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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쌍의 1권(9화)
三章 의원의 마음에도 복사꽃은 핀다(4)


***

며칠의 밤이 지났을까.
마침내 사자검문의 장로가 정신을 되찾았다.
장로가 정신을 찾았다는 말에 천수의곡의 곡주인 도원겸이 직접 방문했다.
“여기가 정말로 천수의곡입니까?”
어리둥절한 상황에서 먼저 입을 연 것은 사자검문의 장로였다.
“그렇습니다. 제가 의곡의 곡주 도원겸입니다. 대협은 사자검문의 장로이십니까?”
“예, 그렇습니다. 무림 동도들이 미숙하나마 군자검(君子劍)이라고 불러 주는 운천이라 합니다.”
군자검은 섬서뿐만이 아니라 강호 전체에 이름난 고수였다.
“한데 어찌하여 큰 상처를 입으신 겁니까?”
“죄송하지만 그 이유를 알려 드릴 수가 없습니다.”
운천은 단호하게 거부했다.
“아닙니다. 이해합니다.”
한 문파의 장로가 생사의 갈림길에 설 정도의 상처를 입은 일이니 어찌 작은 일이겠는가. 개인적으로나 문파로 보아도 함부로 밝힐 만한 일은 아닐 것이다.
도원겸이 웃으면서 말하자 운천도 웃으면서 답했다.
“이해해 주시니 다행스럽습니다. 목숨을 구해 주셨는데, 정말로 죄송합니다.”
사과의 말에 도원겸은 얼굴에 인자한 미소를 띠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인사를 받아야 할 아이는 따로 있습니다.”
“아이라니요?”
그 물음과 함께 운천의 머릿속에 정신을 잃기 전의 마지막 기억이 떠올랐다.

“쿨럭! 쿨럭! 네 녀석은 누구냐? 삼천의 개 종자들이냐?”
“어찌, 어찌 삼천을 아시는 겁니까!”

삼천을 알고 있는 아이!
삼천이란 구룡성 수뇌부 내에서도 극소수만이 알고 있는 기밀 중의 기밀이었다. 그런데 한 아이가 삼천을 알고 있다니!
“운 대협을 발견한 건 장유라는 아이입니다. 허허, 그 아이의 응급처치가 빨랐기에 운 대협께서 이렇게 살아 계실 수 있는 겁니다.”
“아, 예……. 그렇군요.”
운천은 겉으로는 고개를 숙이면서도 속으로는 냉정하게 장유에 대해서 생각해 나가기 시작했다.
‘의곡의 아이가, 삼천을 알고 있다…….’
의심스러운 상황이었다.
‘삼천에서 의곡으로 보내진 첩자일까? 아니다. 그가 삼천의 첩자라면 나를 살려 줄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 의문을 풀기 위해선 한 가지 방법뿐이었다.
‘그 아이를 만나 봐야겠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 아이를 직접 만나서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운천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는 도원겸은 껄껄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장유를 불렀다.

