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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부활 1권 (23화)
7장 희생 (3)
고요했다. 관중도 없고 오로지 원형 둘레의 방탄 창문으로만 이루어진 곳, 각자의 방에서 VIP들은 누가 왔는지, 무엇을 하는지조차 알 수 없다. 싸우는 선수들도 오로지 서로에게만 집중할 뿐, 가운데 불빛 하나만을 두고 맹렬한 적의를 불태울 뿐이었다.
―홍팀 선수 입장. 동양챔피언 이갑수.
―청팀 선수 입장. 1998년 아시안 게임 레슬링 부문 동메달 이석호.
각자 홍, 청의 색으로 가운을 걸친 둘이 안내원에 의해 선수 대기실에서 등장했다.
철컹―!
오직 살아남은 사람만이 나올 수 있는 원형 경기장 문이 열리고 두 선수가 각자 반대편에서 들어왔다. 각자의 이유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들의 감정이나 이유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오로지 이기는 사람이 살고 지는 사람을 죽는다. 그것만이 지금의 현실을 지탱하는 이유이자, VIP라 불리는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였다.
“무슨… 이유로 왔소.”
가운을 벗은 이갑수가 이석호에게 물었다.
“딸입니다.”
이석호가 대답했다.
“그렇군. 난 어머니요.”
“잘… 부탁합니다.”
“규칙은 나도 알고 있소. 무거운 마음을 털어 내도 되겠소.”
“규칙을 아는 건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유일한 규칙, 둘 중 하나의 숨이 마를 때까지 경지장을 벗어날 수 없다. 이석호는 심호흡을 하며 이갑수의 눈을 마주했다. 일초, 이초, 삼초, 대치 시간이 늘어만 갔다. 쉽게 움직이지 못하던 둘 중 먼저 움직인 것은 이갑수였다. 그는 재빨리 물러났다, 치고 들어가기를 반복하며 이석호를 교란했다. 배팅 게임의 시작이었다.
* * *
“이곳에서 기다리시면 됩니다.”
안내자가 말했다.
“대련을 하는 곳인가?”
김소흥이 조그만 방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이곳은 선수 대기실입니다. 때가 되면 사이렌에 불이 들어옵니다. 그때 경기장으로 나가시면 됩니다.”
“경기장?”
김소흥이 눈살을 찌푸렸다.
“네.”
스포츠, 레저 운운하던 것이 모두 사실이었던 듯싶다. 김소흥은 먼저 잃은 사위와 딸을 생각하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심산유곡에서 평범히 살기를 원했던 자네의 신념을 꺾으려 애를 썼던 이 늙은이를 이제는 용서해 주시게. 이 늙은이가 지금에 와서 저들을 총칼로 모두 죽일 수는 없겠으나 적어도 자네에게 바라고 또 원했던, 한반도의 무예에 대한 자부심을 어떤 형태로든 보여 줄 것일세. 그렇지 않게 된다 해도 어차피 저들에 의해 죽을 목숨일 테지만.’
김소흥의 생각대로 AST를 비롯한 삼합회 관련 요주 인물들은 비맥의 실질적 중심 역할을 해왔던 김소흥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분명 ‘그들’은 기회만 있다면 죽였을 것이다. 하지만 김소흥과 비맥의 후예들이 발 빠르게 움직인 덕택에 ‘그들’은 김소흥을 제거하지 못했고 훗날을 기약해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목구멍에 가시처럼 걸리던 김소흥이 직접 은거를 깨고 나왔으니, ‘그들’은 이번 기회야말로 김소흥을 죽일 수 있는 회심의 기회라 생각할 것이 분명했다.
더불어 김소흥이야말로 ‘그들’이 죽인 강태식과 김시연 모두와 관계있는 마지막 위험인물이기도 했으니 완벽한 마무리를 위해서 ‘그들’에게 김소흥은 반드시 죽어야만 하는 존재였다.
‘부디… 내 뜻과 네 아비의 뜻 모두를 이어다오.’
현재 비맥을 잇는 후예들은 전부 은밀히 신분을 감추고 숨어 살고 있었다. 조직적인 결사의 형태로 만들어진 것이 얼마 되지 않았기에, 더욱 몸을 낮추고 훗날 몸을 일으킬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AST를 움직이는 실질적인 중국 남방계 세력들과 그들과 끈이 이어진 삼합회를 견딜 수 있는 힘을 기를 때까지 그들은 전면에 나서지 않겠다고 서로에게 약속했다.
하지만 그 약속이 언제까지 갈지는 모르는 일.
