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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귀 1권(15화)
6장 과거(3)
따스하면서도 상쾌한, 그런 봄바람이 불고 있었다.
살랑대는 바람의 인도를 받는 듯, 하운천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흥, 참 눈물겨운 사제지간이로군.]
어느새 나타나 투덜거리는 단귀륭.
하운천이 묵묵부답이니, 그는 혼자서 떠들어 댄다.
[그 노친네도 참 멍청하지. 그만한 무력이 있었으면서 오른팔을 내줘? 허, 참나.]
뭐가 불만인지.
한참 입을 놀리던 그도, 홀로 말하기에는 지쳤는지, 하운천이 가는 길을 뒤따르기만 했다.
이윽고 도착한 곳은 하운천이 머물던 초가.
그는 그곳에서 여분의 문복 한 벌과 자신의 은자들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이번엔 부엌으로 들어가 종종 즐겨먹던 육포까지 한가득 챙기니 단귀륭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짓는다.
[애송아, 지금 뭐하는 짓이냐?]
“산에 오를 준비를 하는 것이오.”
[산? 산에는 왜?]
“무공수련.”
당연한 걸 왜 물어보냐는 표정이다.
하운천은 미간을 좁혔다. 무엇이 필요하며 무엇을 사야 하는지 고민하는 중. 그러나 단귀륭의 비웃음에, 좁혔던 미간에 주름이 생긴다.
[풉.]
“……?”
[풉, 푸하하하! 애송이, 어디서 주워들은 건 참 많구나, 큭큭큭.]
하운천이 인상을 팍 썼다.
움찔하는 단귀륭.
[하, 하하……. 그래, 그건 그렇다 치고, 네놈이 혼자서 무슨 무공을 수련하겠다는 것이냐?]
그의 물음에 하운천은 품속에서 검은 책을 꺼내 들었다.
[천마대력신공?]
“어? 단 선생이 그것을 어떻게?”
[뭐―?]
단귀륭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럼 여태껏 자신이 따라다닌 건 무엇 때문인 줄 알았던 것인가.
[이 멍청한 놈아! 그럼 그것이 누구의 무공인 줄 알았단 말이냐? 그리고, 본좌가 이렇게 옆에 있는데 혼자 무공을 수련하겠다고?]
“…….”
하운천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뭐냐, 그 얼빠진 모습은?]
“소생은…….”
망설이는 하운천, 그의 머릿속에 자신의 모습이 그려진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단귀륭이 빙의한 자신의 모습.
몸은 분명 단귀륭의 의지대로 말하고 움직였으나, 자신의 정신 또한 분명 깨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자신도 느낄 수 있었다.
단귀륭의 무력.
그 가공할 만한 무력에 지금 생각해도 온몸이 떨리고 심장이 마구 요동친다.
만약, 자신이 그에게 가르침을 받으면 그렇게 강해질 수 있을까?
“못하오. 단 선생처럼 강해질 수 없을 거요. 아니, 그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겠지…….”
그렇다. 애초에 너무나 허약한 체질을 타고난 그다. 살면서 싸움이란 것은 해 본 적도 없고, 힘쓰는 일조차도 견소소가 대신할 정도였다. 그런 그가 단귀륭처럼 강해진다?
하운천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혼자서라도 하는 데까진 해야겠지. 해야 될 일이 있으니 말이오.”
하운천은 할 말을 다했다는 듯, 초가를 빠져나가려 했다.
그때.
척!
갑자기 그의 앞으로 순식간에 이동한 단귀륭이 주먹을 휘둘렀다.
얼굴 위로 꽂히는 주먹.
후웅!
하나, 맞을 리 없다.
그럼에도 하운천은 무척이나 놀란 표정.
[미련한 자식! 뭐? 하는 데까지 하겠다? 그래서 실패한다면? 실패해서, 네 어머니라는 그 노파도 구하지 못하고 네놈까지 죽는다면, 최선을 다했으니 후회는 없다, 이딴 말이나 지껄일 것이냐!]
