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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귀 1권(7화)
3장 특급 제거 대상 흑(黑)(2)


얼마나 지났을까. 한참을 상념에 빠져 있던 홍야개가 움직였다. 시선은 누워 있는 하운천을 향했다.
‘흑(黑).’
저벅저벅.
일정한 발걸음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지며 홍야개가 하운천과의 거리를 좁혔다. 그러곤 입을 연다.
“미안하네.”

***

선유전(善柔殿).
사방이 순박하나 아름다움을 머금은 꽃들과 작은 수목들로 꾸며졌다.
선우세가의 영애인 선우초설이 머무는 곳.
그곳의 입구로 이어지는 대리석 바닥 위를 걷고 있는 노인. 막 하운천의 치료를 끝내고 딸아이의 안위가 걱정되어 발걸음을 한 선우정후였다.
“가주님을 뵈옵니다.”
“가주님을 뵈옵니다.”
선유전의 하인들과 시녀들이 공손히 예를 올렸다.
선우정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시녀를 바라봤다.
“초설이는 어떻던가? 괜찮던가?”
걱정 가득한 음성.
시녀가 싱긋 웃는다.
“초설 아가씨야 항상 씩씩하시잖아요. 걱정하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발걸음 하셨으니까 들어가 보시지요.”
그녀는 문고리를 잡으며 물었다.
선우정후가 고개를 끄덕이고, 시녀가 방문을 열려는 찰나.
꽝!
“아버지!”
“에구머니나!”
“헉!”
안쪽에서부터 세차게 열려 버리는 문. 시녀는 물론이고 여러 명의 하인들과 선우정후까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선우초설이 혀를 살짝 내밀었다.
“헤헤, 다들 놀랐나요? 미안해요.”
그 순박한 모습에 사람들의 얼굴에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녀석, 그렇게 그 아이가 걱정이 됐더냐?”
선우정후는 딸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아! 어떻게 됐어요? 하 공자는요? 아버지시니까 잘 치료하셨겠죠? 그렇죠?”
“하하, 걱정 말거라. 내상도 그리 깊지 않았던 데다가 외상에는 금웅설록수(金熊舌?水)를 발랐으니.”
선우초설의 눈이 동그래졌다.
금웅설록수.
거의 준 영물급에 속하는 금빛 털을 가진 곰의 혀와 선우세가만의 비법으로 만든 금창약을 혼합하여 만든 외상약이였다. 어지간하면 구하기 힘든, 선우세가에서도 귀하게 여기는 약.
“정말 금웅설록수를요?”
“그 정도는 해야 초설이, 네게 잔소리를 듣지 않았을 것 아니냐?”
“아버지도 참…….”
두 사람의 정겨운 대화를 듣고 있던 시녀.
그녀는 다른 시녀들을 시켜 차와 다과를 가져오라 명한 뒤, 두 부녀를 방 안으로 모시었다.
“잠시 뒤에 차를 올리겠습니다.”
허리를 숙이며 말한 시녀는 방을 나서며 문을 닫았고 선우정후는 방 중앙에 위치한 탁자에 앉았다. 선우초설도 그의 앞에 마주 앉는다.
“그래, 그 아이는 이제 걱정할 것 없다. 이제 애비는 네가 걱정이 되는구나.”
“저는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그놈들이 저에겐 아무 해도 가하지 않았어요. 앞으로는 석일 아저씨랑 다른 무사 아저씨들이랑 함께 다닐게요. 죄송해요…….”
“물론이다. 무사들이 많아 불편하더라도 석일과는 꼭 함께 다녀야 한다. 널 어릴 적부터 돌봐 왔던 그니까, 그나마 괜찮지 않겠느냐?”
선우초설이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럼요!”
“녀석.”
선우정후는 애정 가득 담긴 손길로 버릇처럼 딸아이의 머리를 헝클어 놓았다. 선우초설은 그 포근함에 배시시 웃는다.
잠시 뒤, 시녀가 허연 김이 피어나는 차 두 잔과 다과를 내왔다. 차는 홍차 중에서도 구하기 힘들다는 기홍(祁紅). 그러나 선우초설은 못마땅한 표정이다.
“으, 난 이거 써서 못 마시겠던데.”
그 모습에 시녀는 쿡쿡 웃으며 가져온 것들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는 총총걸음으로 다시 방을 나갔다.
호록.
선우정후는 기품 있게 차를 한 모금 들이켜 음미한 뒤 꿀꺽 삼켰다. 맛있냐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딸아이의 시선을 받으면서.
“네가 좀 더 자란 뒤엔 차 맛을 알게 되겠지. 그때가 언제쯤 될꼬? 기다려지는구나, 흘흘.”
선우초설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어떻게 차가 약재보다 쓰지?”
“약재보다 쓰다? 이런, 그거 큰일이구나. 하하하.”
그녀는 말을 하고는 찻잔을 들이키는 아버지를 한 번 바라본 뒤, 자신의 찻잔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찻잔 속에 어렴풋이 하운천의 모습이 그려지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하 공자도 차를 참 좋아해요. 마시면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몸이 개운해진다던가?”
“흘흘, 그렇지.”
“그러면서 밥은 항상 조금만 먹는다니깐요? 소녀가 많이 먹어야 된다고 그렇게 말해도 제 말은 절대 안 들어요!”
“그렇구나.”
“운동도 안 해요. 서책은 그렇게 손에 쥐고 살면서 정작 가장 중요한 건강을 소홀히 한다니깐요.”
