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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귀 1권(8화)
3장 특급 제거 대상 흑(黑)(3)


“저를 따라오시지요. 가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방금 전의 무사가 정문에 서 있는 유모께 공손히 말하였고 그에 유모는 ‘예.’라고 짧게 답하며 그를 따라나섰다.
늙은 유모를 배려해서인가. 무사의 걸음걸이는 다소 느릿했다. 그 때문에 유모는 여유 있게 세가의 모습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오래된 건물들. 그러나 그 기품과 위상을 잃지 않았다. 꾸밈없는 듯 수수하지만 화사한 정원은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그 안에, 초저녁임에도 불구하고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는 세가의 무인들, 그리고 의원들.
모두 피곤한 기색 하나 없이 활기가 넘쳤다.
‘역시 육대세가라 할 만하구나.’
속으로만 감탄하며 유모는 한참을 걸었다.
그렇게 걷자 어느새 귀빈각(貴賓閣)이란 현판을 걸어 세운 건물 앞에 다다라 있었다.
“이분을 안으로 모시어라.”
“예.”
귀빈각의 전용 시녀가 무사의 부름을 받고 내려왔다.
무사는 고개를 돌려.
“가주님이 안에서 기다리고 계실 것입니다. 그럼.”
하고 말하며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조금 전보다 훨씬 빠른 걸음이다. 보폭도 일정했다.
‘고수.’
유모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자 시녀는 의아했지만 본분에만 충실했다.
“안으로 드시지요.”
“아, 예.”
시녀를 따라 계단을 올라 귀빈각에 들어섰다. 여러 개의 방문이 보였는데 그녀는 그중에서도 가장 커 보이는 곳으로 유모를 모셨다.
문이 열리자, 이미 차가 올려져 있는 탁자에 앉아 있는 선우정후가 보였다.
“부족하지만 선우세가를 맡고 있는 선우정후라 하오.”
유모라는 신분. 한 세가의 가주직을 맡고 있는 그에겐 한낱 미천한 신분이 아닐 수 없었지만 그는 결코 그녀를 홀대하거나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공손하기 그지없다.
“아이고, 미천한 저에게 어찌 그리……. 이 늙은이는 하운천 도련님을 모시고 있는 여인네라우.”
“예, 걱정이 되어 찾아오셨나 봅니다.”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선우정후가 말했다.
“걱정이라니요. 가주님께서 친히 초대해 주셨는데 말이지요.”
“초대라니…… 아!”
선우정후는 깨달았다.
유모가 하운천이 다친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이렇게 찾아왔으니 말해 주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사실은 그 아이가 조금 다쳤습니다. 그래서…….”
선우정후는 그간 있었던 일을 그녀에게 상세히 말해 주었다. 그리고 지금은 치료를 해서 며칠만 지나면 금방 괜찮아 질 것이라는 것도.
유모는 이야기를 듣는 내내 근심 어린 표정을 짓고 있다가 감사하다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아니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니.”
선우정후는 그렇게 말하며 하운천이 있는 옆 건물에 방을 내줄 테니 그곳에서 편히 쉬라고 권했다.
그녀가 떠나고, 선우정후는 자신이 머무는 선청전(善淸殿)으로 돌아갔다.
“이제 왔는가?”
미리 와 있던 홍야개가 그를 맞이했다.
제집인양, 백옥을 통째로 깎아 만든 탁자 위에 앉아 턱을 괴고 있다.
선우정후는 말없이 방 귀퉁이에 선반 위에서 선홍빛을 내는 매끈한 병 하나를 꺼냈다.
그 모습을 본 홍야개. 웃음꽃이 활짝 핀다.
“정후야, 무슨 일이누? 네 녀석이 선뜻 매화주를 꺼내다니.”
비싸기도 비싸지만, 구하기가 어려워 귀하게 여겨지는 술.
선우정후는 한 손엔 매화주를, 다른 손엔 술잔들을 들고 탁자 위로 내려놓으며 말했다.