“…….”
[만약, 본좌가 몸이 있었다면 방금 전 단숨에 네놈 대갈통을 부숴 버렸을 것이다. 너같이 약해 빠진 놈은, 뭘 해도 어차피 못할 테니까 말이다.]
울컥.
“나도, 나도 알고 있소! 내 몸뚱이가 약해 빠진 것쯤은 나도 알고 있단 말이오!”
하운천이 악을 썼다. 마치 절규에 몸부림치듯…….
단귀륭이 스윽 몸을 낮췄다.
[내가 약하다고 말한 건, 네놈 몸뚱이가 아니라 네놈의 의지다.]
눈이 커지는 하운천. 순간, 분이 차서 답답했던 가슴이, 혼란스러웠던 머리가 뻥 뚫린 듯 시원해졌다.
[몸뚱이가 약해? 허, 누가 들으면 미친 소릴 한다고 난리 칠 일일 거다.]
“그게 무슨?”
단귀륭은 그저 어깨를 으쓱거릴 뿐, 그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네가 아까, 그 학사 주제에 꽤 강한 무력을 지녔던 노친네에게 말했던 의지. 그 의지를 본좌에게 보여라.]
그 한마디가, 마치 벼락인 듯 하운천에게 내리꽂히자 하운천은 저도 모르게 전율이 이는 것을 느꼈다.
그가 몸을 일으켰다.
손에 들린 천마대력신공의 비급.
그는 그것을 내려다보다 이내 품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세 번의 절.
“부탁드리겠습니다, 단 사부(師父).”
[큭큭, 오냐. 그럼 묻겠다. 본좌보다 강해지는 것이 불가능하다 생각하느냐?]
하운천이 희미한 미소를 머금는다.
“어렵겠지만, 불가능하진 않을 것 같소.”
[애송이 주제에…….]
가소롭다는 듯 말하며 몸을 돌리는 단귀륭. 그런 그의 얼굴에도 옅은 웃음이 솟아올랐다.
7장 수련(1)
하운천과 단귀륭은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수련할 장소가 어디인지는 중요한 게 아니었지만, 그들이 산속을 택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은둔(隱遁).
정파의 모든 문파와 세가를 통틀어 정보력에서는 최고라고 자부하는 개방에게서, 하운천을 죽이려 하던 홍야개와 남궁세가에게서, 그리고…… 이제는 잊어야만 하는 선우초설에게서.
어느 산인지, 그 이름이 무엇인지는 그들조차 모른다.
그저 발걸음 닫는 데로 오른 곳.
산속 어딘가, 보통 장정의 체고(體高)보다 두 배, 세 배는 될 법한 초목들로 이루어진 수림 지대.
하늘을 올려다보면 나무에 가려 슬쩍슬쩍 모습을 보이는 햇빛과 상쾌한 풀 내음, 잊을 만하면 다시금 청아한 새소리가 들려오는 곳. 연신 들려오는 물소리는 근처에 냇가, 어쩌면 호수나 강이 있다는 뜻이니.
“잠자리만 찾으면 되겠는데…….”
물속에라도 빠졌다 온 듯, 하운천은 땀 한 바가지와 함께 지친 기색으로 말했다.
단귀륭은 그 모습에 혀를 차면서도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꽤 높은 산악들 중 한 곳일진대, 흔하다면 흔하다고 할 수 있는 작은 동굴조차 보이지 않았다.
[애송이, 헐떡거리지 말고 빨리 움직여라. 본좌는 상관없다지만, 네 녀석은 이런 곳에서 밤을 보내긴 싫을 것 아니냐?]
“물론이오.”
고개를 끄덕이며 숨을 고르는 하운천의 등에는 가득 차 있는 행낭을 두 개나 메고 있었다.
[쯧쯧, 그딴 것들은 다 필요 없다니까. 고집하고는.]
