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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부활 1권 (21화)
7장 희생 (1)
삼합회 서울 지부, 한남동 안전가옥.
“489께서 보내셨습니다.”
삼합회에서 489란 삼합회 총두목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mountain master라 따로 입에 오르내리는 그는 중국 남방계 무인들과의 교류를 여전히 밀접히 지내고 있었다.
“안다.”
백청후는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고는 고개를 까딱였다.
“489께서는 오 년이 다 되어 가는 당시 사안을 여전히 일급 긴급으로 보고 계십니다.”
“뜻대로 잘 움직여지고 있고 비맥 또한 별 탈 없다 하지 않았나. 오 년이다. 오 년. 그 아이가 사라진 지 오 년이 다 되어 간단 말이다.”
“489께서 하시는 내심을 제가 어찌 다 헤아리겠습니까.”
489 직속 중간 간부이자 한국 지부 연락책을 맡고 있는 RED Pole(붉은 극) 조직의 수석변호사 장지찬은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서 나더러 어찌하란 건가.”
“비맥의 대리인과 무인들을 계속 죽여주셔야죠.”
“난 무인이다. 더러운 일 따위는 하지 않는다.”
“잊으셨습니까. 아직 거래는 끝난 것이 아닙니다만.”
“아가씨와 함께 가족과 떨어져 한국에 들어온지 자그만치 십 년이 다 되어 간다! 너희들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나!”
“과거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으니 거래를 성사시킨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장지찬이 금테 안경 가운데를 손가락으로 치켜 올리며 대답했다.
“너희들의 일이었다!”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 년 전, 489께서는 분명 백청후 씨에게 그를 감시하는 일을 맡기셨고 백청후 씨는 그에 상응하는 모습을 내게 그리고 489께 보여 주셨어야 합니다. 너무 안일했다고나 할까요? 세월 탓인가요? 하하.”
장지찬의 비아냥거림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백청후는 양손을 주먹 쥔 채 부들부들 떨었다. 당장이라도 기름이 번들거리는 얼굴을 찢어 버리고 싶을 만큼 화가 났다. 하지만 참아야 했다. 백청후는 그럴 이유가 있었고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결국 포기한 백청후가 자리에 주저앉으며 눈을 감았다. 대꾸 않고 듣겠다는 의지 표명이었다.
“아무튼 그런 뜻에서, 489께서는 친히 지시를 내리셨습니다.”
장지찬도 굳이 말릴 생각이 없었던지 자기 할 일만 묵묵히 하기 시작했다. 서류 가방에서 여러 가지 서류들을 꺼낸 장지찬은 이내 백청후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무수히 많은 서류들 속에서 한 장을 빼 들어, 서류를 백청후의 앞으로 밀어냈다.
“이번에 죽여야 될 자입니다. 비맥의 대리인이라 불리는 자인데 최근 저희 쪽 움직임을 주시하면서, 기소를 하려 한다 하더군요. 처리해야 할 대상입니다.”
“하지 않겠다.”
“그렇다면 또 잠입 활동을 하셔야 되겠군요. 이미 예전에 죽었을 붉은 폭탄의 주변에 머물며, 뻔한 연극을 하던 것처럼 말입니다. 하하.”
붉은 폭탄은 과거, 준원을 상징하는 명칭이었다.
“죽다니? 누가?”
소파에 등을 기댄 채 팔짱을 끼고 있던 백청후가 갑자기 굳은 얼굴로 물었다.
“백청후 씨의 친구 분이죠. 그는 사 년 전 이미, 폐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시한부 선고를 받았으니 사실 굳이 잡을 필요도 없었었지만, 489께서는 영역을 벗어난 쥐새끼는 무슨 있어도 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확고하셔서 한동안 곳곳을 뒤지고 다녔죠. 덕분에 비맥 쪽에서도 열이 받은 것인지, 그 근방을 계속 감시하던 감시팀 두 명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장지찬의 음성은 더 이상 백청후의 귓가에 들리지 않고 있었다. 그저 준원이 폐암이었다는 사실이 머릿속에서 맴돌 뿐이었다.
‘폐암이라고? 준원이 폐암?’
