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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부활 1권 (24화)
8장 훗날의 기약 (2)


“이런 곳에서 연을 맺었다는 것이 아쉽지만, 설사 그렇다 해도 이 땅에 무혼이 아직 살아 있음을 증명해 주시오.”
흥분한 다이쵸가 외쳤다.
“내가 자네를 쓰러트린다면 아이를 찾지 못할 것인데도.”
“그럴 일은 없소. 아이는 반드시 찾을 것이오.”
“그러기를 빌지.”
동시에 다이쵸가 다시 기합과 함께 목검을 일직선상으로 내리뻗었다. 그의 검에는 아무런 화려함도 없었다. 오직 단 한 번의 집중으로 일격에 상대방을 제압하려 들었다. 뒤따라 백청후도 바닥을 박차고 전보를 펼쳤다.
김소흥을 가운데 둔 난전이 이뤄졌다.
그의 너울거리는 몸짓도 자연스레 그들과 노닐어 갔다. 다이쵸가 절제된 동작으로 검을 찌르자 김소흥은 기다렸다는 듯 손바닥으로 검배를 쳐내고 한 발자국 옆으로 몸을 옮겼다. 그러자 숨 쉴 틈도 없이 침투경의 신력이 담긴 백청후의 팔꿈치가 목을 노리고 몰아쳤다.
김소흥의 오른발이 미끄러지듯, 팔꿈치를 피해 내며 백청후의 등 쪽으로 돌아섰다. 김소흥의 재빠른 판단에 백청후가 흠칫 놀란 순간 그의 손바닥이 백청후의 옆구리를 타격했다.
퍽―!
백청후가 신음성과 함께 철창 쪽으로 다섯 걸음이나 주르륵 밀려났다. 그것을 본 다이쵸도 연타로 들어가던 동작을 멈추고 우선 뒤로 후퇴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접전이었다.
“왜?”
하지만 옆구리를 잡은 백청후는 신음성을 흘리면서도,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김소흥의 손바닥이 옆구리에 닿은 순간 느낀 묘한 기분 때문이었다.
‘확실히 나를 제압할 수 있었다. 아니, 전부 힘을 쏟아부었다면 필경 죽었어.’
김소흥은 왜 자신을 죽이지 않았을까? 백청후의 표정이 복잡 미묘해졌다. 그러나 그런 복잡한 감정들을 설명하기에, 상황은 이미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김소흥이 춤사위처럼 손발을 자유자재로 부드럽게 놀릴수록, 코너에 몰리는 다이쵸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다이쵸는 마치 목숨을 건 전쟁에서 배수진을 친, 사무라이처럼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철컹―!
물러나던 다이쵸의 등이 철창에 닿았다.
이제 결정을 내려야 할 때였다.
다이쵸의 독해진 눈빛이 춤사위와 같은 부드러움으로 자신을 압박해 오는 김소흥을 향했다.
“카압!”
귀곡성을 닮은 다이쵸의 기합 소리와 함께 살기를 담은 다이쵸의 목검이 김소흥의 너울거리는 팔과 다리를 교묘히 피해 파고들었다.
쐐액―!
‘없다!
다이쵸가 눈을 부릅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닿을 것 같던 김소흥의 신형이 눈앞에서 거짓말처럼 사라졌기 때문이다. 동시에 다이쵸가 들고 있던 목검을 겨드랑이로 감싸 안은 김소흥이 다이쵸와 코앞에서 얼굴을 맞댔다.
언제든 다이쵸를 절명시킬 수 있는 거리였다.
“어째서?”
“나를 베게.”
다이쵸를 밀어내며, 한 발자국 더 다가선 김소흥이 그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나지막이 속삭였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의 패배입니다. 나에게 치욕을 주려 하심입니까.”
“나를… 반드시 베게. 아이를 구하라는 말일세.”
“노사!”
“훗날 내 손자가 찾아와 묻거든. 할아비는 패배해서 물러난 것이 아니었음을 부디 말해 주겠는가.”
김소흥은 그 말을 끝으로 다시금 부드럽게 뒤로 물러났다. 마치 다이쵸의 어깨로 인해 밀려났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물러난 김소흥과 다이쵸의 눈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김소흥이 한쪽 눈을 찡긋했다.
‘지금일세.’
“카아아!”
결국 다이쵸는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쒜액―!
그리고 그의 목검이 김소흥의 사혈(死穴)을 정확히 찔렀다.
쿵―!
김소흥의 꿇려지지 않던 무릎이 처음으로 바닥과 맞닿았다. 목구멍에서 치솟아 올라온 핏물이 그의 입술을 통해 뭉텅뭉텅 배어 흘러나왔다.
‘보고 있느냐. 준원아. 잊지 마려무나. 너는 나의… 손자다.’
김소흥이 희미해지는 의식을 억지로 붙잡으며 눈을 깜빡이고는, 저 멀리 철창에 붙여 놓은 초소형 카메라를 뚫어지게 직시했다. 그랬다. 김소흥은 백청후가 링 위에 들어선 순간을 기점으로 미리 준비해 두었던 초소형 카메라를 통해 준원에게 자신의 마지막을 보여 주려 했던 것이다. 이윽고 유일하게 어둠을 비추던 조명 빛이 김소흥의 눈을 서서히 멀게 했다.

