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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부활 1권 (18화)
6장 새로운 신분 (2)


얼마 뒤.
불에 타오른 시체는 한 줌의 연기로 사라져 갔다. 오봉준은 사라지는 연기를 바라보며 벌써 네 개째 피고 있는 디스를 또다시 바닥에 떨어트려 발로 짓밟았다.
죄책감이라도 느끼는 것일까? 오봉준은 아직까지 준원과 단 한마디도 나누지 않고 있었다. 준원도 특별히 오봉준을 설득할 생각 따윈 없었는지, 아무런 말도 없이 차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쯤 흐르자 오봉준이 말없이 차에 탔다. 그리고 나선 준원을 처음으로 마주하며 나지막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돌아가라. 이제. 넌 내가 감당할 만한 놈이 아닌 듯싶다. 너도 굳이 내게 이유를 설명하고 싶진 않을 거라 생각한다.”
준원은 오봉준의 맥 빠진 음성에 말없이 그를 직시하기만 했다. 그런 그의 자리 옆에 먼지로 쌓인 그림이 놓여 있었다.
이윽고, 차는 금방 이충호의 집에 당도했다.
오봉준이 대신 문을 열고 자리를 비켜 주었다.
그만 가보라는 듯.
그러자 준원도 섭섭한 기색 없이, 그림만 챙겨 차에서 내렸다.
“저.”
막 준원이 내리려던 차에 조용하던 오봉준이 그를 불렀다. 그러면서 품속에서 명함을 꺼내 준원에게 건넸다.
“내 명함 가지고 있냐?”
“있습니다.”
준원이 문을 나가기 직전 고개를 돌려 대답했다.
그러자 오봉준이 쓰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혹시나 마음이 어지러워진다면 과감하게 찾아와라. 네 자리 놔둘 생각이니까.”
탁―!
준원은 대답 대신, 고개를 까딱여 보이고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이충호의 집을 향해 걸음을 옮겨갔다.
“무드도 없는 놈.”
몇 마디 하지도 않고 사라지는 준원을 보며 오봉준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 * *

“왔냐.”
돌아온 준원을 맞이한 건 이충호뿐만이 아니었다.
김소흥과 문수가 그와 함께 마루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고생했다.”
이충호는 그간 준원을 꽤나 기다린 듯, 반가운 얼굴로 준원을 껴안았다. 이런 환대가 어색했던지 준원은 말없이 마루에 들어와 그들 곁에 자리했다.
“이제 준원이를 데려가야 할 것 같습니다.”
마침 준원이의 거취 문제를 논하고 있었던지, 김소흥이 조심스럽게 준원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셔야죠. 마땅히.”
이충호도 보내야 된다는 것을 알기에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인다. 물론 그의 얼굴에는 애써 섭섭함을 티내지 않으려 하는 노력이 엿보였다.
늘 타박을 일삼아도, 정작 힘든 교육을 잘 따라와 준 준원이 내심 늘 자랑스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나는 것이 있으면 보내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會者定離 去者必返
회자정리 거자필반.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고 헤어짐이 있으면 만남이 있다.

이충호는 옛 격언을 떠올리며 이내 섭섭한 마음을 접었다.
“하루 정도는 쉬고 싶습니다.”
그때, 조용히 앉아 있던 준원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유난히 쓸쓸해 보이는 눈동자를 마주한 김소흥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준원이 무척이나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준원은 허락해 준 김소흥에게 짧게 목례로 화답하고는 늘 이충호와 올라갔던 옥상으로 발길을 돌렸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이충호도 준원의 상태를 대강 짐작하며 급히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

