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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부활 1권 (11화)
3장 평정심 (5)
“별것 아닙니다.”
“별것 아니기는, 너처럼 능숙하게 SSG―3000을 다룬다면, 웬만한 특수부대의 스나이퍼가 아니라면 이름도 못 내밀 게다. 늘은 것은 확실하다. 대신 다른 것도 함께 성장했는지 확인해 보고 싶어지는구나. 분해!”
“분해.”
나지막이 따라 대답한 준원이 기다렸다는 듯, SSG―3000을 분해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이충호가 외쳤다.
“SSG―3000이 몇 구경이냐.”
“7.62×51mm입니다.”
분해를 이어가던 준원이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유효사거리는?”
“1,000야드입니다.”
“장탄과 무게를 말해 봐라.”
“장탄은 총 다섯 발, 무게는 5.4kg이죠. 스코프를 장착할시 무게가 0.8kg 늘어납니다.”
막힘없이 이어지는 준원의 대답에 이충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쯤하면 되었다.”
“다른 총기류는 아직 보지도 않으셨습니다.”
“물어봐야 무슨 소용이겠느냐. 네놈이 이렇게 쉽게 맞히는데, 시험을 낼 것이라면 좀 더 어려운 걸 내야겠지. 따라오너라. 와인을 사 둔 것이 있다.”
이충호가 뭔가 꿍꿍이속이 있는 표정으로 입을 열자마자, 덤덤하던 준원이 처음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다음 훈련 과제는 그가 가장 싫어하는 와인에 관한 훈련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도 모르게 한숨을 내쉰 준원이 사격을 마친 라이플을 다시 결합했다.
* * *
“와인에 걸맞는 예의와 품위는 상위라고 떠드는 놈들의 비위를 맞춰 줄 때 통용되는 법칙과도 같은 것이다. 정작 그놈들은 와인 맛을 구분할 줄 모르고 와인이 좋다 떠들어대거든. 그런데 와인도 볼 줄 모른다고 생각한 네놈이 만약 와인 맛을 구분할 줄 알아봐라. 금세 흥미가 네게 쏠릴 게다. 그때를 이용하는 건 물론 네 역량이겠지만 말이다.”
처음 와인을 배울 때 이충호가 준원에게 해준 말이다. 신랄하게 비판을 해서 그런지 몰라도 준원은 아직도 그의 말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을 회상하며 와인 잔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옳지.”
와인과 얽힌 예의 중 하나는, 웨이터가 첫 서빙을 가져왔을 때는 잔을 들고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테이블 위에 잔을 두고 받으면 된다. 굳이 잔을 들고 싶은 시늉을 내겠다면 잔의 받침 부분을 손끝으로 아주 살짝 눌러 주는 정도가 좋았다. 물론 이충호는 그것마저도 지적했다. 상위 1%에 속해 있다 믿는 사람들은 그런 사소한 예외마저도 고까운 눈으로 본다는 것이다.
즉, 원리원칙에 따라 움직여 주는 것이 좋다고 설명했었다. 이 밖에도 향을 맡기 전에 와인 액체를 잔의 안쪽 벽에 바르는 스월링을 할 때와 하지 않을 때의 주의 점과 같은 예의들을 준원은 한 가지, 두 가지씩 자연스럽게 드러냈다.
“이제 와인도 제법이구나.”
한참 동안 준원을 주시하던 이충호가 그만 와인을 내려놔도 좋다고 승낙했다.
“맛은 여전히 난해하더군요. 구분하기가 여간 쉽지 않습니다.”
덕분에 잔을 내려놓은 준원이 자리가 갑갑하다는 얼굴로 매고 있던 넥타이를 풀어헤쳤다.
“어허.”
그것을 본 이충호의 눈이 번뜩였다. 이충호가 넥타이를 다시금 하라는 눈빛을 보내며 지적을 시작했다.
“갑갑한 자리는 늘상 있을 수 있다. 그런 자리에서 갑갑하다 해서 넥타이를 풀어헤칠 테냐? 응?”
“시정하죠.”
익히 그의 잔소리를 아는 준원이 재빨리 풀어헤쳤던 매무새를 정리했다.
이 밖에도 준원은 이충호에게 많은 배움을 받았다. 마치 대학교에 다니고 있다 착각이 들만큼, 준원은 체력 훈련을 제외한 많은 분야의 책과 자료들을 밤잠을 설쳐 가며 읽어야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준원이 가장 어려웠던 것은 매혹적인 언변의 관한 고찰이었다.