* * *

“흡.”
준원은 마지막 김소흥이 남긴 영상을 보며, 소리 없이 절규했다. 애써 슬픔을 참던 그가 양 주먹을 꽉 말아 쥔 채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카메라로 전해지는 김소흥의 진한 슬픔이 온몸에 덮쳐든 것이다.
“도련님…….”
운전을 하던 문수도 갓길에 차를 대며 운전대에 얼굴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그의 눈에서도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문수야.”
“예.”
“초소형 카메라로 마지막을 보일 것이니라. 그러니 때가 되면… 카메라와 연결된 PDA를 보여 주도록 해라. 그것이 너의 몫이다.”
“알겠습니다.”

마지막 김소흥과의 대화가 떠오른 문수는 얼굴을 운전대에 박은 채로 지금껏 참았던 눈물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용식. 아니, 백청후.”
어느새 한 방울의 눈물을 흘리며, 표정을 굳힌 그는 마치 잊지 않으려는 듯 백청후의 이름을 되뇌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죽은 줄 알겠지만 자신은 그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한다.
“나는… 너희를 잊지 않겠다.”
준원은 스스로를 마음속에서 죽였다.
‘이제 나는 김유한이다.’
속으로 중얼거린 그의 눈빛이 칼날 같은 냉정함으로 번쩍였다.



9장 훈련소 (1)