장유는 인간의 장기에 관련된 수업을 듣고 있다가 곡주의 부름에 불려 왔고, 곧 운천의 앞에 서게 되었다.
“얘야, 이분이 네가 살린 분이란다.”
“의생관에서 의술을 배우고 있는 장유라고 합니다. 몸은 어떠세요?”
도원겸의 소개에 장유가 진심으로 걱정이 담긴 표정으로 운천을 바라보며 안위를 물었다.
“덕분에 괜찮구나.”
인자한 웃음을 짓던 운천이 도원겸을 향해 말했다.
“곡주님, 이 아이와 둘이서만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리 하지요.”
무언가 중요한 일이 있음을 느낀 도원겸이 흔쾌히 승락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도원겸이 나가고, 그의 인기척이 멀어지는 순간, 방 전체의 공기가 일변했다.
“넌 누구냐?”
운천에게서 일어난 무서운 기운이 장유를 무겁게 내리눌렀다. 그리고 옅은 먹 향이 방 안을 감돌았다.
“으윽…….”
반 푼도 안 되는 내력으로는 버티기 힘든 거대한 압력에 장유는 입조차 열지 못하고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이건 또 무슨 경우란 말인가!’
살려 주었더니 넌 누구냐 하면서 위압하다니, 말도 안 되는 경우였다.
“넌 누구기에 삼천의 존재를 알고 있는 것이지? 말해라. 삼천의 간자냐?”
그 한마디에 장유의 머릿속에서도 운천이 기절하기 전에 나누었던 대화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밀려오는 후회와 경솔함에 대한 반성.
성급했다.
‘내가 삼천이라는 말에 너무 격하게 반응했구나. 실수다.’
장유는 자신을 내리누르는 압력 속에서 힘겹게 입을 열었다.
“채…… 책에서 읽었습니다.”
입을 여는 순간에도 입술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삼천(三天), 그들은 기실 칠백 년 전 무림을 멸망으로까지 몰고 갈 뻔했던 단체였다. 그러니 무림의 야사를 기록한 이야기책 중에 삼천을 기록한 책자가 제법 되었다.
“책? 허어, 그러고 보니 삼천이 나오는 책이 있기야 했었지…….”
그 말과 함께 운천이 손을 휘휘 휘둘렀고, 그 순간 방 전체를 잠식해 있던 기운과 먹 향이 스르르 사라졌다.
압박하던 기운이 사라지자 한결 숨쉬기가 편해진 장유는 막혔던 숨을 몰아쉬며 운천을 바라보았다.
“하아, 하아…….”
“이거 미안하네. 내가 생명의 은인에게 실수한 모양이야.”
‘내공도 낮고, 이겨 내는 방법도 너무 미숙하군.’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간자로 보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하아, 하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내 목숨을 구해 주어서 정말로 감사하게 생각하네. 하지만 삼천에 관한 사실은 잊어버리는 것이 좋을 것이네.”
이미 그 점은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너무 경솔했다는 점도. 삼천이라는 단어에 민감하게 반응한 탓이리라.
조금 더 신중해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사람이 살아나서 삼천의 정보를 구룡성에 전달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어린 나이지만 그 점은 잘 알고 있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장유의 말에 운천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자네를 보면 열 살 소년이 아니라, 산전수전 다 겪은 노강호를 보는 듯해.”
뜨끔했다. 자신은 최대한 아이처럼 행동하고 있는데, 그 행동이 아이처럼 보이지 않는 것인가?
무의식적으로 예전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그럴 리가요. 하하하”
일단 장유는 부인했다.
“당연히 농담이라네. 허허허.”
‘하하하, 정말로 식은땀이 쫙 흐르는 농담입니다.’
속으로만 삼킨 말이었다.
“내 자네에게 은혜 갚음을 해야겠지?”
운천이 웃으며 한 말에 장유는 완강하게 손을 흔들었다.
“의원이 되고자 하는 자로서 당연한 행동입니다. 한데 제가 어찌 보답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응? 의원이 환자를 고치고 보답을 받는 건 당연한 걸로 알고 있네만?”
“그, 그건…….”
의원 일의 본질이 먹고살려고 하는 것이니, 돈을 받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공연한 보답이 아니니 부담 갖지 말게.”
말을 마친 운천은 옆 탁자에 놓인 자신의 검을 들더니 검집에 매달린 금색 장식을 뜯어냈다.
그 금색 장식을 어떻게 조작하자 그 안에서 조그맣고 은은한 먹색을 띤 단약 하나가 나왔다.
운천의 손이 불쑥 움직여 장유의 손에 단약을 쥐어 주었다.
먹색을 띠는 작은 단약에서 좋은 냄새가 손끝에서 코끝까지 전달되었다.
“아까 그 먹 향……. 사자검문의 단약입니까?”
“잘 아는군. 사자검문의 군자단(君子丹)이라는 것이지. 왕유신단(王維神丹)보다는 못하지만, 그것의 반절쯤의 효능은 보일 것이네.”
군자단이라면, 장유도 들어 본 적이 있는 영단이었다. 백 개의 시구를 적고, 먹물이 마르기 직전에 백 개의 약초를 각각 하나의 시구에 감싸서 말려 백 일을 먹 향 진한 곳에서 보관하였다가, 먹 향이 진하게 배어든 약초들을 섞어 만든 단약이었다.
“이 귀한 것을 어찌 제가 받을 수 있겠습니까.”
장유가 사양하며 단약을 내밀자, 운천은 다시 특유의 넉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닌데 그렇게 거절하면 내가 뭐가 되나?”
그가 개어져 옆 탁자에 놓인 옷자락에서 꺼낸 것은 손바닥 크기의 철패였다.
철패에는 음각으로 된 공(孔) 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것은 공자패(孔子牌)라는 것이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구룡성이나 사자검문으로 찾아와 나를 찾을 때 필요할 것이네. 그때는 내 힘이 닿는 데까지 자네를 도와주도록 하지.”
훗날 도와주겠다는 약속의 징표였기에, 미래를 대비해야 하는 장유로서는 거부할 수 없었다.

