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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부활 1권 (20화)
6장 새로운 신분 (3)


김소흥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의 말을 가만히 듣고 난 뒤, 준원이 화제를 돌리며 물었다.
“그럼 이제 할아버님의 생각을 묻겠습니다. 할아버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마음 같아서는, 네가 비맥의 유지를 이어받으면서까지 위험을 자초하게 하고 싶지 않다. 단지 너를 수련시킨 것은 너의 선택을 존중하기 위함이었으니.”
“몰랐다면 가능했겠지만 부모님의 죽음이 그들과 연관이 있다는 걸 안 이상, 굳이 결단을 내린 이상, 생각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녀석…….”
“용서하십시오.”
“용서랄 것이 무에 있겠느냐. 이 할아비의 잘못이거늘.”
김소흥은 그 말을 하며, 씁쓸하게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말없이 방을 빠져나갔다.

* * *

별을 보는 아이.
제목만 들으면 뭔가 심오했다. 하지만 준원은 비닐을 다 뜯은 그림을 응시하며, 쉽게 그림이 뜻하는 바를 떠올리지 못했다.
무엇 때문일까?
무엇 때문에 이토록 그 그림을 지키라 말씀하셨던 것인가.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의문점은 준원의 눈을 그림에서 떼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러던 준원의 눈에 유난히 짙게 수채화 된 별 세 개가 보였다. 그리고 마치 눈앞에서 필름이 영상화된 것마냥, 아주 오래전 어머니의 무릎 맡을 베고 자며 들었던 이야기가 교차됐다.

“엄마. 졸려.”
“우리 아가 졸리는구나. 그럼 엄마가 우리 준원이 잘 잘 수 있게 옛날 얘기 해줄까?”
“응!”
“준원이 아빠가 엄마한테 들려준 얘기야. 나중에 준원이를 만나면 꼭 직접 말씀하실 거라고 늘 얘기해 주셨거든.”
“해줘. 해줘.”

그때는 아마 아버지의 향기를, 이야기를 통해 느끼고 싶었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라도 아버지가 남긴 흔적을 보고 싶었다.

“아주 옛날에 흑룡담이라는 평화로운 마을이 있었단다. 그 마을에는 한 어머니에서 태어난 삼형제가 오순도순 살고 있었는데, 그 삼형제의 어머니는 무척이나 엄한 분이어서 아들들이 여덟 살이 되던 해에 모두 집을 내보냈단다.”
“왜?”
“더 큰 어른으로 성장하라고 보낸 거야.”
“엄마는 그러면 안 돼.”
“그럼 엄마는 준원이를 떠나지 않을 거야. 절대…….”

그래. 어머니가 해주던 이야기가 틀림없었다. 준원은 재빨리 그림에 크게 그려진 별들을 보며 상관관계를 찾으려 애썼다.
‘어머니가 내게 해줬던 이야기는, 늘 삼태성(三台星), 전설의 이야기였다. 한 번 되짚어 보자.’
준원은 이마에 손을 얹고는, 하나둘씩 옛날 기억을 더듬어 봤다.
‘어머니의 엄명으로 모두 집을 나가, 스승을 찾은 세 형제들은 십 년 후, 각자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돌아오지. 첫째는 방석에 앉아 손바닥을 치면 구만 리를 갈 수 있는 능력을, 둘째는 앉아서 구만 리를 볼 수 있는 능력을, 셋째는 무예에 능통해 검만 휘둘러도 번갯불이 튀기는 신비로운 무예를. 그리고 그들은… 힘을 합쳐 태양을 삼킨 흑룡을 잡고 태양을 되찾는다. 이 내용이 아버지와 가진 상관관계가 뭘까. 잠깐. 흑룡이 만약 삼합회와 AST를 상징하는 것이라면 이야기의 퍼즐이 맞춰진다.’
준원의 생각대로, 아버지가 만약 당시 상황을 떠올리며 그림을 남긴 것이라면 그리 틀린 이야기 같지도 않았다. AST와 삼합회가 태양을 삼킨 흑룡이고, 삼형제를 아버지가 스스로를 비유했다면?
‘하지만 그런 식으로만 풀이한다면 단지 비유일 뿐, 무언가를 남기시지는 않았을 것인데. 가만? 아버지께서는 분명 내게 이 그림이 무사히 전달될 것이라고 생각하시고 되레 쉽게 흔적을 남기셨을 수도 있어. 그럼 오히려 간단한 방법일 수 있다는 거지.’
이내 생각을 정리한 준원은 입술을 앙다물고, 손을 천천히 그림을 향해 뻗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유난히 큰 크기의 별 그림의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는 결연한 빛이 느껴지는 표정으로 단박에 별이 그려진 그림을 손가락으로 찢기 시작했다.
동시에 준원의 손가락에 까끌까끌한 감촉이 느껴졌다. 놀랍게도 별이 크게 그려진 부분마다 작은 구멍 세 개가 뚫려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작은 구멍 안에는 특이한 재질의 뭔가가… 자리 잡고 있었다.

