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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부활 1권 (9화)
3장 평정심 (3)


“황 형의 손자라도 되오?”
“내 손자라기보다 한반도의 손자라고 보는 게 나을 것일세.”
“뭐가 그리 거창하오. 유치하기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줄 수는 없네. 그래도 가르쳐 보겠는가.”
“술값이나 하라고 온 것이 아니구려.”
이충호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받아들이겠는가.”
“데리고만 있어 보겠소. 집 치울 가정부 들인다 생각하면 되겠지. 받아 주는 대신 많은 것을 바라지는 마시오.”
“글쎄. 내가 굳이 바라지 않아도 자네가 바라게 되면 어찌할까 궁금하구먼.”
자리를 털고 일어난 황엽의 대답에 이충호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벌써 가시오?”
“커피가 통 맛이 나지를 않는구먼. 집에 돌아가 홍차를 마셔야겠네. 다음에는 홍차가 있기를 기대하지.”
“원. 황 형도 바랄 것을 바라시오.”
“바라기라도 해야, 중간은 갈 것이 아닌가. 허허.”
“뭐. 틀린 말도 아니오.”
이충호가 머쓱하게 웃었다.
그렇게 황엽이 문을 열자 밖에서는 김소흥과 문수 그리고 준원이 마당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리 오너라.”
황엽이 준원을 보며 손짓하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 이충호에게 다가왔다. 마중 나온 이충호의 안색이 찌푸려졌다.
“제안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이미 결정해 놓고 오신 것이었소?”
“미안하지만, 그 말이 맞네.”
황엽의 미소에 이충호는 심드렁한 눈빛으로 준원을 쳐다봤다.
‘제법 덩치는 있는 놈이군.’
체격 하나는 지금껏 본 놈들 중에서 최고 수준이었다. 다부진 체격부터, 허약한 체격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인간 군상을 만나 봤던 그로서는 준원의 신체가 평범한 신체와는 다르다는 것을 단번에 파악했다. 하지만 모든 훈련이 체격으로만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전보다 날카로워진 이충호의 눈이 이번에는 준원의 눈을 마주했다.
“이놈은 안 되겠소.”
그러다 문득, 무슨 생각인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왜 안 되는지 이유를 여쭤 봐도 되겠소?”
가만히 두고 보던 김소흥이 나섰다. 갑작스레 다가온 김소흥의 물음에 힐끗 그를 쳐다본 이충호가 눈살을 찌푸리며 뒷말을 덧붙였다.
“누구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나보다는 더 잘 아실 것 아니요? 저놈… 독기로 가득 찼소. 기구한 사연이 있지 않다면 낼 수 없는 눈이지. 저런 놈 맡았다가, 괜히 분란에 휩쓸리기는 싫소.”
분란에 휩쓸리기 싫다는 이야기에 김소흥은 할 말을 잃었다. 솔직히 못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을 강제로 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던 까닭이다.
물러난 김소흥과는 달리, 준원은 포기한 얼굴이 아니었다. 그는 마당 앞에서 기꺼이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시키는 건 뭐든 하겠습니다.”
“그래도 싫어. 인마. 이젠 나도 늙었다.”
계속되는 거절에, 보다 못한 황엽이 말했다.
“안주된 생활에 물들었구먼.”
“형님. 난 평범한 생활에 감화된 것이 아니요. 단지 그쪽 세계에 지친 게지.”
쓸쓸한 미소를 보이며 말하는 완곡한 거절에 황엽은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김소흥도 사태파악을 끝내고는 여전히 무릎 꿇고 있는 준원의 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일어나거라.”
“싫습니다.”
“허어.”
“제게 필요하다 해서 저분께 배움을 청하라고 하신 것 아닙니까.”
“맞다.”
“그럼 배우겠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배울 것입니다. 그러니… 떠나려거든. 제가 할아버님의 곁을 떠나겠습니다. 용서하십시오.”
단호한 결단을 내린 준원은 이제 일생의 전환기를 맞고 있었다.
“일어나라 하지 않았더냐!”
김소흥은 공들여, 성장시킨 손자가 무릎 꿇고 있는 모습이 보기 싫었던지 호통을 쳤다. 그러자 문수가 나섰다.
“노사님. 이번에는 도련님의 뜻대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김소흥이 대답 대신, 준원을 불만스러운 얼굴로 쳐다보는 이충호를 쳐다봤다. 그러다 김소흥과 눈이 마주친 이충호가 말했다.