“나도 이젠 늙었나 보네. 괜스레 울적해지는 걸 보면 말일세.”
“클클, 그래. 울적할 땐 한 잔 해야지. 암, 그렇고말고.”
그렇게 둘은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시간을 보냈다.
주로 얘기는 홍야개가 이끌어 가고, 선우정후는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
반 시진 정도가 지났을까. 매화주의 마지막 잔을 홀짝 들이킨 홍야개가 입맛을 다셨다.
“쩝쩝, 마실 만하면 사라지는 게 술이라지만. 참, 이번엔 양이 너무 적구나.”
그에 반해 선우정후는 살짝 취기가 오른 모습. ‘훗’ 하고 웃어 버린다.
그를 따라 홍야개의 입꼬리도 씩 올라갔다. 그는 그러면서 술병을 톡톡 건드린다.
“자네가 치료한 그 운천이라는 아이 말일세.”
“응? 그 아이가 왜?”
“그 아이의 유모가 찾아왔다고 들었네.”
“아, 그렇다네. 걱정이 되셔서 찾아오신 게지. 초설이를 알고 있다지만, 그래도 선우세가는 엄연히 무림의 가문이 아닌가.”
“걱정이라…… 그래. 오늘 술은 그녀를 위한 술이라고 해 두지.”
“무슨 소린가?”
홍야개의 눈에 싸늘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술로 목을 축였으나, 곧 피가 대신 할 테지.”

***

이제는 어둑어둑해진 하늘.
고요하다.
유모는 고요한 방 안에 홀로 앉아 있었다.
“기우였구나. 아무 일도 없었을 것을…….”
괜한 걸음을 했다고 생각했지만 하운천이 다쳤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구나.”
그녀는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 어릴 적부터 허약한 체질 탓에 작은 충격에도 큰 상처를 입던 하운천이다. 이번에는 자칫 잘못했으면 큰일 날 수도 있었던 일이다.
학당을 옮겨야 하나.
마치 하운천의 어머니처럼 그녀는 이런저런 걱정을 하며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
깊은 고민에 빠진 그녀.
턱. 턱턱.
그래서 일까? 지붕 위로 무언가 내려앉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음에도 그녀는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소리가 너무 작아 몰랐을 수도 있다.
스으윽.
방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그리고 검은 그림자가 아주 천천히 방 안으로 진입했다.
기척이 없다. 숨소리, 발소리마저도. 하지만…….
“야심한 밤에 무슨 일이슈?”
유모가 고개를 돌려 입구 쪽을 바라봤다.
그곳엔 방긋 미소 짓고 있는 홍야개의 모습이 달빛에 비춰지고 있었다.
“클클, 나름 은밀하게 들어왔다고 생각했는데……. 늙으니까 뼈마디가 쑤셔서인가? 이거 원.”
넉살 좋은 소리를 하며 실실 웃는 홍야개를 위아래로 살펴본 유모. 그리고 발견한 아홉 개의 매듭.
속으론 흠칫했지만 겉으론 표현하지 않았다.
“누구신진 모르겠지만 방을 잘못 찾아오신 것 같은데…….”
그녀의 말에도 홍야개는 반응 없이 방 안을 한 바퀴 빙 돌았다.
달빛이 그를 뒤따랐고 유모의 시선도 그를 쫓았다.
이윽고 그의 입이 열렸다.
“잘못 찾아왔다라. 그래, 그렇지. 이 거지가 용건이 있는 사람은 늙은 노파가 아니니까. 노부는 십오 년 전 멸문한 유경연곡에서 살아남은 곡주의 딸, 견소…….”
촤아악!
말을 하는 도중 닥쳐오는 기습!
유모의 손가락이 갈고리 모양으로 변해 시뻘건 빛을 머금고 홍야개의 눈을 노렸다.
파악!
그러나 홍야개는 여유롭게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그래, 본심을 드러내시는군. 요물.”