보는 법, 나는 듯 달리는 법, 해하는 법을 나누는 배움 따윈 없다. 그것들을 나누고 각자의 법을 만든 것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무지한 자들이 깨달은 자들을 편하고 쉽게 따라잡고자 만든 궤변이다. 진정한 선지자들은 그러한 것들을 애초부터 나누지 않았다. 애초의 모든 생명의 근간은 하늘과 땅과 사람이며, 사람 또한 그 균형 속의 하나를 담당하는 구성원이었다. 사람의 단전을 그릇으로 만들어 사람의 한계를 넘어서려 했다는 설(說)은, 이러한 이치를 잊고서 하는 잘못된 일이었다. 하지만 인체의 단전에 천지의 기운을 받아들여, 한계를 뛰어넘겠다는 정설은 이미 굳혀진 듯 보이니, 나는 이제 무지한 자들의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주려 한다. 부디 이 글을 읽는 것이 나의 아들이든, 어떤 누구든, 훗날 내가 죽는다 하더라도 이러한 이치를 후대들에게 전해 주어라.

내 말을 온전히 이해했다면, 혹자는 외기와 내기를 나누는 우둔한 짓은 하지 않으리라 본다. 대신 기의 동화되는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하는 일은, 기를 느끼는 것이다. 허나 이 일은 쉽지 않다. 과거 심산유곡에 들어간 선조들의 행위 또한 이러한 단계를 연성하기 위한, 하나의 방도였으리라 짐작해 본다. 자연과 밀접한 곳에 가까이 있다면 기를 느끼는 것이 더 빠를 것이라는 설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허나 기를 느끼는 방법 따윈 없다. 오로지 스스로가 하늘과 땅의 중추에 있는 사람임을 무아 속에서도 잊지 말며, 사람의 겉을 촘촘히 감싸고 있는 기(氣)의 존재를 느끼며 동화되려 해야 한다.

기의 흐름을 알았다면, 이제는 그대는 누군가의 움직임도, 심장 소리도, 만물의 모든 것을 오감을 이용해 느낄 수 있게 된다. 그럼 멀리 있어도 기척을 느낄 수 있고 해하려 다가오는 것을 천지의 뻗어져 있는 기의 그물로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다만, 알고 있다 해서 신이 되는 것은 아니다.
분명 신체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며, 만약 그대가 총의 둘러싸인 채로 상대들을 맞이했다면 천라지망(天羅地網)과 같이 기의 흐름을 느낀다 하더라도, 날아오는 총을 전부 피할 수는 없는 것이다. 총탄이 어디서 날아오는지 알고 있다 해도, 총탄들의 도착 지점이 맞물려 있다면 피륙으로는 그 틈을 파고들 수 없으니 말이다. 때문에 나는 피하기보다는 맞서는 것을 택했다. 천지를 타고 흐르는 기의 흐름을 느끼기만 한다면야, 무슨 소용이랴. 그리하여 나는 기의 파동(波動)을 통한 무예를 창시했다. 이렇듯, 파동의 폭발 점을 극대화시켜, 날아오던 총알을 찌그러트릴 수도, 사람을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할 수 있는 무예를 만들어 낸 것이다. 혹자여. 부디 이 힘을 옳은 일에 써 주기를 바란다.

“아버지…….”
준원은 그림 속 담겨져 있던 아버지의 마지막 유서를 보며 조용히 흐느꼈다. 그의 턱을 타고 눈물이 한 방울씩 흘러내렸다.

며칠 후.
철컥―!
늦은 밤, 고요한 수술 방 밝은 조명이 켜지고 준원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마취하겠습니다. 곧 잠에 드실 거예요.”
“네.”
이제, 이 날이 지나면 준원은 더 이상 준원이되, 준원이 아니었다. 그는 수술 침대에 누운 채로 서서히 흐릿해져 가는 의식을 느끼며 혼절했다.

