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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쌍의 1권(13화)
四章 낡은 책 한 권과 인연을 맺다(4)
***
밤이 되었다. 대지에는 어둠이 내리고, 달빛만이 구름 사이로 고개를 비죽 내밀고는 간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두운 밤에 간간이 비치는 달빛.
하나 그 아름다운 달빛과는 반대로 장유의 마음은 허하기만 했다.
악몽을 꾸고 일어났고, 그 이후로는 잠도 잘 오지 않았다.
악몽을 넘어 끔찍하다고까지 표현해야 할 정도로 무서운 꿈이었다.
천살이 꿈에 나타났고, 다시 한 번 살육이 벌어졌다.
섬뜩하게 웃으며 사람들의 목을 치는 천살.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으며, 그중에는 자신이 아는 얼굴들도 보였다.
그들은 눈에서는 피눈물이 낭자하게 흘렀고, 눈마저 감지 못한 채 부릅떴다.
핏발이 가득 선 눈.
꿈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그 붉은빛 눈이 선명하게 장유의 뇌리에 새겨졌다.
목이 날아가고, 피가 낭자했다.
다쳐서 쓰러진 정파인들이 절반이요, 죽어서 쓰러진 이들이 나머지 절반이었다.
너무나 끔찍한 상황에서 자신은 의원이 되어야 했고, 의원으로서 움직여야만 했다.
의원으로서 움직이고자 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천살의 공포가!
천살이 보여 주는 절망이!
천살이 지배하는 전장이!
천살이 내뿜는 살기가!
온몸을 엄습하는 두려움이!
그 모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고, 그 모든 것을 극복할 정도의 힘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무능력했다. 너무나도 무능력했다.
그런 상황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한스러웠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스스로의 모습에 좌절했다.
보는 눈앞에서 다시 정파의 거목들이 쓰러져 갔다. 한 명, 두 명, 그리고 다시 천살의 검이 그의 손을 떠나 허공에 머물렀다.
비릿하게 웃는 천살의 검이, 다시 한 번 이기어검이 되어 빗살처럼 날아오는 순간, 심장 부근의 시큰함을 느끼며 잠에서 깼다.
장유는 우물물을 퍼서 한 모금 마셨다. 시원한 물이 목을 타고 넘어가자 이제야 조금은 마음이 안정되었다.
‘이곳은 그 빌어먹을 전생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장유의 눈에 먹다만 물 바가지의 물 속에 비친 달 하나가 들어왔다.
물이 흔들림에 따라 흐릿해지는 달 조각.
마음이 심란했다.
물속에서 흐릿해지는 달 조각과 자신의 마음이 비슷하다 느꼈다.
들고 나올 때는 확신이 서서 들고 나오긴 했지만, 막상 들고 나와서는 후회가 되었다.
천령공흡.
과연 이것을 가져온 것이 잘한 일일까?
더 좋은 다른 무공이 있지는 않았을까?
이것을 익힌다고 하여 과연 닥쳐올 미래에 도움이 될까?
이번 생에서는 천살을 막을 수 있을 것인가?
이번에도 막지 못한다면 정말로 끝나는 것인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의심과 후회.
이러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물에 비친 달 조각을 바라보고 있을 때, 지팡이 끄는 소리와 함께 한 노인이 나타났다.
허리가 구부정하고 주름이 자글자글하며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보이는 검버섯.
“비허량 스승님.”
장유가 그를 알아보고 고개를 숙여 보이자, 비허량이 끌끌거렸다.
“밤이 늦었는데 아직 자지 않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냐?”
“…….”
묵묵부답, 대답 없이 고개를 숙이는 장유를 바라본 비허량은 지팡이에 몸을 기대며 입을 열었다.
“눈치를 보아하니 고민이 있는 모양이구나. 인의 서고에서 들고 나온 것이 천령이라고 하던데, 그것 때문이더냐?”
인자한 할아버지 같은 목소리였다. 과연 그 깐깐하다는 비허량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장유가 천령공흡을 들고나왔다는 말을 담우에게서 전해 들은 모양이었다.
한데 그 이유 하나로 그를 찾아온 것일까?
천령을 돌려 달라고?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천령을 익히고 나서 폐인이 되어 버린 아이들이 제법 있었지. 효율도 효율이지만, 그 때문에 인 급의 무공으로 분류되어 인의 서고에 들어가 있었거늘……. 그것이 너의 손에 들어갔다라…….”
비허량은 인자한 할아버지처럼 웃으며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고, 운명이라면 운명이겠지. 얘야, 세상에 우연은 없는 법이란다.”
비허량의 얼굴에 자글자글한 주름이 미소를 따라 휘어졌다.
장유는 묵묵부답을 고수하며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고, 비허량은 예의 그 미소를 계속 이어 갔다.
“옛말에 ‘느림의 미학’이라는 말이 있다. 또한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지.”
장유도 잘 아는 말들이었다.
그런데 왜 장유에게 그 말을 하는 것일까?
천령공흡이 비록 느리더라고 계속해서 노력하라는 의미?
“한데 너는 어딘가 조급해 보이는구나. 마음을 편하게 먹고 차근차근 해 나가다 보면 길이 보일 터인데. 무엇이 너를 조급하게 하는 것이냐?”
그 말에 장유는 뒤통수를 망치로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내가 조급해?’
스스로 전혀 실감하지 못했다. 한데 다른 사람의 눈에는 조급해 보이는 것일까?
장유는 비허량의 두 눈을 똑바로 직시하며 물었다.
“제가 조급해 보입니까?”
