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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귀 1권(12화)
5장 맹세(2)
담을 넘고 몇몇 건물을 뛰어넘어 제일 높은 누각에 오르자, 저 멀리 혈전이 벌어지고 있는 전장이 보인다.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노파.
그 옆에, 잠든 선우초설을 안고 있는 선우정후.
중앙엔 홍야개와 하운천이, 그리고 선우세가 일곱 무사들의 시체와 영천무하대의 시체까지.
“도대체 무슨 일이! 누가 있어 영천무하대까지 저 지경으로 만들어 놨단 말인가, 그것도 선우세가 내에서!”
뻔한 물음이다. 마기를 뿌리며 취황 홍야개와 호각을 이루고 있는 자.
“저자가 누구기에?”
답해 줄 수 있는 자는…….
휘릭, 턱!
남궁벽이 단숨에 선우정후의 뒤쪽으로 떨어져 내렸다.
“선황을 뵙소이다.”
“일검존(日劍尊)? 자네가 어찌 이곳에……?”
뜻밖이라는 표정의 선우정후.
남궁벽의 뒤로는 남궁수혁과 남궁세가의 무사들이 내려서며 선우정후에게 포권을 취하고 있었다.
“제갈 군사의 서찰을 받고 홍 장로에게 전언할 것이 있어 이리 찾아왔는데, 이 대체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
“그것이…….”
선우정후는 간략하게 그간의 상황을 남궁벽에게 설명해 주었다.
“그럼 저기 쓰러져 있는 노파가…… 유경연곡의 후예란 말씀이지요?”
“그렇다네.”
확답을 받은 그는 지체 없이 견소소에게 다가가 그녀의 내상을 살핀다.
“위험하긴 했지만. 후, 죽을 정도는 아니군.”
남궁벽이 손을 움직여 그녀의 혈도 중 몇 곳을 빠르게 짚자, 그녀는 ‘쿨럭’거리며 죽은피를 게워 내기 시작했다.
그 후 그녀를 점혈하는 남궁벽.
선우정후는 상황을 이해한 듯 그에게 묻는다.
“제갈 군사께선 그녀의 죽음을 원치 않으시는 게로군.”
“그렇습니다. 이자에게 알아낼 것이 있다고 하셨지요. 그보다…….”
쾅쾅, 콰―앙!
쉴 새 없이 귀를 멍하게 만드는 폭음.
사람들의 시선이 그 소리의 중심으로 옮겨졌다.
“저자……는?”
말을 하면서 흠칫 하는 남궁벽.
홍야개를 상대하고 있는 자가 예상외로 앳된 얼굴을 하고 있어서였다.
선우정후는 뭐라 답해 줄 말을 찾지 못했다.
“저토록 어린 나이에 저런 무력이라니! 거기다 마교의 무공이군요. 설마? 마교에서도 마령혈단을 노리고 있었다는 겁니까?”
“그렇게 추측은 하고 있다네.”
어느 정도는 들어맞는다.
저 아이가 사실은 마교의 인물이었고, 견소소에게 마령혈단을 얻어 복용했다면 지금의 모습을 얻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 보면 그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자신의 딸아이인 초설이가 저 아이를 처음 만났을 때가 약 이 년 전, 그때부터 자신도 저 아이를 봐 왔었다.
그리고 저 아이는 이 년 전의 모습보다 성장했다.
반로(返路)가 아닌 성장(成長).
‘마령혈단을 먹었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한참 상념에 잠겨 있는 그의 귓가로 남궁벽의 단호한 음성이 울려 퍼진다.
“어찌 됐건, 저자는 결국 죽을 몸입니다.”
“……그렇지.”
그의 대답을 끝으로 장내의 인물들은 다시금 경천동지할 싸움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개천타구봉법.
봉술의 주가 되는 엮고, 흩트리고, 찌르고, 부수는 공격이 전부를 이루는 개방의 봉법이다.
공방일체(攻防一體).
