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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귀 1권(10화)
4장 유경연곡(3)


‘……아.’
‘……송아.’
‘……애송아.’
작고 희미했던 목소리가 점점 또렷해졌다.
‘……라, 애송아.’
누가 나를 부르는 것 같은데?
‘……차려라, 애송아.’
‘정신 차려라, 애송아.’
아니 깨우는 건가?
하운천은 어렴풋이 정신이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잠시 뒤,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자 시야를 가득 채우는 단귀륭의 얼굴.
그가 허공에 붕 뜬 채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코앞에서.
“끄아악!”
하운천은 하마터면 침상에서 굴러 떨어질 뻔했다. 심장이 멎은 채로 말이다.
[쯧쯧, 심력이 그리 약해서야.]
단귀륭히 혀를 찼다.
하운천은 정신을 수습하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여기저기 욱신거리긴 했지만, 몸이 가볍고 개운하다.
“이거, 초설 소저의 부친께 큰 신세를 졌구나.”
단귀륭이 그의 앞으로 스르륵 다가왔다.
[신세? 큭큭, 이거 원수에게 신세를 진 꼴이구나.]
“원수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리요?”
[지금 이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냐?]
“소리?”
하운천은 문뜩 병장기가 부딪치는 듯한 소리와 무언가가 폭발하는 소리가 연속적으로 들려옴을 깨달았다.
가까운 곳. 자신이 있는 이 건물의 바로 밖.
‘이게 무슨 소리지?’
하운천이 확인을 위해 방을 나서려 했다.
그가 방문을 열려는 찰나.
[멈춰라.]
단귀륭이 제지했다. 그러고는 손을 슬쩍 휘두른다.
퍽!
방문이 아닌 그 오른편에 위치한 창문에 주먹만 한 구멍이 뚫렸다. 단귀륭의 짓이다.
하운천이 가만히 그를 바라보자 그는 턱짓으로 구멍을 가리켰다. 그곳으로 내다보라는 뜻.
하운천이 한쪽 눈을 감고 나머지 눈을 구멍에 갖다 댔다.
밖에서는 혈전(血戰)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 여인과 가면을 쓴 네 명의 무사, 그리고 갈기갈기 찢겨진 살점들과 함께 떨어져 있는 한 개의 가면.
그들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지만 싸우고 있다는 것쯤은 단박에 알아챌 수 있었다.
살벌한 분위기.
그것을 지켜보고 있는 선우정후와 거지 노인.
하운천은 침을 꼴깍 삼켰다.
사람이 죽어 있는 모습, 시체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하지만 그것뿐, 자신과는 상관없는 무림인들의 세상이었다. 자신이 끼어들 일이 아니다.
하운천은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거뒀다.
“저것과 선우세가의 가주님이 원수라는 것,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겁니까?”
[네놈은 도대체 질문을 몇 번이나 하는 것이냐? 잠자코 지켜보기나 해라.]
단귀륭의 으르렁거림에 하운천은 하는 수없이 다시 밖을 내다봐야 했다.
여인은 네 명의 무사들의 합공을 받고 있었다. 그 모습이 실로 힘겨워 보였는데 어느 순간, 여인이 검에 상처를 입음과 동시에 무사들 중 한 명을 죽였다. 남은 자는 세 명.
하운천은 긴장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주먹을 말아 쥐었다. 잠자코 지켜보던 거지 노인이 나선 것이다.
잘은 모르나 하운천의 눈에도 여인은 무척이나 강해 보였다.
그런 여인을 손쉽게 제압한 노인.
간담이 서늘하다. 한낱 사람이 저런 위력을 낼 수 있다는 것이 하운천으로서는 놀라울 따름이었다.
문뜩 괴상하기 그지없는 단귀륭이 어쩌면 대단한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된 하운천.
“단 선생, 단 선생의 무공이라는 것도 저분처럼…….”
질문하며 단귀륭을 바라보려 했던 그가 움찔했다. 피를 흘리며 땅바닥을 뒹군 여인의 모습이…….
“유, 유모?”
도자기처럼 고왔던 피부가 쭈글쭈글해졌고, 비단결 같은 머릿결이 순식간에 메말랐다. 늘씬하게 뻗은 허리는 금세 활처럼 굽었다.
그 모습이 낯설지 않다. 항상 봐 왔던 모습…….
“유모!”
하운천이 울부짖었다.
“유모! 유모가 왜 거기 있는 거야, 유모! 유모!!”