옥상에 선 준원은 잘게 떨리는 손을 내려다봤다. 살인(殺人)을 처음 해서일까? 아님 마음속 깊은 곳에 일어나는 죄책감 때문일까? 아니다. 죄책감 따위가 있을 리 없었다.
“봉준이 녀석에게 들었다. 살인을 했다고.”
이충호가 문을 걸어 나오며 준원의 옆으로 다가왔다. 어느새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문 그가 담뱃갑을 준원에게 건네며 말했다.
“한 대 펴라.”
“됐습니다.”
“피라면 펴. 이것도 훈련이니까.”
강제로 준원의 손에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려 준 그가 불을 붙여 주자, 준원이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피기 시작했다.
“꼴을 보니 전에 폈었던 모양이로구나.”
“피다 끊었습니다.”
“언제 폈는데.”
준원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자꾸 쓸데없는 질문을 하는 그가 피곤해서였다. 하지만 이충호는 계속 질문을 퍼부으며 평소와 달리 말을 많이 했다.
“자꾸 말을 거는 이유를 알고 싶으냐?”
대뜸 이어지는 그의 질문에 준원이 대답 대신, 쳐다보지도 않던 그를 향해 처음으로 고개를 돌렸다.
“네 일상 자체가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예감 때문이다. 첫 살인은 그렇거든. 어떤 확고한 신념이 있어도 네가 가진 모든 게 송두리째 흔들리는 것 같은 혼란을 겪는 게야. 그러니 일상적인 얘기를 계속하면서 네 긴장을 풀어 줬던 거지. 이제 좀 진정이 된 것 같으니 다행이구나.”
이충호의 말 대로였다. 어느 순간 준원은 자신의 손이 떨리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면서 이채가 흐르는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이제 늘 마음에 품었던 이야기를 해주어야겠다. 넌 지금까지 내가 가르친 어떤 녀석들보다 월등한 실력을 가지게 됐다. 하지만 그 녀석들보다 단 하나가 턱없이 부족하지. 그게 무엇인지 아느냐.”
“뭡니까.”
“계획대로 짜여진 이중성이다. 물론 늘 네 정체성을 기반에 둔, 이중성이어야 하지.”
“모순이군요.”
“스파이였던 내게 네가 교육 받았다는 것부터가 모순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은 거지.”
“…….”
“당부를 하나 하자면, 무엇이든 철저하게 계획하라고 말하고 싶구나. 사실 이제 난 네게 가르칠 것이 없다. 폭탄, 총기, 전술 등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걸 네가 알려 줬지만 사람을 대하는 법은 이론만 알아서는 알 수 없다. 직접 부딪쳐야 하지. 지금같이 ‘복수하겠습니다.’라는 표정을 얼굴에 써 붙이고 다녀서는 금세 네 마음을 알아보는 사람과 마주하게 될 거다. 위험을 자초하게 될 것이라는 소리지. 그러니, 네 뜨거운 마음을 감추고 이성을 차갑게 식혀라. burning heart…….”
나머지 뒷말은 준원이 덧붙였다.
“and cool head.”
가끔씩 준원을 보며 이충호가 해왔던 조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준원이 쉽게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는 것을 보며 늘 염려해 왔었다. 그리고 준원이 떠나는 지금, 그는 준원의 미래를 염려했다.
“물론 어떤 놈들은 살인을 한 후, 살인을 하는 자신의 모습과 평소의 모습을 이중인격으로 나눈다. 그러면서 정신분열에 빠지고, 각 상황에 따라 그에 맞는 정신체가 나타나는 거지. 방금 전에도 말했듯이 난 네게 이런 정신 분열에 빠지는 것을 계획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너의 본래 정체성을 잊지 말되, 평범하게, 아무도 모르는 제2의 가면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더욱 은밀히 네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게다. 하나… 너는 잊지 말아야 한다. 살인을 한 것도. 제2의 가면을 만드는 것도 결국 네 자신이라는 것을. 그러니 너는 유약하게 네 스스로를 두 개로 나누는 멍청한 짓은 하지 말거라. 결국 모든 것의 시작은 네 스스로가 이끌어 낸 결과물이다. 그러니 후회도, 미련도 가질 것 없다. 네 스스로 행하는 모든 일이 곧 길이 될 것이다.”
사실 이충호의 생각은 처음 준원을 받아들일 때와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는 준원과 지내면서, 준원이 가진 어둠의 이유를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는 지레짐작했다. 아마도 지키고자 했던 이들이 누군가 의해 이유 없이 죽어야 했을 것이다. 늘 복수의 대부분은 그렇게 시작하니까.
그래서 그는 준원의 의지를 쉽게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예상하고 생각을 바꾸었다. 준원의 의지가 쉽게 흔들리지 않게끔 견고히 만들어 주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한 것이다.
“흔들리지 마라. 어떤 것보다 우선시 되어야 할 일이다.”
“흔들리지… 않습니다. 아니, 흔들린 적 없습니다.”
준원은 어느새 피고 있던 담배를 바닥에 던져 발로 밟으며 발길을 돌렸다.
동시에 걸어가던 준원의 등 뒤로 이충호의 음성이 이어졌다.
“네가 선택한 길의 끝이… 좋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복수에도 한계가 있다. 하지만 그 복수의 길속에서도, 참된 의미를 보게 된다면 지체 없이 그 길을 택해라.”
악담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과거 준원과 비슷한 길을 겪었었던 선배로서의 충고였다.
‘내 복수의 한계 따위는 없습니다.’
하지만 준원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계속 걸어갈 뿐이었다.

