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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귀 1권(14화)
6장 과거(2)


짹짹.
언제 비가 왔냐는 듯, 청아하게 울려 퍼지는 새소리와 화창한 하늘.
그와 반대로 여인의 마음은 착잡했으니, 한숨이 절로 나오는 건 당연지사였다.
“후우, 어쩌면 좋단 말인가?”
그녀는 자신의 배를 쓰다듬었다.
두근거림과 설렘으로 태어나길 기다려온 자신의 아이는, 이제 곧 세상 밖으로 나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문제는 태아가 남아라는 점.
유경연곡의 여인들은 이 년의 한 번씩, 곡 내에서 이십 명의 여인들을 선발해 아이를 잉태(孕胎)하게 한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여아들은 유경연곡의 무인으로, 남아들은 소모품으로 사용된 자신의 아비들과 함께 버려진다.
버려진다는 것은 곧 죽음.
“어미는 널 죽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결연한 표정을 짓는 여인, 곧 품속에서 섬뜩한 은색 빛깔 비도를 꺼내 든다. 예기를 발하는 칼날은 망설임 없이 그녀의 배에 틀어박혔다.
푸욱.
“아―악!!”
외마디 신음과 함께 핏물은 그녀와 땅을 축축하게 적셔 놓았다.
시간은 흘러, 이십여 일 뒤.
만삭이 된 배를 지닌 이십 명의 여인들이 후아전(逅兒殿)으로 옮겨졌다.
그곳에서 아기가 태어날 때까지 다른 여인들의 수발을 받으며 지내게 될 것이다.
한데, 후아전의 스무 개의 침실 중 한 곳이 비어 있었다.
“소소는, 소소는 왜 안 보이는 것이냐?”
곡주, 견월은 의아함을 느끼며 후아전을 지키는 무사들에게 물었다.
“곡, 곡주님. 그것이…….”
이어지는 충격적인 소식.
“유산(流産)이라니! 유산이라니!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견월은 거의 발광의 가까운 울분을 토해 냈다.
자신의 손녀가, 태어나기도 전에, 빛을 발하기도 전에 죽었단 말인가!
“의원이 말하길, 소곡주의 몸 전체에 기혈이 불안정했었으며, 자궁이 맑지 않고 탁하여 태아가 이미 죽어…… 있었다고 합니다.”
“이, 이……. 어떻게 그럴 수가…… 어떻게…….”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의 충격이었는지, 견월은 비틀거리며 후아전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멀리서 바라보고 있는 여인, 견소소였다.
품속에는 곤히 잠들어 있는 아기를 안고 있다. 어딘가 모르게 말라 보이는 아기다.
“죄송해요, 어머니…….”
한참을 더 그렇게 서 있는 여인에게 그녀의 뒤쪽에 서 있던 시녀가 이 이상은 안 된다는 듯 말했다.
“소곡주님, 몸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소곡주님뿐만 아니라, 아이의 몸도 말이지요. 달이 차기 전에 배를 갈라 꺼낸 아입니다.”
“그래, 그래야지. 이 아이, 우리 운천이는…… 괜찮을까?”
“…….”
“알아, 후천적으로 닫혔어야 할 아이의 상단전이 닫히지 못했어. 하지만, 내 아이…… 죽게 놔두지 않아.”
자신의 어머니를 속이고, 아기 대신 절망감을 안겨 드리면서까지 살린 아이다.
“소곡주님 설마…….”
“아니,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다. 난 여길 떠나지 않아. 아기는 또 낳을 수 있으니까. 유경연곡의 대를 이어 갈 아이 말이야.”
유경연곡, 그 또한 자신의 소중한 보금자리였다.
하지만…….
“천의(天意)를 따르지 않고 역행(逆行)의 길을 걷는 요물들은, 오늘부로 세상에서 지워질 것이다. 그들의 피로! 무림의 정기를 바로잡을 것이다!!”
천둥치듯 울려 퍼지는 고함 소리.
검과 도 그리고 창으로 이루어진 숲이 한순간 일렁거렸다.
수백 명의 초절정급 무인.
그들을 이끄는 자는, 검황 모용단휘와 취황 홍야개.
마치 거짓말처럼, 수십 년간 절강성 항주의 패자로 군림하던 유경연곡은 그렇게 단 한 시진 만에 세상에서 지워져 버렸다.

