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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부활 1권 (8화)
3장 평정심 (2)
“허허.”
김소흥은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김소흥의 머리맡에 세워진 준원의 손바닥이 거두어졌다.
“할아버님 덕분입니다.”
우두커니 멈춰선 김소흥 앞에서 준원은 절을 올렸다. 김소흥 또한 절을 올리는 준원을 따스하게 바라봤다.
“이제 더 이상 이 할아비가 네게 가르칠 것이 없느니라.”
김소흥은 단 이 년 만에 성장해 준 준원이 여느 때보다 기특했다. 이제 더는 가르칠 것이 남아 있지 않을 만큼, 준원은 김소흥을 뛰어넘은지 오래였던 것이다.
평소의 과묵한 문수마저도 경악스러운 얼굴로 준원을 바라볼 만큼 지금의 준원은 나이 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실력을 지니게 됐다. 이제 부족한 부분을 스스로 메꿔 나가야 할 단계가 다가온 셈이다.
“네 아비가 본다면 기뻐할 게야.”
절을 마치고 일어난 준원의 어깨를 토닥인 김소흥은 이내 뒷짐을 지고 산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다시 방에 들어가서 봇짐을 챙기고, 따라나서라. 떠날 때가 됐느니라.”
나지막한 그의 음성에 마주하고 있던 준원의 눈이 커졌다.
잠시 후 도착한 주차장에는 검정색 승용차 한 대가 세워져 있었다.
“타라.”
“네.”
뒷좌석에 자리를 잡은 김소흥의 말에 준원은 뒤따라 조수석에 앉았다.
“문수야. 출발하려무나.”
“예. 노사.”
김소흥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시동을 킨 문수는 운전대를 돌리며 천천히 차를 출발했다.
얼마쯤 갔을까? 차로 두 시간 가까이 지났을 때쯤 차가 처음으로 휴게소에 들러 정차했다. 동시에 비어 있던 주차석 통로로 또 다른 검은 차 한 대가 연이어 멈춰 섰다.
“내리지 마라.”
준원이 문을 열고 나가려 하자 김소흥이 말했다. 사뭇 달라진 분위기에 준원도 표정을 굳혔다.
“오십니다.”
문수가 말했다.
덜컹―!
그리고 문이 열리고 재빨리 한 사람이 김소흥 옆으로 자리했다.
“형님 오셨습니까.”
김소흥은 안면이 튼 사이였던지 짧게 목례를 까딱하며 들어온 노인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일세. 김 노사.”
노인도 반갑다는 얼굴로 김소흥의 손을 맞잡았다.
“인사드려라.”
김소흥이 엷은 웃음을 보이고는 조수석에 있던 준원을 향해 말했다.
“강준원이라 합니다.”
“강준원이라 하면 혹시 아버님의 함자가 어찌 되시는가.”
“저 녀석의 아비가 제 사위입니다. 형님.”
“그럼 이 아이의 아비가 비천의 강태식이라고?”
“예.”
“허허. 아이가 있었구려. 잘되었어. 잘됐어.”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송구스럽습니다.”
“되었네. 이미 퇴물인 내가 뭘 도울 수 있겠나. 한데 무엇 때문에 자네가 날 만나자 한 겐가?”
“훈련을 부탁드립니다.”
“훈련?”
“예. 아직 모두 갖춰지지 않은 녀석이니, 연륜 있는 형님께서 맡아 주셔야 합니다.”
“그 계통이라면 이미 손 뗀지 오래 된 것을 자네도 알지 않는가.”
“그래서 이리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흠. 그렇다면 내 추천해 줄 사람을 만나 볼 용의가 있는가?”
“예민한 일입니다.”
주위 눈이 많다는 이야기였다.
“믿을 만할 걸세. 그 녀석도 손을 뗐거든.”
“함께 일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동료였었네. 하지만 문제가 좀 있지.”
“문제라면?”
김소흥이 물었다.
“그것은 내 입으로 얘기할 거리가 못되네. 직접 보면 알 걸세. 실력 하나는 출중했던 놈이니, 잘 가르쳐 줄 수 있을 게야. 내 미리 말해 둠세. 성의 표시 정도는 해줘야 할 게야. 내 입으로 말하기 쑥스럽지만 속물인 놈이라 말일세.”
“예.”
