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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부활 1권 (22화)
7장 희생 (2)
“한 가지 묻겠습니다.”
엄청난 진실을 마주하게 된 준원은 생각보다 덤덤했다.
아니면 태연한 척하는 것이거나.
“예.”
문수가 고요해진 눈동자를 꿈쩍였다.
“내가 모르는 이런 일이 남아 있습니까.”
“더는… 없습니다.”
“차 멈추고 내 눈 보고 똑바로 말씀하세요.”
냉랭한 음성, 그 속에 담긴 기세에 문수는 자신도 모르게 급히 차를 갓길에 세우고 고개를 돌렸다.
꿀꺽―!
준원과 눈을 마주한 문수가 마른침을 삼키며 입을 꾹 닫았다. 자연스레 팽팽한 긴장감이 차 안에 감돌았다.
“다시… 내가 모르는 일이 생긴다면 두고만 보지는 않겠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나지막한 음성, 그건 이제부터 모든 일을 자신의 의지대로 두겠다는 준원의 다짐이 깃들어 있는 의지표명이었다.
“네. 허나… 아직 다 보지 않으셨습니다. 마지막을 보셔야 합니다.”
문수는 이미 내용을 다 알고 있는 것일까? 그의 말에 준원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서류 가방에 함께 들어 있는 한 권의 책자를 펼쳐 들었다. 책자 안에는 김소흥과 뜻을 함께하는 비맥 인사들의 리스트가 적혀 있었다.
이것을 볼 때쯤이면 준원이 너는 훈련소로 들어갔겠구나. 허나 그 전에 이 할아비는 네게 용서를 구하고 싶었다. 이미 소각되지 않은 기밀 서류를 보았다면 너는 이 할아비에게 궁금한 것이 많을 테지만.
‘대체… 무엇을 감추고 계셨던 겁니까.’
준원의 눈이 편지 아랫줄을 향했다.
원하든 원하지 않던 네 아비와는 입장 차이부터 달랐다. 네 아비는 유언처럼 잇게 된 명맥을 일인전승으로만 이어야 했고, 비맥회를 이끄는 이 할아비는 사위였던 네 아비의 능력을 모두에게 전하자는 쪽에 서야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네 아비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더구나. 하여 이 할아비는 AST 관련 사업 부처 쪽에 네 아비의 신상을 흘렸다. 네 아비가 AST에 나서서 한반도의 저력을 보여 주었으면 하는 바람 아니, 욕심 때문이었지. 허나 그들이 네 아비의 목숨을 노릴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이 할아비의 안일한 자부심 따위가 비맥을 다시 한 번 크게 흔들어 놨고, 네 아비와 어미를 생이별하게 만들었으니, 이 할아비의 잘못이 어떻게 없다고 하겠느냐. 허나 이렇게 네게 용서를 구하지만 그렇다 하여 용서를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지는 않는다. 아니, 이 할아비를 용서하지 않고 원망하여도 좋다. 하지만 절대 꺾이지 마려무나. 누구에게도 무릎 꿇어서는 아니 된다. 준원이 너는 비천과 비맥의 피를 모두 이은… 한반도 무예 역사의 마지막 후예다.
마지막 글귀를 읽던 준원은 결국 더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아야 했다. 그런 준원의 손등 위로 문수가 집어 든 PDA 전원이 켜졌다.
* * *
―숨어 있던 김소흥의 연락을 받았습니다. 현재 지부가 있는 한남동 안전가옥으로 오고 있다 합니다.
어젯밤, 연락책들에게 급하게 연락을 받은 장지찬은 마침 사무실로 찾아온 백청후를 손짓해 보였다. 백청후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장지찬이 앉아 있던 의자에서 벗어나 소파 상석에 자리했다.
“앉으시죠.”
“서 있는 것이 편하다. 부른 이유나 말해라.”
백청후는 여전히 불편한 심사를 감추지 못했다.
“부탁할 것이 생겨서 이리 결례를 무릅쓰고 불렀네요.”
“돌리지 말고 말해라.”
“뭐. 원하신다면야 그러죠. 김소흥이 나타났습니다.”
“김소흥?”
“네. 아? 백청후 씨는 김소흥 노사에 대해 모르겠군요. 과거의 인물이니. 지금 백청후 씨 나이를 실제 나이를 감안한다 하더라도 말이죠.”
“그래서?”
“상대해 줘야겠습니다.”
“상대?”
“네. 직접 대련을 하고 싶다고 청했으니 피할 필요는 없죠. 늙은이가 쓸데없는 오기를 부리니 꺾어 줄 생각입니다. 그간 저희의 이목을 피해 도망친 것도 화가 나고 말이에요. 아시다시피 전 제 계산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것을 굉장히 싫어하거든요.”