“이 아이를 맡아 주어서 고맙소.”
떠나기 전 김소흥이 먼저 악수를 청했다.
“아닙니다. 응어리 진 숙원을 푼 것뿐입니다.”
김소흥의 고맙다는 인사에 그는 되레, 개인적인 욕심이라 대답하고는 함께 서 있는 준원을 향해서 악수를 청했다.
“고생했다.”
“은혜… 갚을 날이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준원도 그에 대한 고마움을 모르지 않았다. 단지 속내에 담고 나타내지 않았을 뿐이었다. 잔정에 하나씩 이끌리다 보면 스스로의 다짐마저 무너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더 누군가에게 다가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한 본심마저 들키기는 싫었기에, 그는 무덤덤한 인사로 이충호와의 인연을 마무리했다. 이충호도 그러한 준원의 마음을 알고 있는 것인지, 몇 마디 인사로써 그를 배웅했다.
“잊지 마라.”
마지막까지 당부의 말을 잊지 않는 이충호의 음성에 준원은 차에 타며 고개를 짧게 까딱였다. 그렇게 차가 출발하고. 백미러로 이충호의 얼굴이 멀어져 갔다.

“고생했다.”
김소흥은 오랜만에 재회한 손자의 손 등 위에 손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늘 무뚝뚝했던 할아비였지만, 그는 늘 준원을 그리워했기 때문이다.
딸과 사위를 잃었으니, 그 비통한 심정을 누가 알까?
김소흥은 이러한 자신의 마음을 준원만큼은 깊게 이해해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내 준원의 입에서 흘러나온 음성은 차 안을 감싸 안던 따스함을 단번에 날려 버렸다.
“이제… 떠날 생각입니다.”
“허허. 생각보다 빠르구나.”
“사 년이라는 시간이 느린 시간은 아닙니다. 전 그간의 사 년을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왔습니다. 이젠… 칼을 갈아야 할 시간입니다.”
나지막한 준원의 음성에서 느껴지는 얼음장같이 차가운 살기는, 운전하고 있던 문수마저도 흠칫거리게 만들었다.
‘나의 선택이 옳은 것인가.’
난전(亂戰)으로 표현될 법한 시기에, 준원의 개입은 적지 않은 파란을 불러올 것이 분명했다.
대한민국 곳곳에 손을 뻗치고 있는 AST와 중국계 무예가와 그들의 하수인이라 불리는 삼합회들은 아마 보이지 않는 적을 두려워 할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상황이 진행될수록 정작 준원의 삶은 피폐해질 것이었다.
복수란 그런 것이기에.
하나, 준원을 말리기에는 이미 늦었고 선택을 되돌리기에도 늦었다.
그럴 바에는 준원이 다치지 않도록 후방을 지원해 주는 길밖에 없었다.
적어도 김소흥은 그리 생각했다.
“한데 트렁크에 실은 그림은 무엇이냐?”
이윽고, 김소흥은 마음을 정리하고는 화제를 전환했다.
“유품입니다.”
“유품?”
“네. 짓밟혀져 있더군요. 놈들에 의해서. 그래서 가져왔습니다.”
“그것이 무슨 소리냐. 그들과 접촉이라도 했다는 게야?”
“네.”
“하아. 어찌할꼬.”
‘그들’은 준원이 죽은 줄 안다. 하지만 이렇게 버젓이 살아 돌아왔으니, 이제부터 그들은 준원을 쫓기 시작할 것이다.
순식간에 김소흥의 표정이 깊은 고뇌에 빠졌다. 하지만 이어지는 준원의 말에 김소흥은 아무런 말도 잇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