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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귀 1권(9화)
4장 유경연곡(2)


마령혈단으로 젊어진 그들이라 할지라도 청령맹의 무인들 앞에선 일초지적이나 마찬가지였다. 구파일방과 육대세가가 직접 나섰기에…….
하지만 그들도 사람인지라, 십오 년 전 그 지옥과도 같은 곳에서 도망쳤던 여인이 있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견소소.
그 당시 곡주의 딸이고 소곡주였으며, 사십 정도의 나이에 이미 절정을 바라보던 고수.
하운천을 길러 준 여인, 그러나 이제는 청령맹의 암살 대상.
그런 그녀를 선우정후는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유경연곡의 여인들은 늙지 않는다고 들었네. ‘그것’을 복용했기 때문에 말일세. 하지만 저자는…… 늙었네.”
홍야개가 옆에서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지, 늙었네. 하나, 과연 그럴까?”
지켜보자는 뜻.
선우정후도 입을 굳게 다물었다.
다섯 명의 무인들, 영천무하대가 서서히 진형을 잡아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견소소의 주변을 에워싼 다섯 사내. 그들이 발산하는 투기에 그리고 살기에 견소소는 온몸이 저릿함을 느꼈다.
이어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사내들은 견소소의 주위를 천천히 돌았다.
그녀도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눈치를 살폈다.
그때.
“타앗!”
기합성과 함께 터져 나가는 한 자루의 검. 뒤이어, 돌진하는 발소리와 함께 찔러 들어가는 날카로운 창.
둘 모두 서슬 푸른 기운이 맺혀 있다.
견소소는 내공을 끌어 올려 검을 쳐 낸 뒤 몸을 틀어 창을 피했다. 그러나 뒤에서 육박해 오는 권력(拳力)!
꽈앙!
“컥!”
그대로 등짝을 내준 견소소의 몸이 심하게 굽어졌다.
사내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연이어 공격을 퍼부었다.
촤아악, 촤악! 서걱!
견소소가 극심한 고통을 참으며 이를 악문 채 발을 놀렸지만, 완벽히 피해 내는 것은 무리였다.
검에 볼 살이 베이고, 옆구리에 창날이 스쳤다. 허공에서 날아드는 발그림자를 막아 내기에 급급했고, 도가 등을 베고 지나갔다.
마지막으로 권을 사용하는 사내가 지르는 일권이 작렬, 견소소의 몸이 삼여 장이나 뒤로 날아가 처박혔다. 비산하는 흙먼지에 뒤덮여 그녀의 모습이 감춰진다.
그사이 무사들은 비뚤어진 가면을 고쳐 썼다. 초승달 모양으로 휜 가면의 눈과 입. 그 서늘한 모습에 소름이 돋을 정도다.
콰득.
“……?”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어 잠잠했던 전장.
갑자기 들려오는, 무언가 단단한 것을 깨물어 먹는 듯한 소리에 무사들은 의아한 듯 고개를 까딱거렸다.
하지만 다시 고요가 찾아들었다.
그리고 걷히기 시작하는, 자욱했던 흙먼지.
무사들과 홍야개 그리고 선우정후는 그곳에 쓰러져 있을 견소소를 바라보기 위해 눈을 치떴다.
“어, 어?”
“아, 아니!”
그러곤 놀라 숨을 들이킨다.
없었다. 그곳에 쓰러져 있어야 할 노파가 없었다.
사사삭.
그 순간 울려 퍼지는 공기를 가로지르는 소리.
이상하게 생각한 홍야개와 선우정후가 그녀의 기척을 잡기 위해 기감을 끌어 올리려는 찰나였다.
푸욱―!
“끄아아악!”
권법을 사용하던 무사가 괴성을 내질렀다. 가슴부근엔 견소소의 오른손이 깊게 틀어박혀 있었다.
“찢어발겨 주마.”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냉랭한 음성.
그녀는 쑤셔 박은 오른팔을 뽑아내 구공혈조의 제 삼 초식을 펼쳤다.
혈조십섬참(血爪十纖斬)!
피를 머금은 듯, 시뻘건 손이 상하좌우 가릴 것 없이 빠르게 십여 번 허공을 갈랐다. 숨 한 번 내쉴 만큼 찰나의 순간 동안.
파바바바바밧!
가슴에 구멍이 난 무사의 몸 위로 서서히 가느다란 혈선이 생겨났다.
“으어어…….”
짐승의 목울음 소리만큼 괴기한 소리가 목을 타고 흘러나오면서, 사내의 몸이 서서히 조각나기 시작했다.
푸슈슛!
이내 갈기갈기 찢겨지는 몸, 그리고 흘러내리는 피와 내장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그 누구도 대응하지 못했다.
홍야개가 무사들을 일깨웠다.
“멍하니 서 있지 마라! 가진 바 모든 것을 이용해 저 노파를…….”