“네놈, 알고 있었구나!”
“물론, 명색이 개방의 방주인데.”
누런 이를 내보이며 씩 웃는 홍야개. 곧바로 말을 잇는다.
“이거, 고맙다고 해야 하나? 이렇게 직접 찾아와 노부를 좀 편하게 해 주니 말일세.”
“무슨?”
그 말은 즉, 자신이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그가 자신을 찾아왔을 거라는 뜻.
그녀가 누구인지 알고 있으니, 목적은 하나뿐이었다.
목숨. 그녀의 목숨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노친네가…… 나를 죽이라고 시켰더냐?”
증오의 불길이 그녀의 눈에서 일렁거렸다.
홍야개는 순순히 대답했다.
“그렇지, 살아 있어야 하지 말아야 할 자가, 같은 하늘 아래서 버젓이 숨을 쉬고 있으니.”
이걸로 확실해졌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
유모는 내공을 끌어 올렸다. 그러고는 잡힌 손목을 빼냄과 동시에 왼손으로 홍야개의 목을 찔러 들어갔다.
슈아악!
홍야개가 뒤로 허리를 젖혀 피해 냈다.
유모는 그 모습을 보고 재빨리 뒤로 서너 걸음 물러서며 쌍장(雙掌)을 뻗었다.
번개처럼 쏘아지는 두 줄기의 장력!
건물 안에서 이런 공격을 할 줄은 예상도 못한 홍야개는 그대로 가슴팍에 장력을 얻어맞았다.
“큭!”
그 충격에 방문을 부수고 밖으로 날아가 처박혔다.
유모는 산산조각난 문을 힐끔 쳐다본 후 창밖으로 몸을 쏘았다. 하운천을 데리고 선우세가를 빠져나갈 계획이었다.

한바탕 소란의 무사들과 시녀들이 유모가 머물던 방으로 달려왔다. 그곳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는 홍야개가 있었다.
“홍 방주님, 도대체 무슨 일이?”
달려온 무사들 중 한 명이 한 발 나서며 물었다.
홍야개가 주위를 슥 훑어보았다. 그 분위기가 사뭇 차가워서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시선을 질문한 무사에게 고정시킨 홍야개.
“지금부로 세가의 모든 인원은 건물 밖으로 나오지 아니한다. 알겠는가?”
“예? 어째서…….”
홍야개가 품속에서 옥패를 하나 꺼냈다.
맹주령(盟主令)이라는 글자가 금으로 음각된 패.
순간 주위에 모든 이들이 허리를 숙이며 동시에 외친다.
“맹주령을 받듭니다!”
“맹주령을 받듭니다!”
구파일방과 육대세가는 물론, 정파의 연합이자 주축인 청령맹에 몸을 담고 있는 문파 그리고 무인들이라면 이유 불문, 순종해야 한다.
그것이 금황패(金皇牌)가 가진 힘.
그것을 가진 자, 맹주의 대신이다. 그것을 가진 자, 맹주의 눈이 되고 귀가 될 것이며 입이 될 것이다.
그리고 지금 금황패는 홍야개가 지니고 있었다.
“전부 돌아가거라. 지금 본 것은 전부 잊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생각하라. 오늘 선우세가에선 아무 일도 없었다. 알겠는가!”
귓전으로 똑똑히 박혀 들어오는, 벼락같은 외침.
내공이 없는 몇몇 시녀들은 정신을 잃을 정도였다.
“예!”
“예!”
무사들은 대답과 함께 쓰러진 시녀들을 부축해 그곳을 빠져나갔다. 다른 시녀들도 전부 숙소로 도망치듯 뛰어갔다.
순식간에 혼자 남게 된 홍야개. 얼굴은 와락 구겨져 살벌한 분위기다.
“그 아이에게 갔을 테지, 그곳이 자신의 무덤이 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4장 유경연곡(1)


서걱, 푸화아악!
푸욱, 파앗!
섬뜩한 소리가 연이어 들려온다.