거기다, 홍야개의 타구봉은 보통 봉의 길이와는 다르게 사람의 한쪽 팔 길이와 엇비슷하다. 그만큼 공방의 변환이 빨라 단귀륭이 꽤 애를 먹고 있는 모습. 그리고 그것은 홍야개도 마찬가지였다.
스팟!
몸을 비틀어 패도적인 단귀륭의 권력을 피한 홍야개, 뒤로 서너 걸음 물러선다.
“어린놈이라고 생각했더니 만만치가 않구나.”
단귀륭이 맞받아쳤다.
“큭, 늙어 쭈그러진 노친네 주제에 만만치가 않군.”
“클클, 고얀 놈 같으니라고.”
히죽 웃어 보인 홍야개는 허리춤에서 덜렁거리는 호로병을 집어 들었다.
뽕!
경쾌한 소리와 함께 병마개가 열렸다. 홍야개는 망설이지 않고 그것을 단숨에 들이키기 시작했다.
혈전을 벌이던 와중에 술이라니?
하나, 단귀륭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그것이 당연하다는 모습이다.
취기(醉氣).
지금의 취황을 있게 해 준, 그에게는 신력(神力)이나 마찬가지다.
딸꾹!
“헛, 미친 건가?”
단귀륭의 헛웃음.
코까지 시뻘개져서 취객의 모습을 보이니 그럴 수밖에. 이제는 아예 좌우로 비틀거리며 서서히 다가오기까지 한다.
한 발짝, 두 발짝…… 일곱 발짝.
스윽.
여덟 번째 걸음을 마지막으로 홍야개의 모습이 장내에서 사라졌다. 기척을 놓쳐 당황하는 단귀륭.
“뭐, 뭣이…… 큭!”
퍼억!
단귀륭이 순간 자신의 후방에서 나타난 홍야개의 공격을 간신히 막아 냈다.
막아 낸 오른팔이 저릿한지 그것을 주물거리고 있을 때.
홍야개는 다시금 여덟 걸음을 밟아 가고 있었다.
취팔선보(取八仙步).
취황의 독문무공이었다.
스윽.
또다시 홍야개의 신형이 사라졌다 싶은 순간!
그는 이번엔 단귀륭의 아래쪽에서 나타나 타구봉을 빠르게 올려치고 있었다. 턱을 부숴 버릴 듯한 기세!
단귀륭이 고개를 뒤로 젖히자 봉의 끝이 턱 끝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이어 단귀륭이 뒤로 공중제비를 돌며 장력을 쏘아 냈다.
콰쾅!
타구봉을 휘둘러 막아 냈으나 충격에 뒤로 밀려 나가는 홍야개, 가볍게 착지한 단귀륭이 대지를 박차고 몸을 쏘았다.
여덟 걸음을 밟기 전에 제압하면 될 뿐.
그가 홍야개의 지척에서 천마각(天魔脚)을 휘둘렀다.
쐐―엑!
공기마저 끊어 내는 단귀륭의 다리!
그러나 허공만 가를 뿐이다. 연신 아홉 번을 휘둘렀으나, 홍야개는 비틀거리면서도 마치 바람결에 휘날리는 나뭇잎처럼 그의 공격을 피해 냈다.
그리고 다시 여덟 걸음.
스윽.
모습을 감춘 홍야개가 이번엔 허공에서 떨어져 내리며 타구봉을 양손으로 내리찍었다.
단귀륭이 재빨리 뒤로 몸을 날리며 피해 내자.
꽈앙!
빗나간 공격이 애꿎은 바닥에 깊은 구덩이를 만들어 냈다. 사방으로 돌 파편이 휘날렸다.
굽혀져 있던 몸을 일으키는 홍야개.
“싸움이 길어지는 것 같으니, 이만 끝내야겠네.”
말과 함께, 그에게서 털을 곤두세우는 살기가 피어올랐다. 사방으로 퍼져 나가 뱀처럼 옭아맨다.