“여기에 있든 말든, 마음대로들 하십시오. 하이고. 이 시골에 무슨 꿀단지가 있다고 다들 이리 모여드시나.”
그는 무릎 꿇고 있는 준원을 매몰차게 외면하고는 이내 황엽에게 목례를 하며 말했다.
“다음에 뵐 때는 황 형 친구 분들은 데리고 오지 마십시오. 내 그럼 형님 다신 안 봅니다.”
“자네 뜻이 그렇다면야.”
황엽은 중간 입장에서 곤란할 텐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미소만을 머금어 보였다. 그리고는 멀찍이 서 있던 김소흥에게 다가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이보게. 김 노사.”
“예.”
김소흥이 못마땅한 얼굴로 대답했다.
“내 생각이 있어서 그러니 손자는 이곳에 놓고 가세.”
“무슨 말씀을.”
“곧 그 이유를 알 것일세.”
황엽이 힐끗 준원을 내려다보고는 나지막이 말했다.
황엽의 부탁으로 결국 준원의 곁을 떠나게 된 김소흥은 쉽게 준원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늘 모질게 준원을 다뤘던 그도, 결국 손자를 염려하는 마음은 늘 속에 담았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준원의 발전을 위해서라면, 이 또한 감수해야 된다는 것을 아는 김소흥은 황엽의 권유대로 그의 곁을 떠난 것이었다.

휘이잉―!
찬바람은 연신 불어왔다. 바다와 가까운 시골의 밤바람은 진즉 동상에 걸릴 만큼 따가웠다. 하지만 준원은 무릎을 꿇은 상태로 얼어붙은 듯, 단 한시도 일어나지 않았다.
늘 고통 속에서 수련해 왔던 탓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준원의 의지력이 더욱 크게 작용했다. 이충호가 받아 줄 때까지 일어나지 않을 생각을 가진 것이다. 그렇게 하루가 흘렀다.
“징한… 놈.”
하루가 지나자 마당으로 나온 이충호는 내심 놀랐다. 떠나지는 않더라도, 따뜻한 곳을 찾아 신문지라도 덮고 있을 거라 생각한 준원이 전날과 다름없이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무릎을 꿇고 미동도 없이.
이충호는 자신도 모르게 의문이 생겼다.
눈에서 독기를 줄줄 보이는 놈이 가진 과거가 무엇일까?
이놈은 무엇 때문에 목숨을 걸고 배움을 청하는 것인가?
준원의 얼굴 반을 뒤덮은 어두운 그림자가 이충호의 마음을 끌어내기 시작했다.
“이놈아. 이러는 이유가 뭐냐?”
슬쩍 다가온 이충호가 물었다.
“사람마다… 각자의 사연이 있기 마련 아닙니까.”
얼어붙은 입술을 달싹인 준원이, 나지막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너 같은 놈들은 수차례 봤다. 다 제 놈들 잘났다고 떠나간 놈들이지. 복수인지 지랄인지 하겠다고 총질 하다 뒈진 새끼들도 있고.”
“발악하며 쉽게 죽는 것만큼 쉬운 일도 없을 겁니다. 전 다릅니다.”
“뭐가 다른데?”
이충호가 반문했다.
“아주 촘촘하게 그물을 만들 겁니다. 그래서 그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꼴을 보며 천천히 하나둘씩 거꾸러트릴 생각입니다. 적어도 복수라면, 자멸시키기 위해 큰판을 만들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네놈이 시대를 거슬러 올라온 폭군들과 다를 바가 뭐냐? 그럼 큰판을 만들기 위해 죽여야 되는 희생들은 어찌 감당할 것인데?”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제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단지, 전 목적이 있고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물을 설계해야 한다는 것만 알 뿐입니다.”
“그리고 그 설계를 짜는 데 내 도움이 필요한 거고? 말하자면 날 이용하겠다는 게로구나?”
“엄밀히 말하면…….”
준원이 눈을 치켜뜨며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허 참.”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될지 몰랐다. 무식한 건지, 아님 대담한 건지, 그것도 아니면 복수에 미쳐서 날뛰는 건지. 배워야 될 사람을 앞에다 두고 ‘당신을 좀 이용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건 일반적인 사람의 생각으로는 불가능한 얘기였다.
그래서 이충호는 더욱 흥미가 동했다.
아니, 애초에 설계 이야기를 하며 구체적인 계획에 대해 언급할 때부터 준원이란 사람에 대해 이끌린 것일 수 있었다.