“대체 이거 어떻게 하는 거지? 저기요. 이것 어떻게 하는지 아세요?”
두 시간 뒤, 논산훈련소에 들어온 준원, 아니 유한은 분리되어 있는 군용 벨트를 끼지 못해 낑낑대는 동기 훈련생의 질문을 받게 됐다. 그는 대답 대신 군용 벨트를 단숨에 만들어서는 그에게 전해 줬다.
“우와. 고맙습니다.”
한눈에 보기에도,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라 보이는 그는 유난히 어리바리해 보였다. 삼 일간 주어지는, 대기 기간 사이에 입대를 포기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갈 것 같은 얼굴이었다.
“지금 주는 보급품은 훈련병들이 앞으로 훈련을 받을 때까지 착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때마침 다시금 조교가 들어와 훈련병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자 갓 입영한 훈련병들은 대강 고개를 끄덕이며 낯선 상황을 적응하려 했다.
“목소리가 작습니다. 알아들었습니까!”
훈련병들이 패기가 없는 것이 못내 못마땅한 건지, 웬만하면 할 말을 하고 나갔을 법한 조교는 미간까지 찌푸리며 훈련병들을 윽박질렀다. 그 기세에 압도당한 훈련병들이 기다렸다는 듯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훈련소의 대기 기간 동안은,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훈련병들은 각 지역에 따라 나뉘어, 삼 일간 머물 대기 생활관을 지정 받고 밖에서 생활했던 모든 사회 냄새를 지워야 했다.
첫 번째로 한 것은 사회에서 입고 온 옷들을 비롯한 물건들을 상자에 붙여 군용 택배로 집에 붙이는 것이었다. 이후 훈련병들은 세 명씩 전우조를 짜고 화장실을 비롯한, 사소한 생활 부분을 그들과 함께 다녀야 했다.
그렇게 첫째 날.
국방색 매트릭스를 깔고 담요를 핀 훈련병들은 밤이 되자,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그간 누려 왔던 것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 것 같았다.
“흑.”
유한의 옆에 있던 훈련병도 다르지 않았다. 그는 처음 본 유약한 인상대로 마음이 여린 탓인지, 다른 훈련병들보다 배는 많은 눈물을 흘려댔다. 그러면서, 아무런 표정도 없이 누워 있는 유한을 향해 울먹거리며 말을 걸어왔다.
“흑. 저기 눈물 안 나세요? 흑.”
“네.”
“흑흑. 부모님 생각이 많이 나네요. 진짜 군대에 들어온 게 이제 실감이 나요. 흑흑.”
“…….”
“지금까지 흑. 이름도 못 물어봤네요. 흑흑.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김유한.”
“저는 김준호예요. 흑흑. 성이 같네요. 흑흑. 나이는 어떻게 되세요?”
굳이 쓸데없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던, 유한은 그냥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훈련병들과 비슷하게 천장을 보며 할아버지의 마지막 죽음을 떠올렸다.
‘결국 패배다.’
가치 있는 패배 또한 패배일 뿐이다. 가치를 위해 싸우고, 또 싸우고 그리고 투쟁해서 마지막에 결실을 얻지 못한다면 그 또한 허망한 역사 속 패배일 뿐이었다. 누구도 패배자를 알아주지 않고 감싸 주지 않는다. 오직 승리자만이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삶도, 복수도, 모든 것도.
‘나는 할아버지처럼, 아버지처럼 그리고 어머니처럼 물러서지 않겠습니다.’
입술을 앙다문 유한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그렇게 삼 일의 대기 기간은 밤에 각자 지정된 곳에서 불침번을 서면서, 금세 흘러갔다. 그리고 삼 일 후, 유한과 훈련병들은 연병장에서 각자 신체에 맞게끔 나뉘어졌다. 대기 기간이 끝나 본격적으로 연대가 구분된 것이다.
“어! 유한 씨!”
신장으로 분류된 연대 분류 속에서 유한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힐끗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고개를 돌린 유한의 눈에 가까이 다가오는 준호의 얼굴이 들어왔다.
“역시 같은 연대로 가게 됐네요. 특별한 인연인가 봐요.”
준호는 멋대로 유한의 손을 잡고는 세차게 흔들어댔다.
빙긋 웃는 얼굴에 천진함이 묻어 나왔다.
“저… 근데 왜 말씀이 없으세요? 제가 싫으신 건가요?”
준호는 여전히 아무런 대답이 없는 유한의 표정을 살피더니, 급히 그의 손을 놓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가 친밀하게 지내는 것을 꺼려한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하지만 절 싫어하셔도… 함께 있으면 안 될까요? 유한 씨는 아무 말씀이 없으셔도 왠지 유한 씨가 옆에 계시면 든든했거든요.”
잠시 고개를 숙였던 준호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는 유한을 향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마음대로.”
이윽고, 유한의 입이 오랜만에 열렸다. 동시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준호가 환한 미소를 띠우며 그를 쳐다봤다.
“감사합니다!”
준호는 이미 다른 쪽으로 발길을 돌리는, 유한의 뒤를 놓칠세라 빠르게 쫓았다.

* * *

한동안 신종플루 전염병이 유행했던 탓인지 새로운 막사에 들어서자마자, 그들은 flu체온검사를 받고, 비인가 물품을 수거 당했다.
“나는 여러분의 훈련을 담당할 상사 김학준이며 1소대장이기도 하다.”
자신을 1소대장이라 밝힌 김학준은 키가 작았지만, 단단한 체격을 지닌 중년 남자였다. 그는 갓 들어온 훈련병들을 몇 마디로 단숨에 제압하고는, 그렇지 않아도 낯선 환경에 떨어진 훈련병들을 쪼아댔다. 담배와 같은 비인가 물품을 아직도 제출하지 않고 숨겨 놓은 훈련병들 때문이었다.
“더 없나? 이번이 마지막 구명의 기회다. 너희들이 지금 담배를 내지 않고 계속 숨겨 놨다가 나중에 걷게 된다면 입소 내에서 받았던 훈련은 전부 허사가 될 것이다. 더 없군. 좋다. 너희들을 믿겠다.”
김학준은 그 말을 끝으로, 한 번 더 걷은 비인가 물품들을, 조교에게 건네고는 교육실 문을 열고 사라졌다. 이어서 각 훈련병들은 또다시 중대로, 소대로 나뉘어 각자가 5주 동안 머물 막사를 지정받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