“언변이야말로 이 시대 사람들이 가장 배우고 싶어 하는 학문 중 하나다. 누가 말 잘하라고 가르쳐 주는 사람 봤느냐? 아니, 있다고 해도 다 고만고만한 놈들일 뿐이다. 어차피 각자 주어진 환경에 따라 말을 잘하고 잘하지 못하는 것이 결정될 뿐인 게야. 하지만 나는 언변을 잘하는 이들의 특징을 단 한 가지라고 본다. 뭐냐고 안 물어보냐?”
“뭡니까?”
“궤변이다. 그들은 자신이 가장 옳다고 믿거든. 세상 어디에도 옳은 것, 틀린 것을 판단하는 기준 따위는 없는데도 말이다. 그러니까 너는 네 스스로가 믿는 것에 따라 입을 놀리면 그만인 게다.”
“너무 뜬구름 같은 이야기 아닙니까?”
“언변이 필요 없다면 때려 부수든가. 네가 원하는 대로.”
어쩌면 이충호의 이론은 옳을지도 몰랐다. 아니, 그의 이론마저 궤변일 수 있었다. 하지만 준원은 그의 말 한마디에 그는 궤변을 믿고 싶어졌다.
“세상 모든 것이 궤변이다. 너마저 궤변을 떠든다 해서 세상이 달라지진 않아. 그러니 지껄여라. 네 마음이 가는대로.”
그 한마디에 준원은 더 이상 이충호의 서재에서, 사람을 매혹하는 백 가지의 책과 같은 것들은 보지 않게 됐다.
어느 날이었다. 일 년이 지나고 이 년째 가을이 찾아왔을 때 준원은 처음으로 훈련을 쉰 적이 있었다. 바로 이충호의 동생이라는 노인이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오봉준이라 밝힌 노인은 이충호와 같은 업에 종사했었던 사람이라고 했다. 그의 방문에 이충호는 황엽이 왔을 때처럼 환한 미소로 그를 맞이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물론 각자의 개인 신상을 비롯한 이야기는 철저하게 서로 묻지 않았지만 최근 나라 돌아가는 이야기나 젊은이들이 불량스럽다는 둥 같은 알맹이 없는 얘기가 주를 이뤘다. 그러던 차에 오봉준은 천천히 화제를 돌려 이충호를 찾아온 경위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목적을 드러낸 것이다.
“형. 내가 흥신소를 하나 운영하고 있는 것 아시잖소?”
“근데?”
“이번 건이 좀 힘들어서, 형을 찾아왔소. 혹시나 아직도 그쪽으로 아는 인맥이 있나 해서.”
“그때 사고치고 나가지만 않았으면 필요할 때 닿을 수 있을 것 아니냐. 누가 국정원장 멱살 잡으래?”
“동료가 죽었는데 가만히 있는 놈이 어딨소?”
“어쨌든. 그쪽은 왜?”
“힘 좋은 녀석이 하나 필요해서 그렇지요. 이제 우린 다 늙어서 힘도 제대로 못쓰지 않소.”
오봉준은 그 말을 하며 준원의 몸을 샅샅이 훑어봤다.
“이야. 이놈 실하고 좋네.”
오봉준은 마치 소의 등급을 매기듯, 준원의 팔을 어루만지기 시작하며 조금씩 접근하기 시작했다.
탁―!
준원은 오봉준의 손이 곳곳에 주물럭거리자 이내 팔을 휘저어 부드럽게 그의 손을 밀어냈다.
“어어?”
자신도 모르게 밀려난 오봉준이 순간,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눈을 빛냈다.
“이놈 어디서 났소. 형님?”
“관심 가지지마. 인마. 네놈 딱지 노릇 시키려고 고생시킨 거 아니니까.”
“그럼 이번만 빌려 주시던가.”
“그걸 왜 나한테 묻냐.”
더 이상 듣기 싫었던지 이충호가 인상을 쓰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오봉준은 기가 죽기는커녕 도리어 이충호를 설득하며 말을 이었다.
“그럼 내가 설득하면 데려가는 거요?”
“지랄.”
“허락으로 알겠소.”
씩 웃으며 너스레를 떤 오봉준이 준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정식으로 소개하마. 오봉준이라 한다.”
“원하시는 것이 뭡니까.”
“힘 좀 써 줬으면 좋겠는데.”
“뭘 받을 수 있습니까.”
“어?”
