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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귀 1권(6화)
2장 청성교(5)
신림학당의 숙소.
지방에서 올라오거나 학당에 머무르며 학문에 정진하고 싶은 문생들을 위한 곳이다.
그 중앙 공터에서 한수광을 비롯해 세 명의 아이들이 시시덕거리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낄낄, 지금쯤이면 하운천 그 자식, 피 터지게 얻어맞고 있을 거야?”
“아무렴. 그 유명한 광오(狂五) 패거리인데.”
광오.
뒷골목에서 꽤 유명한 파락호.
돈만 쥐어 주면 안 하는 게 없는 악독한 놈들이다. 요새는 한수광의 수하 노릇을 하는 중이었다.
돈과 주먹.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아닌가?
“그래도 이건 좀 심한 거 아냐? 여자 앞에서 두들겨 맞는 게 얼마나 꼴사나운데…….”
마음에 들지 않다 한들, 조금 심하다 생각했으나. 한수광은 동의하지 않는 듯했다.
“심해? 그 재수 없는 자식은 이런 꼴 좀 당해 봐야 정신을 차린다고. 알아들어? 항상 제 잘난 맛에 사는 놈이라니까. 그런 놈들은 기를 확 꺾어 놔야 나중에도 다루기 쉬워지는 법이다.”
힘 있는 자의 사고방식.
아이들은 그렇구나, 혹은 그러려니 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하긴, 조금 고지식한 게 애늙은이 같아서 마음에 안 들었어.”
“어, 맞아. 툭하면 잔소리 해 대는 게…… 지만 사서랑 육경 공부한 줄 아나?”
걱정도 한순간. 어느새 한수광에게 물들어 가는 아이들이다.
“크크, 눈에 훤하다. 몇 대 얻어맞고는 아프다고, 그만하라고 설설 기겠지?”
“그러겠지. 그 자식, 몸은 진짜 약하자나.”
“그것도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후, 상상만 해도 두렵다.”
그 상황이 마치 자신에게라도 일어난 것 마냥 몸을 떨어 대는 아이들. 그들의 얘기는 꽤 오랫동안 이어지는 듯했다. 그 누군가가 나타나지만 않았다면…….
달빛 아래 모여 있는 아이들 위로 큼지막한 그림자가 덮였다.
“방금 했던 이야기들, 다시 한 번 해 보거라.”
“……!”
한수광과 두 문생들은 화들짝 놀라며 식겁했다.
그들의 스승, 그리고 하운천의 스승. 어느새 윤괴춘이 자신들의 뒤에 떡하니 서 있는 게 아닌가.
눈썹은 하늘로 치솟을 듯했고 두 눈엔 힘을 콱 준 것이 격노한 게 틀림없다.
“스, 스승님…… 그것이 아니오라…….”
“네 이놈! 신의를 알고 인의를 지키며 도를 깨우쳐 가야 할 너희들이 어찌하여 그런 짓을 벌였단 말이냐!”
그의 분노는 엄청났다. 호통 소리에 숙소의 문생들이 전부 밖으로 나와 기웃거리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웅성웅성.
어느새 주위로 모여들었다.
그 중심엔 무릎을 꿇고 울상이 된 세 아이들과 두 눈에 쌍심지를 켠 윤괴춘이 있다.
“아무래도 이번 일은 총장님께서도 아셔야 할 것 같구나.”
깜짝 놀라 두 손을 싹싹 비비는 한수광.
윤괴춘은 그에게 무심한 눈길을 줄 뿐이었다.
‘그보다, 운천이가…….’
지금 그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라 생각한 윤괴춘.
반 시진 정도가 흘렀을 때, 그는 이미 학당을 나서고 있었다.
3장 특급 제거 대상 흑(黑)(1)
이것저것 장을 봐 온 유모는 대청에 앉아 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호호, 좋은 시간 보내고 계시겄지?”
한창 싱글벙글일 하운천의 얼굴을 생각하자 마음이 절로 뿌듯해졌다.
초저녁.
그녀는 이제 곧 돌아올 하운천을 기다렸다.
찻잔 속에 차가 반쯤 사라졌을 때 집의 문이 살며시 열렸다.
끼익.
“도련님, 다녀오셨…….”
유모가 멈칫했다.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하운천이 아닌 깨끗한 의복을 입고 있는, 그러나 허리춤에 한 자루의 검을 차고 있는 사내.
“누구시오?”
유모가 긴장한 듯 말했다. 자신의 집엔 검을 찬 사람이 들락거릴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내는 인상 좋은 웃음을 지으며 포권했다.
“저는 선우세가의 초설 아가씨를 모시고 있는 석일(奭一)이라 합니다.”
초설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유모의 경계가 조금 누그러졌다.
“그렇구먼, 그런데 무슨 일로 이리 발걸음을 하셨는지.”
선우세가의 사람이기에 유모의 태도도 공손해진다.
