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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부활 1권 (19화)
6장 새로운 신분 (2)


“죽였습니다. 전부.”
“죽이다니?”
“죽여서 소각장에 불태워 없앴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제가 살아 있는지 모릅니다. 제가 살던 동네는 CCTV도 설치되어 있지 않을 만큼 낙후된 곳이니 증거 테이프도 남지 않았을 겁니다. 염려 마시죠.”
“허어.”
사람을 죽였다니? 그리고도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다니?
김소흥은 울컥 솟아오르는 죄스러움에 입술을 앙다물었다.
‘어찌 이리 변했느냐.’
단 사 년 만에 손자는 무섭게 돌변했다.
마치 감정이 없는 사람같이 말이다.
“그랬구나… 그랬어.”
김소흥은 자조적으로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유난히 입안이 쓴 것 같았다.

* * *

상원사.

“가족, 친인척도 없이 실종된 사람들의 신분을 이용했습니다. 아마 노숙자로 살다, 거리에서 죽은 사람들로 추정됩니다.”
문수는 준원의 앞에 새로운 신상 파일들이 담겨 있는 봉투 세 장을 각각 펼쳐 놓았다. 그가 새롭게 살아갈 신분들이 담겨 있는 봉투들이었다.
“이미 법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 도련님께서는 이들의 신분으로 살아가시면 된다. 각자 나이는 24세, 30세, 38세입니다.”
“이름은요?”
“김유한, 백지윤, 오용태입니다.”
“우선 주로 활동할 때의 신분은 김유한이 좋겠군요.”
어느새 서류를 살펴보던 준원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대답했다.
“이유가 있으십니까?”
그의 말을 들은 문수가 물었다.
“나머지 두 사람에 비해 달리 특이사항이 많지 않습니다. 평범한 이들 중에서, 인상으로 보나, 주요 특징들로 보나 가장 평범하죠. 그렇다는 것은 내가 이 사람으로 위장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진다는 이야기도 됩니다.”
“합당하십니다. 그렇게 처리하시죠.”
“그래요. 그다음은 뭡니까?”
“신분 위장은 도련님께서 차차하실 부분이겠지만, 우선적으로 처리하셔야 될 일이 있습니다.”
문수가 말을 끝마치며 입을 닫고 있는 김소흥 쪽을 쳐다봤다. 그러자 문수의 시선을 느낀 김소흥이 개봉하라는 듯 허락의 의사를 보였다.
철컥―!
김소흥의 뜻을 전달 받은 문수는 미리 가져온 서류 가방의 자물쇠를 열고, 그 안에 들어 있는 토지 서류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이것들은 토지 서류입니다. 현재… 일제시대 당시 친일파들의 토지 소송들이 줄줄이 이어지고 있는 것은 아시죠?”
“예.”
“혹여나 오해하실까 말씀드리는 거지만, 절대 도련님은 친일파의 후손이 아니시니 염려 마십시오.”
“계속 말씀해 보시죠.”
“네. 물론 이런 일은 최근 들어 기사화됐을 뿐, 광복 이후부터 비일비재했던 일들이죠. 친일파들은 나라가 광복된 후에도 질기게 살아남았고, 우리나라 대부분 주요 인사 곳곳에 자리 잡았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법 또한 그들의 맞게끔 설정되었다는 음모론이 완전히 틀린 것만은 아닙니다.”
“저는 그것이 저와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만.”
“예. 이제 말씀드리겠습니다. 도련님이 원래 물려받아야 할 땅이 수십 개입니다.”
물려받는다는 말에 준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과거 어머니에게 들어 보지도 못했던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준원의 의아한 표정을 마주한 문수는 그의 궁금증을 풀어 주기 위해 재빨리 말을 이었다.
“우리나라에 친일파 말고도, 남아 있는 음지의 독립군은 늘상 존재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 독립군의 후예들은 대부분 도련님과 같은 비맥의 후예들이죠. 그들은 오래전부터 친일파들의 실상을 알았고 그들의 움직임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첫 번째로 시행한 일이 토지 복권의 관한 소송입니다. 아주 은밀하게 진행했죠. 웬만한 국민들도 토지 복권에 관한 소송들이 줄줄이 이어졌다는 사실은 알지 못합니다. 관심이 있는 소수의 국민들만이 알 뿐이죠.”
“토지 복권이라면?”
“일제 강점기 당시, 친일 인사들에 의해 강제로 빼앗겼다는 증거들을 가져와 저희 비맥의 선조들과 독립투사들의 땅을 복권시키는 소송을 행한 것이죠.”
“그래서요?”
“십오 년 전, 그 거대 소송은 민족문제연구소와 과거 물증들을 여전히 지니고 있던 저희 쪽의 승소로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서울시 주요 거점 시내들 곳곳의 노른자위 땅이 전부 비맥 후예들에게로 돌아간 겁니다. 하지만 땅을 얻었다고 모든 문제가 끝나는 것은 아니었지요. 앙심을 품은 친일파들이 정치적인 힘을 움직일 가능성을 고려해야 했기 때문에, 비맥의 어른들은 정치와 경제 두 가지 힘을 모두 얻어야 했습니다. 즉, 비맥의 뜻을 이어받는 대리인들을 고용하신 것이죠.”