“…….”
“거기다가…….”
그렇게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어떨 때는 화를 내다가도 어떨 때는 웃고 또 어떨 때는 부끄러워하다가도 다시 화를 냈다.
물론 이야기의 주인공은 하운천이었다.
선우정후는 아무 말 없이 이야기를 들어 주며 그녀를 응시했다. 어느새 자신의 딸아이가 사랑에 빠진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많은 아버지들은 기뻐하면서도 내심 서운하고 또 걱정이 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선우정후가 처음 느낀 감정은 그게 아니었다.
안타까움.
그의 눈엔 안타까움이 서려 있었다.
“……그래서 하 공자가 뭐라고 그러셨는지 알아요? 소생 준비 끝마쳤…….”
탁.
힘주어 내려놓는 찻잔 소리에, 별처럼 반짝이는 눈을 한 채 신나게 말을 하던 선우초설은 움찔했다.
“아버지?”
“초설아.”
근엄한 음성.
화기애애했던 방 안의 공기가 다소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에 그녀는 대답도 못하고 조용히 아버지를 바라본다.
“그 아이를 좋아하는 게냐?”
“…….”
“그 아이가 너도 모르는 사이에 네 마음속에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게로구나.”
그랬다. 어느 순간부터, 그를 만나면 항상 즐거웠다. 그를 만나지 않는 날엔 그 사람 생각을 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러다 문뜩 보고 싶어지기라도 하면 반대로 일 분 일 분이 하루와도 같았다. 그가 아프기라도 하는 날엔 하던 일도 던져 놓고 달려가기에 바빴고 하고자 하는 일에 항상 열심이던 그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랬구나, 어느 순간부터 자신은…….
“그만.”
선우정후는 그녀의 상념을 단칼에 잘라 버렸다.
“그 아이를 향한 마음은 그만 접어 두거라.”
그러고는 감정마저 잘라 버리라 한다.
“어, 어째서죠? 아버지도 하 공자를…….”
“그래, 그 아이는 좋은 아이다. 심성도 올곧고 이루려 하는 목표가 뚜렷하며 인의를 알고 예의를 아는 아이다.”
“그런데 갑자기 왜 그러시는 거예요!”
선우정후의 미간의 주름이 잡혔다. 눈썹도 미미하게나마 꿈틀거리는 듯했다.
처음 보는 딸아이의 태도. 자신에게는 단 한 번도 언성을 높인 적이 없는 아이다.
‘그만큼 감정이 깊단 뜻이겠지…… 더 이상은 안 된다. 늦기 전에.’
선우정후도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그녀처럼 자신도 그녀에게 언성을 높이거나 쓴 소리를 한 적이 없었다. 이번이 처음이 되겠지.
“초설이 너는 나의 딸이다. 선우세가의 여식이며 안휘성은 너를 연화선녀라 부르고 있어. 연화선녀는 육대세가의 자리를 꿰차고 있는 본가의 영애지.”
“그래서요? 그게 중요한가요? 명성이라는 게, 권세라는 게 그렇게 중요해요? 하 공자는 그저 학당의 문생이고 저는 아버지의 딸이라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 제 감정보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아버지는 더 중요하다, 이 말인가요?”
“그래.”
망설임 없는 대답.
그것이 선우초설을 무척이나 놀라게 했다.
다를 줄 알았다. 자신의 아버지는 힘을 좇고 권력을 좇는 그런 사람들과는 다를 줄 알았다.
그녀의 기색을 읽었는지 선우정후는 황급히 말을 잇는다.
“초설이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다만, 너는 너고 그 아이는 그 아이다.”
“그게 무슨 소리죠?”
“그 아이의 신분은 생원이다. 너는 비록 무공을 익히지 않았고 의술에 뜻을 품고 있으나 엄연히 무림인이라 할 수 있다. 선우세가가 의가이면서 또한 무가이기 때문이지.”
선우초설은 답답했다. 무슨 소리인지 정확한 그 뜻을 알아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신분 차이가 문제라는 건가요? 아버지는…….”
“그렇다. 신분. 생원이라는 길과 무림인이라는 길, 그것은 각각 다른 두 갈래의 길이다. 그 아이가 걷고 있는 길의 끝에는 황궁이 있어. 언젠가는 이 나라의 황제를 보필하겠지. 생원이란 그런 신분이다. 걷는 길이, 살아가는 세상이 다르다.”
“그런…….”
“초설아.”
선우정후는 엄중한 눈빛으로 딸아이를 바라보았다.
잠시간 방 안의 적막감이 흘렀고 그 뒤, 서서히 선우초설의 울음소리가 사방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흑, 흑흑…….”
그런 그녀를 안쓰럽다는 듯 바라보던 선우정후는 뭐라 해 줄 위로의 말을 찾지 못한 채, 쓸쓸히 방을 빠져나갔다.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기 전 한 번 더 고개를 돌려 딸아이를 바라봤으나, 입은 열리지 않았다. 소리 없는 한숨만 새어 나올 뿐이었다.
탁.
“흑흑…….”
바위 위에 맺힌 빗방울 흐르듯, 선우초설의 눈물이 천천히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또르르.
턱 끝에 맺힌 눈물 한 방울.
이윽고 떨어져 내린다.
퐁당.
식을 대로 식은 찻잔 위로.
잔물결은 조금씩 조금씩 퍼져 나가 선우초설이 그려 놓은 하운천의 모습을 지워 가기 시작했다.

