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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귀 1권(13화)
5장 맹세(3)
자식을 향한 믿음인가.
그의 보답하듯 남궁수혁의 무위는 실로 놀라웠다.
“죽기 싫다면 전부 비켜라!”
몸을 쏘아 내며 소리치는 단귀륭. 움찔하는 남궁수혁과 무사들이었으나 굳건히도 자리를 지킨다.
단귀륭이 원하는 것은 견소소일 터.
그는 손을 휘둘러 장력을 내뿜었다.
남궁수혁을 비롯해 세 명의 무사들에게 쇄도해 가는 장력들!
콰콰콰쾅!
무사들은 막아 내는 것조차 버거워 보였으나, 남궁수혁은 달랐다. 검면으로 장력을 흘려내며 반격의 자세를 취한다.
분명 단귀륭은 호랑이다. 그러나 지금은 상처 입은 맹수일 뿐.
평범한 초식 위주의 공격보단 강력한 초식 하나가 효과적일 것이다.
남궁수혁의 검이 진한 떨림과 함께 ‘우웅’하고 울어 댔다.
동시에 피어오르는 푸르스레한 기운.
검기(劍氣)!
불완전하나, 그 기세가 만만치 않다.
그의 검이 이제는 눈앞에 다다른 단귀륭의 전신을 훑었다.
“큭!”
핏물이 튀며 뒤로 튕겨져 나가는 단귀륭.
“허억, 허억.”
그는 깊은 숨을 토해 내나 포기하지 않고 재차 신형을 날렸다.
그때, 단귀륭을 가로막는 세 명의 무사들.
이제 남궁벽과 남궁수혁은 나서도 되지 않을 거라 판단했는지. 단귀륭은 무시당한 기분에 끌어 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하지만.
번쩍! 촤악!
연신 검날에 의한 섬광이 비출 때마다 늘어나는 상처들이다.
그사이 몸 상태가 더 나빠졌는지, 단귀륭의 움직임은 전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이익! 방해하지 말란 말이다!!”
순간 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상처 입은 맹수는 사나워지는 법.
다 죽었다 생각했던 그가, 돌연 엄청난 힘을 발휘했다.
쐐에엑!
시뻘건 기운을 머금은 단귀륭의 수도!
꽈직!
검을 휘두르던 무사의 머리를 그대로 뭉그러뜨려 버렸다.
흘러내리는 피와 뇌수들.
단귀륭은 손에 묻은 그것들을 털어 내고는 재차 몸을 날렸다.
화살같이 일직선으로 찔러 오는 검!
쨍강!
단귀륭이 손을 휘두르자 반 토막이나 저만치 날아가 버린다. 검을 휘두른 무사가 당황했다.
콰득!
그의 머리가 그대로 단귀륭의 손아귀에 틀어 잡히더니, 이내 수박 깨지듯 터져 버렸다.
남은 무사는 한 명.
단귀륭은 빠르게 튀어 올라 천마각을 휘둘렀다.
쩌엉!
그러나 가로막혔다.
어느새 나타나 검을 들어 올린 남궁수혁, 단귀륭의 눈에 분노의 감정이 일렁거렸다.
“큭, 젖비린내 나는 애송이 주제에!”
귀신의 상태였다 할지라도, 자신이 살아왔던 삶을 합치면 거의 이백여 년을 이승에서 지내온 단귀륭이다.
하지만 지금은 하운천의 몸. 남궁수혁으로서도 기가 찰 노릇이다.
“마인은 마인인가? 웃어른을 공경하는, 인의(仁義) 모르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의 눈에 하운천은 이제 막 자라나는 청년의 모습일 뿐이었다. 그리고 죽여야 할 마도의 피.
남궁수혁에게서 살기 어린 기세가 피어올랐다.
검이 움직인다.
올려 베기의 기수식인 하단세.
승천하는 용의 기세니, 곧 진룡무궁검법의 창룡착운(蒼龍鑿雲)!
촤아아악!
예기를 발하는 검날이 단귀륭의 가슴팍을 베었다.
올려쳤던 검을 돌려 쥐는 남궁수혁.
용의 뇌력이 내리꽂히니, 곧 창룡발뇌(蒼龍發雷)!
푸화아악!
같은 곳을 또다시 베어 가는 그의 검초.
단귀륭의 상처에서 피 분수가 솟아올랐다.
쿵.
한쪽 무릎이 접혔다. 하나 쓰러지지 않는다.
‘애송이의 부탁…….’