“다름이 아니라 저희 가주님께서 하 공자를 세가로 초대하셨습니다. 그래서 초설 아가씨와 함께 세가에 머물고 계십니다. 내일쯤 돌아오시겠다는 말씀 전하라 하셨습니다.”
“도련님께서요……?”
“예.”
유모의 눈썹이 미미하게 꿈틀거렸다.
석일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랬기에 다시 한 번 포권을 올린 뒤 집 안을 빠져나갔다.
유모가 집을 나서는 그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잠시 뒤 상체를 일으킨 그녀의 눈매는 날카로워져 있었다.
“선황 그 작자가 초대를 했다? 천이는 무림과는 연관이 없는 아이인데 어째서……. 설마?”
분위기가 바뀌었다. 심지어는 말투까지도.
유모는 석일이 사라진 방향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얼마정도가 지났을까, 순간 그녀의 몸이 자리에서 촛불 꺼지듯 사라져 버렸다.
***
침술. 의술 중에서도 특히 내상 치료에 주로 사용된다.
선우정후는 귀빈실 침상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왼팔로 오른팔의 소맷자락을 걷어 올린 채 신중하게 침을 놓고 있다.
침상에는 하운천이 상의가 전부 벗겨진 채 누워 있었다. 군데군데 타박상이 무척이나 심했지만, 이미 선우세가의 가전비법으로 만들어진 금창약을 발라 벌써부터 아무는 기미를 보였다.
가슴과 배에는 여러 개의 침이 십(十)자 모양을 이룬 채 꽂혀 있었다.
마지막 침을 논 선우정후가 고개를 젖혔다.
이마에 흐르는 땀 한 방울.
그것을 닦아 낸 그는 방 중심에 자리한 고급스러워 보이는 탁자에 앉아 졸고 있는 홍야개를 불렀다.
“끝났으니 일어나 보게.”
“…….”
그러나 홍야개는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턱을 괸 자세여서인지 머리가 불안하게 흔들거렸다.
선우정후가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한쪽 손을 가볍게 휘둘렀다.
덜덜 흔들리는 탁자.
콩!
결국 홍야개의 자세가 허물어져 급기야는 탁자에 이마를 박아 버렸다.
선우정후는 재빨리 몸을 돌려 모르는 척했다.
얼얼한 통증과 함께 잠에서 깬 홍야개는 이마를 문지르며 슬쩍 선우정후를 바라봤다.
못 봤겠지?
재빨리 말라붙은 침을 닦아 내고는 입을 연다.
“흠흠, 정후야. 언제쯤 끝날 것 같으냐? 계속 지켜봤는데 끝날 기미가 안보이누.”
“지금 막 다 끝났다네.”
“그, 그래?”
홍야개는 당황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침상 가까이 다가왔다. 그 후 곧게 누워 있는 하운천을 살폈다.
“거 참 많이도 맞았군. 꽤 악독한 놈들이었나 본데? 그래도 그 정도면 내상까진 입지 않았을 텐데 웬 침인가?”
선우정후가 걷어 올렸던 소맷자락을 내리며 답했다.
“이 아이의 체질 탓인지 그 정도 충격에도 속이 진탕이 돼 있더군. 마치 다 늙어 죽기만을 기다리는 노인과 같아. 허약해도 너무 허약하지.”
“그래? 하긴 서생 놈들이 다 그렇지. 머리를 가르면 피 대신 먹물이 흘러나올지도 몰라, 클클.”
자신이 한 얘기에 재미있다는 듯 웃어 대는 홍야개.
선우정후는 애써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한데 이토록 허약한 신체를 타고 났다면 분명 그 원인이 있어야 하는데…… 이 아이의 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네.”
“그건 무슨 소린가?”
“말 그대로일세. 이 아이의 몸은 보통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어. 그런데 이토록 쇠약한 체질을 타고났다면.”
선우정후가 하운천의 하단전, 중단전 그리고 상단전을 차례대로 가리켰다.
“정, 기 그리고 신을 보존하는 세 단전의 문제가 있다는 뜻.”
홍야개가 하운천과 선우정후를 번갈아본다. 그러고는 인상을 팍 썼다. 도통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갔다.
“이봐, 돌팔아.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라구.”
“사람은 태어나기 전, 모체의 뱃속에 있을 때에는 세 단전이 따로 나뉘어져 있지 않다네. 선천의 혼원일기가 따로 분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지. 그러다가 아기가 태어나면서 후천적으로 혼원일기가 갈라지며 각각 세 단전에 뿌리를 내리는 것일세.”
“그렇지, 결국 혼원일체경의 경지도 그렇게 나뉜 정, 기, 신을 귀일하여 일체(一體)를 이뤄야 이루어지는 게 아닌가? 그렇지만 태아는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상단전과 중단전이 닫혀 버려서 그 경지는 불가능하다고 단정 지어졌고 말일세. 닫힌 중단전을 개방해 구경의 경지를 이루는 데만 해도 이리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하물며 상단전은…….”