말하면서 견소소를 가리킨 홍야개의 손가락이 일순 부르르 떨린다.
‘얼굴이?’
변했다. 견소소의 얼굴.
얼굴뿐만 아니라 푸석했던 머리카락과 구부정했던 허리. 그 모든 게 젊은 여인의 것처럼 변해 있었다.
“이걸로 확실해졌군. 저자는…… 유경연곡의 요물일세.”
“그렇군. 그렇다는 것은 결국, 척살(刺殺).”
척살이라는 단어.
이제는 네 명이 된 영천무하대 무사들의 머릿속에 똑똑히 각인되었다. 형제와도 같았던 동료를 죽인 자. 그리고 애초에 죽었어야 할 악.
“사방진(四方陣)을 펼쳐라.”
검을 쥔 자가 나직이 명하며 견소소의 정면, 북(北)의 방위를 점하자 나머지 무사들이 동(東), 서(西), 남(南)의 위치로 이동했다.
단순히 네 명이서 견소소를 둘러싼 모습이었지만.
쿠우우.
공기가 무겁다.
몸이 무겁다.
엄청난 압력이 견소소를 짓눌렀다. 이것이 진법의 위력.
“얕은 수. 이런 것이 통할 줄 알았느냐!”
견소소는 하찮다는 듯 날카롭게 외치며 전방의 무사에게 몸을 쏘았다.
무사는 검을 들어 올리며 내력을 운용했다.
어기충검(御氣充劍).
검에 내력을 주입시켜 보다 강한, 보다 예리한 위력을 내는 상승의 무공. 하단전을 사용하는 초경의 경지에 무사들 중 초절정에 이른 자만이 사용할 수 있다.
서늘한 기운을 머금은 검.
무사는 그것을 그대로 내리그었다.
그러나 견소소의 양손에도 시뻘건 기운이 맺혀 있다.
동수.
둘 사이에서 충돌에 의한 불꽃이 튀며, 순식간에 십여 합이 지나갔다. 무사는 검을 가로로 그어내면서 견소소를 밀어냈다. 뒤로 물러난 그녀.
대기하고 있던 한 자루의 도가 그녀를 덮쳤다.
콰앙!
견소소도 이미 눈치를 채고 있었던 듯, 대수롭지 않게 도를 받아쳤다. 그 후 이어지는 반격, 또다시 십여 합.
그렇게 무사들은 차례대로 그녀를 상대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점점 가파 오는 숨결. 이마 위로는 식은땀이 축축하게 피어올랐다.
그 모습이 절박한 그녀의 상태를 말해 주고 있었다.
‘이대론, 위험하다. 수를 내지 않으면…….’
그녀가 이를 악물었다.
때마침 창을 사납게 휘두르며 공격해 오던 무사가 물러나고, 또다시 예기를 발하는 검이 쇄도해 오려던 참이었다.
그녀는 몸을 틀지 않았다.
검이 그녀의 어깨를 훑고 지나갔다.
“크윽!”
피가 허공으로 튀고, 공격한 무사의 눈엔 놀람이 어린다. 알아챈 것이다. 그녀가 일부러 공격을 허용한 것을.
견소소는 고통을 견뎌 내며 대지를 박찼다.
그녀의 몸이 일직선상을 그리며 창을 든 무사에 앞으로 날아갔다.
오른손은 위에서 아래로, 왼손은 아래에서 위로 그어져, 마치 맹수의 아가리와도 같은 그녀의 두 손이 무사를 덮쳤다.
촤아악!
가슴에 생긴 깊은 상처.
무언가에 물어뜯긴 듯한 모습이 실로 처참했다.
또 한 명의 죽음.
남은 사람은.
“세 놈.”
견소소가 몸을 돌려 무사들을 바라봤다. 동시에 무사들의 몸이 덜덜 떨린다.
공포감, 그 안에 뒤섞인 분노.
“그만 물러나라.”
중후한 음성이 그들의 몸을 달래듯 휘감았다. 홍야개였다.
견소소도 잠시나마 몸에 긴장을 풀고 숨을 고른다. 마령혈단을 복용했음에도 영천무하대는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그리고 지금 눈앞에 서 있는 노인.
심상치 않은 기운을 풍긴다. 아까 전 방 안에서와는 차원이 다른 기세.
“노부의 실수다. 아직도 마령혈단을 가지고 있었을 줄이야. 그렇다는 건 제조법도 알고 있다는 뜻이겠군?”
“…….”
대답은 없었다. 그러나 홍야개는 이해했다.
묵언이나, 그것은 곧 긍정.
“그렇단 말이지.”
“헛소리하지 마라. 그보다 만일 운천이에게 무슨 해라도 가했다면, 네놈들은 뼈도 추리지 못할 것이다.”
홍야개가 씩 웃는다.
“흘흘, 네년 몸이나 걱정하거라!”