얼마 후, 운신이 가능할 정도로 몸을 회복한 운천이 천수의곡을 떠나갔다.
떠나가는 운천의 머리에 장유의 모습이 계속해서 밟혔던 건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운천, 그는 아직 알지 못했다.
자신이 만든 인연의 끈이, 후에 사자검문을 살리게 되리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좀 더 먼 미래의 일이었다.

***

새가 밝게 지저귀는 이른 아침, 정자 근처에서 연공을 하던 장유의 눈에 다홍색 옷을 입은 소녀가 들어왔다.
본래 새벽 연공을 하던 장소는 이곳이 아닌데 얼마 전부터 계속 이곳에서 하고 있었다. 이곳이 그녀가 새벽 산책을 다니는 장소였기 때문이고, 그의 마음속에 맺혀 있는 복사꽃 한 봉오리 때문이었다.
“너, 여기서 뭐해?”
그녀의 물음에 예전의 그였다면 대답조차 하지 못했겠지만 이제는 다르다.
“그냥, 운공 중이야. 남자라면 자기 한 몸 정도는 지켜야 하지 않겠어?”
능청스럽게 응대하는 장유였다.
그 말에 소녀는 타박타박 걸어와 정자의 난간에 걸쳐 앉은 뒤, 이제 동이 터 오는 하늘을 잠시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여긴 내가 아침마다 산책하는 곳인데, 네가 며칠 전부터 와 있어서 내가 못 왔잖아.”
“아, 그랬어? 그런데 그게 무슨 문제야? 그냥 나와서 산책하면 되지.”
“옛 성현들이 말씀하시기를 남녀칠세부동석이라고 했어.”
“옛날이랑 지금은 충분히 다르다고 생각하는데?”
장유가 넉살스럽게 받아치자 그녀는 흥 하고 콧방귀 소리를 내고는 다시 돌아가 버렸다.
장유의 눈에 들어온 그녀는 변함없이 아름다웠다. 아직 어린 나이지만 십 년 후에는 엄청난 미녀가 될 조짐이 보였다.
어린 장유를 매료시켰던 지적인 분위기 역시 그대로였다.
‘그때는 엄청난 미녀가 되기 전에 죽어버렸지만…… 이번에는…….’
장유는 과거를 떠올리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다시 연공에 열중했다.
‘애시당초 한 번 만나서 잘될 거라곤 생각도 안 했으니까.’

다음날도, 그 다음날에도 장유는 계속해서 그곳에서 연공을 반복했다.
그리고 다음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그녀와 마주쳤다.
한동안 결과는 미미했다.
짧은 대화가 오갔고, 항상 끝은 ‘흥!’이라는 콧방귀 소리와 함께 끝맺어졌던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장유는 그 장소에서 연공했고, 도예림은 오늘도 다가왔다.
이번에는 먼저 말을 걸지도 않았고, 정자 위에 걸터앉더니 한참 동안 장유를 바라보았다.
장유는 관심 없는 척 눈을 감은 채 연공을 계속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도예림이었다.
“꼭 여기서 연공을 해야겠어?”
그 말에 장유는 하던 연공을 중지하고는 고개를 돌려 도예림을 바라보았다.
“아니, 꼭 그런 건 아닌데, 이상하게 여기 오고 싶어서.”
“그런데 너 몇 살인데 반말이야?”
“열 살.”
몸은 열 살이었다. 하는 행동도 최선을 다해서 열 살 티를 내기 위해 노력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