홍야개가 말을 하다 말고 움찔했다. 그리고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뭐, 뭐하는 건가!”
선우정후의 오른손이 하운천의 머리 위에 얹혀 있다.
그것만으론 그렇게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 그의 소맷자락이 마구 펄럭거렸다.
기의 이동이 느껴졌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이동했다 돌아오는 순환(循環).
잠시 뒤, 그가 손을 회수함과 동시에 입을 열었다.
“기와의 소통이 원활하네. 개방되어 있단 뜻이지. 이 아이의 상단전이.”
“……!”
놀람을 넘어선 경악.
순간 온몸의 소름이 돋음을 느낀 홍야개다.
말이 되지 않는, 아니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
“하지만 중단전은 닫혀 있는 상태, 자네가 생각하는 그런 것이 아니야. 하지만 이런 일은 나로서도 처음이라네. 어떻게 될지는 나도 모른다는 소리지.”
“허…….”
홍야개는 기가 찼는지 연신 헛웃음을 뱉어 냈다.
상단전의 개방. 그 말은 즉 극경의 경지에 올랐단 소리가 아닌가? 아니, 중단전이 닫혀 있으니 그것도 아니었다. 그렇다 해도.
“굉장한 체질이 아닐 수 없구나. 이것이 무림의 복이 될는지, 흉이 될는지.”
“걱정 말게.”
“응?”
선우정후가 인자해 보이는 미소를 띠웠다.
“자네가 말하지 않았나? 이 아이는 서생이라고. 무림과는 상관없는 아이일세.”
그렇다. 생원, 후에 황궁에 몸을 담을 자. 무림과는 전혀 다른 세상. 불가침(不可侵), 불가공(不可共). 이것이 당금 황궁과 강호에 관계다.
“……그랬었지.”
홍야개의 의미심장한 말투.
그러나 선우정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그의 머릿속으로 선우초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난 초설이에게 가 봐야겠네. 이 아이를 치료하느라 신경을 쓰지 못했으니.”
“음.”
홍야개가 고개를 끄덕이고, 선우정후가 방을 나섰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방은 적막감에 휩싸였다.
고요한 방.
그 중앙에 서 있는 홍야개. 그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듯 입을 일자로 굳게 다문 채 팔짱을 꼈다.
[큭큭큭.]
웃음소리. 하지만 홍야개에게는 들리지 않는 듯 보였다. 단귀륭이기에…….
[크하하하하!]
그는 하운천이 누워 있는 침상 옆에서 미친 듯이 웃어 댔다. 선우정후가 한 말을 마음속으로 수십 번이나 곱씹었다. 상단전의 개방. 중단전이 막힌 것 따위는 상관없다.
천마대력신공은 마교의 초대 교주인 일대천마가 혼원일체경을 실현하기위해 만든 신공이자 신법이다.
그는 천마대력신공을 사층까지 익힌다면 능히 혼원일체경에 들 수 있다고 기록해 놨고, 그 신공으로 마교의 역대 교주들은 최소 구경, 혹은 단귀륭처럼 극경의 경지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그러나 일대천마를 제외한 그 누구도 천마대력신공을 사층까진 익힐 수 없었다.
시간.
인간에게 허락된 시간은 무인들을 기준으로 길어 봐야 백여 년. 그것마저도 구경의 경지에 들어야만 가능하다.
단귀륭도 그의 나이 백 세가 넘어서야 겨우 극경의 경지에 다다랐다. 그리고 마교의 무인들은 그가 언젠가는 혼원일체경을 실현시킬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나, 정마혼전 이후 갑작스레 사라져 버린 단귀륭. 역사상 일대천마 다음으로 가장 강했던 단귀륭마저 결국은 극경의 경지가 한계였다.
하지만.
‘애송이라면 가능하다.’
지금은 비록 하단전과 상당전만이 열려 있고 그 둘을 이어 주는 길이자 정, 기, 신중 정(精)을 담는 그릇인 중단전이 닫혀 있어, 신체의 흐름이 흐트러졌기에 허약한 신체를 갖고 있지만.
‘적어도 만년설삼 정도의 영약으로 단숨에 중단전을 개방하고 천마대력신공으로 세 단전의 내공을 쌓는다면…….’
가능하다!
빠르면 몇 년 안에 극경의 경지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혼원일체경은 단귀륭으로서도 얼마간의 시일이 걸릴지 확답을 내릴 수 없다.
아직 걸어 보지 못한 길.
문제는 영약이다.
만년설삼만 해도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데, 그것과 같은 수준의 영약 혹은 영물의 내단이 쉽게 손에 들어올 리 만무하다.
거기다 자신은 지금 혼만 남았다. 직접 구하러 갈 수도 없는 노릇.
‘제길, 중단전이 열리지 않은 채로 심공을 수련하는 것은 위험하다. 자칫 몸이 붕괴되어 죽거나 최소 주화입마에 빠지겠지. 어쩐다…….’
어느새 홍야개와 같은 모습으로 고민에 빠진 단귀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