누군가 비맥의 힘을 한 데 뭉쳐 키우고 조직적으로 육성해야 했다. 그래야만 한반도를 비롯해 아시아 곳곳에 뿌리내리고 있는 AST의 공세를 이겨 낼 수 있었다.
김소흥은 훗날 준원이 그러한 역할을 해 주기를 마음속으로 기원하며 감고 있는 눈을 천천히 떴다. 동시에 귓가로 안내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셔야 할 시간입니다.”
안내원의 말에 눈을 치켜떠 보니 사이렌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힐끗 사이렌을 쳐다보던 김소흥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안내원을 쳐다봤다.
“어디로 가면 되는가.”
“따라오시면 됩니다.”
“가지.”
안내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앞장섰다. 뒤따라 김소흥이 걸음을 옮겼다. 걸어가는 복도 끝이 유난히 어둡고 음습했다.
‘이 길의 끝에서 허무하게 생을 마감하더라도 저승 가서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고 왔다고 말하겠네. 곧 보세. 사위.’
이윽고 전등에서 나오는 밝은 빛, 한 줄기가 김소흥의 눈을 어지럽혔다. 지금 김소흥에게 죽거나 살거나 하는 결과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먼저 죽어간 사위와 딸을 위해, 유일하게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을 걸을 뿐이다.
8장 훗날의 기약 (1)
김소흥이 입고 있던 승복은 어느새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그를 철창으로 밀어 넣은 장지찬이 그에 대한 예우를 차린다며, 미리 고용되어 있던 무예가들 세 명에게 연수합격을 시킨 탓이었다. 결과는 그의 승리, 세 명의 무예가들은 기절한 채 링 밖으로 꺼내어졌다.
“처음…뵙겠습니다. 북계팔극(北界八極) 백청후라 합니다.”
이윽고, 링 위에 오른 백청후가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근본을 따지지 않더라도, 무예를 수련하는 선배에 대한 예의였다. 그러자 김소흥이 손으로 철창을 한 번 흔들어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북계팔극이라, 맹촌의 가계(家系)인가?”
“맞습니다.”
“원류구먼.”
김소흥이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중국의 대표적 무예라 할 수 있는 북방권의 원류가 창현의 맹촌에 머물던 조사, 이서문으로부터 전해졌기 때문이다.
하나 이서문이란 무인은 그 안목이 까다로워, 곽전각과 유운초 이 두 사람에게만 진전 모두를 물려주었다 알려졌다. 다시 말해 현재까지 전해진다는 팔극권 또한 직계의 것이 아닌 이서문이 진전을 물려주지 않은, 나머지 제자들이 방계를 만들어 이어온 것들인 셈이다.
그러니 보기 힘든 맹촌의 후예를 만났다는 것은 김소흥으로서도 기꺼운 일이었다. 무덤이라 생각되는 곳에서 진정한 무예가와 조우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예의가 바르군.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게.”
김소흥이 말했다.
“사정이 있습니다.”
“그럴 테지. 자네는 꽤나 좋은 눈을 가졌거든. 그렇다면 준원이 곁에 있었던 것도 자의가 아닐 것일 테지.”
김소흥이 설마 자신을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못했던 백청후가 흠칫 놀라더니, 이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하지만 날 쓰러트려야 할 것일세. 맞는가?”
“맞습니다.”
“하지만 녹록치는 않을 걸세.”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모든 것을 잊고 한판 놀아봄세.”
“영광입니다.”
덜컹―!
그때였다. 인사를 나누고 서로에게서 떨어져 가던, 두 사람의 귓가로 또 다른 남자의 얼굴이 들어왔다. 검은 도복을 정갈하게 차려입은 남자는 두 사람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는, 말없이 그들 가운데서 무릎을 꿇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난 임기몽상류의 전승자, 이치마루 다이쵸. 이곳에 나를 상대할 자가 있다 들었소.”
이윽고 남자는 천천히 일어서며, 유창한 한국말로 입을 열었다.
“날세.”
김소흥이 덤덤한 눈길을 보내며 대답했다.
“나는… 이곳에서 싸워야만 하오.”
일본인의 대답에 김소흥은 그에게도 사연이 있는 것임을 눈치챘다.
“궁극적으로는, 스스로를 헤아려 평범(平凡)의 도를 구한다는 무소류의 검이 어찌하여 이곳에 서게 됐는가. 사연이 있는 것이겠지?”
거합도의 원류라 불리는 전국시대의 이름 난 무인, 하야시자키 진스케 시게노부가 창안한 것이 무소류였다. 물론 현재는 7대 종가의 종사였던 하세가와 에이신이 무소류를 개량해 만든 무예 무쌍직전영신류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적어도 아직도 일본 내에서 검의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무소류의 원류를 이어받는 후예란, 신화 속의 인물처럼 경외 받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 대단한 위상을 지니고 있는 다이쵸가 장지찬의 덫에 걸려 링 위에 선 것이다.