그 중심엔 한 노파가 있었다. 야수의 발처럼, 오른손은 무사들의 목을 끊고 심장을 후벼 팠다.
그때마다 분수처럼 피어오르는 허공 난자한 선혈.
철벽같은 왼손은 무사들의 검(劍)을, 선(扇)을 그리고 암기처럼 쏘아져 오는 침(針)을 막아 내고 튕겨 냈다.
날렵하고 정확했으며 견고하고 단단했다.
항상 하운천에게 따뜻한 밥상을 내주던 주름 가득한 손. 그것이 이제는 무사들의 목숨을 앗아 가고 있다.
손에서 뚝뚝 떨어지는 핏물. 얼굴과 온몸 여기저기 묻은 ‘타인’의 핏자국. 주위엔 선우세가의 무복을 입고 있는 일곱 구의 시체.
“후우, 후우.”
그녀가 가픈 숨을 몰아쉬었다.
눈앞의 건물로 들어가기 위해 오랫동안 잊고 있던 무공을 펼쳤고, 살생을 했다.
운천아…….
이 안에 있을 아이, 그를 데리고 어서 이곳을 떠나야 했다.
그녀가 목표로 한 문고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잡지 못했다.
쐐에에에엑!
일도양단! 공기를 가르고 그녀마저 반으로 갈라놓을 기세로 베어 오는 한 자루의 도(刀)!
유모는 황급히 몸을 돌려 도의 옆면을 쳐 냈다.
쩌엉!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주춤주춤 옆걸음질 치는 무사. 새하얀 가면을 쓰고 있어 표정은 보이지 않는다.
그가 자세를 바로잡을 무렵, 네 명의 무사들이 속속히 모습을 드러냈다. 전부 똑같은 가면.
그러나 가진 무기가 달랐다. 도와 함께 검, 창, 권 그리고 각.
청령맹의 맹주를 지키는 오 인의 무인. 영천무하대였다.
그들의 뒤로는 어느새 나타난 홍야개와 선우정후가 서 있다. 선우정후는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저자가…… 저자가 정령 유경연곡의 생존자란 말인가?”
“그렇다네. 저 요물이 사용하는 무공. 유경연곡의 독문무공 중 하나인 구공혈조(九孔血爪)이지 않은가? 악랄하고 잔혹하기로 유명한.”
“하지만…….”
선우정후는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이다.
그가 그럴 만한 이유도 있었다.
유경연곡(幽境淵谷).
약 십오 년 전까지만 해도 태평성세를 이루던, 여인들로만 이루어진 문파다.
절강성 항주, 막간산(莫干山) 깊숙이 자리하고 있던 유경연곡은 손가락과 손톱을 단련하여 사용하는 무공인 조법과 검법 그리고 술법에 조예가 깊었다.
여인들로 이루어진 문파라 하여 정도를 걷는 문파로 생각하기 쉽지만 그녀들은 엄연히 사파. 누군가를 죽임에 있어 망설임이 없고 손속도 잔악했으며 성정 또한 거침없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청령맹이 유경연곡을 멸문시킨 것은 아니었다.
마령혈단(魔靈血團).
유경연곡의 전유물이자 그들만의 비술로 연단할 수 있는 환단.
늙은이가 그것을 먹으면 서서히 몸이 젊어지는, 전설상의 경지인 반로환동을 약으로써 실현시키는 희대의 영약(靈藥) 아니, 마약(魔藥)이다.
연단할 수 있는 수가 극히 제한적이어서 복용한 자는 유경연곡의 여인들뿐이었다. 그래서 강호의 무인들은 그녀들을 요물이라 불렀다. 늙지 않는 요물.
그러던 중 충격적인 사실이 알려진다.
마령혈단의 연성 중 순결을 잃지 않은 숫처녀의 생혈(生血)이 들어간다는 사실이.
그것이 청령맹으로 하여금 유경연곡을 세상에서 지우게 만든 동기이자 원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