견소소를 데려가야 한다. 단귀륭은 흐릿해지는 정신을 일깨우며 그녀에게 몸을 날렸다.
퍼억, 쾅!
싸우는 도중 등을 보였으니 무방비의 상태. 남궁수혁의 장력이 그대로 등짝에 틀어박혔다. 거의 이 장여를 날아가 처박히는 단귀륭.
남궁수혁의 곁으로 남궁벽과 함께 잠깐 동안의 운기로 내상을 다스린 홍야개가 다가왔다.
“이거, 남궁세가가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구나. 노부가 면목이 없으이.”
“그런 말씀 마십시오.”
남궁벽이 공손하게 말했다.
홍야개가 견소소를 바라본다.
“그래, 군사께서 저 요물이 죽길 바라지 않는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그래도, 저 아이는 죽여야겠네.”
홍야개의 시선 끝에 걸린 건 단귀륭, 아니 하운천의 모습이다.
가공할 무력이었다. 그런데 아직 어리다.
마령혈단으로 인한 반로일수도 있으나, 그것이 아니라면…….
“위험한 아이일세. 이토록 강한 무력과 마기를 지닌 채 앞으로 더욱더 성장하게 된다면…….”
“그럴 일은 없을 것입니다.”
단호하게 입을 여는 남궁벽, 그의 검날이 요란히도 번뜩였다.
쓰러진 단귀륭에게 다가가려는 그. 그런 그를 남궁수혁이 가로막았다.
“소자가 끝내겠습니다.”
마인(魔人)이나 아직은 어린아이.
아버지의 검의 피를 묻히는 것보단 자신이 대신하는 것이 옳다 생각했는지.
남궁벽도 고개를 끄덕인다.
저벅저벅.
무심한 눈길을 쓱 한 번 주고는 검을 들어 올리는 남궁수혁.
달빛이 검신을 타고 흘러내렸다.
번쩍!
“…….”
조용했다.
한순간 세상이 멈춰 버린 것처럼 조용했다.
본래 사람이란, 말도 안 되는 일이 갑자기 일어나면 얼어붙고 마는 것일까.
홀연히 나타난 한 사람.
장내에 그 누구도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는 그렇게 단귀륭의 목을 자르려던 남궁수혁의 검날을 맨손으로 잡아들고 있었다.
“하늘 아래 인의(仁義)가…… 언제부터 사람을 따지고 가렸는가? 그것인 진정한 인의인가? 군자(君子)는 주이불비(周而不比)하나 소인(小人)은 비이불주(比而不周)인 것을.”
굵직하고 또렷한 음성.
학사의를 입은 중년인은 태산 같은 기도를 품고 있었다.
그는 순식간에 장내의 인물들을 도리도 모르고 도량이 좁으며 간사한 소인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가 손에 힘을 풀자, 남궁벽은 저도 모르게 힘이 풀려 주르륵 뒤로 밀려났다.
번뜩 정신을 차리는 홍야개, 경계 어린 눈빛으로 한 발짝 나선다.
“가르침은, 고맙군. 하나 보아하니 황궁의 인물. 이것은 무림의 일이니 간섭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구려.”
그가 일침을 놓았음에도…… 중년인은 물러서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앞으로 나서니. 홍야개가 기세를 피어올리고, 남궁벽이 검집에 손을 가져간다.
이어지는 중년인의 말.
“그러려 했으나 이 아이는 본디 내 제자요. 물러설 수는 없음이니.”
“그러려 했다라. 그럼 지금까지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뜻인가? 그럼 잘 알 텐데도 그런 소릴 하는가!”
홍야개의 일갈에 고개를 돌려 하운천을 바라보는 그의 스승 윤괴춘이었다.
“운천이와 운천이의 유모가 무림인인들, 그리고 마인인들, 나의 제자인 것은 변함이 없소.”
어느새 다시 홍야개를 바라보고 있는 그.
“거기다 제자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가만히 있을 스승이 되어서는 아니 되지 않겠소?”
“그 과정에 있어, 서로간의 충돌이 불가피하다고 할 텐데도 말인가?”
대답은 없다. 묵언의 긍정.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아직은 지친 기색의 홍야개 대신, 남궁벽이 앞으로 나서며 검을 뽑아 들었다.
스르릉!
명검인 듯, 영롱한 소리를 흘린다. 남궁벽 또한 하나의 검이 되어 날카로우면서도 서늘한 기도를 발산한다.
그를 바라보며 양 소매를 걷어 올리는 윤괴춘, 분명 그는 주변을 압도하는 기세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의 기운이 허공에서 부딪치니 사방으로 바람이 일었다.