“합공이야말로 무인으로서의 수치라는 것을 알고 있소. 허나 내 아이가.”
김소흥의 물음에 다이쵸는 스스로의 처지를 인정했다.
“잡혀 있겠지.”
뒷말을 김소흥이 대신 덧붙였다.
“당신과 생사를 건 대련을 한다면 내 아이를 보내준다 하였소.”
그의 말에 무겁게 고개를 까딱인 다이쵸가 말없이 목검 손잡이를 부드럽게 쥐었다. 목검만으로도 사람을 해할 수 있는 경지의 이르렀다는 뜻이기도 했다.
“썩을 놈들이구먼.”
김소흥이 씁쓸하게 웃었다.
“합공을… 하겠습니다.”
기다리고 있던 백청후도 팔목의 소매를 접어 올리며, 어깨를 좌우로 흔들면서 자세를 잡았다. 당장이라도 달려 나갈 것 같은 맹호의 형상을 한 준비 자세였다. 덩달아 다이쵸도 허리춤에 매달아 놓았던 목검의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대며 날카롭게 눈을 빛냈다.
그러자 둘 사이에서 협공을 받게 된 김소흥도 부드럽게 심호흡을 하며 눈을 반개했다. 고요한 정적이 감돌자 싸늘한 기세가 링 안에 가득했다.
정중동(靜中動)이라 했던가? 셋은 고요한 가운데 끊임없이 서로를 견제하고 있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가라앉은 고요를 깨고 백청후가 바닥을 박차고 주먹을 뻗었다. 맹호의 발톱과 같이 뻗어진 팔극권의 정수가 백청후의 양손바닥을 통해 모습을 드러냈다.
쐐액―! 쐐액―!
팔극권의 정수는 바로 육대개권이라 불렸다. 육대개권은 팔극권에서도 정수 중의 정수이므로, 직계 제자라 하더라도 쉽사리 전수하지 않는다 했다. 하여 중국에서도 그 비기를 알고 있는 직계 제자는 없다고 판단됐으나, 김소흥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눈앞으로 드리워지는 육대개권의 위용을!
백청후의 손에서 표출되는 권기(拳奇)는 결코 그의 나이 대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경지의 것이었다. 잇달아 팔극권의 독특한 전보(보법)가 좌우로 흔드는 어깨와 함께 날카롭게 파고들어 왔다. 육대개권의 동작 중 하나인, 이타맹금(易打猛禽)에 이은 포포투호(抱抛鬪虎)의 연환식이었다.
그의 일수를 막기 위해 김소흥이 뻗어낸 손을 우수로 쳐낸 백청후가 반대편 좌수를 김소흥의 명치를 향해 쇄도했다. 하지만 그의 움직임을 미리 예측한 김소흥이 세 걸음 옆으로 물러나 회심의 일수를 피해 내자 백청후는 한 걸음을 더 나아가 위험하리만치 깊숙이 몸을 던졌다. 그의 어깨가 김소흥의 어깨를 들이받으려 했다.
“침투경의 응용인가.”
김소흥은 다가오는 어깨를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잡아 끌어당겼다, 다시 그가 일으킨 힘을 거꾸로 이용해서 밀쳐 냈다. 상대방의 힘을 이용해 타격을 주는 팔극권의 화경(化勁)이라는 비기였다.
“어떻게……?”
“팔극권에도 이러한 비기가 있을 테지. 화경이라고. 허나, 국자랑에는 그러한 것이 하나의 비기로 내려오지 않네. 국자랑의 전반에 걸쳐 녹아들어 있지. 국자랑은 그것을 이름 붙이지 않네. 하나의 선으로, 점으로, 나타낼 뿐이지.”
김소흥은 말을 하면서도, 옆에서 뻗어진 다이쵸의 목검도 우측을 축으로 한 바퀴 회전해 부드럽게 피해 냈다. 순식간에 다이쵸와 백청후가 같은 선상에 서고, 김소흥이 그 둘을 마주 보는 대치가 이루어졌다.
“대단하시오.”
다이쵸는 실로 감탄했다. 대한민국에 들어와, 이토록 강한 무인을 상대한 적이 없었던 탓이다. 아니, 한국에는 더 이상 마음을 송두리째 뒤흔들 만한 무인을 보지 못할 것을 예상했다. 하지만 여전히 한국의 땅에는 무혼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