구오오오―
홍야개의 내력이 중단전에서부터 대주천을 하자, 대지가 그의 반응하듯 심하게 진동했다.
동시에 머리 위로 천천히 들려지는 타구봉.
푸른 기운이 맺힌다.
기운이 점점 커지니, 이내 타구봉은 그 기운을 분출하고 싶어 온몸을 떨어 댔고, 홍야개는 그에 응하여 그것을 빠르게 내리그었다.
콰과과과!
노도처럼 전방을 쓸어 가는 경력(競力)!
개천타구봉법의 취일만지(取日滿地)!
경력의 해일은 대지를 휩쓸고 단귀륭마저 삼켜 버렸다.
사방으로 돌풍을 일으키며 폭발한 힘, 그리고 그 충격파에 싸움을 지켜보던 이들은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곧 울려 퍼지는, 하늘을 찢어발길 듯한 폭음.
“후우, 후우.”
극강의 초식.
그만큼 몸에 부담이 온 것인지, 홍야개는 깊이 심호흡을 해 신체를 안정시켰다.
죽었으리라.
강한 아이였다. 하나, 이 초식을 버텨 낼 재간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홍야개는 타구봉을 거둬들였다.
그러나 틀렸다.
그 잘못된 생각이 방심을 만들었다.
쏴아아아!
자욱이 피어오른 흙먼지 사이에서 수십 줄기의 지력(指力)이 쏟아져 나왔다.
퍼퍼퍼퍽!
“커컥!”
전신을 얻어맞은 홍야개.
순간,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그의 몸이 떨렸다. 일그러진 표정이 그 충격을 대신 말해 줄 뿐이었다.
“영감, 끝내는 건 당신이 아니야. 본좌지.”
서서히 가라앉는 먼지 사이로 단귀륭이 터벅터벅 걸어 나온다.
입가에 가느다랗게 흐르는 선혈. 묶어 올렸던 머리는 풀어헤쳐진 채, 옷 이곳저곳이 찢겨져 있다.
하지만 그뿐.
휘청거리는 홍야개를 바라보며, 단귀륭은 양팔을 뻗었다.
흑우여로장(黑雨旅路掌)!
불길할 정도의 묵빛 장력들이 유성우처럼 쏟아져 내렸다.
꽈과과광!
사방이 한순간에 쑥대밭으로 변했다.
그리고 그 중심.
어느새 움직였는지, 단귀륭의 손아귀에 홍야개의 목줄기가 틀어 잡혀 있었다. 그의 팔에 핏대가 서며 홍야개의 몸이 서서히 허공으로 떠올랐다.
“크, 크윽…… 컥!”
숨이 턱 막혀 아등바등 거리는 홍야개다.
그 모습이 실로 처참했다.
봉두난발(蓬頭亂髮). 걸레조각처럼 찢겨진 옷, 그 틈새로 보이는 무수한 상처들.
순식간에 상황이 역전(逆轉)됐다.
“그만 죽으라구, 영감. 당신 말고도 상대해야 할 놈들이 많은 것 같으니.”
알고 있었음인가, 남궁세가 인물들의 존재.
단귀륭이 왼손을 들어 올려 수도(手刀)를 취했다.
그대로 틀어박으려는 심산이었다. 그때!
번쩍!
한 줄기 섬광이 목덜미를 쥐고 있는 단귀륭의 오른팔을 베어 왔다.
촤악!
하는 수 없이 손을 거둔 단귀륭, 그예 홍야개가 털썩 하고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만. 두고 볼 수만은 없으니 노부가 상대하겠다.”
서슬 푸른 검을 겨누는 남궁벽.
심상치 않은 기도다.
취황 홍야개와 맞먹는, 아니 어쩌면 그 이상.
단귀륭은 그를 노려보다 그의 뒤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기혈이 다소 안정되어 있는 견소소, 그런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남궁수혁과 무사들.
‘죽이지 않는다? 무슨 꿍꿍이인가?’
머릴 굴렸으나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시간은 벌었다.