***

“스, 스승님…… 그 이야기 정말…….”
“그래. 전부, 사실이다. 죽을 위기에 처한 네 어머니와 아기였던 널 발견한 건 정말 천운이었다.”
침상에 반쯤 몸을 뉘인 채로 앉아 있는 하운천과 그런 그를 바라보고 있는 윤괴춘.
“그, 그럴 리가……. 스승님, 그럴 리가 없습니다. 어떻게 유모가……. 제가 제 어머니를 곁에 두고도…….”
다물어지지 않는 하운천의 입과 펴질 줄 모르는 그의 두 주먹, 윤괴춘은 그런 그를 남겨 두고 뒤돌아섰다.
“오늘은 그만 쉬거라. 약효가 완전히 흡수될 때까진, 안정을 취해야 하니까 말이다.”
그리 말하며 방을 나선다.
탁.
하운천은 닫힌 방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머니.
어머니라고 한다. 이 세상 속에 자신을 들여 넣어 주신 어머니라고 한다. 당신보다 자신을 더 생각하시던 그녀가, 어머니라고 한다.
그런 그녀와 십오 년을 함께 지내 오면서 어머니라고, 그 이름 단 한 번도 불러 드리지 못했다.
사람의 행위 가운데 효보다 큰 것이 없을진대, 자신은 여태껏 작은 것에 매달려 큰 것을 행하지 못했다.
세상을 보는 눈, 말을 하는 입 그리고 이 몸뚱이 모두 어머니에게서 받은 것인데, 눈은 그녀의 참모습을 보지 못했고 입은 그녀의 참모습을 불러 드리지 못했으며 몸은, 그녀를 지켜드리지 못했다.
하운천은 지금이라도 유모, 아니 자신의 어머니가 방문을 열고 들어오실 것만 같았다.
구부정한 허리를 두들기며 주름진 손으로 자신을 어루만져 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방문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었다.
울컥.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격한 감정. 목구멍에 걸렸으나, 이내 힘겹게 비집고 나온다.
“끅, 끄윽! 컥!”
눈물이 흘렀다.
한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막으려 손바닥으로 두 눈을 틀어막았다. 그럼에도 눈물이 흘렀다.
십오 년간, 아들에게 어머니 대신 유모라는 소리를 들으며, 그러면서도 아프진 않은지 배는 고프지 않은지 챙겨 주셨다.
얼마나 가슴이 찢어지고 괴로우셨을까 생각하니 절로 눈물이 흘렀다.
그렇게 한참이 지났을 때.
[면목이 없구나. 미안하다, 애송아.]
다소 힘이 없어 보이는 단귀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구할 수 있었다. 애초에 홍야개를 상대하지 않았더라면, 그를 피해 견소소를 구해 내고 선우세가를 떠났더라면, 추격은 있었을지언정 충분히 가능했었을 것이다.
자신의 호기(豪氣)가 일을 그르쳤다.
하운천은 올렸던 손바닥으로 얼굴을 스윽 하고 쓸어 냈다. 그리고 입을 연다.
“고맙소, 단 선생. 정말…… 고맙소.”
뜻밖의 말.
단귀륭이 눈을 크게 뜨며 하운천을 바라봤다.
“단 선생의 그 무공이란 것, 정말 강했소. 내가 약했을 뿐이오. 애초에 단 선생의 말대로 내가 그 무공을 배웠다면, 이 허약했던 몸을 조금이라도 단련시켜 놨더라면…….”
말을 멈추고 주먹을 꽈악 움켜쥐는 하운천, 가슴 깊이 밀려오는 것은 자괴감이리라.
[네놈, 설마 정신이 깨어 있었던 것이냐?]
“…….”
[그럼…….]
단귀륭은 무어라 말을 하려 했으나, 이내 고개를 젓는다.
[……쉬어라.]
안개처럼 흩어지며 사라지는 단귀륭.
홀로 남은 하운천은 그가 있던 자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저 멍하니, 그렇게 바라보고 있을 뿐.
끼익.
그때 방문이 열리며 한 노파가 들어온다. 하운천이 고개를 돌리니, 견소소가 그곳에 서 있었다.
“유, 유모!”
하운천이 놀라서 외치자, 그녀의 표정이 언뜻 우울해지는 것처럼 보였다.
“아, 아니 그게…….”
침상에서 일어나는 하운천, 이내 멈칫한다.
어느새, 열렸던 방문은 닫혀 있었고 방 안에는 자신 홀로 서 있는 게 아닌가.
그는 힘없이 털썩 주저 않아 버린다. 가슴이 점점 아려왔다.
무의식적으로 올라가는 오른팔은 답답한 가슴팍을 쓸어내리려 했으나, 문뜩 무언가가 손에 잡혔다.
품속에서 나온 것은.
‘이 책은…….’
검은 종이의 책이다.
하운천은 무언가에 홀린 듯 책을 펼쳤다.