그가 지금껏 훈련시킨 이들 중에서는 머리와 강건한 신체 둘 모두를 결합한 최상급 인물이 나온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보통의 특수부대에서 훈련 받던 놈들은 대개 자부심도 강하고 준원이 보이는 강단과 독기가 있다. 육체적으로 강건해 보이는 것처럼 정신력도 지독해서 웬만한 일에는 고집을 꺾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단점으로는 작전을 지시 받아 몸으로 뛰는 일이 아니면, 돌처럼 굳은 머리를 좀처럼 쓰려 하지 않는다. 때문인지 남의 말을 이해해 자신의 의견으로 설득하는 일 따위는 하지 못하는 것이다. 무계획적으로 사는 녀석들이 대부분이라는 이야기다.
그와는 반대로 국정원에 들어와 에이전트로서의 실무를 담당하게 되는 놈들은 남의 말을 경청하고 자신의 뜻을 말로써 쉽게 풀어내 상대방을 이해시킬 줄 안다.
더불어 코트 드 본느나 코트 드 뉘와 같은 최상급 와인의 차이마저도 아는 고상한 취미도 습득할 줄 알며, 아랍어와 프랑스어 등 세계의 언어들을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하지만 이들은 특수부대와는 달리 실무에서의 피를 볼 줄 몰랐다. 쉬운 말로 싸울 줄 모른다는 표현이 옳았다.
그들은 대부분 독기와 강단 같은 건, 저 멀리 던져 놓고 자신들의 고상한 취미와 세치 혀로써 모든 일을 해결하려만 든다. 결국 이러한 놈들은 특수부대와 비슷하게 자기들만 아는 독선적인 태도를 지녀간다. 실무적인 일은 제대로 처리도 못하면서 각계각층의 인사들과 노닥거리는 것만 할 줄 아는 것이다.
그런데 이충호가 만난 준원은 뭔가 분위기부터 달랐다. 그가 경험했던 어떤 놈들보다 독기와 강단이 가득한 놈 같았다. 그런데도 분노로 가득한 마음을 절제할 줄 아는, 또렷한 언사에서 느껴지는 단호함은 앞으로가 기대될 만큼 제법 흥미가 돌았다.
잘만 깎는다면 제법 걸출한 인물이 될 자질이 엿보인 셈이다.
하지만 그런 기대와는 달리, 준원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그가 한 말 때문이었다. 옳고 그름을 상관치 않고 오직 복수만 생각하겠다는 준원의 처절함이, 계속 마음에 걸려 왔다.
‘어떻게 해야 될까.’
눈을 감은 이충호는 곰곰이 생각했다. 준원을 가르치는 것이 옳은지, 내치는 것이 옳은지 그도 판단이 서질 않았던 탓이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제쳐두고서라도, 준원의 능력을 다듬어 보고 싶은 마음은 불덩이처럼 커져 가고 있었다.
‘가르친다. 가르치면서 바꿔 주마.’
잘못된 생각이라면 가르치면서 바꿔 주면 된다.
복수의 끝이 허무한 의자뿐이라는 것을 알려 주면 되는 것이다.
마침내 이충호는 결단을 내렸다.
“허락하실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그런 이충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준원은 이내 입을 닫고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들어오너라.”
이윽고 이충호가 입을 열었다.
허락이 떨어진 것이다.
이충호가 승낙할 줄 예상하지 못했던지, 준원의 눈에도 이채가 흘렀다.
“단.”
그때, 이충호의 단호해진 눈빛이 준원을 향했다.
“무슨 일이든 내 말을 따라야 한다. 어떤 훈련이든 받을 준비가 된 게냐.”
“물론입니다.”
“그럼 됐다. 이제 그만 객기 부리고 일어나라.”
이충호가 일어나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오랫동안 무릎을 꿇고 있었으니, 관절이 굳었을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는 달리 준원은 굳이 이충호의 손을 잡지 않고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덕분에 무안해진 이충호가 쌜쭉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무엇이든 당장… 시작하겠습니다.”
일어난 준원이 추위로 인해 얼어붙은 입술을 달싹이며 말하자, 등을 돌린 이충호가 투덜거리며 말했다.
“시끄러워. 인마. 방에 들어가서 일단 몸부터 녹여. 지랄. 지가 무슨 초인이야? 염병 떨기는.”
무안을 준 준원에게 복수하듯, 투덜거린 그는 준원이 뭐라 할 새도 없이 집 안으로 휑하고 들어가 버렸다. 덕분에 뜻 모르는 준원만 의아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