“그렇구나. 세상의 흐름은 조급한 사람에게든 나태한 사람에게든 똑같이 흘러가고 똑같이 찾아온단다. 한데 같은 시간에 대해 조급한 마음을 가져서 뭐할 것이고? 나태하게 보내어서 뭐할 것인가? 그럴 바에는 할 일을 하면서 차근차근 기다리는 것이 좋을 듯하구나.”
손자에게 충고하는 듯한 할아버지의 말투와 태도였다.
그의 말이 끝나자 장유는 그자리에 서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비허량이 지팡이를 옮겨 그곳을 빠져나갔다.
‘나는 조급하게 달려온 것인가?’
생각해 보니 그런 것 같다. 과거로 돌아온 이후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여유를 가져 본 기억이 없었다. 여유를 가진다고 쉰 적도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그건 여유가 아니었다. 남들보다 항상 바쁘게 살아왔고, 남들보다 항상 많이 움직였다.
‘사람은 항상 바쁘게 살아간다고 좋은 건 아니지.’
그쯤은 장유 자신도 알고 있었다.
바쁘다는 것은 일이 많다는 것이고, 다사(多事)하면 다난(多難)하게 된다.
일이 많은 만큼 문제도 많이 터졌다.
‘간단한 걸 내가 잊고 있었구나.’
五章 단약을 만들다(1)
어느덧 열여섯 살이 된 장유는 제법 청년 티가 나기 시작했다.
예림도 예전의 빛을 발하던 미모를 보여 주고 있었다. 이대로 자란다면 강호쌍미가 아니라 강호삼미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시간이 흘렀지만 둘 사이는 흐지부지되기는커녕 더욱 돈독하게 되었다. 예전의 생에서는 도도하게만 보였던 그녀가, 사실은 자신의 남자에게는 한없이 애교스러운 여인이었다.
그 둘은 마치 아교로 붙인 듯이 붙어 다녔고, 웬만한 일은 함께 해결했다.
그리고 어느 날, 그간의 소식을 모두 듣고 있던 천수의곡의 곡주인 도원겸이 장유를 불렀다.
도원겸은 세월이 지났지만 변하지 않는 기품을 지녔고, 검은 수염의 끝이 조금 하얗게 변했다. 머리에도 흰머리가 많이 났으나 여전히 미중년의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입고 있는 백의는 그와 너무도 잘 어울려 마치 한폭의 그림과 같이 느껴지는 중년인이었다. 또 비슷한 동배라면 친구가 되어 술잔을 마주하고 싶은 사내였다.
하나 그런 그도 멋진 남자이기에 앞서 한 사람의 아버지였다.
“자네가 우리 딸과 친하다지?”
탁자를 손가락으로 툭툭 치고 있는 것이 심사가 많이 뒤틀려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렇게 되었습니다.”
장유가 당황조차 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답하자, 그의 눈썹이 슬쩍 움직이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렇게 되었다라……. 침술 성적 우수, 약초학 성적 우수, 단약 제조 성적 우수. 거기에 무공까지 배우고 있더군.”
“스승님들께서 잘 봐주신 덕에 그렇게 되었습니다.”
“자네는 그렇게 되었다라는 말을 참으로 즐기는 듯한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장유가 도원겸을 향해 웃으며 답했다.
“이번에도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 말에 도원겸이 이를 뿌득 한 번 갈고는 어금니를 꽉 깨문 채로 말했다.
“내 딸을 덮쳤다더군.”
처음으로 장유가 당황했다. 팔에서 돋아난 힘줄이 장유의 눈에는 왜 이리도 무섭게 보이는지 몰랐다.
그래서 눈동자를 굴리며 뭐라고 답해야 할지 고민했다.
“왜 답이 없는 건가?”
계속해서 몰아붙이는 도원겸이었다.
장유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후우,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되었습니다.”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되었다라……. 자네 우리 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태도로 들리는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절대로 아닙니다.”
저번 생에서도 좋아했었고, 이번 생에도 좋아했다. 단지 둘 사이의 진도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에 비해 너무 빨리 나갔을 뿐이었다. 만난 첫날에 입맞춤을 하고, 둘째 날에 그녀가 달라붙었다.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다른 남자들에게는 도도하기 그지없지만 자신에는 한없이 애교를 부리는 도예림이었다.
“그거 다행이긴 한데. 아비로서 안심이 되는 것은 아니군. 자네처럼 우수한 의원이 뭐가 부족해서 우리 딸에게 접근한 건가? 의곡을 노리는 것인가?”
“예림이처럼 아름다운 여성이 뭐가 부족해서 저에게 붙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저야 감사하고 한없이 기쁘지만 말입니다.”
먼저 접근한 것은 장유였지만, 장유는 티 나게 접근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도예림 쪽이 먼저 다가와 들러붙었다는 걸 말한 것이다.
그의 지적에 도원겸은 괜스레 헛기침을 했다.
“커험, 커험.”
그런 모습에서 도원겸의 인간적인 모습을 발견한 장유는 빙긋 웃었다.
“내가 이렇게 자네를 불러 놓고 실없는 소리를 나열한 건, 딸아이를 둔 아비의 입장에서 딸아이가 좋아한다는 사내를 한번 보자는 것이었지”
“…….”
도원겸은 남은 차를 한입에 비워 내고는 말했다.
“바둑에서는 흑(黑) 돌을 백(白) 돌보다 항상 먼저 놓지. 알고 있나?”
갑자기 웬 바둑 이야기인가 생각했지만 장유는 의문을 표하는 대신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자네가 백 돌 앞에 서 있는 흑 돌처럼 되어 주었으면 하네.”
백 돌 앞을 굳건하게 지키고 있는 흑 돌, 어떤 상황에서도 도예림을 보호해 줄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어떤 상황이 온다고 해도 항상 백 돌 앞에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에 도원겸이 활짝 웃었다.
장유도 같이 활짝 웃었다.