천마대력신공.

순간, 하운천의 눈동자가 심하게 요동쳤다. 그는 손으로 그 글자를 쓰윽 훑었다.
“어머니…….”
한참 동안 책을 들여다보던 하운천은 이내 무언가 결심한 듯 결연한 표정을 짓더니, 책을 접고 다시 품속으로 갈무리한다.
“죽지 마세요.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다음 날 아침.
하운천의 상세를 살피기 위해 윤괴춘이 방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떠날 채비를 하고 있는 하운천을 발견한다.
윤괴춘의 표정이 굳었다.
“어딜 가려는 것이냐?”
“가야 합니다.”
“그러니까, 어딜 가려는 것인지 묻고 있지 않느냐.”
채비를 마친 하운천은 몸을 돌려 윤괴춘을 바라봤다.
“무림, 그곳으로 가려 합니다.”
“불가(不可)하다. 네 어머니께서도 그것을 원치 않으셨다.”
“상관없습니다.”
그의 대답에 윤괴춘의 눈에 노기가 피어올랐다.
“운천아! 네 어머니가, 자신의 문파를 그리고 자신의 가족 같은 사람들을 뒤로 하고 도망친 것도 다! 너를 살리기 위해서였다. 지금 그 뜻을 거스르려 하는 것이냐?”
하운천은 물러서지 않았다.
“제가 무림으로 가려 하는 것도,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네가 어찌하여 무공을, 그것도 마교의 무공을 익혔는지, 난 알지 못한다. 하나, 보낼 수 없다. 죽을 것이 뻔한 곳에 너를 보낼 수는 없음이야. 네 어머니도 그걸 원하셨고, 그래서 너 혼자만을 데리고 온 것이다.”
어머니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아랫입술을 꾸욱 깨무는 하운천이다. 그는 앞으로 걸어 나가 윤괴춘을 지나쳤다.
“전 죽지 않습니다.”
“억지 부리지 말거라.
“억지가 아니라, 제 의지입니다.”
윤괴춘은 그의 의지가 확고함을 느꼈다지만 방을 나서려는 하운천의 오른팔을 잡아챘다.
“운천아.”
하운천이 몸을 돌려 그를 바라봤다. 그 후 허리를 숙여 예를 올린다.
“스승님의 은혜(恩惠), 정말 감사드립니다. 하나, 이 못난 제자 그 은혜조차 다 갚지 못하고 떠나려 하니 부디 용서해 주…….”
하운천이 움찔했다.
지금 보았다. 스승의 오른팔.
“스승님 대, 대체…….”
정신이 없어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눈시울이 붉어지고 가슴이 욱신거리며 불에 덴 듯 뜨거워졌다.
윤괴춘은 애써 숨기려 하지 않았다.
“무림이란 비정한 곳이다. 무인들은 언제든지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당연하다는 듯 생각하는 사람들이지. 사람이건 돈이건 신념이건 자신에게 중요한 것을 지키거나 빼앗기 위해서라면 말이다.”
툭.
윤괴춘의 왼팔이 하운천의 머리 위로 올려졌다.
“사숙위대(事孰爲大) 사친위대(事親爲大)라. 섬기는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부모를 섬기는 것이다. 더 이상…… 막을 수는 없겠지.”
그가 올렸던 왼팔을 스윽 하고 내렸다.
“그들에게 맹세를 했었다.”
그들. 홍야개와 남궁세가 그리고 선우세가의 노인들을 말함이라.
“널 다시는 강호로 보내지 않겠다고, 그에 내 오른팔을 걸었지.”
하운천의 눈물 고인 눈이 조금씩 커졌다.
“그리고 이렇게 잘려 있다. 아니, 내가 직접 잘랐어. 운천이, 넌 분명 강호로 갈 것이라 생각했다.”
“스승님…….”
“가거라, 운천아. 어디를 가든지 마음을 다해 가거라. 그리고…… 죽지 말거라.”
고인 물 넘쳐흐르듯, 하운천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운천은 애써 고개를 푹 숙였고, 윤괴춘은 그를 잠시간 바라보다 밖으로 나갔다.
사부일체(師父一體).
사부와 아버지는 하나이니, 그에게 아버지는 윤괴춘이라 해도 다름이 없었다.
하운천은 윤괴춘이 나간 자리로 삼배지례를 올렸다.
“스승님은, 저에게…… 아버지 같은 분이셨습니다. 스승님의 크나큰 은혜,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절대, 절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