백청후가 한동안 대답이 없이 입을 다물자 장지찬의 눈빛이 묘해졌다.
“설마 현실과 작전을 구분하지 못했던 겁니까?”
“입 다물어라.”
“그럼요. 그래야죠.”
“이야기는 다 끝났나.”
“참.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장지찬은 기다려 보라는 제스처로 검지를 흔들어 보이고는 또 다른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이 서류는 곧 들어오실 분의 신상 정보입니다. 확인해 보시고 제가 적어 놓은 시간에 공항으로 마중 나가시면 됩니다. 잘 모셔야 해요. 저희 쪽에서도 제법 큰 손님이거든요. 참, 그리고 이번 건은 백청후 씨의 몫이 아닙니다.”
“뭐라?”
백청후의 시꺼먼 눈썹이 송충이처럼 꿈틀거렸다.
“윤성희 씨의 몫이에요.”
이글거리는 백청의 눈빛에도 장지찬은 주눅 들지도 않고 생글거리며 말했다.
“무슨 짓을 꾸미는 것이냐.”
“꾸미다니요. 저는 치장하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말장난으로 넘길 생각 마라!”
“사실입니다. 꾸미는 걸 싫어하는 건. 그래서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있는 그대로 보시라고 말입니다. 윤성희 씨는 공항 에스코트만 잘 해주면 끝인 거예요. 이제 됐지요?”
말은 번지르르 했지만, 실상이 성 접대라는 것을 백청후는 모르지 않았다.
“이젠 개 노릇까지 하라는 것이냐!”
참다못한 그의 외침에 장지찬이 피식 웃고는 대답했다.
“상부의 지시니 따라 주셨으면 합니다. 저 같은 졸부 변호사가 무얼 알겠어요?”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장지찬이 갖고 온 서류 가방을 챙기며 재차 씩 웃었다.
* * *
“문수입니다. 노사님.”
어둠이 깔린 밤을 뚫고 문수가 상원사를 찾았다.
덜컹―!
자고 있던 김소흥이 문을 열고 말했다.
“들어오너라.”
먼 곳을 응시하던 김소흥이 문수를 향해 손짓했다. 문수가 가까이 다가서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알고 있느냐.”
“예.”
문수는 품속에 고이 접혀 들어 있는, 의료 차트를 쉽게 꺼내지 못했다. 그 의료 차트에는 김소흥이 폐암에 걸렸다는 진단이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꺼내서 볼 자신도, 엄두도 없었다.
“녀석에게는 알리지 마려무나.”
“어떻게 그러겠습니까.”
“그래야 한다. 온전히 바로 서기 위해서는, 마음의 짐을 주어서는 아니 되겠지.”
“노사! 지금이라도 치료를 받으셔야 합니다.”
“그럴 필요 없다. 한 평생 무인으로 살았으면 무인으로 죽는 것이 옳은 게지.”
“사부님!”
“이 가방을 도착하는 즉시 준원이에게 건네라. 그리고… 문수 네게 맡긴 일은 알아서 마무리해 주리라 믿는다.”
“이미… 준비해 뒀습니다.”
울먹이며 대답한 문수의 표정은 비장했다. 무엇을 준비하는 것일까? 둘은 아리송한 이야기를 나누며 대화를 이어갔다.
“고맙구나.”
“아닙니다.”
“딸을 잃고 지금껏 숨어 지내왔으나, 준원이가 살아 있으니 이것으로 내가 뿌려 놓은 씨앗을 거둘 수 있으리라 믿는다. 허나 내가 떠나는 것은 네가 있기 때문임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구나.”
문수를 바라보는 김소흥의 시선이 따뜻했다.
“준원이를 믿고 맡긴다. 그리고 뒤처리와 함께 마지막을 부탁한다. 잊지 마라. 너도 함께 가는 게야. 시간은 열한시다.”
“네. 도련님께는 어찌 말하면 될까요.”
“미안하다 전해 주겠느냐. 할아비가 미안했다고.”
“예. 그리하겠습니다. 사부님.”
방탕 생활의 마침표를 찍고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게 해준 김소흥을 문수는 늘 부모처럼 생각해 왔다. 하지만 이제는 이별을 할 때였다. 문수는 김소흥이 가는 발걸음이 무겁지 않도록 최대한 눈물을 거두고 담담히 이별을 받아들였다.