“대가로 뭘 받을 수 있냐고 물었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준원의 직설적인 태도에, 오봉준이 벙진 표정을 지었다.
“…그래. 공짜는 아니다만. 돈을 원하는 거냐?”
“돈보다 흥신소를 조금 썼으면 좋겠습니다.”
“흥신소를 써?”
“네.”
원하는 것을 주고받는다. 거래의 원칙 중 하나다. 잠시 고민을 하던 오봉준은 일단 급한 불부터 끄자는 생각에 고개를 시원하게 끄덕였다.
“좋다. 같이 일 한 번 해보자.”
“대신 이번뿐입니다. 거래를 한 거지, 계속 함께한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준원이 딱 잘라 선을 긋자 오봉준은 굳이 손해 볼 것 없다는 양 흔쾌히 그의 제안을 승낙했다.
오봉준이 봉고차 앞을 서성이는 동안, 준원은 이충호와 함께 집 옥상으로 올라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이충호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평소의 여유롭던 얼굴이 아니었다.
“왜 그런 결정을 내린 거냐. 무슨 생각으로?”
“떠날 때가 된 것 뿐이지 않습니까. 이번 일만 끝내면 이곳도 떠날 생각입니다.”
“이제 네 뜻대로 설계가 가능할 것 같으냐?”
“부족합니다.”
“그런데?”
“부족하다고 계속 안주해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이제는 스스로 부딪쳐 갈 차례입니다. 책으로 보고, 서류로 보며 끊임없이 공부한다 해서 각양각색의 사람을 아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사람을 상대하려면, 살아 있는 사람과 부딪치는 것보다 좋은 훈련은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네 할아버님께는 말씀드려야 하지 않겠냐.”
“도리어 염려하실 겁니다. 조용히 다녀오겠습니다.”
“가르쳐 준 것들을 잊지 마라.”
“네.”
“허나, 가르쳐 준 것을 응용하고 상대방에게 활용하는 것은 늘 얘기했듯이 너의 역량인 거다. 기억해라.”
준원은 대답 대신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받아라. 명함이다.”
오봉준이 준원과 함께 봉고차에 타며 명함을 건넸다.
대박 흥신소.
XX―XXXX―XXXX.
돈만 쥐어 주면 똥 개 찾는 일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대표이사 : 오봉준.
“명함은 됐습니다.”
“이미 준 명함은 받지 않는다. 버리던가 아님 넣어 둬. 둘 중 하나는 네 선택 아니냐.”
“그러죠.”
준원은 어쩔 수 없이 승복 바지 주머니에 명함을 넣어 뒀다.
“근데 다른 옷은 없냐?”
가만히 준원을 쳐다보던 오봉준의 질문에 준원이 고개를 저었다.
“이제 다른 옷은 불편합니다.”
“그래도 튀는 건 좀 그러니까 대충 이거나 입어 둬라. 저 녀석이 입는 옷인데 체격이 있으니 너한테도 맞겠다 싶다.”
오봉준이 그러면서 뒷좌석을 통해 트렁크를 뒤지던 사이 운전석에서 mp3를 들으면서 노래를 흥얼거리는 동남아 계 외국인도 마침 그제야 준원과 오봉준이 탄 것을 봤던지 끼고 있던 헤드셋을 빼며 말했다. 그가 백미러를 통해 준원을 힐끗 쳐다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형씨. 반갑다. 난 유복.”
“반갑습니다.”
“형씨 이름 뭔가?”
“준원.”
“쑨 원?”
쉽게 발음하지 못하는 유복의 말에 준원이 슬쩍 오봉준을 쳐다봤다.
“왜?”
“한국말 직접 가르쳤습니까?”
“그럼?”
“제대로 가르쳤으면 해서 말입니다.”
“내가 안 가르쳤어. 지가 귀동냥으로 배운 거지.”
변명하듯 말하는 오봉준의 대답에 준원은 그의 말을 귓전으로 흘리며 달리는 창밖을 쳐다봤다.
‘엄마… 그림 반드시 찾을게.’
그랬다.
그는 아버지가 남긴 그림을 찾기 위해 흥신소와 거래를 한 것이다. 이유는 딱히 없었지만 찾아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그들의 눈을 피해 그림을 찾기 위해서는 흥신소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런 준원의 생각을 알 리 없는 오봉준은 준원의 힘을 빌려 일을 해결할 생각에 흡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동상이몽(同床異夢)을 꾸는 두 남자가 서울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