“정 내 동료를 믿기 힘들겠다면 지금 당장 내 따로 신상이 담긴 서류를 주겠네. 예민한 일이라면 응당 그래야겠지. 참, 참고로 말해 두는 거지만 녀석은 남조선과 나를 잇는 유일한 연락책이었었네. 신분을 가장했던 남조선 블랙 요원이라 하더군. 귀순한 후 나중에 알았네만. 그만큼 실력이 보장된 것 아니겠나.”
“하지만 그분도 비슷한 연배가 아니십니까.”
“예끼. 이 사람아. 같은 연배라고 체력이 모두 약한 건 아니잖은가.”
“알겠습니다. 허허. 그렇다면 지금 당장 준비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당장 말인가?”
“예.”
“좋네. 무엇보다 술값이 궁한 터라, 이런 일이라면 눈에 불을 키고 달려들겠지. 대강 가르칠 심산으로 말일세. 하지만 녀석의 성격은 내가 더 잘 아네. 어떤 부대에서든, 에이전트로서의 심장은 늘 뛰고 있는 친구지. 그러니까 자질과 열정만 보여 준다면 금세 제대로 가르칠 마음을 잡을 걸세. 시간이 얼마 걸릴지는 전적으로…….”
노인의 시선이 준원을 향했다.
“너의 몫이란다.”
얼마 뒤.
“저분은 누구십니까.”
노인이 사라지고 준원이 김소흥에게 물었다.
“전 북한 노동당 국제 담당비서 황엽 선생이시다.”
뭔가를 깊게 고민하고 있던 김소흥이 대답했다.
“황엽이라면.”
“북한 체제를 참다못해 나오신 분이다. 물론 겉으로 보이는 직책만 국제 담당비서였을 뿐, 실상은 국가안전보위부 부장이지. 물론 겉으로는 이홍수라는 인물이 국제 사회의 부장이라 알려져 있지만 꼭두각시놀이일 뿐인 게지. 어찌 되었든 우리나라로 말하면 국정원장이라고 보면 된다. 군인 계급을 통용하기 때문에 계급 자체의 의미는 다를 수 있지만 하는 역할은 비슷하지. 아마도 준원이 네게 추천해 주신 사람은 과거 함께 탈북한 부부장 윤대일일 게야.”
“어떤 사람인지 아십니까?”
준원이 물었다.
“윤대일이란 사람에 대해서는 모른다.”
“예.”
“저분 또한 북한에 이어져 내려오는 국자랑의 후예이시니 네게는 아득한 사조가 되시는 분이다.”
“알겠습니다.”
준원의 대답에 김소흥은 더 신경 쓰지 않고 문수를 쳐다봤다.
“문수야.”
“예.”
운전하고 있던 문수가 대답했다.
“저 차를 따라가거라. 차도 천천히 몰고.”
“천천히 몰고 있습니다.”
“네 기준 말고.”
김소흥의 음성에 문수가 조심스럽게 밟고 있던 액셀 페달에서 천천히 발을 뗐다.
* * *
소 우는 소리가 들려오는 따사로운 농촌의 낮은 정겨운 분위기였다. 그곳에 낯선 검은 차 두 대가 들어선 것은 오후 12시 30분경이었다. 차는 곧 밭을 지나 마을 어귀 외곽에 위치한 자그마한 붉은 지붕 집에 도착했다.
덜컥―!
이윽고 차문이 열리고 밭에서 신는 장화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에유.”
먼저 내린 동네 이장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마을 안내를 맡은 모양이었다. 뒤따라 차에서 내린 황엽이 운전기사에게 손짓으로 사례비를 주라고 하고는 걸음을 돌렸다.
“예. 일 잘 보셔유. 안에 들어가시면 이 영감님 계실 거에유.”
“고맙소.”
등 뒤에서 들려오는 말에 황엽이 쓰고 있던 중절모를 벗어 든 채로, 가볍게 인사했다. 그렇게 문 앞에 선 황엽이 문을 두들기려 할 때쯤, 안에서 누군가가 문을 열어젖혔다.
“누구요?”
“날세.”
“오랜만이오.”
머리가 산발이 된 노인, 윤대일이 구멍이 숭숭 뚫린 흰 속옷 차림으로 하품을 하며 나왔다.
“이제 일어난 겐가.”
황엽이 물었다.
“나는 황 형처럼 신사가 아니라서 그런가 보지요. 빌어먹을 날씨 왜 이렇게 우중충해? 뼈도 쑤시고.”