“대련만 해주면 되는 건가.”
“네. 그럼 됩니다.”
장지찬의 대답이 꽤나 의외였지만, 백청후는 대련만 해도 된다는 장지찬의 말을 믿지 않았다. 필시 다른 꿍꿍이를 부려 김소흥이라 무예가를 사고사로 위장하거나 피살시킬 생각일 것이다. 사고사로 만들어 아무런 문제없게 만드는 것이 장지찬이 늘상 하는 일이니 별문제도 없이 상황이 마무리될 것이 뻔했다.
‘난 장기판에 졸일 뿐이겠지.’
“어디에서 말인가.”
“지부 밑에 투기장이 있는 것은 아시죠.”
한남동 안전가옥 지하에는 대형 규모의 투기장이 설치되어 있다. 매달마다 선수들이 바뀌고 장기 분해가 되어 나가는 곳이기도 했다. 뼛속까지 무예가인 백청후가 눈살을 찌푸리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뼛속까지 무예가인 백청후에게 돈을 걸고 가진 바 무예를 보여 주는 일은 발가벗은 몸을 보여 주는 것만큼 수치스러운 것으로 생각됐기 때문이다.
“그곳에 VIP들을 모실 계획입니다. 챔피언 명예 방어전으로 다룰 생각이니 신경을 써 주셔야죠.”
“신경을 쓰다니? 나더러 그곳에 나가라?”
“못할 것도 없어요. 이번 일만 잘해 주신다면야 제법 큰 액수를 드리죠.”
“좋다. 거래를 한다. 너희들이 원하는 요구 조건을 들어줄 테니, 대신.”
“대신?”
“아가씨는 돌려보내 드려라. 그것이 내 요구사항이다.”
“잠깐 착각하고 계신 모양인데.”
장지찬이 천천히 소파에서 일어나고는 안경을 벗고 눈을 매만지며 말했다. 이윽고 눈에서 손을 뗀 장지찬이 한결 차가워진 눈빛으로 말했다.
“백청후 씨 같이 알량한 실력만 과신하는 사람들의 최후는 늘 정해져 있답니다. 그러니 너무 실력을 과신하지 마세요. 하늘을 훨훨 날아다녀도 총 한 정이면 끝장나는 시대니까요. 그러니까 백청후 씨는 시키는 대로 움직이기만 하세요. 머리는 나 같은 사람들이 씁니다. 생각도, 의사 결정도 모두 내 뜻대로 하는 겁니다. 난… 틀린 적이 없으니까요.”
늘 그렇듯, 습관처럼 안경 가운데를 손가락으로 치켜올렸다 내린 장지찬이 입술을 질끈 깨문 백청후를 환한 웃음을 머금은 채 쳐다봤다.
“그만 나가 보세요.”
장지찬이 손가락으로 문을 가리키며 매몰차게 고개를 돌렸지만 백청후는 주먹만 말아 쥔 채 쉽게 자리를 뜨지 못했다.
* * *
―오랜만입니다. 김 노사님.
“기억하는군. 장 변호사.”
―물론입니다. 어찌 됐든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대련을 받아들일 테니 우리가 원하는 조건하에 오셔야 합니다.
“그러지.”
―지부로 오십시오. 지부는 누구보다 잘 아실 테지요. 한 번 경험이 있으시니 말입니다.
“과거 얘기는 하지 말지.”
―예. 그러죠. 그럼 곧 뵙겠습니다. 아, 차를 보내 드릴까요?
툭.
대답 대신 공중전화의 수화기를 내린 김소흥은 역 앞에 붙어 있는 전광판 시계를 쳐다봤다. 아직 문수와 약속한 시간이 두 시간 정도 남았다.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보며 김소흥의 표정은 많은 생각들로 깊어졌다.
승복차림의 김소흥을 사람들이 힐끗힐끗 쳐다보며 지나갔다. 김소흥은 시선에는 아랑곳없이 느릿한 걸음으로 인파 틈을 지나 사라져 갔다.