“어찌 될지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사람 인생이오. 준비는 철저하게 하는 것이 좋소.”
[잘났다, 이놈아.]
있는 돈 탈탈 털어서 산 벽곡단과 옷, 침낭, 그리고 온갖 비상 약재들까지. 하운천은 소중한 금궤짝을 모시듯 행낭들을 들고 다녔다.
한데, 그것들을 바라보는 단귀륭의 시선이 심상치 않다.
‘흐흐, 무릇 산속 수련엔 그에 걸맞은 수련 방법이 있게 마련이지. 야생의 가혹함 말이다, 흐흐흐.’
문득 소름이 돋는 기분에 뒤를 돌아보는 하운천, 단귀륭은 재빨리 시선을 옮겼다.
하운천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걸음을 떼자 단귀륭의 입가에 사악한 미소가 번졌다.
반 시진 정도를 돌아다녔을까.
어느새 끝도 보이지 않는, 크나큰 절벽 앞에 서 있는 두 사람.
절벽이 있으면 동굴도 있으렷다.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한참 동안을 걸었지만, 동굴은커녕 토끼굴조차 보이지 않는다.
한계, 단귀륭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다.
[으아아아!!]
안 그래도 험상궂은 얼굴, 인상을 쓰며 괴성을 토해 내자 여간 우악스러운 게 아니었다.
[제길, 없으면 만들면 되는 거 아닌가! 어이, 애송이!]
움찔.
혹시 불똥이라도 튈까 잔뜩 긴장해 있던 하운천은 역시나 하는 표정을 지으며 단귀륭을 바라봤다.
[행낭은 저리 치워 버려라, 지금부터 수련 시작이다.]
“……!”
놀랐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자신으로서도 길을 헤매며 시간 낭비를 하는 것보다, 무공을 익혀 빨리 강해지고 싶다는 마음뿐이었으니까.
“그런데 무슨 수련을 해야 하오?”
단귀륭의 또렷한 음성으로 한 자 한 자 내뱉었다.
[천마대력신공.]
“천마대력신공…….”
하운천은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는 배우는 자세이다.
단귀륭은 가만히 그를 굽어보다 설명을 시작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단전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것이 세 개로 나뉘어 각각 상, 중, 하단전으로 나뉘지. 단전이란, 쉽게 말해서 내공, 자연의 기운을 담는 그릇이다.]
“그렇다면, 단전은 왜 세 개로 나뉘는 것이오?”
[인간의 몸으론, 정기신(精氣神)의 일체를 이루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정기신?”
단귀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손가락을 들어 올려 무언가를 허공에 휘갈겼다. 그러자 놀랍게도 허공에 시뻘건 글씨가 수놓아지는 것이 아닌가!
신(神).
기(氣).
정(精).
단귀륭이 말을 이었다.
[정은 하단전에 근간을 두는데, 이는 무언가를 수렴하여 응집하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 심법이나 신공은 그 성질을 이용해 하단전에 내공을 쌓는데, 대부분이 호흡을 통해서 기운을 끌어모으지.]
그가 정에 대한 설명을 끝내자, 허공에 떠 있던 정이란 글자가 스르륵 하고 사라졌다.
[기는 중단전에 뿌리하고 있다. 정과는 반대되는 성질의 기, 이것은 뻗어 나가는 성질을 지니고 있지. 하단전의 그릇이 내공으로 가득 차, 중단전이 개방되면, 기의 성질에 의해 내공이 온몸으로 퍼져 나가 전신의 혈맥과 세맥을 타통시킨다. 그럼으로써 내공이 온몸을 선회하는 대주천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스르륵.
마치 촛불처럼 사라지는 두 번째 글자.
그리고 마지막.
[신(神). 정과 기가 물질을 이루니, 신은 물질을 주재한다. 상단전이 개방되면 의지력이 강해진다. 모든 것이 네 의지대로, 네 의지하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이때, 환골탈태를 경험함과 함께 신안(神眼)을 얻게 될 것이다.]