천천히 여기 있는 놈들을 전부 죽이고 저 노파를 데려가기만 하면 되니. 하지만 세상사 뜻대로 되지 않는 일도 있음인지.
“큭?!”
단귀륭이 가슴팍을 움켜쥐었다.
갑작스레 찾아온 격통(激痛).
가슴뿐만이 아니다. 전신이 칼날에 에이는 느낌.
그리고 남궁벽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스팟!
단귀륭의 왼쪽 어깨가 쩍 하고 갈라져, 큼지막한 상처가 생겼다. 시뻘건 핏물이 허공을 한가득 수놓았다.
연이어 이어지는 남궁벽의 공격. 마치 하늘을 노니는 한 마리의 용과 같이 부드러우면서도 강맹한 검놀림.
남궁세가의 진룡무궁검법(眞龍舞穹劍法)이었다.
단귀륭은 극심한 통증을 억누르며 천마제운보(天魔濟雲步)를 펼쳤다. 남궁벽의 검기(劍氣)가 단귀륭을 반으로 갈랐다.
스르륵.
그러나 잔상이었음인가.
남궁벽은 알고 있었다는 듯 재차 검을 휘둘렀다. 그의 검에서 검기가 흩뿌려져 나와, 단귀륭의 전신을 베어 갔다.
극경의 경지에 든 자만이 펼칠 수 있다는 검기. 남궁벽이 자신의 무력을 뽐내는 듯, 검기는 쉴 새 없이 터져 나왔다.
처음에는 단귀륭의 잔상만을 베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상처를 입히는 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상처는 깊지 않다.
하나, 적진성산(積塵成山)이라. 작은 상처가 모이니 큰 상처 못지않다.
단귀륭의 몸에는 마치 금이라도 간 듯, 수십 개의 검상이 새겨져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반격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럴 여유가 없는 듯, 지치고 괴로운 기색이 역력한 그의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온몸이 무겁다. 땀은 비 오듯 흐르고, 거기다 숨 쉬는 것마저도 힘들 정도의 고통.
부작용(副作用).
단지 혈련인의 부작용만은 아니다. 불완전하고 금이 간 항아리에 장강을 담으려 하니 자연 깨질 수밖에.
하운천의 몸이 버틸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본좌의 실수다. 조금은 더 버텨 낼 줄 알았건만…….’
이러다간, 빙의상태 마저 깨어져 버릴지도…….
그 와중에도 남궁벽의 검은 멈출 줄을 몰랐다.
촤악!
서늘한 검이 머리맡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니, 도중에 검로가 바뀌어 수직으로 내리긋는다.
파악!
아슬아슬하게 피해 낸 단귀륭.
그는 무언가 결심한 듯, 붉은 안광을 폭사해 내며 뒤로 물러나 기수식을 취했다.
권(拳)의 자세.
내력을 집중하니 곧 폭발하기 직전 화산의 모습이다.
위험을 감지한 남궁벽이 달려들려 했으나, 이미 단귀륭은 팔을 뻗고 있었다.
쿠오오오!
집채만 한 크기의 주먹 형상을 띈 권기(拳氣)가 남궁벽의 전면으로 쏘아졌다.
저것에 맞는다면 몸이 형체도 남기지 못하고 짓이겨질 터.
우우웅!
남궁벽이 내력을 끌어 올리자 검이 짙은 검명을 토해 냈다.
덧씌워지는 검기. 검을 들어 올리고, 이어 내려 벤다.
간단한 동작이었음에도 그 안에 담긴 경력은 능히 산을 가르리라.
촤아아악, 콰앙!
권기가 반으로 잘렸다.
무산된 공격.
남궁벽은 그 너머로 단귀륭을 쫓았으나 그는 더 이상 그곳에 없었다.
고개를 돌리니, 견소소를 둘러싸고 있는 자신의 아들과 남궁세가 무사들에게로 짓쳐 들어가고 있는 게 아닌가!
그는 놀란 기색이 역력하나 이내 검을 집어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