***

막상 나오긴 했지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무거운 마음이 그의 발까지 짓누르는 듯했다.
그렇게 선우정후가 멍하니 서 있자 시녀가 다가와 묻는다.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가주님.”
“아닐세.”
그는 고개를 저으며 천천히 돌계단을 내려왔다. 저 멀리 은은한 빛을 발하는 달이 눈에 들어온다.
‘오늘따라 유난히 그대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오.’
이런 일이 있을 때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사람. 떠나기 전, 먼저 가서 미안하다며 눈물을 흘리던 사람. 그의 부인이자 선우초설의 어머니였던 사람. 그리고 지금은 세상에 없는 사람.
그렇게 휘영청 밝은 달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긴 선우정후를 깨우는 자가 있었다.
“가주님!”
세가의 입구가 있는 방향에서 달려오며 소리치는, 선우세가의 정문을 지키는 무사였다.
“무슨 일인가?”
“예, 하운천 공자의 유모라는 사람이 찾아오셨습니다. 가주님이나 초설 아가씨를 뵙고자 하신다는데 어떻게…….”
“이런, 걱정이 되셨나 보구나. 어서 귀빈실로 모시거라.”
“예.”
선우정후는 유모를 데리러 돌아가는 무사를 잠시 바라보다 곧장 귀빈실로 향했다. 한발 먼저 가서 손님 맞을 준비를 해야 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