고 있던 준원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대답했다.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나지막이 묻는 준원의 신체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이 단단해져 있었다. 원래 컸던 키도 부쩍 자라, 이제는 190cm 달할 만큼 건장한 신체를 자랑했다. 반대로 김소흥의 반백이었던 머리는 하얗게 변해 있었고, 그의 잔주름은 더욱 깊어져 있었다. 새삼 준원은 하얗게 서린 그의 머리를 보며 세월의 무게를 실감했다.
“가보면 알 게다.”
김소흥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는 여전히 준원에게 비밀스러운 외할아버지였고, 일을 치르기 전에는 굳이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일이 벌어지고 나면, 그때서야 준원이 헤쳐 나올 수 있게끔 적당한 조언을 줄 뿐이다.
“그 전에… 해야 할 것이 있느니라.”
대청마루로 나온 준원에게 김소흥이 눈발을 맞으며 우두커니 서 있던, 문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하얍!”
문수는 일언반구도 없이 대청마루에 있던 준원에게 주먹을 뻗었다. 준원이 급히 기둥 뒤로 물러나며 문수와 대치 상태에 돌입했다. 준원의 굳어진 안색과 함께 승복 차림의 문수가 준원과 같은 보법을 보이며 느리게 다가왔다.
작심을 한 듯, 문수의 표정에는 비장감마저 감돌았다. 그러자 멀찍이 떨어져 지켜보던 김소흥이 준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할아비가 준비한 선물이다.”
“과분할 정도의 선물이군요.”
문수에게 시선을 집중한 준원이 나지막이 대답하고는, 기둥 뒤에서 번개처럼 빠져나와 오른발로 바닥을 박차, 왼발을 곧게 뻗었다.
문수가 양손으로 준원의 왼발을 쳐냄과 동시에 뛰어오른 준원의 가슴팍 쪽으로 파고들어 왔다.
‘너무 쉽다!’
깊이 들어올수록 문수는 의아함을 느꼈다. 이 년간 수련한 준원의 경지가 이 정도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점점 승패는 뚜렷해지는 것 같았다.
조금만 더 파고들면 준원을 패대기칠 수 있었다. 그 순간 준원의 양손이 뱀처럼 문수의 어깨를 타고 올라와 그의 등 뒤로 방향 전환을 시도했다.
“어림 없… 흡!”
급히 대응하려 했던 문수는 결국, 항복을 선언했다. 어느새 등 뒤로 돌아선 준원이 문수의 목젖을 팔로 옥죄었기 때문이다.
숨통이 잡힌 문수가 목을 옥죄고 있는 준원의 팔목을 치며 발버둥 쳤다. 그제야 준원도 한 걸음 물러나며 팔의 힘을 풀었다.
“잘했다.”
가만히 두고 보던 김소흥이 처음으로 칭찬을 했다. 그만큼 방금 전 준원의 방향 전환은 상대방의 거리를 재고 움직인 담력뿐 아니라, 국자랑을 통해 발전한 준원의 신체적 능력 둘 모두를 선보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굳이 발경을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충분히 준원의 무예가 어느 경지에 이르렀는지 김소흥은 추측할 수 있었다.
“마지막 선물이니라.”
문수가 조용히 뒤로 물러나자 이번에는 김소흥이 나섰다. 준원도 김소흥이 직접 나설 줄은 몰랐던지, 마른침을 삼키며 눈을 빛냈다.
“하겠습니다.”
머뭇거림도 없이 준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김소흥과의 대련은 목숨을 걸지 않은 이상,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가르침이라는 것을 아는 탓이다. 하지만 준원의 예상과는 달리, 김소흥의 눈빛은 평소와 많이 달랐다.
“목숨을 걸어야 할 게야.”
높낮이 없는 무덤덤한 음성.
쐐액―!
그리고 이어지는 김소흥의 한 수에 준원은 황급히 왼발을 축으로 몸을 뒤집었다. 분명 발경이 담긴 한 수였다. 가까스로 피한 준원을 힐끗 쳐다보며 김소흥이 입을 열었다.
“발경을 상대의 움직임에 따라 수십 가지의 종류로써 나누는 것은 우둔한 짓이다. 과거 네게 일러 주었듯이, 발경은 신체의 힘을 단번에 극대화시켜 일점에 쏟아붓는 것을 얼마나 빠르고 효율적으로 쓰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국자랑에서의 발경은 매 움직임 하나하나에 전부 깃들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었습니다. 기합이라는 예비 호흡이 없어도, 언제든 의지에 따라 발경을 행하고, 시연할 줄 알아야만 할아버님과 붙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고도 하셨죠.”
준원의 눈빛이 매서워진다.
“옳거니.”
“굳이 보셔야 하겠다면…….”
그가 어깨를 한 차례 털어 내듯 흔들며, 다리를 낮추고 마보 자세와 흡사한 기수식을 취해 보였다.
“보여 드리겠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둘은 조용히 격돌했다. 그들의 보법에 의해 바닥에 있던 눈밭이 발의 이동에 따라 사방으로 휘날려 주위를 감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