벽을 붙잡고 외쳤지만 들릴 리 없다. 잘못 봤나 싶어 유심히 살폈지만 확실했다.
거기다. 자신처럼 유모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모습을 드러내는 선우초설까지.
하운천은 단박에 문을 걷어차고 밖으로 뛰어나가려 했다.
[애송이!]
단귀륭은 외침과 동시에 팔을 뻗었다.
하운천이 허공을 날아 침상 위로 처박혔고 그의 곁으로 단귀륭이 다가갔다.
[미쳤느냐? 지금 네가 밖으로 나간다고 해서, 저 노파가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단 선생이야말로 미치지 않고서야!”
왜 자신을 말렸냐는 말은 내뱉지 않았다. 시간이 없다.
하운천은 재차 침상을 박찼다. 하지만 또다시, 단귀륭의 만류에 그는 뒤로 튕겨져 나갔다.
[진정해라!]
“이, 이……!”
악에 바쳐 눈을 부릅뜨는 하운천.
[진정하고 내 말을 들어라! 네가 나간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다. 너도 봤지 않느냐?]
“그럼? 그럼 이대로 가만히 앉아, 죽어 가는 유모를 지켜보라는 거요!”
그가 울분을 토했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과 함께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단귀륭은 그를 내려다보다 진중히 말했다.
[도와주마.]
순간, 하운천의 눈이 약간 커졌다.
[그 전에 명심할 것이 있다.]
하운천이 단귀륭의 눈을 응시했다. 지난번과는 다른 구원을 바라는 눈길.
[네 녀석의 몸속엔 내공이 없다. 그 말은, 본좌의 무공이 제 위력을 낼 수 없다는 소리와 같다. 그래서 한 가지 편법을 쓸 것이다. 단전 안에, 내공을 대신할 수 있는 기운을 불어넣어 줄 것이다. 하나!]
단귀륭이 한 자 한 자 힘을 주어 말했다.
[그 대가로 네 녀석의 수명이 줄어들 것이다. 얼마가 될지는 본좌도 확답을 못하겠다만.]
수명이 줄어든다.
무서울 정도로 극심한 부작용이다. 그럼에도 하운천은 상관하지 않았다.
“부탁하오, 단 선생……. 도와…… 주시오.”
목소리에 힘이 없다.
겸연스러운 것이다. 이기적인 자신의 행동에.
항상 단귀륭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하던 자신이, 이런 상황이 되자 오히려 부탁을 한다.
졸장부.
자기밖에 모르는 옹졸한 사람을 일컫는 말. 지금 자신이 딱 그 꼴이다.
그러나 단귀륭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리고 또 하나. 네 녀석이 알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본좌의 무공은 마교의 무공이다. 시간이 없으니 간단히 말하겠다. 마교는 정파와 사이가 좋지 않다. 아니, 말 그대로 적(敵). 그리고 저 노친네들은 정파 무림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자들이지.]
급한 상황이기에 본론만을 설명했지만 하운천은 이해했다.
단귀륭이 그의 몸에 빙의하여 어쭙잖은 무공으로 홍야개를 상대한다는 것은 자살이나 다름없다.
본신무공을 드러내야 할 것이다.
그들의 눈엔 하운천이 마교의 무공을 익힌 마인으로 비춰질 테니, 결국은 척살대상.
하지만 단귀륭이 걱정하는 것은 그게 아니었다. 하운천도 마찬가지.
[네 녀석이 연모하는 저 계집, 이제는 보지 못할 것이다. 상관없겠느냐?]
그 질문에 그는 단귀륭의 예상대로 주저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이내 결심을 내린 듯,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상관…… 없소. 어차피, 그리 되었을 테니. 그 시일이 조금 앞당겨지는 것뿐이오.”
황궁과 무림.
같은 하늘 아래, 다른 세상.
선우초설은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겠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언젠간 그녀도 알게 될 사실이었다.
언뜻 무정하다 할 수 있을 하운천의 태도였으나, 유모이기에 당연한 것이다. 그에겐 어머니와도 같은 존재. 어째서 그녀가 무공을 익히고 있고 정파라 불리는 세력에게 죽임을 당해야 하는지 궁금했지만.
‘유모에게 직접 들을 것이다. 죽게 놔두지 않아. 나에게 말해 주지 못한 게 있잖아. 안 그래…… 유모?’
하운천이 결연한 표정으로 단귀륭과 눈을 맞췄다.