* * *

새로 뒤집어쓴 얼굴 표면이 낫는 세 달여가 흐르는 동안, 준원은 신체검사 및, 군 입대에 필요한 것들을 문수와 함께했다. 그리고 얼마 뒤 입대가 결정됐다.
병무청에서 온 입영 통지서와 함께 입대 날이 부쩍 가까워졌다. 그렇게 하루, 이틀, 삼 일이 지나고 마침내 입대 전날이 다가오자 준원은 과거 상원사에서 수련하던 날을 떠올리며 마지막 수련을 시작했다.
쐐액―! 쐐액―!
준원의 놀려지는 손과 발은, 고요한 호수를 연상케 했다. 이내 부드럽고 평온한 움직임은 끊임없이 이어져갔다. 하나 그 와중에 놀라운 것은 그의 손이 닿지 않은 근방 나무에 준원의 손바닥과 같은 크기의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허허. 이젠 이 할아비는 가볍게 누르겠구나.”
한참 국자랑을 펼쳐 가던 준원의 손끝이 잘게 떨리며 멈추자마자, 등 뒤에서 김소흥이 걸어 올라왔다. 그러자 준원이 동작을 멈춘 자세 그대로 대답했다.
“복잡한 마음도… 초유행공을 펼칠 때는, 잠시 묻어 둡니다. 그래서 더욱 수련에 열중하는 것인지도 모르죠.”
오랜만에 솔직히 자신의 심정을 토로한 그의 음성에는 짙은 고독감이 서려 있었다. 어쩌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평범한 삶을 그리워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네 복수를 지원하는 것은 어렵지 않느니라. 이 할아비의 목숨을 걸고라도 네가 그 길을 가겠다면 힘쓸 것이다.”
“그럼 무엇을 고민하시는 겁니까.”
준원은 지금껏 김소흥의 표정에 담긴 고심이 궁금했다.
무엇 때문일까?
“이 할아비는 네가 지금이라도 새로운 신분으로 평범히 살길 원한다. 이 할아비의 욕심이 큰 것이냐.”
이제야 김소흥은 준원에게 속내를 시원하게 털어 냈다. 그는 준원을 데리고 온 날 이후부터, 마음이 계속 무거웠던 것이다.
“애초부터 저를 데리고 오시지 마셨어야 했습니다.”
“그렇겠지. 때론 진실을 묻어 두어야… 할 때도 있는 법이라는 것을 너무 늦게 알았구나.”
“아니요. 몰랐다면, 더욱 할아버지를 원망했을 겁니다. 적어도 지금은 할아버지를 향한 원망 같은 건 잊은지 오래입니다.”
“차라리 할아비는 그 편이 나은 듯도 싶구나.”
준원은 엷게 웃어 보이자, 김소흥은 아무런 말도 없이 갑자기 그의 공간을 향해 뛰어들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단아한 몸짓들이 서로를 밀어내며 노닐었다.
김소흥의 발은 끊임없이 준원의 틈을 파고들려 움직이고 준원은 밀려나면서도 공간을 내어 주지 않았다. 열락(悅樂)의 상태가 이러할까. 둘은 어느 순간 서로의 움직임에 녹아들며, 무아지경 속 일체가 되어 가고 있었다.
쐐액―! 쐐액―!
그렇게 얼마쯤 서로를 향해 움직였을까? 어느 순간, 서로에게서 적당한 거리를 두고 떨어진 둘은 깊게 숨을 들이켰다.
눈을 감은 둘의 눈의 서서히 뜨여지고 김소흥이 번개처럼 땅을 박차고 준원의 심장을 찔러 들어갔다. 하지만 비슷한 움직임을 맞받아칠 줄 알았던 준원은 도리어 고요한 정적을 깨지 않은 채 멈춰 있었다. 마치 돌처럼 굳어 버린 양.
‘안 된다!’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지 몰랐던 김소흥은 급히 발경을 거두려 했으나 이미 늦은 뒤였다. 손은 뻗어졌고 준원이 막지 않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그때였다. 지척까지 도달한 김소흥의 오른손을 준원이 신형이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르게 왼쪽으로 몸을 비틀어 피해 냈다. 그리고는 김소흥의 빈틈으로 파고들어, 그의 왼쪽 팔꿈치 관절에 자신의 팔목을 바짝 붙였다. 언제든 김소흥의 팔꿈치를 부러트릴 수 있는 자세가 완성된 것이다.
“허허. 어찌 피했느냐.”
준원의 행동은 분명 무모했다.
적정한 한계 거리마저 넘어설 때까지, 상대방의 수를 피하지 않은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김소흥 또한 인간 신체의 한계를 극한으로 끌어올린 무예가이다. 다시 말해 아무리 준원의 신체가 뛰어나다 해도 방금 전의 한 수는 피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준원은 피했고 도리어 반격을 가했다. 한계 그 이상의 경지에 오르지 않은 이상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용서하십시오. 시험을 해 봤습니다.”
“어떤 시험을 말하는 것이냐.”
“느리게 보입니다. 모든 것이.”
“허허. 어찌 그런 기사(奇事)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김소흥의 얼굴에 놀람이 서렸다. 그리고는 한편으로 자랑스럽다는 눈빛을 보였다. 준원은 이제 그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경지를 향해 다가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할아비는 네가… 자랑스럽구나.”
김소흥의 따스한 손길이 준원의 어깨를 붙잡았다.
“저는 아직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준원의 표정은 여전히 차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