놀라운 사실이었다. 그렇게 따진다면, 비맥이야말로 대한민국을 주무르는 실세 중의 실세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준원은 더욱 궁금해졌다. 왜 그러한 힘을 가지고 있는 비맥이 어째서 무력하게 AST와 중국 남방계 무예가들에게 침투 당했었는지 말이다.
“왜 당한 겁니까. 그런 힘을 가지고도.”
“십오 년 전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럼 대강 그림이 그러시지 않으십니까.”
“그렇군요.”
준원은 곧 깨달을 수 있었다. 비맥이 그토록 집단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시점이, 그의 아버지가 죽은 시점과 맞물려 있다는 것을.
‘서류에서도 본 적이 있다. 아버지의 죽음과 동시에 비맥이 결사 형태의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고.’
이내 문수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한 준원은 그가 자신에게 이러한 얘기를 꺼내는 요점이 더욱 궁금해져 왔다.
“이제 말씀드릴 차례군요. 왜 제가 도련님께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인지.”
“네. 들을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준원이 문수의 말에 고개를 까딱였다.
“할아버님께서는 비맥의 후예들 중에서도 가장 큰 대주주이십니다. 대리인들이 세운 기업 곳곳의 막강한 주식들을 보유하고 계시죠. 그 재산들을 전부 도련님께 이양할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다. 불법적인 부분까지 고려해서라도, 웬만하면 원 상태로 이어주고 싶으시다 하셨습니다.”
“세금을 면제 받으실 생각이시군요.”
문수의 말을 들은 준원이 김소흥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것은 이 할아비의 몫이다.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준원의 시선을 느낀 김소흥이 나지막한 음성으로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아무 소리 말고, 물려받으라는 이야기였다.
“굳이 세금을 면책 받으려는 이유도 겉으로 일어날 복잡한 법적 절차들 때문이겠죠. 그렇게 되면 할아버님의 이름까지 그들에게 노출될 것이고 말입니다.”
“잘 보셨습니다. 현재 비맥의 후예들은 전부, 자신들의 이름이 아닌 대리인을 통해 기업의 행보에 자신의 의지를 전합니다. 물론 겉으로 보이는 명의들도 전부 위장된 신분들이죠.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냄새를 맡을 테니 말입니다.”
“아직까지 그들의 눈에 걸리지 않은 것이 신기하군요.”
“그만큼 철저하게 움직였습니다.”
“좋습니다. 받아들이죠. 이것을 물려받는 데 또 다른 절차가 필요합니까?”
“예. 실은 곤란한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도련님의 위장 신분을 구하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만. 알고 보니, 이 위장 신분의 실종자가 군대를 다녀오지 않았다 하더군요. 물론 군대를 다녀온 다른 위장 신분으로 하려고 했지만, 대개 도련님의 나이와 비슷한 나이대의 실종자들 중에서 군대를 다녀온 이들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위장 신분 하나를 만드는 데 드는 시간과 돈도 오래 걸리는 일이라는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입니다만. 실은… 보증인을 구하는 겸 군대를 다녀오시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어 도련님의 의견을 여쭈고자 합니다.”
“보증인?”
“네. 위장된 신분이 더욱 공고히 다져지려면, 보증인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더구나 그 보증인들은 대개 AST든 중국 남방계 무인 협회든, 삼합회던, 그들의 눈에 띄지 않을만한 인물들로 구성하는 것이 나을 테지요. 혹여나 그들을 캐 봤자 도련님 본래의 신분과의 연관성은 찾지 못할 테니 말입니다.”
“그들은 내 얼굴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 문제는 어떻게 건드리실 생각이십니까.”
“저희 비맥의 대리인들 중에는 전문 성형외과 의료진들 또한 있습니다.”
“의료진을 이용해서, 성형을 시키겠다는 이야기입니까.”
“도련님의 선택 사항이십니다.”
“거절하면?”
“거절당하는 거겠지요. 단, 그만큼 위험부담이 커질 수 있다는 이야기도 됩니다.”
문수의 말을 요약한다면, 준원은 거절이라는 것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한다. 해낸다.’
어차피 목숨을 건 일이었다. 얼굴을 바꿔,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전부 종잇장처럼 불태운다 하는 선택이더라도, 그들을 무너뜨린다면 결코 후회 따위는 없을 것이다. 결국 준원은 일생일대의 결단을 내렸다.
“성형…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시기에 맞춰서 군 입대 준비해 주시죠.”
“알아두셔야 합니다. 단순한 성형은 아니라는 것을.”
“그럼 뭐죠.”
“페이스오프, 다른 사람의 얼굴과 바꾸시는 겁니다.”
“알겠습니다.”
나지막한 준원의 음성에 문수가 대답 대신 깊게 고개를 숙였다.
그의 힘든 결정에 경의를 표하는 목례였다. 그렇게 새로운 운명의 주사위가 던져졌다.