그가 대지를 박차고 허공으로 튀어 오르듯 솟아올랐다. 딛고 있던 지면은 그 충격에 쩌억 하고 금이 갔다.
오른손에 들린 매끈한 호로병.
뛰어오르면서 마셨는지 입 안 가득 술이 담겨 있다.
푸화아악!
불을 뿜듯 내뿜자, 미세한 방울들이 촘촘한 암기가 되어 견소소를 덮쳤다.
그녀는 내공을 끌어 올려 옷소매를 빳빳하게 만들면서, 두 팔을 풍차처럼 휘둘렀다.
따다다다닥!
마치 방패 위로 수백 개에 달하는 화살이 박히는 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홍야개가 부드럽게 바닥으로 착지하고, 견소소의 팔이 멈췄다. 옷소매엔 눈으론 식별할 수 없는 구멍들이 나 있었다.
“죽기 전에 술 맛을 좀 봤으니, 여한은 없겠구나.”
“말이 많구나!”
견소소가 홍야개의 지척으로 돌진했다.
엄청난 속도였지만 홍야개는 덤덤했다.
그가 내공을 운용하며 오른팔을 들어 올렸다.
중단전의 내공이 대주천하여 그의 몸을 한 바퀴 선회했다.
쿠오오오.
오른손에 푸른빛이 맺히며 강맹한 기운이 소용돌이친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선우정후와 영천무하대의 무사들은 온몸에 전율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자신들과는 차원이 다른 강함, 그리고 그것을 견소소도 느끼고 있을 터.
그녀는 단전에 남아 있는 내력을 한울도 남기지 않고 모두 끌어 올리며 양손을 찔렀다.
그에 맞춰 홍야개도 가볍게 손을 내지른다.
콰―앙!
“크아아악!”
비명 소리와 함께 검은 그림자가 피를 토하며 튕겨져 나갔다. 예상대로 그림자의 주인은 견소소였다.
그녀의 양 소맷자락은 충격의 여파로 걸레처럼 찢겨졌고, 뼈가 함몰된 듯 가슴팍이 움푹 들어가 있었다. 입에선 진득한 피가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음?”
내뻗은 손을 여유롭게 회수한 홍야개가 쓰러져 있는 견소소를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선우정후에게 시선을 건넸다.
선우정후도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홍야개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무래도, 완벽한 마령혈단은 아니었나 보네. 큰 충격에 약효가 사라진 것을 보니. 신분과 무공을 숨긴 상태에서 제대로 된 재료를 구하기가 어려웠겠지.”
재료.
입으로 내뱉진 않았지만, 숫처녀의 생혈을 뜻하는 것을 홍야개는 알아차렸다.
“그렇군.”
홍야개는 고개를 끄덕이며 원래의 모습, 노파의 모습으로 돌아온 견소소에게 다가갔다.
그때, 예상치도 못한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유, 유모! 아버지!”
선우초설.
어느 새 그녀가 저만치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얼굴에 한가득 경악성을 담고서.
“초설아! 네가 어떻게 여기에 있는 것이냐!”
선우정후가 깜짝 놀라 외쳤다.
분명 선유전의 무사들에게 그녀가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잘 감시하라 명했었다.
그러나 그는 몰랐다. 선우초설이 아무도 모르게 만들어 논 비밀 통로가 있었음을. 그 누구도 모르는 선유전의 침실과 밖을 이어 주는 통로.
“이,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죠? 왜 유모가…….”
그녀는 말을 하다 말고 흐린 눈으로 피를 게워 내고 있는 견소소를 보곤, 소스라치며 그녀에게 뛰어갔다.
선우정후는 그녀의 어깨를 잡아채며 제지했다.
“아버지!”
그녀는 화가 나서 소리쳤다.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다.
선우정후는 그런 딸아이의 눈을 잠시간 바라보다 빠르게 수혈을 짚었다.
“아…….”
몰랐어야 할 사실을, 보지 않았어야 할 광경을 본 딸아이가 걱정이 됐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는 선우초설을 품속에 안고 고개를 끄덕였다.
홍야개가 난감한 표정을 짓다 다시금 몸을 돌렸다.
종지부를 찍을 때였다.
점점 가까워지는 홍야개. 그를 바라보는 견소소의 눈에는 분노, 답답, 울분 등 여럿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이렇게 쉽사리, 허무하게 죽어서는 안 된다. 운천이를 위해서라도.
하지만 그녀의 의지를 짓밟기라도 하듯,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들었다.
가슴이 미어졌다.
홍야개는 그런 그녀를 무심하게 내려 보다 옆으로 손을 뻗었다.
휘리릭.
허공을 격하고 부드럽게 빨려 들어오는 한 자루의 검.
영천무하대의 무인이 들고 있던 검이었다.
“그만 끝내야겠지.”
홍야개가 나지막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