* * *
삼합회의 한국 지부는 한남동, 안전가옥에 위치하고 있다. 안전가옥의 드나들 수 있는 인물의 숫자는 극히 제한되어 있으며 이곳을 지키는 경비 업체만 해도 상당했다. 물론 내부에는 VIP를 접견하는 접견실부터, 그들이 머무는 방까지 최상의 시설과 인테리어와 미술품 전시로 고급스러움을 더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VIP들을 그들이 한 달의 한 번 꼴로 초청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VIP들이 원하는 욕구를 맞추기 위해 삼합회가 직접 설계해 지하에 원형투기장을 비롯한 VIP 초호화 객실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들은 지정 받은 방에 들어가, 돈을 걸고 배팅을 시작한다. 한계 액수는 없으며 초기 배팅 액수 최소치는 일억이다. 일반인들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거액임에도 불구하고 VIP들은 화장실에 돈을 버리듯, 투기장 배팅을 즐겨왔다. 그리고 오늘… 투기장 역사상 흥미로운 게임이 펼쳐지려 했다.
“안녕하십니까. 장 변호사입니다. 인사드립니다.”
방마다 달린 TV에서 장지찬의 얼굴이 스크린에 펼쳐졌다. 고개를 숙여 인사를 마친 장지찬은 이번 선수들의 신상 정보 내역을 육성으로 말해 주며 투기장에 참여하는 선수 한 명 한 명의 장단점을 빼놓지 않고 브리핑했다.
“…이리하여 총 오늘은 스무 명의 지원자가 있을 예정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메인이벤트가 있습니다만. 여러분들께서 꽤나 즐거워하실 이벤트입니다. 한, 일, 중 세 국가의 무예 고수들이 펼치는 빅 이벤트이니 아무쪼록 현명한 배팅이 되시기를 기원하겠습니다. 각 고수들의 추가적인 자료들은 방 안의 팩스로 보내 드릴 테니 확인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만 오늘 배팅 브리핑을 마칩니다.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삑.
“연결 끊었습니다.”
각 방의 회선이 되어 있는 카메라의 전원을 끈 조직원이 말했다.
“나가 봐.”
장지찬이 나가 보라며 손짓하자 조직원이 기다렸다는 듯 그의 접견실에서 빠져나갔다. 동시에 책상 위에 있던 내선 전화가 울렸다.
“얘기해.”
전화를 받아든 장지찬이 말했다.
―날세. 들어가도 되겠나.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것은 국자랑의 후예, 김소흥이었다.
“물론입니다.”
어느새 미소를 머금은 장지찬이 내선 전화를 끊고 의자에 등을 기댄 채로, 김소흥을 기다렸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그 틈으로 쓰러진 경비가 축 늘어진 것이 보였다. 그리고 경비를 지나쳐 김소흥이 방 안으로 들어와 문을 잠갔다.
찰칵―!
“재미있군요. 일부러 덫을 놓고 하나라도 죽이고 가자는 심산인가요? 차라리 자부심 때문에 대련한다는 명목보다는 훨씬 나은 죽음이겠군요. 차… 한 잔 하시겠습니까?”
자리에서 일어난 장지찬의 태연한 표정에 김소흥이 나지막이 대답했다.
“따로 예약된 것이 없다기에 제압한 것이다. 그러니 죽이러 온 것은 아니다.”
“허면 그 아직도 그 알량한 자부심을 버리지 못한 겁니까? 총 한 정이면 쓰러질 그깟 신체를 이용한 무예를? 차라리 원초적인 스포츠가 낫겠군요. 그게 진짜 싸움이죠. 피가 터지고 광란하는 뭐랄까? 인간 본성을 끌어낸 카타르시스를 맛보게 해주는 뭔가가. 물론, 그것으로도 부족한 분들을 추려 내서 시작한 것이 바로 이 사업의 묘미죠. 이 사업을 함께 동참해 주신 분들 또한 저희 레저 산업을 무척이나 즐겁게 애용하고 계십니다.”
“자네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 아니 수십, 수백, 수천 년의 역사가 도도히 흐르는 것이 각 나라의 무예일세. 그것이 어떤 것인지 보여 주지.”
“뭐. 그리 생각하신다면 굳이 설득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어떻게 보여 줄 생각이십니까.”
“대련을 하겠다고 얘기했네.”
“어떤 방식의 대련이든 상관없다는 말씀이시겠죠.”
“네놈들이 원하는 어떤 방식도 상관없다.”
쾅―! 쾅―!
그때 접견실 앞 비서들이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한 삼합회 조직원들이 부리나케 달려와 문을 부쉈다. 가운데 위치한 김소흥이 조직원들과 장지찬 사이에 가로막힌 꼴이 됐다.
“돌아가. 다시.”
장지찬이 손으로 ‘딱’ 소리를 내며 조직원들에게 돌아가라는 시늉을 보였다. 조직원들이 고개를 한 번 숙여 보이고는 다시 물러났다.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해 볼까요.”
소파를 가리킨 장지찬이 차가운 미소를 머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