* * *

대리인을 통해 뻗어진 비맥의 기업들은 숫자가 많았다. IT계열의 중소기업부터 시작한 회사 목록을 보니, 비맥은 외국 선박 업체와 합병한 기업을 합쳐 수많은 위장 계열사를 가진 문어발 조직이나 다름없었다.
또한 삼 년 전, 불어난 부채와 전 회장의 회사 공금횡령이 맞물리게 있었던 대한민국의 대표적 기업 D사의 인수를 포함한 서류까지 확인한 준원은 내심 비맥이 지닌 힘을 알 것 같았다.
하지만 문수가 말하기를, 비맥이 한국 곳곳의 손을 뻗어가던 시점에도 삼합회를 통한 자본들은 끊임없이 한국으로 유입됐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이 AST에 소속된 남방계 무인들의 후예들이거나 혹은 그들과 관련된 대리인들이라고 하니 결코 비맥의 세력이 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군의 세력이 큰만큼 적의 세력은 더욱 크다.’
현재 사회의 자본 원리는 수많은 자본 투자자들의 해외 투자로 대개 이루어진다. 더구나 해외 투자 의존도가 높은 대한민국의 특성상, 중국의 영향력은 미국이 한국에 끼치는 영향을 서서히 능가하려 하고 있었다.
더구나 최근 L사의 파산으로 일어난, 세계 경제가 공황 위기로 치닫는 과정에서도 빠른 경기부양책을 집행으로, 도리어 경제 약진을 끌어낸 중국의 경제 성장세 흐름을 탄 AST는 그들의 하수인인 삼합회와 함께 본격적으로 한국 금융 시장에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사정이 그러했으니 비맥의 입장에서는 더욱 덩치를 키워 가는 그들에게 또 한 번 위험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할아버님과 비맥에서 제게 원하는 것이 뭡니까.”
김소흥과 단둘만의 시간을 가지게 된 준원이, 직접적으로 물었다.
“비맥은 네게 AST에 해체를 원한다.”
“왜 저입니까?”
“그들의 눈을 피할 수 있는 것이 너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 그리고… 과거 비맥을 열광하게 했던 네 아비의 아들 때문이라는 후광도 한몫을 하더구나.”
“결국 제게 원하는 건, AST의 해체와 삼합회의 몰락입니까.”
“맞다.”
“AST의 해체는 비맥에 무얼 의미합니까.”
“AST는 현재 범세계적으로 영향력을 넓혀 가며 아시아권의 무예가들을 중국 남방계의 구속시키며 아주 오랜 옛날이나 있을 법한 노예 시장을 꾸리려고 한다. 도리어 AST를 이용해서 지하경제의 돈을 벌어들이겠다는 셈이지. 무예가들을 잘만 훈련시키면 각종 이권 사업에 사용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그들의 해체를 원하시는군요.”
“맞다. 이미 변질된 AST는 구원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린 네가 AST를 해체시켜 주기를 원한다. 그곳에 구속된 무예가들도 전부 해방시켜 주기를 원하는 게지.”
“그리고 그 이권 사업들의 주축이 된 삼합회를 무너뜨리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까?”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