그때.
―아니…… 됩니다…….
갑자기 귓전을 때리는 한줄기의 전음(傳音).
여인의 목소리다. 장내에 있는 여인은 단 한 사람.
윤괴춘은 대답 없이 견소소를 바라봤다. 조금 멀리서, 초점이 없는 희미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
―운천이의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부디, 운천이를 잘 부탁드립니다.
윤괴춘의 눈이 놀람으로 약간 커졌다.
―지금 무슨 소릴…….
―윤 노사님…….
간곡한 음성과 간절한 눈빛.
자신보다 자식의 안위를 걱정하는 어미의 얼굴이 저러할까.
윤괴춘은 망설이고 있었다.
견소소의 말대로 그녀를 이곳에 홀로 두고 하운천만을 데리고 떠나는 것은 도리가 아니나, 이미 마음이 그녀에게 굴복하고 있었다.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참이지?”
약간 굳은 음성의 남궁벽.
윤괴춘은 그 특유의 웅혼한 눈빛으로 다시금 남궁벽과 시선을 맞췄다. 그러면서 스윽 소매를 내린다.
“이 아이는 데려가겠소.”
윤괴춘은 덤덤하게 한 손으로 하운천을 들어 올리려 했다.
“노부를…… 능멸하는 건가? 무인들에게는 무인들만의 세계와 율법이 있다네. 검을 뽑아 든 상대를 앞에 두고…….”
“무인들의 방식이라.”
윤괴춘이 남궁벽의 말을 가로챘다.
“이 아이를 데려가, 다시는 강호로 내보내지 않겠다는 맹세로, 내 오른팔을 걸겠소.”
“무슨…….”
으득으득, 쩌적, 푸화악!
뼈가 부러지고 살점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붉은 피보라가 일었다.
툭.
뜯겨져 나가 땅바닥으로 처박히는 팔.
뚝, 뚝.
흘러내리는 피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윤괴춘은 남은 왼쪽 팔로 하운천을 안아 들었다.
마지막으로 그의 시선이 견소소에게 꽂히자 그녀는 애절하고도 처연한 눈물과 함께 살며시 눈을 감는다.
‘고맙습니다, 윤 노사.’
6장 과거(1)
비가 내려 질퍽질퍽한 땅 위로 한 여인이 걷고 있었다.
안개 낀 산등성이.
여인은 겁도 없는지 으스스한 그곳을 홀로 올랐다. 당연했음인가.
“소곡주님, 오셨습니까.”
“소곡주님, 오셨습니까.”
여인이 ‘유경연곡’이란 현판을 걸어 세운 정문에 당도하자, 두 무사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맞이했다.
무사들 또한 여인의 몸. 그러나 자연히 피어오르는 기세가 사내 못지않다.
“어머니…… 아니, 곡주님은 오셨지?”
“예, 반 시진 전부터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래, 가자꾸나.”
무언가 망설이는 듯한 기색을 보이는 여인이다.
일다경쯤을 걸어, 유경연곡 제일 깊숙이 자리한 온월전(溫팟殿)의 입구에 도착하자, 무사들이 돌계단을 올라 문 앞에 섰다.
“소곡주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곧바로 들려오는 화답.
“들어오거라.”
무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문을 열자, 여인은 망설임 없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어둑어둑한 내부, 단지 중앙의 길을 따라 놓인 양옆의 촛불들만이 빛을 발할 뿐이다.
그리고 그 끝, 수려하나 곳곳에 요염한 기운을 품고 있는 여인이 홀로 앉아 있었다.
유경연곡의 곡주, 견월.
“이제 왔구나.”
“예, 어머니.”
여인이 견월을 어머니라 부르는 모습은 무척 낯설게 느껴졌다. 두 모녀의 모습에서, 나이 차가 그리 나지 않음을 볼 수 있었기 때문.
견월은 지그시 여인을 바라보다 시선을 아래로 옮겼다.
그녀의 봉긋한 배.
“이제 곧 태어날 아이, 무어라 하시더냐?”
“그것이…….”
“여아라 하셨을 것이야. 그렇지 않느냐, 소소야? 손녀일 것이 틀림없다. 장차 유경연곡을 이끌어 나갈 나의 손녀 말이다.”
이것이었던가, 망설임의 근원이.
기대감이 어린 견월의 눈빛.
여인은 그런 그녀의 기대를, 희망을 저버릴 수 없었다.
“그랬…… 어요, 어머니. 분명 그렇다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