“부탁하오, 단 선생.”
[큭큭, 좋다.]
대답과 함께 그의 핏빛 눈이 번뜩였다.
스르르르.
“……!”
그의 형체가 허물어지며 순식간에 안개처럼, 구름처럼 흩어졌다. 구름과 같으나 흑빛을 띠며 안개와 같으나 탁하고 짙다.
그것은 어느새 나무를 타고 오르는 뱀처럼 하운천의 몸을 다리에서부터 허리를 지나 목 부근까지 휘어 감았다. 그리고 재차 허공으로 흩어진다.
아니 흩어진다 싶은 순간!
운무가 엄청난 속도로 하운천의 눈과 코로 빨려 들어갔다.
딱딱딱딱!
몸이 사시나무 떨 듯 벌벌 떨리자 이가 격하게 부딪쳤다.
쿵!
괴로움에 못 이겨 한쪽 무릎을 떨어뜨리곤 머리를 움켜잡고 몸부림친다.
“끄윽!”
억눌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 뒤이어…….
“끄아아악!”
오금이 저릴 정도로 괴기한 비명도 터져 나왔다.
그것을 끝으로, 방 안에는 다시 정적이 흘렀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미동도 없이 서 있기만 하던 하운천. 그가 천천히 머리를 들어 올렸다.
눈에서는 붉은 빛이 일순 반짝이다 사라졌다.
“후우, 나쁘지 않군.”
그는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고는 이내 상의를 부욱 하고 찢어 버린다.
으득, 으득!
양 엄지를 강하게 물어뜯자 흘러내리는 피. 꽤 아플 만한데도 표정엔 변함이 없다.
“백 년…… 만인가?”
감회가 새로운 듯, 그는 바닥을 적시는 피를 묵묵히 바라보다 수인을 맺으며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을 외웠다.
순식간에 사이한 기운으로 가득찬 방 안.
그가 어지럽게 움직이던 손을 멈춰, 천천히 몸에 갖다 댔다.
뼈만 앙상한 몸이 피로 새긴 문양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굴.
눈 밑에 一자를 쓰윽 긋자, 방 안 가득했던 기운이 서서히 그의 몸으로 흡수되며 얼굴과 온몸 가득한 문양이 시뻘건 빛을 내뿜었다. 그 모습이 실로 섬뜩했다.
잠시 뒤, 피로 새긴 문양들도 어느 샌가 몸 안으로 흡수되어, 혈련인을 펼치기 전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다.
혈련인(血連印).
피의 화장.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몸의 지니고 있는 생명의 기운, 선천지기를 태워 그 내력을 내공대신 단전에 불어넣는 마공.
혈련인으로 얻은 내력은 보통 심공으로 쌓은 내공보다 훨씬 강력하다. 삶을 포기하고 얻은 힘이기에.
하운천, 아니 단귀륭은 텅 비었던 하단전과 상단전이 순식간에 충만해짐을 느꼈다.
“큭큭큭.”
주체할 수 없는 힘.
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중단전이 열려 있지 않아 완벽한 극경의 경지는 아니다. 하지만…….
“한바탕 하기엔 충분하지.”
그가 내력을 끌어 올렸다.
드드드드.
방 안의 모든 것들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선반 위에 올려 있던 찻잔들과 항아리들이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와 함께 깨져 나갔다. 심지어는 건물 전체가 흔들리는 듯했다.
단귀륭이 눈을 빛내며 손을 뻗었다.
꽈꽈꽝!
그의 전면에 있던 것들은 벽이고 뭐고 할 것 없이 터져 나갔다. 그리고…… 이제는 환하게 내다보이는 바깥의 전경.
“뭐, 뭐냐!”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도와 각을 쓰는 무사들이 각자 기수식을 취하며 건물의 입구에 오연하게 서 있는 단귀륭을 바라봤다.
그 뒤에는 놀랍고도 당황스러운 눈빛을 머금은 선우정후와 홍야개, 그리고 견소소가 있었다.
“우, 운천아…….”
너무나도 미약한 목소리.
그러나 단귀륭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본다. 단귀륭의 표정이 천천히 굳어 갔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 피어오로는 분노의 감정.
자신이 느끼는 것이 아니다. 하운천의 몸이, 그리고 혼이 느끼는 것. 그것이 그대로 자신에게 전해져 왔다.
“기다려…… 유모.”
단귀륭이 말했다.
그러나 하운천의 목소리. 그를 대신해서 말해 주는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