* * *
입대일이 성큼 다가왔다. 준원은 김소흥의 배웅을 바라지 않고, 상원사에서 헤어지기를 원했다. 물론 김소흥도 크게 움직일 수 없는 형편이기에, 고집을 부리지 않고 준원의 뜻을 존중했다.
“그만… 가보겠습니다.”
“몸조심하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으마. 너는 죽을 고비를 견뎌 왔으니. 군 생활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게야.”
“예.”
준원은 짧은 목례로, 서운함을 대신했다. 하지만 준원도, 김소흥도 서로의 서운한 마음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감정을 이야기하는 데는 둘 모두 서툰 사람들이었기에.
차를 타고 가는 내내 문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명상에 빠진 준원의 마음을 최대한 이해하고는, 휴게소도 지나치지 않고 계속 훈련소를 향했다. 그렇게 얼마쯤 달렸을까? 준원이 탄 차가 논산 IC를 타고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이제 조금만 더 달리면 논산 훈련소에 당도하는 것이다.
그때서야 문수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기분… 괜찮으십니까.”
“웬일인지, 아무런 감흥도 없군요.”
사실이었다. 준원은 단지 보증인들을 얻기 위해, 떠나는 것일 뿐, 군대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기대하고 가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누군가는, 낯선 환경에서 이뤄지는 기대감이 생길 수 있었겠지만, 준원은 이미 군대에서 배워야 할 것들을 이충호를 통해 습득한 뒤였다.
그러니 전혀 흥미가 생기지 않을 수밖에.
“다녀오시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겠습니다.”
“군대를 다녀온 이후에는 할아버지 곁을 떠날 생각입니다.”
“그럼 저도 도련님과 함께해야겠군요.”
“무슨 말입니까.”
“제가 노사님의 곁을 대신 도련님과 함께한다는 것을 보시면 대답이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할아버지의 곁을 떠나겠다는 말씀입니까.”
“단순히 떠나겠다는 것이 아니죠. 이제 저는… 도련님의 사람입니다.”
“그렇군요.”
준원은 무덤덤했다. 기쁜 내색도, 만족스러운 표정도, 고마운 마음도, 어떤 것도 표정에 드러내지 않았다. 그냥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나와 함께 간다면 도리어 할아버님의 곁에 있는 것보다 힘든 나날이 될 겁니다.”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린 채로 준원이 무겁게 입을 뗐다. 그러자 김소흥과 약속한 시간의 때를 기다리던 문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도련님.”
준원이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려 문수를 쳐다봤다.
“좌석 밑을 보시면 서류 가방이 있을 겁니다. 살펴보십시오.”
일순, 준원의 표정이 냉랭해졌다. 늘 서류 가방을 살필 때마다, 받았던 충격들을 떠올린 것이었다. 이번에는 또 무엇일까? 준원은 이내 서류 가방을 열고 안을 쳐다봤다. 서류 가방 안에는 PDA와 몇 가지 파일 철이 있었다.
“파일부터 확인하십시오.”
문수가 백미러로 준원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자 준원이 별 대답 없이 파일 철을 열어 서류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TOP SECRET CODE 10 # (소각 분류)
강태식과 김소흥은 적대 관계였다.
“적대……?”
둔기로 뒤통수라도 맞은 양 눈을 동그랗게 뜬 준원의 손이 미미하게 떨렸다.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준원은 입이 텁텁해지는 것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다음 장을 넘겼다.
강태식이 지닌 무예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게재의 무예였다. 무예를 오랜 시간 익힌 무예가들도 경외하고 두려워할 만큼, 강태식의 가능성은 어떤 무예가들보다 크게 열려 있었다. 때문에 김소흥은 비맥을 따르는 제자들 중 몇몇을 선발하여 강태식에게 문하 제자로 받아 주기를 권유했다. 하지만 일인전승을 따르는 예를 무시할 수 없다 판단한 강태식은 정중히 그 청을 거절했고, 김소흥은 그에게 대신 AST를 나가기를 권유했다. 한반도의 무예가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을 입증해 주기를 원한 것이다. (1988년 당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