쨍쨍한 햇볕을 느끼던 황엽이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웃었다.
“아예 얼굴도 보기 싫다고 하지 그러나? 허허.”
“알면 좀 가시지 그러시오.”
“변한 게 없구먼.”
“사람이 너무 갑자기 변하면 갑자기 죽는다지 않소. 난 오래 살고 싶은 일인이요. 어찌 됐든 들어오시오.”
문을 열어 둔 윤대일이 집 안으로 들어가자 황엽이 따라 들어갔다. 홀아비라는 것을 이해한다 해도 집 안은 엉망이었다. 늘어놓은 빨래부터, 군데군데 놓여 있는 소주병과 안주들과 버려지듯 벗어져 있는 잠바까지, 전쟁터가 따로 없었다.
“자네는 집에서도 계속 전쟁 중인가?”
“시답잖고 재미없는 농담 마시고 이쪽으로 앉으시오.”
“어디로 말인가? 허허.”
“아, 이쪽 말이오.”
윤대일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빨래를 오른쪽으로 싹 밀어내며 먼지로 가득한 바닥을 가리켰다.
“좀 치워 놓지 그랬나.”
“그러니까 미리 온다고 말이라도 해주면 좋았잖소.”
“미리 온다고 해도 치워 놓겠는가?”
황엽이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당연히 아니지.”
윤대일이 씩 웃으며 부엌 쪽으로 분주히 움직였다.
“어디 가시는가?”
“커피 타러 갑니다. 손님이 떡하니 오셨는데 커피라도 대접해야 되지 않겠소.”
“되었네.”
“아니오. 드리리다.”
“그럼 홍차로 주게.”
황엽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홍차 없소.”
부엌 쪽에서 재차 윤대일이 대답했다.
“그럼 매실차로 주게.”
“그것도 없소.”
“아무것도 없는데 뭘 그렇게 분주히 움직이나?”
황엽이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말하자, 어느새 물 주전자를 전자레인지 위에 올려놓은 윤대일이 대답했다.
“커피 믹스 있소. 설탕 반. 프림 반으로.”
윤대일이 머쓱한 얼굴로 대답했다.
“컵은 씻긴 했는가?”
한눈에 보기에도 때가 낀 컵을 보며 황엽이 물었다.
“손님이 왔는데 그 정도는 해야 되지 않겠소. 너무 타박 마시오.”
“새로운 삶이 꽤 즐거운가 보군. 그 까다롭고 깔끔하던 자네가 이리 변했으니.”
“죽고 죽이는 데 혈안이 된 그 동네보다는 훨씬 낫지 않겠소.”
주름살이 한층 깊어진 윤대일이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술 좋아하는 건 여전하구만. 와인에서 소주로 바뀌었을 뿐이지.”
“살아보니 와인보다는 소주가 낫더이다.”
“대일이 자네답군. 아니, 이젠 이충호인가?”
“언제부터 알았소?”
“자네가 북파 공작원인 것 말인가?”
“알면서 물으시오. 소주가 당기는구먼. 잠깐 기다리시오.”
이충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때가 낀 냉장고에서 소주병을 꺼내 들어 깡 소주를 마셨다. 목이 마른 사람이 물을 먹듯 들이키는 그의 모습에 황엽이 웃었다.
“우리가 몇 년 만에 본 게지?”
“횟수로는 탈북하고 오 년 만일 게요.”
“그렇지.”
“어쨌든. 언제부터 아셨소?”
“오 년 전부터 알았네만. 그것이 우리가 보지 않은 이유라도 되는가.”
“그렇게 말해 주신다면야 내가 뭐 할 말이 있겠소.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지.”
“속인 것이 죄라고 느낀다면 내 한 가지 부탁할 게 있네만.”
“내 이럴 줄 알았지. 여우 같은 노인네 같으니라고.”
“자네도 늙었네.”
“늙어도 이렇게 여우같이 늙기도 힘들 거요. 황 형. 좋소. 얘기나 들어 봅시다. 옛날도 아니고 거래라고 해도 들어주지 않을 테지만.”
“술값이나 해두라고 말해 주는 걸세.”
“적당히 굴릴 놈이라도 있는 모양이오.”
“글쎄. 자질을 판단하는 건 자네의 몫이 아니겠나.”
황엽의 말에 이충호가 멋쩍은 듯 볼을 긁적이며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