“신안……?”
[그렇다. 모든 것을 네 의지 하에 두려면 먼저, 모든 것을 보아야 하는 것이니, 그것이 바로 신안이다.]
하운천은 소리 없는 탄성을 질렀다. 이 형용할 수 없는 경외심은 무어란 말인가.
무공.
그가 알고 있는 무공은 칼을 휘두르고 주먹을 내질러 남을 죽이고 해하는 게 전부였다.
물론 홍야개나 단귀륭의 무공은 그것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었으나, 그때는 그저 감탄의 수준이었을 뿐. 마치 작은 연못에 발을 담갔는데, 알고 보니 그것이 바다였음을 깨달은 기분이다.
하운천의 눈빛이 달라졌다.
단귀륭도 느꼈음인지…….
[훗, 좋은 눈빛이다.]
그가 재차 붉은 기운이 맺힌 손가락을 흘겼다. 붓을 다루듯.
허공에는 동그란 원 주위에 다섯 개의 붉은 점이 그려졌다.
단귀륭은 그중 원을 가리켜 단전이라 칭하고, 붉은 점들이 오행을 이루는 소주천의 경로라 설명했다.
점들이 이어지고, 오행을 이루니 종내에는 큰 원 안에 작은 원이 들어가 있는 모습.
[처음으로 네가 익혀야 할 것이 이거다. 소주천을 이용한 하단전의 운기행공.]
“음, 호흡으로 자연의 기운을 받아들여 그것이 단전의 주위를 돌아 소주천을 이루고 하단전의 자리한다, 이 뜻이오?”
단귀륭의 얼굴에 만족감이 어린다.
[생각보다 둔하고 멍청하지는 않구나, 애송이.]
“그런데 그 자연의 기운이라는 것이 도통…….”
[아, 그건 나중이고. 일단은 네놈 단전에 들어 있는 기운부터 움직여 보거라.]
하운천이 깜짝 놀라 외쳤다.
“기운이라니? 무슨 기운 말이오?”
[방금 했던 말은 취소다, 멍청한 놈. 그럼 죽기 직전의 네 몸을 살린 건 뭐라 생각했느냐? 네 녀석의 그 외팔이 스승이란 노친네가 먹인 환단은 분명 영약이었을 거다.]
“아……!”
영약이 무엇인지에 대해선 자신도 알고 있었다.
수만 가지 음식과 재료들을 기록해 놓은 서적에서 본 기억이 난다. 천추만고(千秋萬古)의 세월 동안 자연의 기운을 품어 온 과일이나 약초 혹은 금수들.
그러고 보니, 보통 때보다도 산을 오르는 게 훨씬 수월하다는 걸 느낀 그였다.
[가부좌를 틀고, 집중해라. 천마대력신공 일층(一層)의 구결을 일러 줄 터이니.]
하운천이 눈을 감았다. 그러자 뇌리로 박혀 드는 단귀륭의 목소리.
[천지기성(天地氣成) 기정기마(氣正氣魔) 이기원시일(二氣元始一)…….]
머릿속으로 오롯하게 스며드는 문자들.
구결이 끝나고, 하운천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다.
단귀륭의 입이 다시금 움직였다.
[본좌가 말했던 것을 잊지 마라. 단전은 그릇이고, 그 안에는 물이 채워져 있음이니, 그것이 곧 내공이다.]
미약하게 떨리는 하운천의 눈썹.
느껴졌다.
충만히도 채워져 있는 하단전의 기운.
그러나 움직이지 않는다.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것이다.
[끌어 올리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흘려보내듯 해 보거라.]
팔짱을 낀 채로 하운천을 내려다보고 있는 단귀륭.
하운천은 익숙하지도 않은 가부좌를 틀고 있으면서도 한 치의 미동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